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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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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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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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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이튿날(4)

DUMMY

중전은 음성에 최대한 피곤한 기색을 담으려고 애썼다.


“우풍 심한 냉골 방에 세자는 고뿔이 걸렸소.

궁녀와 내시들은 비좁은 방에 서 있느라 잠을 못 이뤘고 그들이 떠드는 통에 대왕대비께서도 잠을 설치셨소.

까탈스런 이 사람이 밤을 새운 건 당연한 일이고.”


세자, 중전, 대비 모두 잠을 못 잤다. 난감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까딱하면 중전 앞에 서서 한숨을 내뱉을 뻔 했다.


“결코 오래 머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만 힘든 것을 용납해 주시면 조정의 기틀이 굳건해지고 전하의 성총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변란의 원천을 색출해내는 즉시 환궁토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적어도 사나흘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이 자가 계속 뒷걸음질로 발뺌을 하는구나, 중전은 맞선 사내가 속에 어떤 흉기를 숨기고 있는지 찔러 보고 싶어졌다.


“그 문제는 차차 논의하도록 하고, 하나 더 물어봅시다.”

“예. 마마.”

“운미가 중상을 입고 목참판 집으로 업혀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운미는 세자빈의 친정 오라비입니다. 경과가 어떤지 알아 보셨소이까?”


한껏 뾰족해진 중전 곁에서 세자가 멀뚱멀뚱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중전과 달리 세자는 처남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변란을 피해 이어하고 국정을 쇄신할 계획을 수립하느라 바빴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목참판이 알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운미공에 대해서는 기대를 하지 않으시는 것이 나으십니다.”

“고균과 운미는 한 때나마 친근한 사이로 알았는데, 너무 냉정하게 단념하는 게 아닙니까?”


중전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고 차디찬 시선은 김옥균을 찌르고 있었다. 민영익에 대한 추궁에는 김옥균도 가슴 속을 찔려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황공하옵니다. 운미가 습격당함에도 손을 쓰지 못한 것이 소신도 한스럽고 죄스럽습니다.

다만 운미가 십여 군데 자상을 입고 출혈이 심해서 희망을 품기 어려울 따름이옵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만 하는구나, 중전은 얼굴이 굳었다.

손에 피를 묻힌 지 얼마 안 된 자를 상대하고 있기에 조심스러웠지만 점점 분노가 치미는 것은 중전도 어쩔 수 없었다.


“자상을 입고 출혈을 한 이는 운미뿐이오?

흉폭한 자객은 이곳 경우궁에도 있나 보오. 이 피냄새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지난 밤에 불온한 무리 몇이 경우궁에 완력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습니다.

변란을 부추기는 자들이라 판단되어 두세 놈을 즉결처분했습니다.”


김옥균은 어금니를 문 채로 중전을 똑바로 보면서 대답했다.

‘더 알고 싶어? 얼마나 끔찍한지 보여줄까?’

중전은 ‘즉결처분’ 네 글자에 힘을 준 말투가 더 묻지 말라는 협박으로 들렸다.

‘이 자가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조정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여기는구나.’


“자세한 사세는 전하께서 각국 공사들을 면담하시고, 정국이 안정된 후에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자가 급하게 기침을 해댔다.

중전은 기침 소리가 자기 심정을 대신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내시 유재현이 침전과 통하는 중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중전마마. 어의가 세자저하 탕약을 다 달였다고 하옵니다. 이리로 내 올까요?”


중전의 시선이 뒤로 돌아갈 때 김옥균이 고개를 숙였다.


“공사 초빙 건 때문에 소신은 물러가겠습니다.”


중전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김옥균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두려움과 노여움이 중전의 심장을 빨리 뛰도록 부추겼다.


“됐다. 세자와 내가 들어가겠다.”


중전은 흥분을 억누르면서 세자의 등을 떠밀었다.



박영효는 중문 앞에서 마주 오는 중전과 세자를 보았다.

박영효가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지만 중전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옆을 지나쳤다. 허리를 편 박영효가 보기에 중전의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냉랭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정전으로 들어선 박영효는 급하게 김옥균을 찾았다.

변수와 외국 공사들의 면담 시간을 상의하던 김옥균이 말을 멈췄다. 박영효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김옥균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내전에서 고대수를 만나고 왔소.”


체구도 힘도 남자 못지 않은 궁녀, 통명전에서 폭약을 터뜨려 주상이 경우궁으로 이어하는 데 일등공신이 된 개화당의 정보원 고대수.

박영효는 고대수와 은밀한 대화를 나눌 때처럼 은밀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재현이 내전에서 계속 환궁을 선동하고 있소. 내시와 궁녀들에게만 떠드는 게 아니라 대왕대비전도 흔들어 대고 있다고 하오.”

