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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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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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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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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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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20)

DUMMY

입을 떼기 직전에 김옥균의 눈이 중전의 눈과 마주쳤다.

김옥균이 초승달을 닮았다고 생각해온 예리한 눈이 차갑게 빛나며 그를 보고 있었다. 중전의 하얀 얼굴 가운데 또렷한 콧날이 더욱 날카롭게 보였다.


“주상전하의 성은으로 말미암아 우정총국의 낙성을 축하하는 연회가 오늘 있었습니다.”


떨리는 음성이었다.

어전에 엎드린 박영효와 서광범도 곁눈으로 김옥균을 보면서 잔뜩 긴장했다.


‘괜찮다. 흉변을 고하는 것이니 떨릴 수 있다. 거짓말이라서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박영효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각국 공사와 대소신료들이 참석하여 연회가 성황인 중에 흉변이 발생하였습니다.”


주상의 얼굴이 굳었다. 김옥균이 닷새 전 걱정했던 대로 외세에 의한 변란이 터진 것인지, 김옥균이 말했던 대로 개혁을 시도하다가 암초를 만났다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중전의 표정도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우정국 인근의 초가에 방화로 인한 큰 화재가 났고,

사정을 파악하려 나섰던 우영사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난자당했습니다.”

“운미가······ 그래, 운미가 어찌 되었단 말이냐?”

“홍영식과 함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긴다고 들었습니다.

서양의사 알렌을 부른다고도 하였습니다만······,”


잠시 김옥균이 말을 멈추자, 주상과 중전은 비극을 직감했다.


“자상이 십여 군데나 되고 출혈이 과다하였습니다. 이미 의식이 없어서 소생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주상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중전의 입은 굳게 닫혀만 있었다.


“화변은 곳곳에 번지고, 자객이 성중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정총국에 있던 대신들도 난리를 피해 흩어져 생사를 모릅니다. 전하! 화급을 다투는 누란의 지경입니다.

이대로 계시면 궁궐 안까지 자객의 무리가 몰려들까 두렵습니다.”

“대체 어떠한 자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범인이 누구냐, 양심을 건드릴 주상의 질문이었지만 내친 김에 김옥균의 말은 거리낌이 없었다.


“시정잡배의 난동이나 개인의 원한으로 인한 범행은 결코 아니옵니다. 조정대신과 외국 공사가 모인 연회를 노린 범행은 나라의 변란이옵니다.

전하께서도 급히 안전한 곳으로 이어하시어 옥체를 보중하셔야 하옵니다.”


주상과 중전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충격의 으뜸가는 원인은 달랐다.


‘영익이가······!’ 중전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면서 약한 모습을 감추었다.

조정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위로해주는 다정한 곳이 아니었다. 주상의 발목이라도 얼싸 안고 목놓아 울고 싶지만 떨리는 가슴과 솟는 눈물을 억눌렀다.


가까이 두었던 또 한 명의 일가붙이가 비명횡사를 했다. 중전이 가슴 속에 감춘 어두운 구멍이 더 크게 벌어졌다.

입양돼서 중전의 오라비가 된 민승호의 식구들은 선물상자에 숨긴 폭탄이 터져서 횡사했고, 그의 동생 민겸호는 분노한 구식군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끔찍한 죽음들을 백성들은 희소식으로 여겼다.

폭탄으로 갈갈이 찢긴 이들을 보고 천벌을 받은 탐관오리라며 손뼉을 쳤고, 부하였던 무지랭이 군인들의 몰매에 죽은 민겸호는 개천에 처박혀 삶은 돼지처럼 몸이 허옇게 부풀도록 내버려 뒀다.

어느 백성 하나 시신을 거두어 주려 하지 않았고 더럽다고 침을 뱉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중전 자신도 산 채로 장례식을 치를 뻔했었다.

임오군란을 이용해 정권을 재장악한 시아버지 대원군은 정적으로 여겼던 며느리가 복귀하는 꼴을 상상도 하기 싫었던 듯싶다.

대원군의 명에 의해 실종된 중전의 국상이 준비되던 중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그녀는 겨우 환궁할 수 있었다.


그때도 백성의 다수는 대원군의 실각을 안타까워 했고 중전의 장례가 현실이 되지 않은 것도 안타까워 했다.

중전은 자신과 주변을 둘러싼 냉랭한 시선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왕비의 조카로 입양되고 세자비의 오라버니가 된 것이 영익이에게 불행이 됐구나.

내가 곁이 허전하다 느껴서 영익이를 가까이 둔 게 잘못이었나?’

