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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건의 막소설

무협 단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최지건
작품등록일 :
2013.03.31 19:26
최근연재일 :
2014.11.12 15:53
연재수 :
8 회
조회수 :
10,159
추천수 :
105
글자수 :
161,631

작성
13.08.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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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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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20쪽

오크 스무 마리 째

DUMMY

그가 우리 마을에 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오크 사냥을 나간 마을 어른들이었다.

오크의 시체와 함께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끌려온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지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검은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기묘한 복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와 동갑인 헬름은 그를 악마와 화신이라고 불렀고 나보다 두 살 어린 요란은 오래된 신의 혈족 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다른 감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유별난 인간일 뿐이었지만 여하튼 그는 생김새만큼이나 특이한 인간이었다.

또한 재수가 없기도 했다.

그가 잡혀온 게 봄이 아니라 최소한 겨울이었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그를 악마와 화신이니 신의 혈족이니 부르는데도 내가 그를 인간이라 생각 하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 중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게 나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마을 어른들과 사냥을 나간 사람 중에는 우리 아버지가 끼어 있었고 아버지는 마을의 촌장이었다.

필연적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를 집에 들이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던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아버지가 대표자로서 그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 집 헛간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 집에 온 첫 날 그는 하는 것 없이 그냥 불안에 떨었다.

마치 처음 우리 집에 왔던 송아지 같았다.

아버지가 그에게 음식을 주기 위해 헛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기묘한 언어로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당연히 기겁을 했고 손에 들려있던 호신용 몽둥이로 그를 내리쳤다.

우리 집에서의 첫 날을 그는 그렇게 기절한 채 보냈다.

그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가 깨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헛간으로 찾아 갔을 때 그는 머리를 싸맨 붕대를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내 생각이지만 그 붕대 덕분에 그가 지금처럼 얌전해 진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그냥 또 몽둥이에 머리가 깨지기 싫어서였을지도 모르고...

여하튼 그는 정신을 차렸고 아버지가 건네주는 오크 고기죽도 잘 받아먹었다.

그렇게 그가 오고 사흘 쯤 지났을 무렵 나는 억눌러두었던 호기심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아버지의 명령과 어머니의 걱정 때문에 참았던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얼마 전 마을에서 가장 예쁘다는 호레의 벗은 몸을 봤을 적과 같은 흥분으로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아니었다.

아버지가 또다시 오크 사냥을 나가고 어머니가 나물을 캐러나간 사이 나는 몰래 헛간으로 찾아갔다.

문을 열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낡은 경첩에서 마녀의 웃음소리 같은 기음이 새어나왔다.

그 소리 때문인지 내가 헛간으로 조심스레 들어섰을 때,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며 헛간의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잔뜩 경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내 모습을 확인하자 묘하게 긴장을 놓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내가 아이였기 때문에 만만하게 본 것 같았다.

처음 개를 길들일 때의 심정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 나는 잘 구운 오크 고기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손을 뻗어 고기를 받아들었다.

생각대로 순한 성격이었다.

그가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하자 나는 가만히 그를 관찰했다.

옷차림이나 장신구들이 내 흥미를 끌었다.

그가 입고 있고 차고 있는 것들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계속해서 문자가 바뀌는 팔찌하며 무슨 천으로 만들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옷, 괴상망측한 신발까지 그는 존재 자체가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기는 한 걸까?

어쩌면 헬름의 말대로 인간을 현혹하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온 악마 일지도 모른다.

나는 침을 꼴딱 삼키며 여러 가지 상상을 떠올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고기 한 점 묻어있지 않은 뼈다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또다시 기묘한 언어를 내뱉었다.

첫날처럼 마구 소리치는 게 아닌 침착한 어조였다.

“아..임.. 코리언. 나이스 투 미츄?”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내 반응을 표정으로 알아챘는지 그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나 한국인이라고... 아놔.. 못 알아듣나.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그는 시종일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손짓발짓을 해댔다.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던 그의 표정은 이내 짜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까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를 보며 나는 키우던 개를 떠올렸다. 좀 잘해주면 기어올라 사람 곤란하게 만들었던 개였다.

