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잠시 후, 차량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삼각별 마크의 고급 세단 한 대가 집 앞에 서 있었고 날 데리러 온 직원은 상전 모시듯 차에서 내려 대기하다가 내가 나오자 뒷문을 열어주었다.
여명길드에 도착하니 레이드 지원 2부의 직원들이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와 에스코트 해주었는데 그들이 나를 둘러싸고 길을 터주며 엘리베이터 같은 것도 미리 대기시켜 놓은 덕에 기다리거나 막힘 없이 사무실까지 직행할 수 있었다.
이런 게 권력의 맛인가.
“준호 씨! 어서오세요!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고요?”
“네, 덕분에 편안하게 왔습니다.”
김지호 부장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나를 반겼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게 이렇게 강력한 속담이었을 줄이야.
어제 그가 내게 보인 태도를 뻔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면전에서 저렇게 싹싹하게 반겨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부장님.”
나를 태워다준 직원이 차키를 김지호 부장에게 넘기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 나이에 이런 대기업의 부장 직함을 달고 있으니 그 정도 차는 유지할 능력이 된다는 건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자, 우, 우선 그럼, 레이드에 참가하시겠다는 거죠?”
“5억 맞춰 주시는 겁니까?”
“아이, 그런 건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해놓겠습니다! 일단 가시죠!”
“어딜 말입니까?”
“어디긴요! 던전이죠!”
“지금 바로요?”
그는 숨돌릴 시간도 없이 내 등을 떠밀었다.
급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뭐 서류를 작성하고 사전 설명 정도는 듣고 출발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던전에 가자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던전 브레이크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윤 대리! 어서 던전까지 모셔다드리고 와!”
“예?! 제, 제가요?!”
“그럼 부장인 내가 갈까?”
길드에서 일하곤 있지만 헌터도 아닌 일반 사무직인 이에게 당장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현장에 가라고 하니 겁이 날 만도 했다.
“아,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까라면 까야지 뭐 어떡하겠나, 회사원의 비애였다.
윤 대리는 그럼 다시 차키를 달라는 듯 살짝 손을 내밀고 기다렸는데.
“어? 뭐, 왜!”
“차, 차키⋯.”
“차, 차키? 어, 음? 내, 내 차키가 어디 있지? 사무실에 있나?”
김지호 부장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는 현장에 자기 차를 보내긴 싫었는지 뻔히 주머니에 있는 차키를 찾는 척 사무실 안으로 도망가며 말했다.
“이, 일단 자기 차로 다녀와! 빨리! 시간이 없어!!!”
그는 나와 윤 대리의 등쌀을 떠밀었고 그렇게 우리는 현장으로 떠나게 됐다.
***
‘⋯5억? 진짜 5억이라고?’
이동하는 동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나 이거 해결하면 진짜 5억 받는 거야?
뭔가 현실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로또나 주식 대박 같은 망상도 꿈도 아니고 진짜 5억?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5억을 뭘 어떻게 써야 할까.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은 아니지만 이것을 밑천으로 내 인생을 바꾸기엔 충분한 돈이었다.
안정적으로 적금을 넣을까 주식이나 부동산을 굴려볼까, 아니면 끝내주는 스포츠카를 사서 짧은 인생 화끈하게 즐길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 보니 금세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은 마포구의 평범한 주택단지였다.
주민들은 이미 모두 대피했고 헌터관리국의 요원과 여명길드의 헌터, 그리고 군인이 주택의 옥상이나 골목에 기관총 진지와 각종 포대(砲臺)를 설치해 동네 전체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단순히 단발적으로 끝나는 재해가 아니었다.
던전 안에서는 몬스터가 주기적으로 생성돼 던전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장기전을 상정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윤 대리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던지듯 내려놓고 도망쳤고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헌터 한 명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척보기에도 한 싸움 하게 생긴 남자였다.
“레이드에 참가하기로 한 박준호 씨 맞으십니까?!”
“아⋯ 네⋯ 전데요.”
“이번 던전을 담당한 공격대장 이태민입니다! 일단 가시죠, 다들 준비되어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자면 박준호 씨는 전투에 전혀 참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 공격대가 안전히 모실 테니 박준호 씨는 보스의 기믹만 파훼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뭐 상황을 파악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얼떨결에 던전 입구 코앞까지 끌려갔다.
- 쿠구구구구구⋯.
던전 입구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이 짙은 보라빛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이제 저 입구가 터지며 몬스터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면 그게 던전 브레이크였다.
“지체없이 진입한다! 작전은 동일하다! 1팀이 박준호 씨를 호위하고 나머지는 전열에서 길을 뚫는다! 질문이나 이상 있는 팀 있나!”
“““없습니다!”””
던전 앞에는 돌입할 준비를 마친 헌터들이 대열을 갖춰 서 있었다.
역시 대형길드의 숙련된 헌터들이라 그런지 딱히 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내가 무서웠다.
- 쿠구구구구구⋯.
심술난 두꺼비처럼 부풀어 오른 던전의 입구가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던전은 가만히 있었지만 눈앞이 어질거리고 꼭 던전 입구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쯧.”
화가 났다.
