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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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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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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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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0.02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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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첫날(11)

DUMMY

유대치는 고아가 된 열다섯 살 신이를 거두었다.

약방에 일손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유대치는 신이를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고 행동거지를 지켜봤다.


신이는 아버지 친구들에게 일거리를 얻어 지붕 고치는 일을 했고 품삯을 받으면 유대치에게 드렸다.

종종 유대치가 심부름을 시키면 지시한 말을 꼼꼼히 반복해 외운 다음에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갔다 왔다.


장마철에 사랑채 기와가 깨져서 빗물이 새자 신이가 기다렸다는 듯 솜씨를 발휘했다. 해가 났지만 아직 기와가 다 마르지도 않았을 때 지붕에 올라가서 능숙하게 틈을 메우고 기와를 갈았다.

유대치가 보기에 신이는 지붕 위가 아니라 평지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을 하면서 혼자만 들리게 무언가 중얼거리고 끄덕이는 모습도 그림처럼 눈에 박혔다.

기왓장을 끼워 넣을 때마다 홀로 미소 짓는 신이를 보면서 유대치는 깨달았다.


‘저 아이는 돌아간 아비와 이야기하면서 일하고 있구나.

아비한테 일을 배울 때 들었던 말들을 꼭꼭 곱씹으면서 웃는구나.

정신을 흘리고 망령된 헛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밝은 기억으로 아버지를 곁에 두려하는 거야.’


그 순간 유대치는 신이 아버지의 임종 순간을 떠올렸다. 아들과 아버지가 마주 보며 짓던 미소가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신이는 유대치의 약방이 마음에 들었다. 약방 선생님은 단순한 의원이 아닌 것 같았다.

자주 젊은 양반들이 찾아와서 선생님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의정의 아들, 공주마마의 신랑 같은 아주 높은 나으리들도 있다고 했다.

그 중에 스무 살에 장원급제한 천재라는 양반이 신이를 귀여워했다.


신이가 약초 심부름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김옥균에게 꾸벅 허리를 굽히고 지나치려는데 김옥균이 신이의 팔을 붙들었다.


“네가 신이로구나.”

“예. 나으리. 어찌 저를······.”

“대치 선생님께 들었다. 지붕 위를 걷는 재주꾼이고 누구보다 발이 날래다고.”


쑥스러운 신이는 뭐라 대꾸를 못 하고 머리만 긁었다.


“남다른 좋은 마음도 가졌다고 하시더구나. 그게 어떤 건진 나도 잘 모르겠다만.”

“아닙니다. 나으리. 지붕 고치는 것 빼면 그저 무식한 놈입니다요.”


하하하, 김옥균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이는 대견스러워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것은 그 순간 김옥균의 기분이었다.

절명하는 아버지와 마주 봤던 날 이후 신이는 놀라운 공감 능력을 갖게 됐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면 그 순간 상대방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아마 좋은 마음이라고 선생님이 이 나으리한테 말씀해 주셨나 보다.’


김옥균은 신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으리 소리 하지 말고 아저씨라 불러라. 내가 그 정도 나이는 된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신이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김옥균의 의도가 나쁘지 않음을 느꼈다.


“자, 말해 봐라. 고균 아저씨라고. 어서.”

“고··· 고균··· 아저씨.”


김옥균은 다시 크게 웃었고 신이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심부름을 나갔다.

약초 상인에게 달려가면서 신이는 추측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청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 때문에 저 나으리가 자기한테 신경을 쓰는 것이리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유대치의 사랑채에 모인 젊은 양반들은 자주 청나라를 성토하며 열을 올렸었다.


그 후 신이가 서너 번쯤 어색하게 김옥균을 아저씨라고 불렀을 무렵이었다. 유대치와 김옥균이 상의를 하더니 신이를 불렀다.


“너 운영각이란 데 가서 있어 볼래?”


유대치는 덤덤하게 물러 앉고, 김옥균이 웃으면서 신이에게 물었다.


“거기가 뭐 하는 덴데요?”

“청루.”

“청루가 뭔데요?”

“기생집이란다. 한양 장안에서 제일 번듯한 기생집.

선생님도 잘 아시는 집이고 나랑도 가까운 집인데 일꾼이 필요하단다.”


