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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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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현
작품등록일 :
2017.06.16 22:52
최근연재일 :
2019.04.02 12:16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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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9
추천수 :
31
글자수 :
220,138

작성
17.06.2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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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추천
2
글자
8쪽

5

DUMMY

“무시하시는 건가요?”

“벌금 낸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종이로 된 돈 뭉치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벌금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액수였기에 직원은 경찰을 불러 법령을 확인한 다음 필요한 만큼만 그에게 쥐어주었다. 남자가 남은 돈을 경찰에게 주려 했지만 벌금 고지서와 영수증이 더해져 돌아올 뿐이었다.


“제가 느끼기엔 법을 대놓고 무시하시는 것 같군요. 용병 생활을 오래 하셔서 아직 감이 안 잡히시는 것 같은데 여긴 법치국가입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상 법에 따라주시죠. 우파나히 씨.”

“벌금 냈다.”


직원이 우파나히라고 부르는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벌금을 수령했던 경찰이 궐련을 낚아채갔다. 경찰에겐 그럴 권리가 있는 모양이었고 우파나히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곤 하지만 한순간동안 자기 손에서 궐련을 낚아챌 정도로 잘 훈련된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직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물론 벌금을 부과하는 정도인 가벼운 법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편의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여서 사는 세상이니 힘드시더라도 참아주십시오.”


그가 사는 세계가 달라진 것을 실감하는 찰나였다.

많은 나라를 떠돌아 다녔지만 이렇게까지 법에 순응하고 지키는 나라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나라가 적당히 부패된 관료체계를 가지고 있어 돈을 주면 알아서 편의를 봐준다.

근데 여긴 달랐다. 법이 엄격하고 법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생각도 곧다. 거기다 필리오림이라는 제도가 있으니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고 안전하게 생활 할 수 있다. 물론 악용했을 때의 부담도 크기 때문에 악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평화롭다라는 것은 이런 기분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차에 팔라둔이라는 자에게 갔었던 직원이 돌아와 우파나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자리에 안 계셔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물건은 맡겨두었으니 곧 대답이 올 거라 생각합니다.”

“알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전소에 앉아 기다릴 필요는 느끼지 못한 것인지 테이블 위에 두었던 보석을 다시 자루에 담았다. 각각 경도가 다른 것들을 마구잡이로 던져 넣는 꼴을 보지 못했던 직원이 보관함을 대여해주겠다고 했지만 필요 없다며 일축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전소 밖으로 나오자마자 궐련을 다시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는 것이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나라지만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선 익숙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이는 모양새였다.


피로 피를 씻는 전투는 더 이상 없다. 하늘을 뒤덮는 화살의 비도, 멈출 줄 모르는 창칼의 파도도 없다.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들도 없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울부짖는 이들도 없다.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인 표정도 없이 그저 웃고, 떠들고, 즐긴다.

맛없는 음식도 없고 불편한 잠자리도 없는 것은 좋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선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우파나히는 멍하니 거리를 구경하며 궐련 한 대를 다 태우고 나서야 겨우 움직였다. 배가 고프다고 했으니 포장이 되는 음식이라도 조금 사가지고 가야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지만 다 식어빠진 음식을 가지고 갔다간 불벼락이 날아올게 분명했다.

몇 가지 계획 중 어느 것이 나을까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골목 입구에서 궐련한대를 더 태운 뒤 장작으로 쓸 나무를 한 묶음과 고기 한 덩어리. 감자 한 자루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 밖에 없어요?”


라고 질책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별 말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화덕에 감자를 넣은 뒤 장작을 조금 쌓은 다음 지푸라기와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천천히 공기를 불어넣어 불을 키웠다.

고기는 칼집을 낸 뒤 짐 꾸러미에서 꺼낸 향신료를 조금 뿌린 다음 꼬챙이에 꿰어 불에 직접 닿지 않게 화덕에 걸어 천천히 구웠다.


“안 타게 잘 구워요.”


한 번도 탄 고기를 먹인 적은 없었지만 항상 듣는 이야기였기에 우파나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맛있게 굽는 데는 별다른 요령이 없었다. 계속 관찰하면 되는 일이었다. 고기의 두께와 불의 세기, 불과의 거리 같은 것을 계속 지켜보면 된다. 눈을 떼지 않고 고기가 굽히는 정도를 확인하며 정성을 들인다. 그렇게 한참동안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며 구운 뒤 적당히 구워졌다 싶을 쯤 화덕에서 꺼냈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거 꼬챙이 채로 먹는 거예요?”

“아니.”


접시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짐 꾸러미 안에 야영할 때 쓰던 것이 있긴 했지만 식기라고 이름 붙이기도 미안한 깡통에 가까운 냄비 두 개 뿐이었다.

여자가 아쉬운 데로 그 깡통들을 꺼내 내밀었고 우파나히는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잘라 깡통 하나에 담은 뒤 뚜껑을 덮어 열을 보존했다.

부지깽이로 화덕을 뒤적여 안에 넣어두었던 감자를 꺼냈다. 겉 부분이 조금 타기는 했지만 고기가 아니니 상관없었다.

감자 하나를 잘라 다 익었는지 확인한 다음 감자를 물에 넣어 차갑게 식혔다. 다 식은 것은 탄부분과 껍질을 떼고 다른 깡통에 담았다. 이대로 먹어도 꽤 맛있을 것 같아보였지만 우파나히는 짐 꾸러미에서 조금 남아 있던 버터와 치즈, 소금, 설탕을 꺼내 섞으면서 으깼다. 몇 가지 조미료가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지만 아쉬운 데로 만들었다.


그렇게 고기에 향신료를 더해 구운 것과 여러 재료를 더한 으깬 감자가 완성되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점심이 그녀들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 모두 만족했다.

도축한지 얼마 안 된 고기는 신선했고 그 지방에서는 구하기 힘든 향신료를 더해 느긋하게 구움으로써 촉촉함과 부드러움이 살아 있는 상태였다. 으깬 감자도 조미료의 비율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묘하게 맛있었다.


여자는 과일이나 빵 같은 것이 더 있었으면 하는 표정이었지만 우파나히는 그렇게 섬세하지 않았다.


넉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잔뜩 굶주리고 있던 두 사람이 먹기 시작하니 양이 부족해보였다. 물론 새로 만들어도 될 일이었지만 귀찮았던 것인지 두 사람이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우파나히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여자가 버린 맛없는 건조식량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보존성이 좋은 곡물을 가루 낸 뒤 소금과 동물지방을 섞어 물기 없이 구운 것이라 짜고 느끼할 뿐이라 정말로 맛이 없었지만 아무 말 없이 잘 먹었다.


“침대랑 모포 같은 건 안 사왔어요?”


일찍 식사를 마치고 남은 것을 샤크티 앞에 밀어준 여자가 여전히 아무 것도 없는 집을 둘러보는 척 하며 싫은 소리를 했다. 우파나히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환전이 안됐다.”

“감정서랑 출처에 대한 서류는 다 가지고 있잖아요.”

“법이 다르다.”

“뭐······나도 여기 법은 잘 모르니까요. 불법적으로라도 환전할 방법은 없나요? 하른달에서 한 번 해봤잖아요.”

“여긴 안 된다.”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남자의 답변에 그녀는 “법치주의 만세네요~와~” 라며 힘없이 환호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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