엉겨 붙는 개에게 내가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에게 말했다.

‘개가 기어오를 때는 말이다. 이렇게 해야 한단다.’

그 날 있었던 아버지의 손놀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슬그머니 옆에 놓아둔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는 첫 날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흠칫하며 떨더니 이내 웃는 낯으로 날 보며 무슨 말을 내뱉었다.

“진정해. 진정. 내가 좀 싸가지가 없었지? 말로 하자.”

여전히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의미는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사람 같이 생겨서 개보다 다루기는 편했다.

나는 몽둥이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내 행동에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애 눈치까지 봐야 하나. 어쩌다 네 신세가 이리 됐냐? 영철아.”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묘하게 우울한 표정을 짓는 그를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며 내 눈을 피해 눈동자를 산만하게 움직이다 꿈지럭거리던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를 헤집던 그는 이내 어설픈 웃음과 함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좋은 거 보여 줄 테니까. 잘 좀 지내자.”

묘하게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래도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며 참았다.

그는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갑작스런 행동이었기에 나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런 내 반응이 우스웠는지 그는 실실 쪼개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을 따라 흔들리는 물건은 네모난 상자였다. 본 적 없는 광택에 두께도 매우 얇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피니 얼굴이 비치기도 했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 물건을 내가 흥미롭게 바라보자 그는 흥이 낫는지 이제는 싱글싱글 웃음 지으며 또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건 말이야. 스마트폰이라는 거야. 물론 너희들 같은 미개한 종족은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걸 키면 아주 식겁을 하겠네.”

그는 그 네모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새삼 헬름의 이야기가 떠올라 나는 슬쩍 몽둥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는 피식 웃으며 내 면전에 그 상자를 내밀었다.

검은색 표면에 얼굴이 비춰보였다.

이게 뭐지 흑요석으로 만든 장식물인가 하고 생각 할 때 갑자기 번쩍 하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상자 안에서 여자들이 춤을 추며 기괴한 주문을 외고 있었다.

인간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더불어 그 기괴한 물건에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버렸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몽둥이를 집어 들어 그 물건을 냅다 치고 남자를 죽도록 패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헬름의 추측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다 어찌어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남자는 기절한 상태였다.

그가 내게 내밀었던 상자는 바닥에 떨어져서도 계속해서 기괴한 주문을 춤과 함께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불길한 물건을 몽둥이로 내리쳐서 부셔버렸다.

서너 번 때리고 나니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문이 멈췄다.

나는 불길하게 빛나는 검은색 상자와 기절한 남자를 번갈아 쳐다본 후 곧장 헛간을 나왔다.

햇빛 아래 섰을 때도 그 기괴한 주문은 찝찝함이 되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나는 머리를 털어내고 손에 들려있던 몽둥이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얼른 우물을 향해 달려갔다.

긴장감에 바싹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다.

그를 기절 시키고 이틀 동안 나는 헛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날 기절한 그를 봤을 텐데도 별말 없이 넘어갔다.

아마 자고 있다고 생각 했거나 아니면 그가 얻어맞은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신경 쓰지 않았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우리 마을에 온 지 닷새가 지났을 무렵 마을은 분주해졌다.

나흘 후에 있을 ‘스무 마리 째 오크’ 때문이었다.

오크를 스무 마리 째 사냥 했을 때, 마을에서는 오크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공양을 준비했다.

겨울의 막바지 봄의 초입에 이른 보릿고개가 되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연례 행사였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마을은 우울한 분위기에 빠지고는 했다.

하지만 올해는 왠지 분위기가 달랐다.

다르다고 해서 특별히 분위기가 밝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느 때처럼 우울한 분위기에 잠겨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다?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는 마치 어머니가 시킨 청소를 해야 하는 내 기분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 귀찮은 일을 끝내고 친구들과 놀기 위해 뒷문을 나섰다.

그때 헛간 앞에 모여 있는 어른들이 보였다.

