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암현의 세계입니다.

분홍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암현
작품등록일 :
2017.06.16 22:52
최근연재일 :
2019.04.02 12:16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11,475
추천수 :
31
글자수 :
220,138

작성
17.07.02 08:01
조회
157
추천
2
글자
7쪽

9

DUMMY

열 하고도 일곱여덞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마차리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손이 얼얼해질 정도의 서류작업과 심사, 신분증명 등등. 익숙하지 않은 일에 몇 번이나 기절할 뻔 했고 몇 번이나 포기할 뻔 했다. 칼만 휘두르다가 죽을 팔자라고 여기고 있던 차에 재앙이 아닐 수 없는 일들이었다. 다행이라 한다면 팔라둔 필리오림이 신분증명에 앞장서줬다는 것 정도일까. 덕분에 해야 할 일이 절반 정도는 줄어 하루 만에 원하는 것을 얻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품에는 크게 휜 곡도가 한 자루. 목엔 무기를 소지해도 된다는 증명이 새겨진 펜던트가 하나 걸려 있었다.


법을 지키는 것이야 좋지만 지나치게 깐깐하다. 성벽 밖을 나서면 생각만 해도 질리는 시난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선 아귀 같은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거늘 성벽 하나만 사이에 두고 무기소지를 전면 금지하고 있으니 아이러니 할 수밖엔 없는 노릇이다.

성벽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놈들이 만든 법이 다 그렇지. 라고 생각해도 시난과 대면해온 용병이자 검사로썬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아아아아!!! 젠장!”


분수 위에 동상이 놓인 공원의자에 앉아 서류의 산을 헤집고 가져온 칼을 칼집에서 살짝 꺼내 칼날의 상태를 확인했다. 맑고 투명하다. ‘피의 강’이라 불리는 이름과는 다르게 아름다울 정도로 빛난다. 조금 남은 햇볕에 의지해 춤이라도 추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공공장소에서 무의미하게 무기를 꺼내 휘두르지 말 것. 그런 조항도 있었던 것 같으니 마차리는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꾹 참기로 하고 잠시 피로한 눈을 붙였다.


마차리라는 한 사람이 이때까지 살면서 읽은 문자의 양만큼의 문자를 서술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문자를 눈에 새겼다. 피곤할 수밖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침침한 눈을 잠시 떠 분수 위의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등에 자신의 몸집만한 대검을 맨 여성의 동상. 일곱 영웅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이사벨라 티린의 동상이라고 불렀다. 다른 영웅을 존경하는 마차리에겐 결코 좋은 인상을 주는 영웅은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을 지키고 전사한 영웅이니 잠시 잠든다고 해도 소매치기 정도는 막아 주리라.

그렇게 잠시 잠들었다.


더운 날이라곤 하지만 달이 뜨고 밤이 깊어지면 모든 게 차가워진다.

모기도 많았고.

귓가에 울리는 모깃소리에 잠이 깬 것은 어느덧 한밤중의 일이었다.

귀로 파고들어 머릿속을 괴롭히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칼을 뽑은 것도 그때였다.


모기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달빛을 이정표삼아 그 날갯짓을 추적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휘둘렀다.


“으······”


하지만 모깃소리가 다시 귓가로 울려 퍼지는 것으로 성과가 없음이 나타났다. 왱왱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해가 떨어진 공원엔 아무도 없어 칼춤을 한바탕 춘다고 해도 신고할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한잔하고 싶네.”


종일 서류 작업만 하느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었고 짜증은 날대로 난 상태. 거기다 허무한 칼춤까지 한판 췄으니 뱃속을 채워야할 차례였다.


이사벨라 동상의 영향일까. 이리저리 기웃거려봤지만 있는 것이라곤 대장간을 중심으로 한 쇠를 다루는 곳뿐이었다.


