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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검귀 소일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최근연재일 :
2023.06.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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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05.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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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 돌아오다(2).

DUMMY

흑사방의 패거리 셋 중 대장 노릇을 하는 것은 능표라는 자였다.


대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잘 알았다.


삼류 흑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능표의 인생 전반이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공도 익히지 않은 초짜에게 검술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삼류니 뭐니 해도 그 또한 칼밥 먹는 무인이었으니까. 수하가 당한 것은 온전히 방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붙잡으려 했다.


쐐애액!


우선은 무기를 빼앗는다.


힘을 실어 휘두른 칼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 한 수에 철방주같은 근육질에 다부진 남자도 칼을 놓치지 않았던가?


헌데 소일도의 기괴한 검은 능표의 검과 부딪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부딪혔으나 쇳소리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밀려났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검뿐 아니라 모든 무술에 통용되는 원리이자, 숙련되면 한 치의 힘으로도 팔 척을 넘어뜨린다는 묘리였다.


받아야 할 반탄력을 받지 못한 능표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소일도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능표의 앞섶이 사선으로 붉게 찢어졌다.


소일도가 몸의 허접한 완력을 고려해서 깊게 베지는 않았지만 톱날의 이빨 덕분에 상처가 크게 벌어졌다.


“크아악!”


철방주의 의도대로 고통을 주기에는 최적인 검이었다.


소일도에게 철방주는 아버지였다.


고아였던 그를 데려다가 철방에서 먹이며 재우며 가족처럼 대해준 인물.


이름도 없이 눈에 파묻힌 채 얼어 죽어가던 백치(白癡: 발달장애) 고아에게, 자신의 성씨인 소(昭)를 붙여 대장장이답게 일도(一刀)라는 이름을 지어준 구원자였다.


검귀의 기억은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소일도의 기억이나 인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철방주는 그에게 여전히 아버지였고.


그것은 복수의 이유로 충분했다.


능표는 붙잡겠다는 생각을 버렸는지, 수하와 함께 달려들었다.


무림인도 아닌 자를 상대로 양쪽에서 합공이라니, 우스웠지만 그럴 수 있었다.


상대는 검귀였으니까.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능표와 수하가 동시에 소일도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아래로 내리찍는 종베기라면, 부드럽게 받아칠래야 받아칠 공간도 없을 것이다.


‘잡았다.’


검을 내리치는 순간 능표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음 순간 신기루였던 것처럼 산산히 흩어졌다.


카가가각!


톱날같은 소일도의 검과 능표의 검이 사선으로 교차하며 불꽃이 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범부의 근력으로 어찌 장성한 무림인 둘의 검을 받아냈단 말인가?


능표는 순간 소일도의 검끝을 보았다.


검 끝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단단한 바닥을 이용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순간, 능표는 검 끝에 시선을 빼앗긴 대가를 치렀다.


소일도는 비쩍 마른 젓가락같은 손가락을 곧추 세워서 능표의 양쪽 눈을 찔렀다.


능표는, 검을 든 상대 앞에서 시야가 사라졌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거기에 가슴팍을 톱날에 베인 고통이 상기되며, 능표는 겁을 집어먹었다.


“오, 오지마!”


그가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걱!


마구잡이로 휘두른 검에 뭔가 베였다.


깊었다.


숱한 살인의 경험, 손끝에 끈적하게 남아 있는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치명상이다.


전투 경험이 없는 양민이라면 상처는 더더욱 심하게 작용할 것이다.


“흐흐흐, 철방 애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더니 꼴 좋다. 강호에서 눈 먼 칼에 맞아 뒤지는 놈이 몇 포대인 줄이나 아느냐? 주제에 제법 봐줄만 한 재롱이었다만, 결국 진짜 무림인은 당해낼 수 없는 것이야!”


한껏 달아오른 능표가 쎄함을 느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왜 아무 말도 없지?’


적을 베었으니 수하가 뭐라도 말해야 옳았다.


‘서, 설마.’


“제 수하의 목을 베어놓고 어지간히도 기쁜가 보군.”


소일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기다렸다.


능표의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다.


발치에 목이 잘린 채 쓰러진 수하의 시신이 허물어져 있었다.


“검에 눈이 멀었으면 휘두르질 말았어야지.”