아버지는 그 중심에 서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다른 어른들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조금 관심이 끌리기는 했지만 약속에 늦은 나는 이내 헛간을 빠르게 지나쳐 마을 공터로 향했다.

신나게 놀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을 때는 아버지도 마을 어른들도 보이지 않았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헛간을 보며 나는 그가 괜찮을지 생각했다.

이틀 전을 생각하자 좀 너무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마 그때의 기괴한 주문이 떠올라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가능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는 헛간의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해가 저물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들이치는 달빛에 그의 형상이 보였다.

무릎을 감싸 안고 있는 듯 했다. 꽤나 음울해 보였다.

그 모습에 약간 동정심이 생겼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상 뭘 어쩌겠는가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나는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나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우거나 땅고르기를 도왔다. 칭얼대는 여동생을 대신해 어머니의 일을 돕기도 했다.

짬짬이 논 건 덤이다.

삼 일이 지났고 그가 온지 구 일째가 되었다.

가끔씩 그를 살펴보기도 했다. 우울해 보이던 인상은 꽤나 밝아졌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질문도 하는 듯 했다.

질문을 한다 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몸으로 이것저것 흉내를 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게 태반이었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면 아버지가 평소의 근엄한 표정을 무너뜨리고 그의 흉내를 내며 익살스런 농담을 해주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아버지의 경계심도 많이 옅어진 것 같았다.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여러 어른들을 따라 걸으며 나는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오늘은 ‘스무 마리 째 오크’를 대비해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는 날이었다.

보통 이 날이 오면 어른들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곤 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장소를 물색하면서도 아버지나 어른들은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꽤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사냥감을 찾기도 했다.

다 헛간에 머물고 있는 그의 덕이었다.

반나절 동안 살핀 끝에 어른들은 좋은 장소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곳에 어른들은 짊어지고 왔던 나무기둥을 박아 놓고 산을 내려갔다.

어른들을 따라 숲을 벗어나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나무기둥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서 일까.

기둥은 나무 같지 않은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노을빛을 따라 붉게 빛나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묶이기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 말에 나는 몸서리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반응에 콧소리를 내며 웃어보이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손짓에 얼른 아버지 뒤로 따라붙었다.

열흘째 아침이 되어 나는 우물물을 퍼서 세수를 한 후 헛간을 쳐다봤다.

그가 이 마을에 오고 열흘간 있었던 일이 스쳐갔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날들이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들려 줄 좋은 이야기 거리였다.

아니면 여자를 꼬실 때 좋은 이야기 거리 될지도 모르지. 여튼 좋은 경험이었다는 말이다.

세수를 하고 사냥 도구 손질을 했다. 그 후 아침을 먹고 나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 어느새 정오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외에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는 어른들이 모여 헛간 앞에 모였다.

아버지의 손에는 밧줄이 들려 있었다.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 본 후 아버지는 다른 이들에게 고개 짓을 하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헛간 문이 열리고 산만한 덩치의 어른들이 헛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헛간 안에서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소리는 얼마 가지 못했다.

잠잠해지자 아버지가 헛간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고 곧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그 뒤를 어른들과 밧줄에 묶인 그가 뒤따랐다.

입에는 재갈을 물려놔 꽤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애써 그를 외면하며 어른들의 뒤를 따랐다.

어른들은 그대로 그를 끌고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손에 들린 대야에 손을 담갔다가 그를 향해 뿌렸다.

붉은 핏물이 비산했다.

남자는 얼굴에 부딪히는 핏물에 기겁하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어른들의 억센 손길에 눌리고 밧줄에 묶인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광장을 가로질렀다.

마을을 벗어났을 때 쯤에는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아버지는 선두에 서서 어른들을 이끌었다.

가고 있는 방향은 어제 물색해둔 장소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내 또래의 아이들 역시 각자의 부모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들떠 있었다.

이제 막 새순이 돋기 시작한 나뭇가지를 밀어내며 나는 흘낏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불안에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고 옷도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눈을 치뜨며 나를 쳐다봤다.

