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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49. (수필) : 노숙자 부부

 

 

노숙자 부부

 

 

삼일 이재영

 

매섭게 시리던 겨울 추위가 어느덧 끝나고 화창한 봄날을 맞은 3월 말이 되었다.

산과 들엔 벌써 진달래와 개나리가 활짝 피었고, 아파트 정원의 목련 나뭇가지도 아기 손 같은 우윳빛 꽃잎을 수줍게 펼치기 시작했다.

도심 대로변 화단의 갖가지 영산홍은 붉거나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려고 예쁜 자태를 서로 겨루며 뽐내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내와 산보 삼아 꽤 먼 거리의 대형 마트에 찬거리를 사러 갔다. 봄볕에 15분 정도 걸었더니 등에 땀이 다 나려고 했다. 봄이 왔음을 실감하며 모처럼 즐거운 담소를 나눴다.

죽은 듯 얼어붙었던 미물이 긴 겨울을 견뎌내고 따사로운 기운에 꿈틀거리며 소생하는 봄에는 사람도 움츠렸던 몸을 풀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마트 근처 대로변의 광장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저만치 벤치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게 보였다.

사각형의 채양 지붕 밑에 누워도 될 만큼 길쭉한 벤치 네 개가 둘러 놓인 곳이다. 얼핏 봐도 노숙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벤치에서 광장을 지난 건너편 다른 벤치에 가방 등 짐꾸러미 여러 개도 보였다. 아마도 그 노숙자의 짐인 듯싶었다.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못 본체 천천히 광장을 지나서 건너편 벤치에 이르렀다. 키 높이의 무성한 영산홍 나뭇가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자리다.

그러자 벤치의 짐꾸러미 사이에, 숨다시피 돌아앉아 있는, 어떤 여자의 머리가 나타났다. 모자 안 쓴 단발머리 스타일로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옆모습은 무표정했다.

 

둘이 부부인가 보네.” 얼른 지나쳐서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닐 것 같은데요. 저리 되면 여자가 벌써 헤어졌겠죠.” 아내는 강하게 도리질했다.

뭐라고 반대의견을 펼치려던 나는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차리고 그만뒀다.

나는 40대 중반에 어렵게 사업하다 집을 날리고, 아버님과 두 아들을 포함한 다섯 식구가 1년 이상 뿔뿔이 흩어져 지낸 적이 있다.

만약 그때 아내가 군소리 없이 내 곁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 가족이 어찌 되어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마트에서 간편한 식자재를 산 우리는 무심결에 동의라도 한 듯 광장을 비켜 다른 길로 둘러서 집으로 왔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그 부부로 보이는 두 노숙자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마침 당뇨 정기 진찰이 있어 병원에 간 김에 멀지 않은 곳이라 일부러 그 광장 공원에 들러봤다.

대여섯 개의 짐꾸러미 옆에 남자는 그대로 있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가방 하나쯤이 줄어든 듯도 싶다.

부부가 확실해 보이는데, 어디 볼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떴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은 빤히 보이는 도로변 은행 건물의 바깥, 길가에 입구가 별도로 있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거지꼴이 되었는데도 헤어지지 않고 둘이 함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뭐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지갑에 돈은 10여만 원 있지만 그걸 다 줄 수는 없고, 뭔가 도울 게 없나 생각하다 문득 건빵이 떠올랐다. 내가 글 쓸 때 먹는 주전부리인 보리건빵인데, 한 봉지에 50개 들어있고, 세 봉지 한 묶음에 천 원밖에 안 한다.

 

다음날 오후 아내가 없을 때, 건빵 세 봉지를 사서 점퍼 주머니에 넣고 그 광장 공원으로 갔다. 밥이 어중간할 때 간식으로 먹기에 좋고 무척 싸다고 알려줄 참이었다.

벤치에 그 남자만 있는데 마침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일회용 포장 백반에 반찬은 참치캔뿐이다.

내가 다가가자 남자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덥수룩한 수염에 희끗희끗한 머릿결로 미루어 오십 대 후반은 족히 되어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건빵 세 봉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 건빵인데 세 봉지에 천 원이에요. 슈퍼에서 팝니다.”

남자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무리 거지같이 보여도 그렇지, 남 밥 먹는데 와서 건빵이 뭐냐?’는 것 같다.

나는 미리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둔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일곱 장을 꺼내어 건네줬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른 포크를 놓고 일어서서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도 곧 고시원에 들어갈 겁니다. 무슨 일이든 찾아봐야지요.”

허리 굽혀 감사를 표하는 노숙인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보증금 없이 월세 20만 원만 내면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이 갖춰진 두어 평 남짓한 고시원 쪽방을 얻을 수 있다.

머잖아 일자리가 생기고 부부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리란 예감이 스쳤다.

소생하는 나무엔 단비가 필요하다.

손이 다시 바지 주머니 지갑으로 갔다. 오만 원권 두 장이 들어있다.

 

 

 

 

[ 계간지 문예감성 2022년 봄호 (28) 등재 ]

 

 





 (등재 용) - 이마트 광장 공원.jpeg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2.07.16 20:44

    어떤 사연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힘내셨으면 좋겠네요.
    처한 환경이 아닌, 사람 그 자체를 보아주셨다는 걸 그 분도 느끼셨기 때문에 환하게 웃어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따뜻해지는 에피소드네요. ^-^*

  • 002. Lv.55 맘세하루

    22.07.23 13:08

    네, 이웃별님. 다시 뵈어 무척 반갑습니다.
    그 노숙자 부부는 그 후 저 공원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다시 일자리 찾아서 다시 회생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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