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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검귀 소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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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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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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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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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방(3).

DUMMY

소일도는 잰걸음을 재촉했다.


수련을 끝내기 전에 흑사방이 소일도를 발견하느냐, 흑사방에게 발각되기 전에 소일도가 수련을 끝내느냐.


경각을 다투는 시간의 싸움이었다.


반점 주인장의 안내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장포제철소가 나왔다.


벙(房)이 아니라 소(所)인 만큼 소가철방보다는 규모가 큰 곳이었다.


아마 장포현에 흑도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장인 하나가 아니라 몇 명이서 함께 작업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소일도는 우선 제철소 안에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먼지가 쌓인 진열장부터, 쇠를 두드릴 때 사용하는 모루, 달굼과 풀무질을 했을 화덕, 담금질에 쓰였을 옹기, 혹시 모를 지하실까지.


같은 철을 제련하는 장소라 그런지, 소가철방과 이곳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모든 방에 사람이나 사람이 머물던 흔적 따위가 일절 없음을 확인한 소일도는 손가락으로 진열장에 쌓인 먼지를 쓸어보았다.


먼지와 함께 잿빛 쇳가루가 묻어났다.


화덕에는 타다 만 잿더미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외에도 사람 살던 흔적이 짙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검게 착색되어 있었다.


‘하나, 둘, 아니 셋이다.’


보아하니 셋 이상의 장정이 저항하다가 피 흘린 듯했다.


이곳에서 그들이 실제로 죽었는지, 아니면 어떤 사정으로 연명했는지는 몰라도 격한 싸움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소가철방에는 철방주의 핏자국도 이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소일도는 검파를 꾹 눌러쥐었다.


‘다시는 그리 무력하게 숨지 않겠다.’


지하실 궤짝에서 벌벌 떨며 숨 죽이던 날, 소일도는 그 날을 기억한다.


소음도 빛도 막아주지 못했던 천 쪼가리.


그러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던 무력감.


“......”


소일도는 금방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상념에 잠길 시간 따윈 없었다.


다시 무력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더욱 강해져야 했다.


수색을 마친 소일도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내실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들고 온 보따리를 풀자, 약방에서 비싼 값에 사들고 온 약재들이 한 번에 해방되며 쓰디쓴 약향을 풍겼다.


‘약사는 말렸지만, 나는 어차피 이것들을 흡수할 생각이 없다.’


소일도는 갈근(葛根: 칡뿌리)을 통째로 집어서 별대른 배합이나 손질 없이 곧장 입에 넣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약재들을 하나씩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갈근, 창포, 강황, 인삼, 작약, 고삼잎, 하수오, 섬수, 자충, 백청......


소일도는 약사가 아니다.


따라서 그 약들이 가지는 성질이나, 함께 복용하면 안 되는 성질의 유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그가 고른 약재들은 하나같이 모두 효능이 좋기로 유명했다.


갈근은 생명력이 강하며 예로부터 해독(解毒)에 널리 쓰이고, 창포는 물에 우려 목욕만 해도 효능이 있다 할 정도로 밀도가 높다. 강황(薑黃: 생강)이나 인삼은 말할 것도 없고, 작약은 막힌 혈을 풀어주는 데 크게 작용한다.


그 밖에도 고삼잎, 하수오, 섬수, 자충, 백청 모두 쓰임이 분명하고 기운이 강한 약재들이었다.


그 사실 하나면 족했다.


소일도는 이것들을 약으로써 먹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이란 본디 몸 안에 기운을 흡수하게 만드는 것이자, 나아가 그 기운으로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일도는 애초에 단전까지 기운을 흡수하지 않고, 임시로 끌어다가 쓸 공력으로 치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단전에 흡수되지 않은 기운은 내공이 되지 않는 대신, 부작용을 일으킬 일도 적고 탁기를 제하지 않아도 돼서 운기조식 또한 필요 없었다.


‘이러면 자객이 와도 한 순간은 공력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


한 순간이면 족했다.


그 찰나가 소일도의 목숨을 살릴 것이다.


