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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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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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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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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7)

DUMMY

박영효는 뜨거운 찻잔을 비웠다. 그리고 맹세를 상기시켰다.


- 조선과 일본국을 위해서, 조선 독립의 거사를 함께 완수하자는 맹세를 잊지 말아 주시오.


다케조에는 역시 여유 있게 웃으며 답했다.


- 하하. 조선 개화 지사들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박영효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다케조에가 덧붙였다.


- 나는 금릉위의 결의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부마의 작위에 만족할 수도 있는데 독립 혁명에 운명을 거는 것은 참된 대장부의 일입니다.


박영효는 말없이 목례로 찬사에 답했다.

지난 두 해는 그의 삶에서 풍운과 맞닥뜨린 시절이었다.

수신사 대표로 일본에 가서 서양 강국에 못지않게 변모한 이웃나라의 위세를 실감하고, 우리도 문명한 나라를 건설하리라 결심했었다.


돌아와서 한성판윤에 임명됐을 때는 뜻을 펼칠 수 있으리라 부풀었었다.

근대 도시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도로를 정비하는 치도국, 치안 체계를 갖추기 위한 경순국을 설치해서 한성을 변화시키고, 일본에서 데려온 기술자와 함께 신문을 발행해서 백성들이 개화의 장점을 실감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개월만에 민씨 일파에 의해 광주 유수로 밀려났고, 좌절하지 않고 신식 군대를 만들기 위해 남한산성에서 군병을 양성했지만 그 역시 사병을 키운다는 모함에 휩싸여 사직해야 했다.


권좌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정변을 꾀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영효는 거사에 나서는 것이 결코 권력욕 때문만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권력이 싫다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명된 나라의 지도자이고 싶었다.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만을 바랐다면 위험하지 않은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박영효는 자신이 꿈꾸고 시작했던 문명 개화를 끝까지 이뤄내고 싶었다.

그래서 사재를 털고 평소에는 어울리지 않던 신분 낮은 이들을 포섭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에 임하는 그는 개화파 동지 누구보다도 철두철미하고 강경하다고 자부했다.



다케조에는 집무실에서 나와 공사관 현관까지 박영효를 배웅했다. 자식 연배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에게도 친절하고 공손한 자세였다.

박영효는 다케조에와 작별하고 나오며 생각했다.


‘흔히들 일본인을 보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한다.

누구나 겉과 속은 다르다. 조선보다 먼저 개항을 해서 서양 강국과 교섭해 왔던 일본이니 교섭의 기술이 늘었을 것이다.

제 성질을 못 이겨서 인상으로 다 드러내는 게 순박하다는 건 미련한 생각이다.’


그는 다케조에 식의 처세 방식을 긍정했다.

친절한 겉모습을 잃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 볼 수도 있지만 복잡해지는 세상에 적응하는 세련된 화술로 볼 수도 있었다.

다케조에가 겉으로 했던 말과 나중의 행동이 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주인공인 우리의 대처에 달려 있다고 박영효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정총국 낙성식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편물 접수와 분리 공간, 사무와 회의 공간으로 건물의 새 단장도 말끔히 마무리되었고, 손님을 맞을 요리 준비도 순조로웠다.

우정총국을 책임진 총판이자 개화당 거사의 주역인 홍영식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았다.


홍영식은 우정 사업에 열의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개화당이 현실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정권을 갖지 못했다는 것뿐이 아니었다.

서구 문물과 제도를 접한 개화파들은 조선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양반 지배층을 비롯한 다수의 백성들은 개화를 서양 흉내를 내는 호사 취미 정도로 여겼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전통에 따라 살아왔는데 굳이 상스러운 서양 놈들 물건과 제도를 들여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개화파는 서양 문물을 들여와서 이득을 얻거나, 외세에게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이라는 의심도 팽배했다.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신문물과 제도의 혜택을 본다면 개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홍영식을 비롯한 개화파는 기대했다.

당장 기차를 운행하거나 여러 곳에 전기 시설을 하기는 어려웠다. 반면에 우편제도는 어렵지 않게 시행할 수 있고 평범한 백성도 구체적인 효과를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고균, 이제 곧 백성들도 개화의 이로움을 느낄 것이오.

서찰 하나 전하려고 먼 길 떠나는 사람을 수소문하는 번거로움도 그만이고, 답장 하나 받으려면 몇 달이 걸리는 지루함도 사라질 것이외다.”


홍영식의 말투에서 뿌듯함이 배어나왔다. 맡은 일에 성실하고 세상을 위하는 일에 진심인 것으로 인정받는 홍영식이었다.

그는 백성들이 편리해졌기 때문에 진심으로 기뻐하리라, 김옥균은 홍영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간의 수고를 칭찬했다.

그리고, 진짜 관심사를 물었다.


“사(四) 영사는 모두 참가하는 건가?”


한양 도성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친군 전후좌우 영사 네 명의 참석 여부가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 넷을 제거해야 개화당이 군권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4영사가 모두 참석할 수 있는 날로 우정총국 낙성식 연회를 잡았었다.


“윤태준만 불참이라 하오. 오늘 궁궐 숙직을 해야 한답디다.”