“이래서 이사벨라란······”


다른 동상 근처로 넘어가볼까 생각하던 차에 옅은 불빛과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마차리의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밤까지 하는 곳이야 뻔한 일. 설마 하나 술 마시는 것도 허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불빛과 소리를 쫓아 발걸음을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여관과 주점과 식당이 합쳐진 듯한 가게가 하나 있었다.

‘흰 산양의 뿔 나팔’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은 그에게 있어서 등대와도 같은 장소일 터였다.

뿔 나팔 안은 시끌벅적했고 얼큰하게 취한 빨간 머리들이 큰 웃음을 내지르며 언제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금방 나간 듯 먹은 흔적이 치워지지 않은 빈자리에 앉아 나이를 꽤 먹은 점원을 불러 세웠다.


“뭐든 좋으니까 배 채울만한 거랑 얼큰하게 취할 수 있는 걸로 줘요.”

“아직 성인이 아니면 술은 안 되는데. 그건 그렇고 무기······아, 증명이 있네.”


서류의 산과 싸워 이긴 증표가 마차리의 목에 걸려 있었다.


“나 샤엘라에요. 괜찮으니까 독한 걸로 하나 줘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인 점원의 눈앞에서 장갑을 벗어 손을 보여줬다.

거친 일을 하는 노동자나 쇠와 불로 단련된 대장장이도 가지지 못할 굵고 단단한 손이 점원의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를 샤엘라라고 밝힐 정도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손가락이 네 개뿐이라는 것, 샤엘라와 보통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알아채기 쉬운 차이점이었다.


“곧 치워 줄 테니까 기다려. 술 마시고 칼부림 하지 말고.”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마요. 고향에선 술 마시고 칼춤 추는 녀석을 제일 못 써먹을 녀석으로 판단하니까요.”

“말은 잘하네. 알았으니까 기다려.”


점원은 먼저 받은 주문을 처리한 다음 주방에 마차리의 주문을 밀어 넣었다.

북적대는 모양새가 꽤 활기찬 것이 좋은 음식점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점원이 테이블을 치우고 얼마쯤 지나니 얇게 썬 삶은 고기에 채소와 소스를 곁들인 것이 나왔고 조금 더 기다리자 진득해 보이는 과실주가 한 잔 어울려 나왔다.


마차리의 기준엔 영 부합하지 않은 것인지 포크로 고기를 찍어 냄새를 한 번 맡아보더니 고기 끝을 살짝 떼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소스를 더하니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잡냄새를 잡는 것은 실패한 요리였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까. 마차리는 약간 후회하면서도 진흙이 안 섞인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입 안 가득 우겨 넣고 질겅질겅 씹고 삼켰다.


“음······”


배는 차는 요리였으니 어느 정도 만족했지만 술은 상태가 안 좋았다. 과일찌꺼기가 그대로 씹히는데다가 맛이고 뭐고 그냥 시큼털털한 것이 혀가 아릴 정도였다. 마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걸 한 잔 전부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건 다음날 화장실에서 고생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일 것 같은 예감이었기에 마차리는 이 이름도 모를 술을 반만 마시기로 결정했다.


“요즘 우파나히 씨 요리에 익숙해진 건가······흠······”


배가 어느 정도 차니 고기 요리도 못 먹을 것이 되었다. 반만 마시겠다던 술도 두어 모금 마시곤 마시지 않았다. 용병생활을 할 땐 이것도 고급요리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몇 달 정도 호화로운 요리로 입을 호강시켰더니 입맛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더 이상 용병 생활은 못하겠네. 라며 한탄하며 남은 고기요리를 뱃속으로 밀어 넣는 그였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분홍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9 17.07.02 158 2 7쪽
8 8 17.07.01 138 1 7쪽
7 7 17.06.30 142 1 6쪽
6 6 17.06.29 158 1 6쪽
5 5 +2 17.06.20 198 2 8쪽
4 4 +2 17.06.19 194 2 7쪽
3 3 17.06.18 776 1 7쪽
2 2 +2 17.06.17 387 3 7쪽
1 1 +2 17.06.16 851 3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