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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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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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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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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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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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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첫날(8)

DUMMY

서재필의 집에 모인 사내들은 거사의 성패를 실질적으로 좌우할 핵심 요원들이었다.

제거 대상자를 유인하기 위한 방화를 맡은 이들과 직접 제거 대상자를 공격할 이들, 그리고 대신들의 출입문인 창덕궁 금호문을 지킬 이들까지 서른 명이 넘는 사내들이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김옥균이 마당에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김옥균에게 집중됐다. 말 없이 빛나는 눈동자들에는 긴장과 흥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김옥균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그들을 둘러봤다.


‘한을 풀고 싶어 하는 사람, 벼슬자리를 원하는 사람, 나라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 윗사람의 권유를 인정상 뿌리치지 못한 사람······ 거사에 나선 까닭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우리 개화당을 믿는다는 것만은 똑같을 것이다.

이들은 나를 믿고 있는 것이다. 나를 믿는 마음이 한 가지이듯이 오늘 이들은 하나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이끌어 거사를 이룩하고, 이들을 살려내야 한다.’


수십 개의 눈동자들은 김옥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옥균은 느꼈다. 그들은 긴장으로 바싹바싹 말라가는 자신들에게 불을 당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김옥균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허두를 떼고 김옥균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를 향한 긴장의 끈들이 더욱 팽팽히 당겨졌다.


“기다리던 거사의 날이 왔다.

우리 국왕을 모욕하고 백성의 목숨과 재산을 유린해 온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속방을 자처하고 굴종하는 자들,

벼슬을 사고 팔면서 제 나라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짓밟아온 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내 앞의 그대들이 용맹하고 현명하게 협력함으로써 대사를 이루어낼 것이다.”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김옥균은 이날의 행동계획을 다시 주지시켰다. 사흘 전에 박영효 집에 모였을 때 박영효가 설명했던 내용이었지만 실수 없도록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일곱 시부터 우정총국 낙성식 만찬이 시작된다. 만찬이 진행되는 여덟시 삼십 분에 우정총국에서 멀지 않은 안동 별궁에 불을 지르고 화약을 폭발시킨다.”


별궁 방화를 맡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성과 궁궐을 지키는 친군영의 네 영사들은 도성 안 화재 때면 불을 끄러 와야 한다.

우정총국 낙성식에 초대된 영사들이 우정총국에서 별궁으로 가는 길에 영사 일인당 조선 장사 두 명과 일본인 한 명이 맡아서 제거한다.

영사 중에 윤태준은 숙직으로 연회에 불참한다고 한다.

윤태준을 맡았던 장사들은 예비대로 별궁 뒤에서 대기한다.”


영사 한 명당 삼인조로 구성된 자객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네 개 조에 한 명씩 한복을 입은 일본인 자객이 포함돼 있었다.


“신복모가 인솔한 전영 병사들은 창덕궁 금호문 근처에 매복했다가 별궁 화재 즉시 대신들이 입궐하는 금호문 밖으로 달려가서 파수한다.

입궐하는 대신 중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삼인을 기다려 제거한다. 네 명 영사 중 별궁 화재현장에서 살아남아 입궐하려는 자가 있어도 제거한다.”


부천 해방영에서 거사를 위해 상경한 신복모는 박영효가 남한산성에서 조련했던 군인이었다. 신복모는 자기 지휘를 받을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리 당 사람들이 입궐한 후 궁녀 모씨가 통명전에서 화약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김봉균과 이석이도 인정전 행랑에서 화약을 터뜨린다.”


박영효와 김옥균의 하인인 두 사람과 궁녀가 폭약을 터뜨림으로써 궁궐 안을 혼란에 빠뜨리고, 궁궐에서 대피하자는 핑계로 임금을 경우궁으로 데려가려는 작전이었다.


“별궁 화재 후 일본 공사관 병력 30인이 창덕궁 금호문과 경우문 사이를 왕래하며 의외의 불상사를 방지할 것이다.

혼란의 와중에 아군끼리 충돌할 우려가 있다. 군호는 ‘천’이다. 일본말로는 ‘요로시(됐다)’로 정한다.”

“무슨 ‘천’ 자입니까?”


자객 중 한 명이 물었다.


“하늘 천(天)이다.”


한자(漢字)를 알려주고 나서 김옥균은 군호 ‘천’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대들의 임무는 긴장하고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제 아무리 날래고 용맹한 무인이라도 당황하면 기량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우리가 침착해야 한다는 얘기다.

오늘의 거사는 우리가 급습하는 것이다.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다.

하늘 천, 천···, 천···, 처언천히 처언천히 침착하게 행동하면 하늘 천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예.”

“요로시.”


몇몇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마당 감나무에 기대 앉아 있던 도성 안에서 유명한 장사 윤경순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천천이라, 하늘하늘 하늘하늘······ 그거 살랑살랑하니 허리 돌리는 색기있는 계집 같구먼.”


몇몇은 낮게 웃고 몇몇은 이 상황에 웃어도 되나, 김옥균의 눈치를 봤다.


