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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검귀 소일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최근연재일 :
2023.06.15 23:20
연재수 :
3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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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05
추천수 :
618
글자수 :
204,305

작성
23.05.1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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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13쪽

검귀, 돌아오다(1).

DUMMY

음습하고 침침한 철방.


철방주는 자투리 천을 북북 찢었다.


각종 쇠붙이를 만드는 철방에는 언제나 쇳가루가 날리기 마련이다.


자투리 천은 그 쇳가루를 닦을 때 쓰던 물건이었다.


칼날에 쇳가루가 들러붙으면 금방 무뎌지니까, 수시로 닦아줘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철방주가 천을 찢고 있는 이유였다.


“일도야.”


철방주는 천을 비비 꼬아서 소일도의 양쪽 귓구멍을 막았다.


“여기서 나오지 말거라.”


입에 물려서 말도 막았다.

눈에 칭칭 감아서 시야 또한 빼앗았다.


마지막으로 손발목을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면, 그때부터 이백까지 이백 번을 세고 나오거라.”


이백은 소일도가 아는 가장 큰 숫자였다.


몸은 약관이 넘었지만 소일도의 정신은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철방주는 부드럽게 말하고 완전히 포박된 소일도의 뺨을 쓰담았다.


“절대로 울지 말고, 도회지에 있는 포목점 곽 아저씨 알지? 거기로 찾아가라. 적어도 배는 곪지 않을 거다.”


그와 헤어지기 싫은지 눈물을 줄줄 흘리던 소일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뒤주의 뚜껑을 닫았다.


스르릉.


기다리는 동안 칼을 마저 갈았다.


* * *


귀에 꼽아진 천 쪼가리는 그다지 소리를 막아주지 못했다.


소일도는 철방 지하실 뒤주 안에서 숨죽인 채 모든 소리를 엿들었다.


철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둘? 아니면 셋?


모르겠다.


다음에는 말소리가 들렸다.


“철방주. 무탈하셨나 모르겠군. 잘 지내셨소?”

“내 가족들은 잘 있소?”

“물론이지. 우리 흑사방에서 잘 보호하고 있소.”

“......”

“발주는?”

“다 됐소.”


그러자 여러 명의 발소리가 철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주문해 놓은 병장기들이 잘 완성됐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철방주의 솜씨는 퍽 뛰어난 편이었다.

이번에도 필시 문제없으리라.


역시나 사내가 철방 안쪽을 천천히 걸으며 만족스러운 듯 소리를 흘렸다.


“음. 역시 철방주로군.”

“......”

“방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오. 원래 지역에 흑도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점거하는 것이 철방 아니겠소? 병기를 독점해야 반항심의 씨가 마르니.”


내용은 양해를 구하는 듯했지만 사내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우린 돈은 챙겨주지 않소.”


쩔그렁.


유독 철전 부딪히는 소리가 컸다.


일부러 조롱하듯 전낭을 흔들어보인 것이다.


“받으시오. 이번 수주값이오.”


돈을 건네준 사내들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차르르릉!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소일도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알았다.

주문해놓은 병장기들을 자루에 담고 있는 것이다.


창(槍).

검(劍).

도(刀).

봉(棒),

편(鞭: 채찍).

곤(棍: 몽둥이).

부(斧: 도끼)......


주류인 무기들과 함께,


철질려(鐵蒺藜: 지뢰용 쇳조각)나, 겸(鎌: 낫), 극(戟: 창의 일종)같은 희귀한 것들도 모두 쓸어담았다.


모두 철방주가 몇 개월 동안 잠을 죽이고 살을 태워가며 만든 무기들이었다.


“다 챙겼나?”

“예, 전부 확인했습니다.”

“음.”


한참 무기를 쓸어담은 사내들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철방주, 다음 발주가 결정되면 또 오겠네.”


철방주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사내는 매번 하던 경고를 날렸다.


“다른 놈들 주문 받으면 알지? 끅. 그럼 몸 간수 잘 하시고. "


목 긋는 시늉을 한 사내가 철방을 나가려다가 뭔가 잊었다는 듯 멈칫했다.


"아참, 요 앞 도회지에 등매루라고 질 좋은 기루가 하나 생겼더군. 자넨 일만 하느라 모르겠지만, 제법 됐어.”

“무슨 뜻이오?”

“뜻은 무슨. 자네도 처자식과 떨어져 지내니 외로울 것 아닌가. 받은 돈도 넉넉하겠다. 내 같은 남자로서 그냥 알려만 주는 걸세, 알려만. 참고로 기녀들도 아주 예뻐.”


처자식을 잃은 아비에게 기녀라니.