어느덧 약재를 모두 먹어치운 소일도가 정좌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약재의 기운들이 소화되어 몸 곳곳에 스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소일도는 별다른 조치 없이 단전에 거름망을 덧대는 느낌으로 약재들의 완전한 흡수만 막았다.


이제 약재들은 온전히 삼 일 정도만 체내에 머무르다가 기화할 것이다.


‘당장 약방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들로 범위를 좁히느라 효과가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군.’


최소한의 대비는 이것으로 마쳤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근골을 단련할 때였다.


말이 단련이지, 실상은 몸 전체를 짓이겨놓고 찢어발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부작용으로 며칠 동안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앓아눕는 것도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행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온 몸을 뜯어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미 무골이 되어버린 몸은 바꿀래야 바꾸는 게 쉽지 않은데, 지금 소일도의 몸 상태는 거의 흰 도화지에 가까웠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상태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소일도는 최고의 화백(畫伯)이었고, 걸맞을 만큼 좋은 도화지를 원했다.


소일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유약하고 말랑한 근육들과 연골, 또 깡마른 나뭇가지같은 골대가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모두 뜯어고칠 수 있었다.


‘천무지체(天武肢體)도 만들 수 있겠군.’


소일도는 온 몸에서 힘을 쭉 뺐다.


곧이어 범인(凡人)이라면 상상도 못할 격통이 단전에서 퍼져나가, 심장과 치골부터 손끝 발끝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온 몸이 빨갛게 달군 석쇠에 지져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일도는 고통을 꾹 감내하고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공력으로 근육의 섬유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벌렸다.


뼈대 중 약하고 얇은 부분을 망치로 두드리고 사포로 가는 것처럼 손질했다.


모든 과정에서 소일도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소일도의 생각은 오직 완벽한 외공의 토대를 닦는 것에만 오롯이 집중되어 있었다.


‘천무지체도 필요 없다.’


하늘이 내렸느니 어쩌니 해도 결국 천무지체나 무골이라는 말은 몸이 튼튼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소일도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시기에, 남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양의 깨달음과 신체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런 그가 천무지체에서 만족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검을 휘두르기에 가장 좋은 몸,’


많이들 착각하곤 하는데, 인간의 신체는 애초에 완벽하지 않다. 튼튼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소일도에게 검을 휘두르는 데 방해되는 부분은 필요 없었다.


따라서 천무지체처럼 단단하기만 하고 검을 휘두를 때 방해되는 부분은 가차없이 버렸다.


권사가 되거나 박투술을 익히거나 하다못해 마공을 익힐 거라면 쓸모 없는 근육이 없겠지만, 소일도는 검수로서 정점을 찍고자 했다.


무작정 파괴력이 강한 검이 아니라 개미의 다리털조차 수백 등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검을 추구했으니, 그만큼 정교한 신체를 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검신지체(劍神肢體)라고나 할까.


지금이라면 만들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담담하던 소일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큼이나 엄청난 고통이 손가락 끝까지 신체를 장악했다.


사람들이 사지(四肢)가 찢기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두려워 하는데, 소일도는 지금 온 몸을 스스로 얇게 조각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몸으로 능지처참의 백 배, 천 배가 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목과 관자놀이에는 핏대가 불룩하게 올라오고, 주먹은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새하얗게 질렸다.


내상을 입은 것처럼 새빨간 선혈이 앙다문 입술 끝에 맺혔다.


“......”


그렇게 네 시진이 지났다.


소일도는 어둠살이 내려앉은 방 가운데서 눈을 떴고,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근골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성공적이었다.


장래에는 검수로서 가히 완벽에 가까운 신체를 만들 수 있으리라,


* * *


이름모를 검객이 들렀다 간 지 이틀이 지났다.


소일도가 머물렀던 반점.


홍풍반점의 주인장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 제발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이 상황에서까지 잡아떼는 걸 보면 본 방이 어지간히 병신으로 보였나보군.”


흑사방 소속의 무인, 양운양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하는 주인장을 걷어차버렸다.


콰장창!


주인장의 몸뚱이가 날아가서 반점의 식탁이며 식기들을 부숴 놓았다.


