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예쁜 꽃이 그려진 문장이 코웃음을 쳤다.
[아~ 요새 책들 먼지 제대로 안 닦냐, 청소부!]
딱 봐도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진 문장이 비꼬듯 말했다.
[신입 천사야? 이런 고리타분한 데 오다니 어지간히 미움받았나 봐?]
꽤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문장이 정수혈을 툭툭 치며 말했다.
[으휴, 너 몸 꼬라지가 그게 뭐냐? 너 같은 약한 애를 청소부로 보내다니, 청소가 장난이야?]
‘...나 무슨 신데렐라인가?’
정수혈은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처음 만난 문장이 끝내주게 착한 문장이었다는 걸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들은 대부분 정수혈을 깔보거나 놀려먹거나 뭘 시키려는 말만 했다. 심지어 정수혈이 먼저 말 거는 건 대답하지 않았다!
‘최상급 정령이면 뭘 하냐, 다 인성이 쓰레긴데.’
여기 온지 1시간도 안 되었지만 정수혈은 문장들에 대한 원한을 한바구니 가득 담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래서는 문장들이 정수혈이 용사인 걸 알아보는 건 고사하고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지 않은가.
‘좋아. 차라리 서프라이즈를 해 버리자.’
내가 비록 호박마차도 능력도 없지만 그래도 용사다 이 종이 쪼가리들아!
정수혈은 이를 뿌득뿌득갈면서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미친 척하고 높은 데라도 올라가서 나 용사다! 라고 외치는 게 낫겠어.’
이판사판이었다. 증거를 대라고 하면 그냥 우기지 뭐. 그렇게 독기어린 결심을 한 정수혈은 4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으로 갔다. 4층 높이에 있는 책장 위로 올라가서 외칠 생각이었다. 4층 구석에 있는 사다리를 발견한 정수혈이 그 사다리로 가까이 다가가서 사다리를 집어 끌려는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끼야야아악! 안돼 그렇게 옮기면! 나 찢어져!]
“깜짝이야!”
놀란 정수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이 구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은 틀림없이 문장이 낸 목소리 같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또 문장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야, 왠지 마력의 흐름이 이상해!]
[엄청난 용사님이 오려나 본데?]
용사가 온다고? 정수혈은 1층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1층의 가운데에서 은은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와....”
진짜 용사가 오면 빛이 나는구나. 정수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차라리 그 용사랑 접촉해서, 내가 지구에서 온 용사라는 걸 밝히는 게 자연스러울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정수혈은 아까보다 약간 어긋난 사다리를 돌려놓으려고 갔다. 사다리가 워낙 무거워서 다시 끌려는 순간, 또 비명이 들렸다.
[그만! 그만! 누가 보내서 온 거야? 철벽의 문장이야? 그만 하라니까, 나 여기 얌전히 있었잖아!]
“...?”
높고 울리는 이 목소리, 틀림없는 문장의 목소리였다. 정수혈은 다시 주변을 열심히 날아다녔으나, 아무리 봐도 여기 날아다니는 문장은 아무도 없었다.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그럴 리가 있냐! 아래를 봐, 아래! 바보야!]
정수혈은 아래로 시선을 돌렸으나 구석이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문장은 정수혈이 자신을 못 보는 걸 알았는지 피식 웃었다.
[야 야, 됐어. 어서 가 봐.]
“아니, 가 보라니?”
[내가 이 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그래도 소문은... 들을 거 다 듣는다고. 새로 온 청소부지? 날개도 없고 비실비실하게 생겼다는.]
소문 겁나 빠르네. 정수혈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그저 웃었다. 문장이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이런 구석진 곳까지 오는 거겠지.]
“너는 뭔데?”
[...알 필요가 있겠니? 그것보다 얼른 가 봐. 용사가 강림하는 거 흔한 거 아니야. 멋진 광경이니까 기억해 두라고.]
“너는 안 보러 가?”
[...됐어. 나는 오래 살아서 많이 봤어.]
그러나 어쩐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정수혈은 뒤를 돌아보았다. 문장들이 마치 종이로 된 이글루처럼, 그 빛을 감싸고 있었다. 멀리 있는데도 문장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는 확산의 문장!]
[저는 증폭의 힘을 가진 문장입니다!]
[용사님! 봐 주세요, 어서요!]
마치 자신을 뽑아달라고 외치는 구직자처럼 보였다. 구직자들이 종이쪽은 아니지만, 종이들이 파닥거리면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용사가 오니까 저렇게 어필을 하는 거구나....”
4층의 울타리에 기대어서 그 장관을 보는 정수혈의 시야에, 문득 저기로 날아가지 않고 멍하니 책장에 앉아있거나 오히려 구석으로 숨는 몇 개의 문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상했다. 용사가 왔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문장이라니? 지켜보는 걸로 봐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저기, 구석에 있는 오래 산 문장아.”
[나 부른 거야?]
사다리 너머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수혈이 답했다.
“응. 너.”
[나는.... 아니, 그래, 그렇게 부르던가. 그래. 무슨 일인데.]
“왜 용사가 왔는데도 안 움직이는 문장이 이렇게 많아?”
[오, 너는 그것조차 모르는구나.]
힘없는 목소리가 키들키들 웃었다.
[그야 너무 약하거나 쓸모없는 문장이라서 저 용사에게 다가가지 않는 거지.]
“뭐?”
[어차피 안 뽑힐 텐데 뭐하러 어필을 하겠어. 그리고 능력을 밝혀봤자 다른 문장들이 비웃거나, 용사가 비웃거나 할 텐데.]
“...뭐야 그게.”
뭐야 그게, 라고 말은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정수혈의 심정은 썩 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뽑힐텐데. 그러게. 정수혈도 여러 번 그 심정을 겪었다.
[뭐야 그게. 라니. 그런 거지. 너도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부정만 당해봐.]
“....”
[우리라고 뭐 이런 문장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우리는 죽지도 못하니,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차별받고 비웃음당하겠지.]
“....”
[신입 천사야.]
힘없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인간에서 비롯되었으니, 인간이 가진 자기 운명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겠지. 우리 같은 자들은 이제 지쳐서 쉬고 싶은 거니, 우리 같은 자들을 내버려둬 주면 고맙겠어.]
“....”
[그것보다 저 장관을 보러 가. 너희는 우리처럼 오래 살지 못하잖아. 멋진 광경을 네 눈에 많이 새겨둬. 짧은 생에 많은 멋있는 걸 눈에 담아. 그게 멋진 인생이야.]
“....”
울타리에 기대어 찬란하게 빛나는 그 장관을 구경하던 정수혈은 뒤로 돌아서, 그 힘없는 목소리가 나는 어두운 구석을 향해 다가갔다. 목소리가 당황한 듯 외쳤다.
[뭐하니? 어서 보러 가라니까.]
“뭐, 이미 뭔지는 봤으니까. 그것보다 나 너랑 좀 더 이야기하는 게 나을 거 같아.”
[나랑?]
“왠지 너랑 나랑 잘 통할 거 같거든.”
[...뭐?]
“나는 몇천년 산 건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선택받지 못해서....”
정수혈이 조심조심 어두운 안쪽으로 들어갔다. 도서관 전체가 밝아서 그런지 정수혈은 그제야 힘없는 목소리를 내는 그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사다리의 다리 아래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린 아주 지저분하고 낡은 종이가 하나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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