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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검귀 소일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최근연재일 :
2023.06.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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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4,305

작성
23.05.1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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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흑사방(5).

DUMMY

‘온다.’


눈 앞에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고 드는 고수가 스무 명이나 있다.


그 스물은 모두 각각의 흉흉한 병장기를 가졌고, 전원이 살겁에 익숙해 있다.


실력 좋은 살인마 스물을 동시에 조우한 기분.


심장이 둥둥 고동친다.


주어진 것은 풍전등화같은 검 한 자루.


허나 충분하다.


한 치의 쇠붙이로도 능히 살인하리(寸鐵殺人)-.


그것이 검귀(劍鬼)였다.


심장의 요동침이 의미하는 바는 공포 아닌 기분 좋은 긴장과 흥분이리라.


지금, 이 정도의 적이라면 가능하다.


이 싸움 가운데 반드시 새로운 깨달음이 깨어나리라는 강한 미증유의 확신이 전신을 전율한다.


전율로 깨어난 오감각은 집(集)과 중(中)을 만들어내니, 검을 중심으로 모인 정신은 곧 세상 안에 소일도와 검 둘만 남겨놓는다.


세상의 소음들이 아득히 멀게 사라진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소일도는 사람의 피륙을 사선으로 베어내고 있었다.


싸움의 포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름 모를 흑사방 간부 하나의 몸뚱이가 온전히 두 쪽으로 나뉘었다.


순간 잘린 몸뚱이 사이로 창날이 시야 속으로 훅 빨려들어오듯 커졌다.


소일도는 고개를 살짝 틀어서 창끝을 피하고, 돌아오는 호흡에 아직 회수되지 못한 나무 창대에 검을 꽂아넣었다.


창대의 나무 결대로 돌진해서 창의 주인도 창대처럼 반으로 갈랐다.


고작 두 호흡에 둘을 죽였다.


등매루 루주에게 검이 한 번 막혔던 것을 생각하면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없는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이런 시건방진 놈이!”

“소원대로 아주 요절을 내버리겠다!”


자신있게 달려든 거구 두 사내.


그들은 덩치에 맞게 각각 청룡언월도와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아무리 소일도가 중검을 익혔다고 해도 내공이 부족한 상황, 중병기의 공격을 막았다가는 검이 부러질 것이 빤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더라.’


그러나 소일도가 애써 대응을 떠올릴 이유는 없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으니.


‘아아.’


공격이 닿기 직전에 몸을 쭉 뺐다.


그러자 청룡언월도와 방천화극이 서로 충돌하며 엉켰다.


‘이런 느낌이었군.’


중병기와 중병기의 충돌로 반탄력을 받은 두 거구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소일도는 둘 중 우선 청룡언월도를 든 간부의 발목을 벴다.


거구 하나가 쓰러지자, 혼자 남은 방천화극 사내는 소일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방천화극이란 애초에 양쪽에 월아(鉞牙)라고 하는 무거운 날이 두 개나 달려 있어서 웬만한 거장이라도 사용하기 어려운 무기다.


오죽히면 여포의 신위를 추켜세우는 이야기에서 그가 방천화극을 다루었다며 내세우겠는가.


즉, 그것은 개폼을 잡는 사파의 졸개가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솨아아아아아아.


검으로 벴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절단음이 방천화극 사내의 몸에 기다란 반월(半月) 모양의 혈선을 남겼다.


곧이어 사내가 짧은 단말마와 함께 뒤로 넘어갔으나.


쉴 틈따위는 없었다.


어느새 소일도를 휘감듯 날아온 철편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몸을 옭아매려 했다.


“잡았다 이놈! 이대로 터트려주마!”


사방을 애워싼 채찍이 소일도를 조각낼 기세로 한 순간에 당겨졌다.


그러나 모두가 소일도의 분해를 예상한 순간, 그의 몸은 그곳에 없었다.


철편이 완벽하게 시야를 차단한 순간 절묘하게 움직인 것이었지만, 적에게는 마치 소일도가 이형환위(二形換位)의 신기를 펼쳐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으리라.


이어서 소일도가 나타난 곳은 철편을 휘두르던 편사의 눈 앞이었다.