나를 버린 헌터관리국이나 그런 불행을 겪은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아직도 과거의 공포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계속 움츠러드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내가 겪은 일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끔찍한 재앙이 분명했고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위로했다.
하지만 나 자신은 나를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그깟 일 따위에 내 앞길을 막히고 싶지 않았다.
뭐 길 가다 넘어진 정도의 일이라는 양 툭툭 털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담력과 배짱이 없는 인물이라는 거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특별한 사람이길 원하고 또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일로 내가 좁쌀만 한 간땡이를 가진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호⋯ 씨! 박준호 씨!”
던전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이태민 공격대장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람이 혼이 팔리면 정말 바로 옆에서 자기 이름을 불러도 안 들리는구나.
“에⋯ 예?!”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허옇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 얼굴은 정말 분칠이라도 한 양 하얗게 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게 고작 D급 던전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이건 무려 A급 던전이다.
위험성이 동네 길고양이와 티라노 수준의 차이다.
“괘,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못하겠어요, 집에 갈래요. 라고 할 수도 없고 숨이 꽉 막히고 몸이 벌벌 떨렸지만 악으로 버텼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무엇보다 5억이다, 5억.
내가 아무리 개처럼 일하고 구질구질하게 절약하며 살아도 평생 잔고에 찍어보지 못할 액수의 돈을 오늘 하루만 잘 넘기면 한방에 벌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쪽을 보세요.”
어떻게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 와중에 이태민 공격대장이 나를 안심시키려 어딘가를 가리켰고 나는 그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박준호 씨를 경호하게 될 1팀 팀장입니다.”
그는 1팀 팀장을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소개할 필요도 없었다.
1팀 팀장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긴 은발을 싸우기 편하게 포니테일로 묶고 세상 무엇에도 관심 없다는 듯 차갑고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있는 여성.
헌터에 별 관심이 없는 나조차 잘 알고 있는 웨펀 마스터라는 특성을 가진 A급 헌터 윤아린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본 나는 반사적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와, 미친, 진짜 말도 안 되게 생겼네.’
사진으로 몇 번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그녀를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도 너무 예뻐서 대체 누군가 찾아봤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윤아린 헌터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사람과 말 한마디 섞어 볼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쥐어짰다.
“⋯⋯.”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여전히 아무 관심 없다는 눈으로 나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까딱거리고 말았다.
듣던 대로 쌀쌀맞았지만 미모가 저 정도 되면 그냥 얼굴값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꾸라도 해줬다는 사실이 기쁘게 느껴졌다.
애초에 그녀를 실물로 봤다는 사실 자체가 평생 술안주 감이니까.
‘⋯생각보다 작네.’
가까이서 본 그녀의 키는 생각보다 작았다.
물론 어림잡아 170cm 정도로 평균적인 여성의 키보다는 컸지만 사진으로 볼 때는 나보다 더 키가 커 보였는데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비율이 좋다는 소리겠지.
“⋯⋯⋯헉!”
나도 모르게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마주쳐버렸다.
“무, 무기가 참 많으시네요, 하하.”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혼자 중얼거리듯 딴청을 피웠다.
그녀는 웨펀 마스터라는 명칭에 걸맞게 몸에 온갖 무기를 두르고 있었다.
양 옆구리에 검 두 자루를, 등에는 거대한 워해머와 배틀액스를 교차해 착용, 가슴팍에도 전투단검 두 개가 달려있었고 또 허리에 작은 전투도끼 하나가 더 달려있었다.
대체 몇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혼자 들고 있는 건지 저 정도면 거의 걸어 다니는 무기고 수준이었다.
“⋯⋯⋯⋯.”
내 딴 청에 그녀는 다행히 별말 하지 않고 시선을 다시 던전 쪽으로 휙 돌렸고 나는 오싹해진 등골을 진정시켰다.
뭘 꼬라보냐고 한마디 들었으면 참 무안했을 텐데 감사합니다.
“박준호 씨? 박준호 씨!”
“아, 예예!”
윤아린 헌터에게 푹 빠져 있던 탓에 옆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또 못 알아먹었다.
“그,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다만 안에서 절대 돌발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몬스터에 겁먹어서 혼자 막 도망치거나 안 간다고 뻐팅기는 일이요. 꼭 저희와 항상 붙어 있으셔야 하고 지시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앞에선 이미 다른 팀의 헌터들이 던전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나를 호위해줄 1팀의 헌터가 내게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똑똑히 대답했다.
언제부턴가 떨림이나 불안이 완전히 사그라들어 있었다.
이래서 배경지식이 중요하다는 건가.
나는 다른 헌터는 하나도 몰라도 윤아린 헌터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많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무패의 헌터라는 그런 이야기.
지금까지 그녀가 참가한 레이드 중 실패한 레이드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레이드 실패는커녕 너무 압도적인 그녀의 무력에 동료 헌터들이 할 게 없어서 지루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힘과 실력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S급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한민국, 아니 어쩌면 세계 최강의 헌터에게 1대1로 보호를 받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안감을 느끼면 그건 그냥 병인 거겠지.
나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던전 입구를 통과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던전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윤아린 헌터가 투입되고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오게 된 거지?
또 내가 뭘 하면 되는지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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