능표는 왜인지 소일도의 그 말이,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한 지적처럼 들렸다.


협도 의도 없이 그저 눈 가리고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왔던 인생.


그리고 그것이 꼭 자신이 죽는 이유처럼도 느껴졌다.


콰득!


“아아아아악!”


소일도의 톱날이 이번에는 능표의 어깨죽지에 틀어박혔다.


“너는 그냥 죽이지 않아.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사지를 천천히 썰어주마.”


그 말을 끝맺은 소일도가 검을 톱질하듯 당겼다.


쿠루루루루루룩!


피와 뼈가 섞여 깎이는 소리와 함께, 검을 쥐었던 능표의 오른팔이 통째로 썰렸다.


그 다음은 왼 손목.


왼발목.


오른 다리.


그리고 마저 왼팔을 썰어버리려고 했을 시점에 능표는 바닥에 머리를 심고 죽었다.


너무 많은 피를 쏟은 것이다.


“......”


소일도는 무심하게 능표의 조각들에서 시선을 돌렸다.


철방 밖에 버려진 철방주의 시신에 벌써 까마귀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아버지.”


소일도가 다가가자 까마귀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아직 철방주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는 와중 고개를 돌려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철방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딸, 연이, 내, 부인......”

“알았습니다.”

“일도야...... 고맙다.”


살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애초에 폐부를 찔려서 처음부터 회생 불가능이었다.


이윽고 철방주의 심장이 맥동을 멈췄다.


소일도는 철방주의 손을 꽉 붙잡았다.


“감사했습니다.”


* * *


소가철방(昭家鐵房).


철방 앞에 걸린 간판이 노을빛에 물들어갔다.


철방주의 시신을 묻은 무덤의 봉분은 저녁이 되어서야 완성됐다.


소일도는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그 앞에 절했다.


애도의 시간이 끝나자 가부좌를 틀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해 보았다.


우선 전생, 그러니까 검귀로서의 기억은 그다지 없었다.


무슨 이름이었는지, 부모는 있었는지, 어디의 소속이었으며 심지어는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모두 물안개에 가려진 강의 반대편처럼 침침했다.


다만 그럼에도 강하게 느껴지는 욕망은 있었다.


‘검의 끝을 보고 싶다.’


전생에 자신은 검귀(劍鬼)로서 검에 모든 생애를 바쳤다.


그리고 이번 생에는 그 끝을 보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뜨거운 욕망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방법 하나만큼은 바위에 새겨진 듯 남은 것이다.


문득 느껴지는 흉통에 소일도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장이 꿀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건가.”


검귀의 혼은 몰라도, 철방의 백치로 자란 소일도는 아직 피냄새와 시체에 반감을 가지는 듯했다.


“걱정할 일은 아니지.”


이 몸에 검귀가 들어온 이상, 어차피 익숙해질 테니까 말이다.


소일도는 앉은 자세로 눈을 감았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탓에 검귀로서 사용하던 내공심법의 구결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고절한 상승의 심법을 몸에 익힐 때가 아니라, 무공의 토대가 될 기초를 닦을 때였으니까.


마치 나무를 키우는 일과 같았다.


나무도 높이 자라려면 처음에는 가지치기가 필요한 법이다. 검도 그랬다. 검의 극치에 다다라, 검신(劍神)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당장의 화려한 이파리들을 떨쳐내야 했다.


쇠심줄같은 줄기 하나면 족했다.


싱그러운 잎을 피워내는 것은 줄기가 높이 자랐을 때면 된다.


기억은 없어도 그 깨달음만은 확신했다.


‘기억보다 깨달음이 먼저라니, 마치 원혼(冤魂)같군.’


원혼이든 망령이든 상관 없지만 말이다.


소일도는 옅은 호흡을 시작했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통해 아랫배의 단전에 내공을 쌓는 토납법(吐納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공심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요법이었다.


화산의 자하신공, 소림의 달마역근경같은 강호의 신공절학들은 물론이고 싸구려 기본공인 삼재공이나 육합공에도 미치지 못하는 호흡법인 것이다.


‘하지만 충분하다.’


중요한 건 당장의 강함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주의할 것은, 색채가 짙은 무공에 섣불리 때 타지 않는 것이었다.