이 이상 없는 모욕이었다.


이내 은근한 조소를 흘린 사내들이 철방을 떠나려고 했다.


“......잘 가시오.”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소일도는 철방주가 사내들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내 사내들이 문지방을 넘는 순간.


툭.


아주 얇은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 위의 천장이 열렸다.


티티티틱!


이번에는 여러 개의 소리가 한 번에 겹쳤다.


그와 동시에 열린 천장에 얇은 실로 매달려 있던 온갖 무기들이 사내들을 향해 낙하했다.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음?”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던 사내가 작은 소리에 반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시퍼렇게 날선 칼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대로 세 명의 사내들이 모두 몸을 관통 당해 절명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푸푸푸푸푸푹!


철방주의 함정은 대부분이 바닥에 박혔다.


세 사내가 모두 날렵하게 몸을 날려 피한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들이기에 뒤늦은 대처에도 살 수 있었다.


가장 가장자리로 떨어진 검 하나가 표적을 맞췄지만, 그마저도 쇳덩이들을 등에 이고 있던 한 사내가 겨우 어깨를 스쳤을 뿐이었다.


회심의 함정을 피해낸 사내의 만면에는 당혹 대신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보니 철방주께서 기문지식에도 조예가 있으셨군.”


뒤이어 철방주가 돌진했다.


“그 입 닥쳐라!”


우악스러운 외침이었다.


채앵!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검의 파찰음은 기세만큼 대단하지 못했다.


애초에 철방주는 무림인이 아니라 철방을 운영하는 대장장이였으니까.


“아쉽게 됐소. 그대는 우직하게 일을 잘 해서 좋았는데.”


비릿한 음성으로 말한 사내가 검을 뽑아서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쩌엉!


철방주가 칼을 휘둘렀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일격으로 사내들과 철방주 간의 실력차를 실감할 수 있었다.


“흡......!”


철방주는 들고 있던 검을 놓쳤다.


그대로 무빙비가 된 그의 명치께를 향해 사내의 검이 밀려들어왔다.


이렇다 할 기술도, 가공할 위력도 없는 삼류 잡배의 찌르기였으나 그럼에도 무림인과 양민의 차이는 컸다.


엉성한 기문지식까지 이용해가며 독심을 품고 준비한 일전이 실패할 만큼.


사내의 검이 철방주의 폐부를 뜨끈하게 관통했다.


뒤이어 철방주의 신형이 피를 뿜어내며 주저앉듯 허물어졌다.


숨소리 하나가 완전히 끊겼다.


“각주님, 어찌할까요.”

“어차피 무기는 충분하다. 돌아가서 보고해야지.”


대수롭지 않게 말한 사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돈 되는 게 있는지 찾아봐라.”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털어가놓고도 부족했는지, 명령을 받은 수하들이 쿵쿵거리며 철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문지식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꼼꼼히 경계하면서 찾도록.”

“예, 시신은 어찌할까요?”

“일단 철방 밖으로 던져놓아라. 요즈음 기강이 영 헤이해졌는데, 좀 멀리 가져가서 버리면 본보기가 되겠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질질질.


저항 없는 시신을 끌고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소일도의 귀를 긁어댔다.


곧 다시 돌아온 사내가 다시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바닥문을 발견했다.


“여기 수상한 문이 있습니다!”


소일도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수하의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문이 있었나. 음.”


나머지 두 남자도 바닥문 옆으로 모였다.


선 자리에서 사방을 살핀 사내가 수하에게 명령했다.


“주변에 기관지식은 없다. 열어라.”


소일도는 숨을 죽였다.


그러나 숨을 죽이는 것도 소용 없다는 걸 알았다.


“궤짝인가?”

“쉿.”


수하들을 조용히 시킨 사내가 집중했다.


궤짝 안쪽에서 야트막한 기척이 들렸다.


겁을 먹었는지 잘게 떨림도 느껴졌다.


“흐흐, 숨겨놓은 자식새끼라도 더 있었던 건가. 철방주, 마지막까지 아낌없이 베풀다 가는구려.”


어린 아이는 돈이 된다.


노비로 팔아도 좋았고, 어디선가 무급으로 일을 시켜도 괜찮았다.


특히나 미색이 뛰어나다면 남녀할 것 없이 웃돈을 얹어서라도 데려가겠다는 늙은이들은 줄을 섰다.


“어디 보자.”


기왕이면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


제일 비싸게 팔리는 종류였다.


“겁먹지 말거라. 얌전히 굴면 해치지 않으마. 어른의 말은 잘 들어야겠지?”


그리고 사내가 궤짝의 덮개를 연 순간.