“그래. 좋아. 여유가 있구나.”


김옥균은 미소를 지으면서 진홍을 떠올렸다. 정치나 정변을 남녀의 정분에 빗대 말해 버릇한 건 진홍이였다.

‘이 자리에 진홍이가 있어 연설을 한다면 사내놈들 귀에 쏙쏙 박히겠구나.’


김옥균은 다시 좌중을 둘러봤다.

얘기를 시작할 때보다는 누그러졌지만 아직 긴장과 불안이 눈동자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들 중에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찌르러 가는 이들이 있다.

계획은 우리가 했지만 인간의 목숨을 끊는 것은 저들이다.

두렵거나 죄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김옥균은 말로써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자신이 할 일임을 느꼈다.

단호하고 분명한 말들을 건네면 저들의 불안이 덜어지리라 여기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죽어가는 조선을 위해 칼을 들었다.

칼은 죽음과 삶을 갈라놓는다. 칼이 그대들과 조선을 죽음으로 이끌 것인가?”


김옥균이 말을 멈추자 바라보는 이들은 잠시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

짧은 순간 청중의 몰입을 이끌어 내는 재주. 약관의 나이에 장원급제를 했던 사나이의 언어는 문자뿐 아니라 음성에 있어서도 날렵했다.

일본 군사학교 유학생일 때 김옥균의 연설을 자주 들었던 서재필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믿음을 주는 건 홍영식, 빈틈을 없애는 건 박영효, 기분을 내는 데는 김옥균이다.’


개화당 젊은이들이 유행처럼 말하던 인물평이었다. 역시 기운을 불어넣는 데 일인자는 김옥균이라는 것을 서재필은 실감했다.


“동지들, 그대들의 칼은 광명으로 향해 간다. 오늘밤 그대들의 거사가 조선을 광명으로 이끈다.

백성들의 갈 길에 너희가 앞장선다. 이 길에 샛길은 없다.

광명을 찾는 일에 배신은 용서치 않는다. 그리고 나는 우리에게 배신은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랫사람을 ‘동지’로 칭한 것에 감동했기 때문일까? 무리 중 한두 명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김옥균 곁에 서 있던 서재필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내들은 소리내기를 그쳤고, 김옥균의 연설에 따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을 깨우러 가자. 불을 밝히러 가자.”



‘그런데 전기란 과연 무엇인가?’


최초로 미국을 여행하며 신문물을 기록하던 보빙사들의 의문이었다.

구리선을 통해 불꽃을 보내는 것인가? 번개 같은 섬광이 구리선 속으로 전해지는 것인가?

그러나 구리선을 잘라 봐도 그 속엔 번개도 불꽃도 없었다.


조미수호조약의 답례 사절로 태평양을 건넌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깨우쳐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조선과 너무 멀리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빌딩 속에서 자주 조선을 암흑에 빗대었다. 휘황한 전등불에 눈이 휘둥그레진 젊은이들로서는 그들의 모국을 암흑세계로 연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민영익은 입김을 불어보았다.

찬 기운에 허연 김이 눈 앞에서 흩어졌다. 쌀쌀한 날씨였다.

두루마기 소매 속으로 두 손을 맞잡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정총국의 총판 홍영식이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을 것이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도 한 자리에 모일 것이다.

민영익으로서는 결코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다.


보빙사의 대표로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자칭 개화당이라는 그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개화당의 보빙사 수행원들, 홍영식과 서광범과 변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도 들뜨지 않은 민영익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들으며 성리학의 경전을 읽고 있는 민영익에게 그들이 물었었다. 희망에 가슴이 벅차지 않느냐고.

민영익은 자신에게도 부푸는 감정이 있다고 답했다.


“희망이라고? 암종처럼 커져 가는 두려움이 있네.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희망과 닮았을 것 같네.”


수행원들은 사절단의 대표가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토라진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상과 의견이 자유롭다는 서양을 부러워하면서도 이들은 왜 이리 옹졸한 것일까?’

오히려 답답한 건 자신이라고 민영익은 생각했다.

‘강하고 똑똑한 상대를 만나면 모두가 부러워하고 추종해야만 하는가?

도사리고 경계하는 사람은 죄인이란 말인가?’


민영익은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왕과 왕비로부터 받은 지위와 권한을 버림으로써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작가의말

별궁 -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 때에 비를 맞아들인 궁전


‘안동 별궁’은 종로구 안국동의 공예 박물관(구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음.  


** 21시 15분에 한 편 더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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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첫날(24) 23.10.10 11 3 15쪽
25 첫날(23) 23.10.09 12 3 16쪽
24 첫날(22) 23.10.09 9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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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첫날(20) 23.10.07 12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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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첫날(18) 23.10.06 10 3 9쪽
19 첫날(17) 23.10.05 11 3 9쪽
18 첫날(16) 23.10.05 14 3 10쪽
17 첫날(15) 23.10.04 14 4 9쪽
16 첫날(14) 23.10.04 11 3 10쪽
15 첫날(13) 23.10.03 18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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