기초가 없는 상태로 번드르르한 무공을 익혀봤자, 그 무공에 오히려 끌려다닐 뿐이다.


지금은 새하얀 도화지를 넓힐 때.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손쉽게 올라가버린 경지는, 그만큼 좁은 도화지에 서투르게 색채를 입혀버리는 것과도 같다.


좋은 그림이 완성될 리가 만무했고, 그런 식으로는 소일도가 바라는 검신의 경지에는 들지 못한다.


‘전부 버린다.’


주요한 깨달음과 기본을 제외한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순수한 검 한 자루만 남기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내공을 쌓았다.


사실 쌓았다기보다는 한 꼬집 겨우 집어 올렸다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소일도가 쌓은 내공은 그만큼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난 소일도가 철방 안으로 들어갔다.


흑도 사내들의 자루를 풀어서 무기들을 눈으로 핥았다.


명검(名劍)까지는 아니더라도, 실력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이 분명한 무기들이었다.


소일도는 그중 검 한 자루를 챙겼다.


후웅!


휘둘러보니 역시나 손에 착 감겼다.


그 기세로 지금의 몸으로 가능한 검을 펼쳐보았다. 무수히 많은 가지를 잘라내고 남은 줄기들.


검의 근원이 되는 묘리들이었다.


쾌검(快劍), 중검(重劍), 환검(幻劍), 유검(柔劍).


스아악!


빠르게, 무겁게,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검으로 한 폭 그림을 그리듯 한참을 매몰한 소일도가 만족스러운 듯 검집에 검을 납검했다.


검귀의 정신 속 깊은 무저갱이 아직 검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일도는 무기들을 넣어서 자루를 다시 묶고, 이번에는 철방주의 톱니 달린 검을 집어들었다.


괴이하고 흉측한 검.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그것을 철방주의 봉분 앞에 비석을 대신해서 푹 꽂았다.


“소연, 그리고 설 부인.”


소일도가 봉분에 대고 중얼거렸다.


흑사방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철방주의 처자식의 이름들이었다.


“구해오겠습니다.”


솔직히, 구해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살아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절대로 흑사방이 말처럼 가족들을 보호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흑도에게 끌려갔으니 기루나 홍등가에 팔아치워졌거나, 쭈그렁 영감의 노리개로 사용되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국경을 넘어 노예로 팔렸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는 끝까지 반항하다가 이미 죽은 것이었다.


“만약 죽었다면......”


소일도가 조용히 읊조렸다.


“똑같이 전부 베겠습니다.”


합장을 마친 소일도가 정말로 여정을 떠날 준비를 했다.


철전이 든 전낭을 챙기고 자루를 어깨에 둘러멨다.


어느덧 노을마저 지고, 캄캄한 밤이 도래하고 있었다.


소일도는 나서기 전 흑사방 떨거지들의 시신 셋을 철방 밖으로 꺼내서 아무렇게나 놔두었다.


시신은 들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다.


까마귀들이 남은 고기를 처리할 것이며.


구더기와 파리가 찌꺼기마저 먹어 없앨 터였다.


당연했다.


흑사방의 독점으로 인해 철방의 물건을 찾는 이들은 오직 흑사방뿐이었으니까.


유일한 방문자가 죽었으니, 누군가 이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치워줄 리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업보가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간 일에 불과했다.


“흑사방(黑私幇)이라.”


어찌됐든, 새로운 몸으로 검을 써보기에는 알맞은 무대일 것 같았다.


등을 돌린 소일도가 조용히 밤길 어둠을 찢으며 나아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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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 소일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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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흑사방(3). +1 23.05.16 1,105 18 12쪽
8 흑사방(2). +1 23.05.15 1,130 12 12쪽
7 흑사방(1). +1 23.05.14 1,192 15 12쪽
6 등매루의 밤(3). +1 23.05.13 1,230 22 12쪽
5 등매루의 밤(2). +1 23.05.12 1,269 20 13쪽
4 등매루의 밤(1). +3 23.05.11 1,310 23 12쪽
3 검귀, 돌아오다(3). +1 23.05.10 1,420 26 12쪽
» 검귀, 돌아오다(2). +1 23.05.10 1,623 27 12쪽
1 검귀, 돌아오다(1). +5 23.05.10 2,112 2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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