드러난 것은 온 몸이 질긴 천으로 묶인 소일도였다.


“뭐야, 다 큰놈이잖아.”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길쭉한 몸으로 보아 적어도 약관을 넘긴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듯한데 숨어 있었다니, 부끄럽지도 않으냐?”

“......”

“쯧, 아무래도 상관 없지. 어쨌든 돈은 될 테니.”


허나 사내의 섬뜩한 말에도 소일도는 얌전했다.


방금 전까지 궤짝 안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거짓말인 것처럼, 천으로 둘둘 말린 소일도는 숨결조차 부드러웠다.


‘무서워서 숨어 있던 놈이 뭐가 이렇게 침착해?’


사내는 순간 소일도를 경계하며 세밀하게 관찰했다. 궤짝에서 느껴진 떨림은 방심을 유도한 작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사내의 기우였다.


‘눈물 자국이 있군.’


말라붙은 눈 밑 자국 덕분에 사내는 안심했다. 기절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철방주가 죽는 소리도 들렸을 테고, 어두운 곳에 묶인 채 방치되어 있는 와중 살인마들에게 발견됐으니 겁이 많은 놈이라면 기절할 법도 했다.


“기절했나보군. 일단 얼굴만 확인하고 옮기면 되겠다.”


사내의 말에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 중 하나가 소일도의 얼굴에 감긴 천을 모두 풀었다.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건가.”


감겨 있으리라 생각했던 소일도의 눈은 그야말로 번쩍 뜨여 있었다. 다만 초점과 광채가 없을 뿐이었다.


“이놈, 내 말 들리느냐?”


수하 하나가 의식 없는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헛짓 그만하고 옮기자. 어리지는 않지만 얼굴이 미남자라 괜찮은 값에 팔릴 거야. 클클클.”


사내들은 잠시 뒤 자신들의 주머니에 들어올 두둑한 액수를 떠올리며 웃었다.


“읏샤.”


한 명은 소일도를, 한 명은 무기들이 담긴 자루를 들어올린 사내들이 철방을 벗어나려고 했다.


“......요.”

“응?”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소일도의 입이 열렸다.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아저씨에게 마지막 인사는 하게 해주세요.”


기절했던 사람같지 않은 담담한 어투였다.


그 말에 사내 셋이 시선을 교환하다가, 철방주를 죽인 사내가 턱짓했다,


가는 내내 칭얼거리며 난리를 피우느니, 인사 한 번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나았다.


수하가 소일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목과 발목을 묶은 천을 풀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귀에 꼽혀 있던 천을 뺐다.


“허튼 짓 하면 뒈진다. 우린 고깃값만 받아도 남는 장사야.”

“......”


소일도는 대답하지 않고 철방주의 시신 앞으로 걸어갔다.


철방주는 죽는 순간까지 칼을 꽉 쥐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칼의 모양이었다.


칼날 부분이 톱날처럼 뾰족한 이빨들이 달려 있었다. 저런 물건이 사람에게 스치기라도 하면 살점이 찢겨 나올 것이다.


깔끔한 살상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고통을 주기 위해 직접 만들어놓은 듯했다.


철방주는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시신의 칼은 더럽다고 여겨 가져가지 않은 건가.”


소일도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소일도이되, 소일도가 아니었다.


죽음에 가까운 극도의 위기 속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검에 홀려 일생을 바쳤던 사내.


검귀(劍鬼)였다.


“이 검을 회수하지 않은 것이 오늘 너희가 죽는 이유다.”


물론 흑사방 사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그만 데려와라.”

“예.”


수하 하나가 소일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일도의 손에 흉측한 검이 들리긴 했지만, 휘두르는 자가 저래서야 장난감이나 다름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콰직!


소일도의 지척까지 다가온 수하의 목에 톱날이 들이박혔다.


방심한 그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역시 날이 이래서 베기는 어렵군.”


크르르르르륵!


소일도가 힘을 줘서 검을 뽑았다.


그러자 수하의 목뼈가 톱에 갈리는 것처럼 잘려나갔다.


피분수가 뿜어지고.


“이 개새끼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두 흑도 사내가 격분하며 소일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와라.”


그에 대꾸하는 소일도의 음성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강호에 검귀의 귀환(歸還)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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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등매루의 밤(2). +1 23.05.12 1,269 20 13쪽
4 등매루의 밤(1). +3 23.05.11 1,309 23 12쪽
3 검귀, 돌아오다(3). +1 23.05.10 1,418 26 12쪽
2 검귀, 돌아오다(2). +1 23.05.10 1,622 27 12쪽
» 검귀, 돌아오다(1). +5 23.05.10 2,107 2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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