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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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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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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작성
23.09.3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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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첫날(9)

DUMMY

그는 어릴 적부터 글씨와 그림에 빼어난 자질을 보였다. 특히 그가 그린 난초는 대원군의 난초와 쌍벽을 이룬다는 칭찬을 받았다.

민영익 스스로도 서화에 몰두하는 삶이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사를 올려줄 아들이 없던 권력자 민승호의 양자가 되어 졸지에 왕비의 조카가 되고, 여동생이 세자에게 시집가서 세자빈의 오빠가 돼 버렸다.

민영익은 기다림도 준비도 없이 약관의 나이에 민씨 척족의 꼭대기에 올라버렸다.


구태여 바란 자리도 아니었지만, 권력의 끈을 원하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그를 임금과 왕비 바로 다음의 권력자로 만들어 버렸다.

스스로는 자신이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와 사무가 부담스러운 탓도 있었지만, 조선에서 세 번째 힘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명확했다.


청나라 군의 우두머리 원세개뿐만 아니라 그 아래의 오조유나 진수당보다 자신이 큰 힘을 가졌는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절로 고개가 흔들렸다.

그라고 청나라의 속박을 받는 나라꼴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권과 거기 딸린 척족의 밥줄을 지켜내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환재 박규수의 사랑채에서 서양문물을 배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들도 민씨 척족의 촉망받는 젊은 권력자와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나이 든 민씨들보다 당연히 말이 잘 통했기 때문에 문명 개화의 동지가 될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고 그의 집 문지방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개화를 바라는 젊은 관료들과 교류하는 사이고, 왕과 왕비의 신임을 받는 입장이라 그가 미국과의 수교에 답례하는 보빙사의 대표 역할도 맡았다.

미국은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으며 조선을 독립국으로 대우했고, 동양의 신기한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을 극진히 대우했다. 당연히도 사절단의 개화당 젊은이들은 발달한 문명에 감탄하고 큰 기대감을 품었다.


그러나 민영익 눈에 미국과 조선의 거리는 멀고도 멀었다. 배우고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큰 차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아예 먹혀버리지 않게, 녹아 없어지지 않게 조선은 도사리고 경계해야만 할 것이었다.


세계 여행 중에도 돌아온 후에도 개화당들은 조선의 변화에 미지근해 보이는 민영익에게 불만을 표했다.

그는 토론을 즐기지 않았고 언쟁을 벌이면 얼굴만 뜨거워지고 말문이 막혀오는 기질이라 별반 대꾸는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할 말은 많았다.


‘백인들은 아비와 할아비도 ‘너’라 부르며 서로 하대한다. 반상의 구분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다.

과연 옥균이나 영효나 영식은 그것을 즐겨 실천할 것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양반이면서 아랫사람을 격의 없이 대하는 것. 너그럽고 가깝게 대해 주면 감복해서 나를 잘 모시겠지, 이런 속내를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소탈해지려는 것.

그것은 진정 상것들을 하늘이 내린 똑같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민영익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의 차이는 있을지 모른다. 사람에 따라 귀천을 가리는 정도가 다르기는 하겠지.

그리고 사람이 나와 남을 완전히 동등하게 여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양처럼 법을 이용해서 귀천을 없앰으로써 제도에 맞춰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흘러 아랫것들이 글자라도 읽고 쓸 줄 알고, 미신이나 전설을 따라 행동하는 우매함이라도 털어낸 다음에 시행해야 할 제도가 아닌가?

제도가 앞서면 상민 천민들도 교육을 받을 테니 우매함에서 벗어날 거란 반론도 있을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나눠 먹을 만한 경제력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아랫것들까지 학교든 서당이든 배우러 다닐 여유가 생길 것 아닌가?


주상도 미국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우리를 도우려는 어진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미국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미국도 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서슴지 않은 나라였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주고 조선 사신들에게 세계 여행을 시켜준 것은 고마운 일임에 틀림이 없으나 미국을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기에는 조선은 너무나도 뒤져 있고 너무나도 허약해져 있다.’


문명국 유람을 다녀오고도 고전과 구습(舊習)만 붙들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광활한 미국과 유럽 강국들을 여행하면서도 어찌 하여 공자왈 맹자왈 하는 옛글이나 읽고 있고, 돌아와서도 구습을 일소해 버리고 새로운 문명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가?”


개화당 젊은이들의 이런 언사를 민영익도 익히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청나라에 사절로 갔다 오면 청나라 문물에 반해서 곧바로 친청파가 되고 일본 유람단을 다녀 오면 즉시 친일파가 되는 세태는 적절한 일이란 말인가?