소일도의 검이 쾌속한 찌르기로 편사의 심장을 꿰뚫었고, 그 상태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다른 간부의 심장을 향해 내달렸다.


“이 놈이 누굴 봉사로 아느냐!”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간부가 소리쳤다.


저 멍청한 공격을 당해주기에는, 검에 꿰인 편사의 몸뚱이가 너무 크고 무거웠다.


간부는 검에 꿰인 동료의 몸뚱이 째로 손일도를 날려버릴 생각으로 둔중한 철퇴를 휘둘렀다.


빠아아아아아악!


무게가 못해도 육십 근은 나갈 법한 철퇴가 목표에 적중하며 편사의 몸을 찌그러뜨렸다.


그 몸뚱이는 공중으로 붕 떠서 날아갔다.


하지만 간부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편사의 몸뚱이 덕에 뒤에 숨은 소일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미 소일도가 자신의 무릎 높이로 몸을 낮춘 채 파고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간부는 자세를 수습하려 했지만 무거운 철퇴의 무기 때문에 허둥거렸다.


목이 달아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


다음 순간 간부는 공중을 날고 있는 감각을 느꼈다.


목 없는 자신의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이 간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툭.


간부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소일도는 무심하게 검을 내리찍어서 벌레를 눌러죽이듯이 발목 없는 청룡언월도 사내를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벌써 죽은 흑사방 간부의 숫자가 여섯이었다.


“다음.”


소일도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자 누구 하나 쉽사리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간부끼리의 실력은 비등했는데, 순식간에 여섯이 당한 장면을 목격하고 달려들 멍청한 인물은 없었다.


간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슬금슬금 뒤로 빠질 뿐이었다.


“다음, 없나?”


소일도가 재차 확인했다.


흑사방주는 여전히 턱을 괴고 상석에 앉아 있었고, 간부들은 영 무소식이었다.


“없나보군.”


소일도는 돌연 기세를 죽이고 납검했다.


천천히 걸어서, 온통 쏟아지고 깨진 술상들 중 엎어지지 않고 멀쩡한 곳으로 가서 앉았다.


소일도가 술잔을 쭉 들이켰다.


“잠시 쉴 테니 마실 사람은 마셔라.”


그리고 정말로 그는 싸우다 말고 앉아서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주향이 식도를 타고 밀려들어와 창자를 뜨겁게 달구는 것이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게 좋은 술이군.”


잔을 비우고 또 따라 마시고.


보다 못한 흑사방주가 입을 열었다.


“뭐하는 짓이냐, 이 자리에서 제사라도 지내겠다는 건가? 아니면 체력이 바닥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둘 다 아니다.”

“역시 그렇군. 그럼 뭐냐.”

“마실 사람은 마시라고 했다.”

“......”


소일도는 흑사방주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이제 알겠군, 승전주(勝戰酒)야. 벌써 이겼다고 착각하는 건가?”


소일도가 한 모금을 마신 뒤에 한 마디 대꾸했다.


“......멍청한 방주를 섬기고 있었군.”


우드득.


언제나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던, 흑사방주가 쥐고 있던 좌석의 팔걸이에서 살벌한 소리가 났다.


완전히 바스라진 팔걸이가 흑사방주의 손아귀에서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흑사방주의 눈이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소일도와 흑사방주가 맞붙을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때 누군가 초탈하게 가벼운 걸음으로 나서서 찬물을 끼얹었다.


소일도에게 왼 팔을 잃은 자객, 홍기였다.


그는 대충 옆에서 술잔 하나를 챙기더니 소일도의 술상 앞에 앉았다.


“한 잔 마셔도 되겠소?”


홍기의 잔에 술이 꼴꼴꼴 채워졌다.


그것을 한 번에 들이킨 홍기가 입가를 쓱 닦았다.


“사실 좀 멍청한 방주이기는 했소.”

“역시 그렇군.”

“사실대로 말하면, 수하 열을 보내서 아홉이 죽었는데 자기 체면이나 걱정하고 있는 소인배가 흑사방주요. 게다가 이제는 술 한잔 하라는 말도 못 알아 먹어서야 원. 귓구멍에 뭐라도 꼽아놓은 줄 알았소.”

“음.”


둘은 주거니 받거니 소일도가 한 잔을 더 마시고 말했다.