“가벼이 볼 일이 아니군.”


김옥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균. 청천백일하에 보여줘야 하겠소이다. 누가 칼자루를 쥔 것인지.”

“유재현을?”


박영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옥균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르게 나갔다가는 지난밤의 죽음들에 대해서도 따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었다.

김옥균도 박영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박영효는 사관생도들을 지휘하는 서재필을 찾으러 갔다.



‘유재현도 죽는다.’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목숨이 값나가지 않는 시절이기는 했다.

이십 년도 안 된 병인년 천주학 박해 때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는 것도 허용됐었다.


천주학쟁이의 혐의가 짙다, 놔 뒀다간 도망갈 수 있다, 포졸의 이 정도 판단만으로 사람이 죽어나갔다.

무기를 든 반란군도 아닌데 팔천 명 이상이 남의 나라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어나갔다.


이 년 전, 임오군란 뒤에는 상품을 매점해 가격을 올림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경제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처형된 시전 상인이 수백에 달했다.


김옥균이 죽음을 남 일이 아닌 충격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동인부터였다. 개화당의 선배격인 승려 이동인은 시체를 찾지 못했으니 실종이었지만,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민영익의 집 문객이면서 고종을 독대하기도 했던 최초의 일본 밀항자 이동인을 누가 죽였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민씨 척족이다, 대원군 계열의 척사파다, 김홍집 등의 온건 개화파다, 추측이 난무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때부터 개화당의 위기감이 커진 것이었다.

이동인이 사라지고 박영효가 요직에서 밀려나고 김옥균의 차관 도입이 집요한 방해를 받으면서 개화당은 선제 공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조선의 개화와 독립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생존마저 위협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자라났다. 그 결과 민영익이 난자당하게 된 것이고 여섯 대신의 죽음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 때는 이동인이 민영익의 집 사랑채에서 숙식했고, 김옥균도 이틀이 머다 하고 드나들었었다.

그런데 이동인은 사라졌고, 민영익은 이동인 실종의 배후로 의심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민영익마저 난자당해 쓰러졌다.

‘생사확인은 필요 없다. 운미는 살아날 수 없는 상태였다.’

반목하다 죽어간 이들이 얼마 전까지는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이 김옥균에게 허무감을 줬다.



‘아니야.’

김옥균은 고개를 저었다.

‘그 가까움이라는 것, 사고방식이 다른 이들의 위태로운 교류였어. 사상누각이었어.’

김옥균은 이동인이 살아 있던 어느 날, 민영익의 사랑채를 떠올렸다.


그와 이동인과 홍영식, 박영효가 잠시 출타한 민영익을 기다리고 있었다. 녹차잔을 앞에 두고 무료함을 달래다가 이동인이 재담을 시작했다.

승려의 신분이었으나 수도자라고 하기에는 파격과 분방함이 넘쳤던 이가 이동인이었다.


“운미 책장에도 역시 중국 옛날 얘기 책이 한가득이로구나.”

“조선 사대부 사랑방이 어딘들 다르겠소이까?”

“나는 중국 왕들 중에 한고조가 제일 마음에 들었었소.”

“무슨 장점이 있었길래 스님이 좋아하신 겁니까?”

“이름이 좋잖소?”


한고조의 이름 ‘유방’으로 한 말장난이었다. 사내들 하는 짓은 동서고금, 직종과 계층을 불문하고 비슷한 데가 있었다.


“게다가 그 집구석이 참 재미져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어요.

한고조가 죽은 다음에는 유가들이 권력을 휘두른 게 아니라, 유방네 처갓집 여씨들이 천하에 방귀를 뀌어댔잖수?”


이동인의 유쾌한 말투에 좌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유방을 발탁해서 키운 게 여씨 집안이었던 거라. 배후 실세력은 유방 때부터 여씨였다는 거지.

사람들은 유방 장인이 모략가였다고들 하지만 난 달라요. 유방 마누라 여태후가 이거였던 거라.”


이동인은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주먹 위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과장된 동작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여씨네 ‘여’자가 음률 ‘려(呂)’자 아닌가? 그년의 글자가 아래 위로 입(口, 입 구)이 두 개니까 사내들보다 여자들이 기가 쎈 집구석이라 이거여!”


머리를 박박 민 스님이 걸진 농을 뱉으니 사랑채의 웃음은 점점 커졌다.


“근데 이 ‘려’자라는 년이 윗입보다 아랫입이 더 크네그려. 아이고야! 이런 노골적인 짐승이 어딨어? 우리 유방 폐하 침전에서 아주 죽어났겠어.”