이른바 세계일주를 하고 온 자는 당연히 서양 문물을 추종해야 된단 말인가?

신문명을 배워 온 깨달음이 결국 남의 나라를 추종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북벌을 하겠다면서 두루마기 하나 고쳐 입지 못해서 연암의 이야기책에서 조롱을 당한 제 방구석 지사들과 다름없지 않은가?’


새로 사귀어서 환한 얼굴만 본 친구에게 반하는 것보다는, 밉더라도 잘 아는 이웃을 믿는 게 안전하다고 민영익은 생각했다.


‘청이 그나마 익숙하다. 그들은 상국이라고 거들먹거렸지만, 우리를 점령하거나 지배하지 않았다. 우리가 오랜 세월 경험해 봐 아는 자들이다.


서양 제국은 식민지를 직접 지배한다. 일본은 서양이 되려고 한다.

우리는 서양과 다르다. 문명국이라는 저들은 인민 간에 차별이 없다지만 그렇지도 않다.

미국인들은 검둥이 노예를 아예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다.

우리네야 반상의 구분이 있다지만 상것들, 노비, 종놈에게도 인간의 금도가 있고 마을과 이웃에는 정과 아량이 있다. 서양 놈들과는 다르다.


과학문명에 무지하고 불편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비록 암흑세계라 할지라도 보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중심이 있어야 하고 그 중심은 권력이다. 왕과 왕비를 받드는 세력을 지켜야 한다.’


그가 보기에는 개화파를 자처하는 ‘일본당’ 젊은이들이 오히려 경박했다.

무작정 급하게 따라 가려다가는 강한 나라에게 먹히는 신세만 될 뿐, 차근차근 신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려면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청나라라는 거름막을 이용하는 게 오히려 효율적이라는 게 그의 소견이었다.


개화당은 하루 하루를 참고 견디면서 실력을 기르기보다는 갑자기 개벽한 세상을 꿈꾸면서 서로 헛바람을 불어 넣고 있는 자들 같았다.



동십자각을 지나자 우정총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정국을 통하면, 먼 길 가는 이를 수소문하지 않아도 일정 비용만 지불하고 꼭 필요한 소식과 물건을 전할 수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람된 개화의 모습이었다.

한데 마땅히 축하해야 할 장소에 가까워지는 민영익의 가슴은 거칠게 두근거렸다. 설렘의 느낌이 결코 아니었다.


안남(베트남)에서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한성에 주둔하던 청군 삼천 명 중 천오백 명이 빠져나갔다.

그 후 돌아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전과 달리 호전적으로 돌변해 있었다. 자칭 개화당이라는 일본당들도 다케조에와 어울리며 수상하게 굴었다.

민영익은 일본 공사관과 일본당 관련 첩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을 드러낼 결정적인 정보는 포착하지 못했다.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무슨 꿍꿍이 속일까?

놈들은 언제 어떻게 도발해올까?

현명은 분명 저들 주위를 파고들고 있을 것이다. 현명을 지금 찾아봐야 하나?’


민영익이 떠올린 현명은 지불한 대가만큼 값을 제대로 하는 정보 상인이었지만 어느 편인지 속내를 알기 힘든 자였다.

민영익은 긴 입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결론 없이 머리가 복잡해지자 짜증이 치밀었다.


먹을 갈아 난을 치고 숨결을 고르면서 글씨 쓰는 것에 집중하는 생활, 문방의 기물들과 앞선 선비들의 작품을 모으며 사는 삶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참으로 과연 저자들은 무슨 꿍꿍이 속인가? 무엇을 계획하고 어느 때 어떤 식으로 도발해 올 것인가?’


망설이는 것처럼 민영익의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작가의말

일요일은 쉬고, 월요일(10월 1일)부터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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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튿날(3) 23.10.12 8 3 11쪽
29 이튿날(2) 23.10.11 12 3 12쪽
28 이튿날(1) 23.10.11 1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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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첫날(24) 23.10.10 11 3 15쪽
25 첫날(23) 23.10.09 12 3 16쪽
24 첫날(22) 23.10.09 9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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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첫날(20) 23.10.07 12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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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첫날(18) 23.10.06 10 3 9쪽
19 첫날(17) 23.10.05 11 3 9쪽
18 첫날(16) 23.10.05 14 3 10쪽
17 첫날(15) 23.10.04 14 4 9쪽
16 첫날(14) 23.10.04 11 3 10쪽
15 첫날(13) 23.10.03 18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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