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대형 2 설산파 대사형
청년이 사라지자 소녀는 손뼉을 쳐 대며 기뻐하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삼숙, 그럼 빙정동에 천년설삼이 있다는 건 어찌 된 건가요?”
삼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약왕이 엉터리 지도를 그렸을 리는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네요. 아무튼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화로 옆에 몸을 눕혔다.
2 설산파 대사형
청년은 한매촌의 끝자락에 자리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손발을 놀리고 있다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대형 오셨습니까.”
그중에는 거산도 있고 투자 도박을 하던 무리도 있었다.
청년은 살짝 검미를 찌푸리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임 사제, 앞으로.”
거산이 재빨리 달려 나와 청년의 앞에 곳곳이 섰다.
청년은 빠른 손놀림으로 손가락을 튕겨 거산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거산의 동공이 빙글 돌고 다리가 꼬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청년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밖에선 대형이라 해도 연무장에선 대사형이라 하라 했지?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할 것 아냐? 따라와.”
청년은 당당하게 걸어가고 거산은 슬쩍 고개를 돌려 늘어선 청년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뒤를 따랐다.
연무장을 벗어나 안채로 들어서자 거산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대형, 어찌 되었습니까?”
청년이 손가락으로 거산의 입술을 가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쉿, 조용히 해. 처음엔 인상이 더럽더니 제법 말이 통하더라고. 하기로 했어. 부엌에 가서 밥을 챙겨 갖다 줘. 내일 아침까지 먹을 수 있게 넉넉히.”
거산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해했다.
“사모님한테 혼 날 텐데······.”
청년이 눈을 부릅뜨며 윽박질렀다.
“어머니한테 혼날래, 나한테 혼날래.”
거산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사모님한테요.”
“그럼 얼른 움직여.”
“예, 대형.”
거산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청년은 세면장으로 가 옷을 벗고 고의만 입은 채 물을 끼얹었다.
“어, 시원하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고 사십대 미부인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아직 물이 얼음장 같을 텐데 대충 씻어. 얼른 밥 차려올게.”
청년은 얼른 미부인을 잡았다.
“어머니, 밥은 나중에 먹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버지 계시죠?”
“그래, 서재에 계신다.”
“어머니도 서재로 오세요.”
청년은 재빨리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전낭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방안에는 문사건을 두른 중년인이 책을 읽고 있다가 책을 덮고 청년을 맞았다.
“비 왔구나. 십팔사략은 많이 읽었느냐?”
청년의 이름은 운비, 설운비였다.
“아버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걸 보십시오.”
비는 전낭에서 황금을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누른빛을 발하는 황금을 본 부친의 입이 딱 벌어지고 뒤 따라 들어온 모친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소 침착하기가 이를 데 없는 부친이 말까지 떠듬대며 물었다.
“이, 이게 웬 금이냐?”
“기맥이 막혀 곧 죽게 생긴 꼬맹이가 호위무사와 함께 마을에 들어 왔는데 성모봉으로 데려가서 그 애를 살려 주기로 하고 받은 돈입니다.”
부친은 침음을 흘릴 뿐 말이 없었지만 모친이 비의 등짝을 때리며 꾸짖었다.
“이 녀석아, 고작 그 정도 일을 하고 이렇게 큰돈을 받으면 경우가 아니지. 하나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줘라.”
비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그 사람들은 엄청난 부자에요. 우리에겐 큰돈이지만 그들에겐 푼돈에 불과해요. 이 돈이면 한매촌 식구가 평생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이제 장사치들과 언성을 높이며 약초를 팔 필요도 없어요. 또 번듯한 문파도 세울 수 있잖아요.”
모친의 음성이 작아졌다.
“그렇긴 하다만 너무 큰돈인데······.”
잠자코 있던 부친이 입을 열었다.
“기맥을 뚫으려면 열화천熱火泉에 들어야 하는데 어린애가 견딜 수 있겠느냐?”
비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조금 도와주면 됩니다.”
부친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상념에 잠기더니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열화천의 효능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겠느냐?”
“꼬맹이는 아무 것도 모를 것이고, 호위무사에겐 위치를 알려주지 않을 참입니다.”
“한매촌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해라.”
“예, 아버지.”
부친의 승낙이 떨어지자 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부인, 어서 밥 차려 주구려.”
모친이 불안한 표정을 내보이며 부엌으로 가자 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이제 십이 년 수련을 마쳤으니 소자 강호로 나가 견문을 넓혔으면 합니다.”
부친은 세찬 바람을 맞은 화등처럼 눈빛이 흔들리고 한숨을 토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비야, 강호에서 힘이란 무공이 둘이라면 경험과 지략이 넷이고, 인맥이 나머지라 할 수 있다. 혈혈단신으로 강호 행을 한다면 엄청난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부친은 천장을 보며 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는 어려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내가 강호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이곳으로 돌아온 것도 바로 경험과 지략이 모자라고 고지식한 성격 탓에 많은 친구를 두지 못해서였다.”
비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가 여덟 살 되던 해 부친은 강남땅을 떠나 고향인 설산으로 돌아왔다.
부친에겐 고난과 시련의 땅이었을지 모르지만 비에겐 아니었다.
비옥하고 포근한 강남은 천당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고 십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남의 수려한 사계를 잊을 수 없었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의 부친은 무공은 강했지만 타협을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바람에 많은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다.
어린 비가 보기에도 젊은 시절의 부친은 지나치게 맑았다.
부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무공 또한 마찬가지야.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무공을 드러낼 땐 삼 푼 정도는 숨겨야 했지만 단순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네가 강호행보를 한다면 능력의 일곱만 드러내고 셋은 숨겨야 할 것이다. 충분한 경험과 지략, 좋은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 또한 부친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부친은 본신의 무공을 다 드러내는 바람에 수많은 적을 두어 강호행보에 지장이 많았다.
부친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부친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성정과 자질이 괜찮은 아이가 있으면 사제나 제자로 삼아도 좋겠지. 그렇다 해서 아무에게나 본산절기를 전수해서는 안 된다.”
비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설산파가 강호에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습니다.”
부친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아롱거렸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부친의 눈물.
낭패를 당하고 강남땅을 떠날 때도 의연하기만 했던 부친이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비는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부친 또한 문갑을 여는 척 하며 얼굴을 가렸다.
마침 모친이 불렀다.
“비야, 밥 차려 놨다.”
“예, 어머니.”
비는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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