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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51. (수필) : 영어 웅변대회

 

영어 웅변대회

 

삼일 이재영

 

내가 진주고 2학년이던 1968년에 홈룸(HR: homeroom)이라 불리는 교내 특별 활동 시간이 운영되었다. 나는 영어 회화반에 들었는데, 영어 선생님 두 분 외에 윌리엄 웨이시라는 미국인 피스코(Peace Corps: 평화봉사단)’ 남자 단원이 함께 지도했다. 우리나라에 원어민 영어 교사를 채용하는 EPIK(English Program in Korea)가 생긴 게 1990년대 초반이니까, 그 당시로는 접하기 매우 어렵고 귀한 기회였다.

피스코는 개발도상국에 파견되어 기술, 농업, 교육, 위생 활동에 봉사하는 미국 정부 지원의 민간단체이다. 1961년 당시 뉴 프런티어 정책을 주창한 미국 대통령 케네디(Kennedy, J.F.)의 제안으로 발족하였고, 초기에 16개국 900명의 자원봉사자로 출발했다.

1966년에 52개국 1만 명이 넘는 규모로 늘어났지만, 1980년대 초에 많은 나라가 봉사단에게 떠나라고 요청해, 63개국에서 일하는 전체 자원봉사자 수는 6천 명 정도로 줄었다.

우리나라에는 1966년부터 1981년까지 50차례에 걸쳐 봉사단원과 직원 2천여 명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평균 2년 정도 머물며 영어를 가르치고, 보건소에서 결핵 퇴치 사업을 벌였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한국 재방문 사업이 외교부와 한국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이루어져서, 당시 청년이었던 단원들이 노인이 되어 젊은 시절 그들이 봉사했던 나라의 놀랍게 발전한 모습을 확인하는, 뜻깊은 행사가 되기도 했단다.

 

나도 고교 시절에 피스코와 관련된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어 즐겁게 되새겨 보기로 한다.

초여름쯤인가, 영어 회화반 김홍안 선생님께서 한 달 뒤에 영어 웅변대회가 있으니 주제는 자유로 원고를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정성 들여 만든 영문 원고를 제출해서 선생님께 체크받고 몇 군데 고쳤다.

며칠에 걸쳐 달달 외워서 준비했고, 대회 당일에 2학년 동기 6, 전년도에 1등 했다는 3학년 선배랑 7명이 함께 남강 다리 건너 선명 여상 강당으로 갔다. 가 보니 진주 공고에서도 한 명이 왔다.

타이틀은 거창하게 영남지구 영어 웅변대회인데, 참가자는 전부 여덟 명으로, 진주고 교내 웅변대회나 마찬가지였다.

복도에 대기하면서 보니, 심사위원이 웨이시 선생님 외에 피스코 단원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다.

그때, 진주 여고 영어 시간에 피스코 선생님이 영어로 뭔가를 말한 다음, 따라서 복창하라는 뜻으로 ”repeat after me! “ 하면서 두 팔을 아래로 펼쳤다가 위로 모아 올리니까, 학생들이 모두 우르르 일어서더라는 얘기가 떠올라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당시는 선명 여상이 후기 입학이어서, 콩글리시지만 절반이나 알아들을지 자못 걱정되었다)

가위바위보로 발표 순서를 정했는데, 당혹스럽게도 내가 첫 번이 되었다.

문을 열고 강단에 올라가 연단 앞에 서서 내려다보니, 하얀 교복 입은 까만 단발머리 여고생들이 한 삼백 명쯤 빼곡히 앉아있다. 우와! 어떻게 눈 둘 바를 모르겠다.

그래도, 첫 연사로 뭔가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서, 더운 날씨에 참석해줘서 고맙다고,

“First of all, as the first speaker, I thank for your attending here in spite of the hot weather.”라고 즉석연설을 했는데, 까르르~ 웃음바다가 되었다. 왜 그러나 두리번거려 보니, 마이크가 꺼져서 육성만 나간 거였다.

손끝으로 톡톡 건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자, 누군가 와서 줄과 연결된 곳을 확인했다. 멋쩍게 서 있기도 그래서, 주전자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시는데, 또 까르르~ 젠장, 가시나들이! 여고생 아니랄까 봐.

정신 차리고 아래를 훑어보니, 마침 같은 신안동에 사는 이름 모를 소녀가 있다. 초점 고정하고 연설 시작. (소녀는 얼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모른다. 황홀?)

“... (중략) at this time, we all Korean students have to devote ourselves to the studies and the performance of our duty, as members of Korean society.”라며,

지금 우리 한국 학생들은 사회 일원으로서 의무인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고, 공자 촛대 뼈 까는 소리 지껄여대고 성공적으로(?) 마쳤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난생처음 들어봤다. 그것도 여고생들로부터. 기분 째졌다.

심사 결과 이덕문 1, 이재영() 2, 강외태 3, 진주 공고 4등이었다.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이라고, 케네디 대통령 연설문을 패러디했던 선배는 빠지고, 나머지는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서 축하 파티를 열었다. (진주 공고도 졸졸 따라붙어서 낑가줬다)

내가 부상으로 받은 두툼한 향나무 재질 영한사전에서 처음 보는 향긋한 냄새가 어찌나 진하게 나던지, 돌려가며 코끝에 대고 맡아봤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2012년 어느 날, 미국에 거주하는 구경호라는 동기가 웨이시 선생님을 만났다며 동창회 홈페이지에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20대 초반 젊은 총각이었던 웨이시 선생님이 머리 허연 노인이 되어 웃고 있는데, 모두 너무 반가워서 지난날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댓글로 달았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닌 인간은 자비로워서, 약자를 돕는 봉사활동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많이 참여한다. 그래서 이 지구상의 평화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영원히 유지되리라 믿는다.

고교 시절 내게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신 피스코 단원 윌리엄 웨이시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남강문학협회 회지 남강 문학 2022년 제15() 등재]






 (등재용)-밑에 글 - 미국거주 동기 구경호와 웨이시 만남 (2012년).jpg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2.09.05 20:39

    짝짝짝!!! 좀 많이 늦었지만 그 시절 재영 학생에게 저도 박수 보냅니다.
    ㅎㅎ영어 웅변 대회에서 2등이라면 칭찬 받으실 만 합니다.
    지금이었으면 유튭 검색하면 바로 나왔을 텐데 아쉬워요. ^ㅁ^

    후에 당시의 선생님을 만나신 것도 놀라워요.
    정말 좋은 추억을 선물 받으셨네요♡

  • 002. Lv.55 맘세하루

    22.09.07 12:22

    그때 진주 KBS 라디오 방송에 뉴스로 나왔고, 진주 여고 다니는 초등 동창이 듣고, 동창 모임 때 한번 해보라고 해서 위의 인용 부분만 했지요. ㅎ
    저한테는 피스코 평화봉사 단원이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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