임오군란 때 궁궐을 탈출한 중전을 숨겨 줘서 큰 신임을 얻고 있는 이가 윤태준이었다. 김옥균이 생각하기엔 네 명의 영사 중에 지략이나 영향력이 뒤지는 편이었다.


“윤태준 한 명이면 별 문제는 아니오.

다른 척신들을 하수할 때 함께 처리할 수 있을 것이오. 외국 공사들은 어찌 됐소?”

“초대한 이들 중 독일 공사와 일본 공사가 건강상 이유로 못 온다 하였소.”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독일 공사의 참석 여부는 거사의 대세와 관계가 없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바로 전날 까지도 몸에 별 탈이 없었다.

아마도 일부러 참석을 피했으리라, 김옥균은 짐작했다.


낙성식 중에 영사들을 유인해서 제거하고 이후에 국왕을 창덕궁에서 나오도록 하면서 일본공사관 병력을 개입시킬 예정이었다.

우정총국에서부터 일본 공사가 같이 있다 보면 애초부터 개화파와 일본측이 계획적으로 공모했다는 혐의가 짙어지기 쉬웠다. 다케조에는 불필요한 약점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고 불참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컸다.


홍영식이 요리 준비를 점검하러 가자 김옥균은 다시 자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만날 사람이 많고 바쁜 날이었다.

빠른 발걸음 중에도 머릿속에는 해결하지 못한 많은 의문이 맴돌고 있었다. 그 의문들은 민씨 척족을 비롯한 집권 사대파와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당의 치열한 정보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계향은 우리에게서 정보를 캐내려는 민씨 일파의 사주로 변을 당한 걸까?

중전을 비롯해 권력을 잡고 있는 친청 사대파는 우리의 계획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을까?

민영익이 보름 전 궁궐 연경당에 있던 대포 두 문을 청군 진영으로 옮겨 놓은 것은 우리를 견제하기 위함일까?

군화를 벗지 않고 잠자며 비상대기 중이라는 청군은 단지 실전 같은 훈련을 하는 것뿐일까?

한성순보를 발행하는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무슨 변이 생기더라도 외국인으로서 자중하라고 한 민영익의 경고는 무엇을 알고 한 얘기일까?’


질문들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양측 모두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속히 결단하지 않고 망설이다가는 먼저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미 김옥균과 동지들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다.


변수는 김옥균의 집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영효의 수신사 일행에 포함돼 일본에 다녀왔고, 민영익의 보빙사 일행에도 들어서 미국에 갔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던 특이한 경력의 청년이 변수였다.


현재 그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장내사 掌內司에서 주사로 일하고 있었다.

장내사는 왕실의 사무와 각국 공사 접견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라 변수는 늘 임금 가까이에서 근무했으므로 김옥균에게는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개화당의 큰 걱정거리 하나는 왕과 왕비의 야행성 생활습관이었다.

별궁 방화에 이어 우정총국에서 나온 영사들을 제거하고 입궐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하더라도, 밤중에 궁 안에 대신들이 가득 모여 있으면 뒷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대신들까지 궁궐에서 끌고 나올 수도 없는 일이고, 제거대상인 벼슬아치들을 수많은 대신들 앞에서 해칠 수도 없었다.


김옥균과 변수는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내시 오군을 불러 대책을 협의했었다. 고민 끝에 오내관은 거사 일에 임금이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할 계책을 생각해냈다.

평소에 완료하지 못하고 승정원(承政院)에 쌓아둔 문서를 거사 당일 아침에 승정원 관리(院吏)를 시켜 갖다 바치게 함으로써 임금이 낮에 잠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괜찮은 발상이었지만 혹시라도 임금이 문서를 무시하고 침전에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옥균은 변수와 오내관에게 그런 경우 임금의 접견 일정을 바꾸어서 낮 시간을 바쁘게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었다.

김옥균이 사랑채에 올라서자마자 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진행사항을 보고했다.


“주상께서 오늘 날이 밝은 뒤부터 밀린 공사(公事)를 재결하기 위해 그대로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고, 여러 승후관(承逅官)은 모두 오늘 오후 2시에 입대했는데 일찍 물러가게 했습니다.”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지자 김옥균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네. 자네와 오내관이 수고가 많았네.”


김옥균은 변수에게 곧 궁중에 들어갈 것과, 궁중에서 듣고 본 것을 이날 밤 자신이 대궐에 들어가는 즉시 상세하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급하게 일어나 서재필의 집으로 향했다.

거사의 행동대원들은 박영효 집에 모여 있다가 지금쯤 우정총국에 가까운 서재필 집에 숨어 들었을 것이었다.


작가의말

하수하다 - 어떤 일에 손을 대다, 손을 대어 사람을 죽이다. 


승정원 - 왕명의 출납을 맡던 왕의 비서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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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첫날(16) 23.10.05 14 3 10쪽
17 첫날(15) 23.10.04 14 4 9쪽
16 첫날(14) 23.10.04 12 3 10쪽
15 첫날(13) 23.10.03 19 4 10쪽
14 첫날(12) 23.10.03 19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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