충격에 피를 토하는 주인장을 보고도, 양운양은 무심하게 말했다.


“네놈이 그간 제철소 폐가에 복수행에 나서는 무인들을 재웠다는 걸 정말로 본 방이 모를 줄 알았나?”

“......!”

“그간 송사리 피라미같은 놈들이 제 발로 찾아와주는 것이 기특하고 편리하여 못 본 체 해주었건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다.”


양운양은 그간 주인장의 행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흑사방은 네놈 가게에 특별히 행패를 부린 적이 없는데, 죽은 제철소 놈들의 친구라도 됐던 게야?”


죽은 제철소 놈들이라는 말에 주인장의 눈가에 핏줄이 섰다.


정답을 알아챈 양운양이 비릿하게 웃었다.


“쯔즛. 쓸데없는 정은 뗐어야지. 자네는 아직도 세상이 정으로 굴러가는 줄 아는가?”


혀를 끌끌 찬 양운양이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박도를 뽑아들었다.


“아무튼 축하하네, 목숨 걸고 지킨 의리라니 저승에서 제철소 친우들이 아주 좋아하겠어. 쌍수 들고 환영을 해주겠군. 흐흐흐.”

“이노오오옴! 반드시 악적들에게 천벌이 떨어질.......”


서걱!


주인장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양운양이 든 박도는 절삭력이 좋은 도의 일종이다.


그런 이유로 주인장의 목도 깨끗하게 뎅강 잘려나가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허망한 눈동자를 뜬 그대로였다.


“소일도란 놈이 이것을 보면 좋아하겠군.”


홍풍반점을 빠져나가, 양운양이 제철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홍풍반점에서 왼 길로 난 골목을 지나 걸으면 금방 나오는 장포제철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쥐새끼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그곳에, 양운양이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상대는 자객 열을 상대로 아홉을 죽이고 살아남은 검객이다.


도저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사방에서 온 전갈(傳喝)이다. 소일도란 검객은 안에 있는가?”


제철소 안쪽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방주께서는 대화를 원하신다. 얌전히 따라오면 해는 가하지 않을 것이야.”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했지만, 양운양은 여전히 쥐새끼처럼 조심스럽게 제철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쇠를 두드리는 곳이 나오고, 장인들이 머물렀던 방, 피가 흩뿌려진 바닥을 차례로 지났다.


“......안에 없는가?”


양운양이 사방을 경계하며 마지막 내실을 살피려고 걸음을 옮긴 순간.


스륵.


건드렸다고 눈치도 못 챌 정도로 느슨하게 이어진 실이 양운양의 다리에 걸려 움직였다.


약방에서 얻어 온 실이었다.


물론, 실은 소일도의 손가락 끝과 연결되어 있었다.


소일도가 번쩍 눈을 떴다.


“혈향이 짙군.”


검지와 중지.


쏜살같이 쏘아진 소일도의 지법이 반응할 틈도 없이 양운양의 마비혈을 짚었다.


‘방심......!’


무림에서 한 순간의 방심은 대가가 컸다.


통나무처럼 굳어버린 양운양이 겨우 눈동자만 굴려서 소일도를 보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 하던 소일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참선에 잠긴 고승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살려주는 건가?’


묻고 싶었지만 공력을 실은 지법에 혈자리가 강하게 제압 당한 터라 양운양은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한편 소일도 또한 더 이상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검을 휘둘러 단칼에 베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기에 급한대로 점혈을 한 거였다.


‘하루 정도 가겠군.’


양운양에게 걸어 놓은 점혈이 유지되는 시간은 하루 쯤일 듯 싶었다.


소일도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까지도 하루였다.


소일도는 눈을 감고 회복에 심열을 기울인 채로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양운양은 달랐다.


‘저 놈은 대체 뭘 하는 거냐!’


점혈을 걸어놓고 냅다 명상에 잠긴 소일도의 모습은 영문을 알 턱이 없는 양운양의 눈에 미친놈처럼 보였다.


같은 하루였지만, 둘 중 어느 쪽의 피가 더 바짝바짝 마르는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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