중전은 잠시 감상적인 생각을 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결단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이조연··· 한규직··· 두 영사는 어디에 있소?”


중전은 김옥균을 보며 물었다. 억지로 누르고 있지만 충격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다 감출 수는 없었다.


“우정국을 나올 때까지는 두 사람을 봤지만 그 후로는 행방도 안위도 알지 못합니다.”


궁궐을 지켜야 할 네 영사 중에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행방불명이란 얘기에 주상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그들도 위험하다는 말인가?”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고,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그들을 찾을 테니 심려 마시라고 김옥균이 주상을 달랬다.


“도성 안에 방화를 하고 영사를 해치는 일은 그대들의 말처럼 저자의 잡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다시 말을 꺼낸 중전은 파르르 눈꼬리를 떨면서도 광채 있는 눈으로 김옥균을 노려보고 있었다.


“운미가 청국과 가까웠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오. 같이 우정국에 있던 그대들은 다행히 무사하나 이조연 한규직은 행방을 모르오.

잡배의 난동이 아니라 세력 있는 자들의 변란이라면 뒤에 있는 그 세력은 누구라는 말이오?”


역시 사태를 어물어물 넘길 중전이 아니었다.

청나라와 가까운 권력자는 죽거나 행방불명이다. 변란이 일어났다며 궁궐로 달려온 너희 일본당은 멀쩡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소행인 것이냐? 중전은 따져 묻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깜빡이지도 않고 자신을 직시하는 중전의 눈길을 대하기가 힘들었다.

‘저 여인은 지금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인가? 안간힘으로 두려움을 버티는 것인가?’

중전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이 순간에는 김옥균의 감정보다 기세가 강해 보였다.

중전을 납득시킬 만한 말을 찾기는 힘들었다. 납득은 안 되더라도 따져묻기를 그치게 할 만한 답변도 지어내기 쉽지 않았다.


“여기 있는 그대들과 지금 죽거나 사라진 대신들보다 더 강한 자가 조선 사람 중에 있다는 말입니까?

조선사람 중에 없다면 누구란 말입니까? 청나라입니까? 아니면······,”


중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주상의 시선은 중전과 김옥균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가 주시하는 두 사람은 단순히 자기 아내와 신하가 아니었다. 두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주상이었다.

주도를 하건 떠밀리건 간에 결론을 짓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주상은 점점 초조해졌다.


“일본이란 말입니까?”


‘일본’을 말하면서 중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김옥균을 향한 시선이 끊어져 튕겨나갈 것처럼 팽팽했다.


“외국 세력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일단 위험을 피하시면 저희가 촌각을 다투어서 사태의 배후를 캐내겠습니다.”


창덕궁을 떠나 경우궁으로 이어하는 게 중요했다. 자신들이 파 놓은 굴로 왕이 들어오고 나면 왕비도 기가 꺾일 것이다.

김옥균은 요구받은 답변을 피하면서, 유리한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자 했다.


“둘 중에 무엇인지! 지금 경의 생각을 말하세요! 청국입니까? 일본입니까?”


중전은 긴 논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라는 거냐? 기세로 몰아붙일 때라 판단하고 주도권을 놓치 않았다.

김옥균뿐 아니라 방 안의 사내들, 박영효와 서광범 심지어 주상까지도 한 여인의 기세에 긴장하고 있었다.

위기였다. 말로는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던 김옥균이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김옥균이 못 찾은 답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여인이 건네주었다.


“콰과광!”


천둥 벼락에 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느낄 만큼 압도적인 소리였다.


“전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이 동시에 목놓아 주상을 불렀다.

어서 결정을 내려 자기들의 뜻에 따라달라는 호소이자 압력이었다.


“용단을 내려 주소서. 이대로 계시면 침전마저 위험하옵니다.”


냉철한 여인으로 소문이 났지만 두 해 전의 군란 때 죽음 직전까지 갔던 중전이었다.

폭발음에 떨리는 가슴으로 주상을 돌아 보았다.

그 때 한 번 더 짧은 폭음이 들려왔다. 주상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았다. 경들의 말에 따라 움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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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첫날(22) 23.10.09 9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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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20) 23.10.07 11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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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첫날(17) 23.10.05 11 3 9쪽
18 첫날(16) 23.10.05 14 3 10쪽
17 첫날(15) 23.10.04 14 4 9쪽
16 첫날(14) 23.10.04 11 3 10쪽
15 첫날(13) 23.10.03 18 4 10쪽
14 첫날(12) 23.10.03 17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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