“사실 귀에 뭘 꼽아 놓아도 들릴 말은 잘 들린다. 경험담이라서 잘 알아.”

“그럼 방주는 귓대가리에 말뚝이라도 박았나보오.”

“그럴 수도 있겠군.”


흑사방주는 그 대화를 바로 앞에서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가, 나중에는 약이 오른 듯이 붉어졌다.


“외팔이, 지금 배신하겠다는 건가?”

“왜 그러시나 방주, 외팔병신 하나 없어도 달라지는 건 없지 않겠소?”

“아직 네놈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모르나보군. 설령 소일도 그놈이 살아서 이곳을 나간다 해도, 한번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네놈을 살려둘 것 같은가?”


그러자 홍기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방주, 이제 와서 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요? 지금까지 임무에 실패하거나 쓸모 없어진 살수는 물건 버리듯 하지 않았소? 마치 그대는 내 목숨을 살려줄 것처럼 말하지 마시오.”

“......”

“언제까지 소인배처럼 살 건가, 방주.”


기분 나쁘게 웃던 홍기가 이번에는 미소를 싹 지우고 정색했다.


“나 말고도 죽기 싫어서 흑사방주를 따르던 이들은 들으시오. 흑사방에서 나처럼 소모품으로 썩어갈 거라면 말리지 않겠소만. 그게 아니라면 멍청한 방주를 계속 섬기는 일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거요. 지금도 저렇게 술 한 잔 맞대는 게 무서워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지 않소이까?”


긴 말을 끝낸 홍기가 술잔을 들이켰다.


제법 속이 쓰릴 양이었는데, 그는 내일이 없는 술고래처럼 잘 마셨다.


“보시오, 나야 한번 이 검객을 죽이려고 했으니 밑으로 들어가기는 글렀다 쳐도, 그대들에게는 수하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방주보다 적에게조차 기탄 없이 술 한잔 내주는 수장이 좋지 않겠소?”


그러자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직접 입을 열어서 술렁이지는 않았으나, 많은 이들의 마음이 술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잠자코 듣던 소일도가 틀린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나는 수장이 될 생각은 없다.”

“아, 그렇소?”

“그래.”

“아님 말고.”

“그리고 너를 살려줄 생각도 딱히 없다.”

“......”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던 홍기의 행동이 굳었다.


그의 웅변에 마음이 움직이려던 흑사방 간부들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홉떴다.


심지어 흑사방주마저 소일도를 미친 놈 보듯 봤다.


“......살릴 생각이 없었다면 왜 갑자기 술을 권한 거요?”


홍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유가 필요한가?”

“그야, 따라주는 술을 받고 마시면 같은 편으로 삼아주는 그런 그림 아니었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 너희는 내 가족들을 죽인 원수인데, 내가 살려줄 이유가 있나?”

“으음.”


홍기는 침음성을 흘렸다.


마지막 한 잔의 술 안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며 일렁이고 있었다.


그 술잔 안에 홍기가 담아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시원하게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하긴, 우리도 사람 죽이고 묻는 데 이유 없고 돈 뜯는 데 이유 없긴 했던 것 같소.”


따지자면 물론 그때그때 취할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살생도 하고 약탈도 했겠지만, 그들에게 수탈을 당한 자들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었다.


홍기는 그 사실에 납득했다.


“그래도 싸우다가 죽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하려면 그렇게 해라.”

“고맙소.”


소일도는 이만 술잔을 놓고 일어났다.


“내려와라 흑사방주.”

“......건방진.”


마침내 흑사방주가 움직였다.


흑사방(黑私房)이라는 이름답게, 검게 물들인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그의 장삼이 펄럭였다.


“대화하라고 보낸 전갈이 죽은 이유가 있었구나. 대화가 통할 놈이 아니야.”

“......”

“하나만 물으마. 너, 정체가 뭐냐? 말해두지만 철방 아들이라느니 하는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


소일도는 즉각 답했다.


“네놈이 어떤 대답을 원하든, 나는 소가철방의 양아들 소일도다. 그리고 이것은 소가(昭家)에서 보내는 검이다.”

“......역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놈이로군.”


흑사방주의 손에서 화염공(火焰功)으로 인한 새빨간 불꽃이 화륵 타올랐다.


흑사방주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소일도를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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