한고조를 안 무서워한 자는 많았지만 한고조 사후에 여태후한테는 모두가 설설 기었다, 이름 유방이 아니라 진짜 유방 가진 사람이 실세였다면서 권력을 잡았던 여인 이야기로 웃고 떠드느라 방 안 사람들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지 못했다.


권력을 잡으면 아녀자가 사내놈보다 훨씬 독하다고 누군가 지껄일 때 장지문이 열리면서 방 주인 민영익이 들어섰다.

한 순간 웃음은 멎고 어색한 헛기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보료 위에 좌정하는 방주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허허, 우리가 농짓거리 하느라 운미공 들어오는 줄도 몰랐소이다.”


얼굴이 굳은 이동인의 너스레는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리던데, 재미난 이야기들 하셨나 봅니다.”


이동인뿐만 아니라 방 안의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민영익이 말했다.


“지나(支那 차이나china를 발음에 따라 한자로 적은 것) 옛이야기를 조금 풍자했을 뿐이외다.”


예민해진 민영익은 ‘지나’라는 표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국 즉 청나라를 서양 발음식으로 ‘지나’라 부를 때는 대개 낮춰 보는 태도를 담고 있었다.

민영익을 제외하고는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은 일본과 가까웠고, 중전이 권력을 가진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민영익으로서는 충분히 언짢을 상황이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김옥균이 민영익에게 차를 건넸다.

민영익은 녹차의 향을 잠시 음미하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일본 사람들이 중국 못지 않게 차를 많이 마시지요.”


끄덕끄덕, 좌중은 조심스럽게 민영익에게 동의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물에 풀가루 푼 것 마시면서 절차가 복잡해요.

허리는 어떻게 숙이고 손바닥은 어떻게 마주치고, 먹기 전에 차릴 격식이 아주 어렵습디다.”

“스모꾼들도 그리합니다. 홀딱 벗어 놓고선 싸우기나 하지, 그 전에 게걸음질 하고 발바닥 들고······.”


김옥균이 일본 씨름을 소재로 맞장구를 쳤다.


“서화를 봐도 그래요. 종이가 허옇거나 누러면 됐지.

연두색 종이에 분홍색 종이에, 이건 내용이 아니라 꾸밈새에 눈길이 더 가니 말이오.”


일본이나 일본당을 조롱하고픈 민영익의 의도가 조금씩 드러났다.


“형식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글씨든 그림이든 차를 마시든 대상이 뭐고 내용이 뭔가가 첫째 아니겠소?

저쪽 섬사람들은 내용은 자기 것으로 못 채우고 형식만 갖추는 것 같습디다.”


중국과 중국을 추종한다 욕을 먹는 민씨 집안을 비웃은 것에 대한 반격임이 분명해졌다. 민영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의 입은 굳게 닫혔다.


“내야 남의 나라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그저 추측으로 하는 혼잣소리지요.

그런데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하도 형식만 있고 속에 내용이 없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다르다, 그런 욕을 들으니까 답답해서 배 가르는 버릇들이 생긴 게 아닐까?

자, 봐라. 내 뱃속에도 내용물이 다 있다. 창자도 있고 콩팥도 있다.”


그 날의 대화가 김옥균의 무리와 민영익을 갈라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경직되고 냉랭한 공기는 오래 김옥균의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그 할복이란 것도 진짜 할복자살이 아니라면서요? 뒤에 목 잘라주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답디다.

허허, 저는 참 뭔지 모르겠소이다. 뭐가 진짜인지를요.”


그 날도, 경우궁에서 그 때를 돌이키는 이 순간도 김옥균의 가슴은 참으로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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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튿날(6) 23.10.13 11 3 12쪽
32 이튿날(5) 23.10.13 10 3 12쪽
» 이튿날(4) 23.10.12 13 3 13쪽
30 이튿날(3) 23.10.12 8 3 11쪽
29 이튿날(2) 23.10.11 12 3 12쪽
28 이튿날(1) 23.10.11 11 3 12쪽
27 첫날(25) 23.10.10 11 3 13쪽
26 첫날(24) 23.10.10 11 3 15쪽
25 첫날(23) 23.10.09 12 3 16쪽
24 첫날(22) 23.10.09 9 3 9쪽
23 첫날(21) 23.10.07 13 3 10쪽
22 첫날(20) 23.10.07 10 2 9쪽
21 첫날(19) 23.10.06 13 3 9쪽
20 첫날(18) 23.10.06 10 3 9쪽
19 첫날(17) 23.10.05 11 3 9쪽
18 첫날(16) 23.10.05 14 3 10쪽
17 첫날(15) 23.10.04 14 4 9쪽
16 첫날(14) 23.10.04 11 3 10쪽
15 첫날(13) 23.10.03 18 4 10쪽
14 첫날(12) 23.10.03 17 4 10쪽
13 첫날(11) 23.10.02 18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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