사실 유대치의 약방에서는 가끔 심부름을 다녀오는 것 말고 신이가 할 일은 없었다.

유대치가 소개해 준 집이라면 가서 있는 게 마땅하긴 했다.


‘하지만······ 기생집 심부름꾼이라니.’


아버지가 알면 실망할 것 같았다.

신이 아버지는 운 좋게 인자한 주인 양반을 만나서 자기 대에 면천이 됐으니 본인은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었다.

늘 아들 신이가 살림을 꾸려서 자식 낳고 내외간에 사이 좋게 사는 걸 보는 것만이 꿈이라던 아버지였다.


신이는 기생들 틈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면 사내답지 못하게 성정을 망치거나 바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심한 자식 꼴을 알게 되면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싫은가 보구나.”


신이를 쳐다보다가 김옥균이 말했다.

신이는 뭐라 대답을 못했다. 유대치에게 고마움을 느껴왔기 때문에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도 그날은 김옥균도 유대치도 더 이상 운영각에 관해 이야기하지를 않았다.


다음다음 날 김옥균네 집 하인 이서방이 운영각에 짐을 날라 줘야 되는데 일손이 부족하다고 불러서 신이도 짐꾼으로 따라갔다.

문갑을 지게에 지고 신이는 다방골로 이서방을 따라갔다.

스무 칸이 넘는 대가댁을 개조한 운영각은 고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깔끔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신이는 괜시리 쑥스러운 기분에 제 발끝만 내려다 보면서 대문과 중문을 지나서 운영각의 본채로 들어갔다.


대추나무와 느티나무가 팔작지붕보다도 높게 자라서 마당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넓은 대청마루 뒤에는 앵두나무가 빨간 열매들을 달고 있었다.

초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 올린 창문들은 처마에 쇠고리로 걸려 있었다.


신이는 이서방을 따라 끝방에 문갑을 가져다 놓고 다시 마당으로 내려왔다.

심부름 하는 계집애가 두 사람에게 찬 우물물을 떠다 주었다.

냉수 사발을 돌려주고 땀을 닦다가 신이는 대청마루 옆방에 쳐놓은갈대발 뒤에 여인이 있는 것을 보았다. 운영각의 안주인 진홍이었다.


햇볕을 막은 발 때문에 진홍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 있었다. 창가에서 한쪽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진홍의 옆모습이 신이의 시야에 꽂혔다.

신이가 한 치만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을 좁은 틈으로 들여다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늘 속에 있는데도 갸름한 얼굴선과 눈동자의 빛과 가는 입술, 흘러내린 한 가닥 머리카락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지한 사물을 보는 것 같았다.

여인은 낮은 소리로 뭔가 주문 같은 것을 외고 있었다.

신이 옆에서 대추나무 그늘 아래 바람을 쐬고 있는 이서방은 여인의 얼굴도 음성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이는 커다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고, 멈춘 시간 속의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 큰 망치로 머리를 땅, 맞은 느낌이었다.

위잉, 머릿속이 울리고 가슴에서 숨이 찼다.


저 여인은 가까이서 마주 보더라도 도무지 무슨 감정인지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상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딱히 장점으로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순간에는 공감을 못할 것 같다는 자신 없는 예감이 신이에게 묘한 좌절감을 안겨줬다.


소년은 마음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여인에게 꼼짝 못하고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조활까, 가슴이 꽉 막혀올 때 이서방이 신이의 어깨를 쳤다.

이제 가자고 말하고 중문을 나설 때까지도 이서방은 진홍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진홍 역시 두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뭔가 중얼거리는 것만 같았다.


약방에 돌아와서도 그늘 속에 앉아 있던 여인의 이미지는 신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에 외출했다 돌아온 유대치에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채 다 들기도 전에 신이 입에서 말이 튀어 나왔다.


“저······ 거기 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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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첫날(22) 23.10.09 9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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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첫날(20) 23.10.07 1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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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첫날(15) 23.10.04 14 4 9쪽
16 첫날(14) 23.10.04 11 3 10쪽
15 첫날(13) 23.10.03 18 4 10쪽
14 첫날(12) 23.10.03 17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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