동정에 호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얼른 눈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죄책감이 들어서가 아니라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아버지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버지는 미소를 띄며 시선을 돌렸다.

멀리 어제 물색해둔 장소가 보였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은 좁은 공터에 나무기둥 하나가 떡 하니 꽂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멀리서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크의 울부짖음이었다.

피냄새를 맡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스무 마리 째 오크’를 잡았기 때문에 분노에 눈이 멀어 있어서 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와 어른들은 그 울부짖음에 걸음을 서둘렀다.

순식간에 공터에 도달하자 아버지는 바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지시에 따라 어른들이 피범벅이된 그를 나무 기둥에 매달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꽉 묶는 손길이 야무졌다.

나와 다른 아이들도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간단한 일을 도왔다.

주변에 피를 뿌리고 나뭇가지를 꺾어 나무기둥 주변에 장식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덕에 준비는 쉽게 끝났다.

아버지는 주변을 빙 둘러보고는 만족했는지 고개를 주억이고는 나무 기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품안에서 기도문이 적힌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스무 마리 째 오크의 분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 다음 스무 마리 째 오크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저희를 지켜주시옵고...”

아버지가 읽고 있는 것은 오랜 옛날 스무 마리 째 오크를 잡고 그 분노에 마을 초토화 되었을 때 나타난 현자가 준 선물이었다.

그가 가르쳐준 지혜는 몇 대를 거치며 전해져 왔는데 그 중 하나가 ‘스무 마리 째 오크’에 관한 것이었다.

오크의 기억력은 가히 파멸적이라 할 만 해서 동족을 열아홉 마리까지 사냥해도 그냥 긴가민가할 뿐 동족이 사라졌는지 눈치 채지 못한다고 한다.

대신 동족이 사냥 당한 것에 대한 분노만이 남아 축적되는데 그게 스무 마리 째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온다고 한다.

그때의 폭주는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지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자가 오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기에 무분별하게 오크를 사냥 했고 그 분노를 사는 악순환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어 준 것이 현자였다.

그는 스무 마리 째 오크를 잡고도 오크의 분노를 사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그건...

“스무 마리 째 오크의 분노가 바쳐진 제물로 위로되기를 바랍니다.”

오크를 사냥한 인간에게 마음껏 분노를 풀게 하는 것이었다.

현자는 인간에게 생존을 위해 오크 사냥이 필요하듯 오크에게는 분노를 풀기 위한 사냥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나무기둥에 묶인 그를 바라봤다.

그의 검은 머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끊임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피에 물든 그의 몸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오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도문 소리가 그에 맞춰 멈춰졌다.

아버지는 책을 접어 품 안에 넣고 고개를 두 번 꾸벅이고 손으로 가슴을 한 번 쳤다.

기도를 끝냈다는 의미였다.

“이만 가지.”

아버지의 지시에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어른들을 따라 공터를 뒤로 했다.

공터 가운데에 그만이 홀로 남았다.

나는 그를 보며 속삭이듯 인사를 전했다.

“다음 생에는 말이 좀 통하는 곳으로 가기를...”

오크의 울음소리는 이제 지척에서 들려왔다.

나는 멀어져 가는 어른들의 뒤를 따라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올해는 마을 사람의 희생 없이 끝났다.

잘 된 일이다. 잘 된 일이야.

이 정도면 행복한 결말이지.


작가의말

 타이틀은 무협 단편인데

 이건 판타지 입니다.

 왜인가 하면...

 한 달 동안 판타지를 준비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에게는 면목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될까 싶지만 다른 글들은 연중은 될지언정 연재를 끝낸 건 아니니.

 결말을 못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안 가지셔도 됩니다.

 새로 준비한 판타지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최소한 파이어볼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오리지널 세계관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흔히 나오는 소재들은 배재를

 했거든요.

 얼마나 새로울지는 모르겠지만 제 딴에는 나름 괜찮은 세계관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염치없지만 새로 시작 할 글에 많은 기대를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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