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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건의 막소설

무협 단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최지건
작품등록일 :
2013.03.31 19:26
최근연재일 :
2014.11.12 15:53
연재수 :
8 회
조회수 :
10,155
추천수 :
105
글자수 :
161,631

작성
14.08.04 14:45
조회
664
추천
13
글자
271쪽

살귀록 1권

DUMMY

정당하게 사는 자에게는 어느 곳이든 안전하다.





























서장



“선물을 뭘로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개미를 털어내며 녀석에게 물었다.

꽤나 배운 녀석이라 들었고 여자를 홀리는데 한가닥 재주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무슨 선물 마..말입니까?”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해주었다.

“내일이 어머니 생신이시거든. 선물을 사야 하는데 뭐가 좋겠냐는 말이지.”

녀석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녀석의 대답을 기다리며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기둥이 받치고 있던 지붕에서 흙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이곳도 이제 슬슬 수리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가 무너질 듯싶었다.

나는 어깨에 떨어진 흙을 털어내고 녀석을 바라봤다.

움찔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지만 좀 있으면 흠집 날 얼굴에 애정을 담아서 뭐하겠나.

“오..올해 세수가 어찌 되십니까?”

“엉?”

“그 어머님의 연세 말입니다.”

“아 올해로 환갑이시지. 내일 환갑잔치를 열기로 했어.”

“아...축하드립니다.”

“뭘 새삼스럽게.”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녀석도 따라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선물로 따뜻한 솜저고리가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솜저고리?”

이제는 더듬거리지 않고 말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어머니가 환갑잔치에서 솜저고리를 입고 미소 짓는 모습을 떠올렸다.

꽤 괜찮아 보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감사합니다.”

제법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는 녀석을 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어디 괜찮은 포목점 아냐? 내가 그런쪽으로는 영 아니거든.”

“아, 그거라면 제가 전문입지요. 이곳 북경에서라면 전문대가 제一골목의 양씨포목점이 최고입니다.”

“오~ 그래?”

“예 그럽지요. 장안의 어지간한 명가의 아낙이라면 모두 양씨포목점의 옷을 입는다 들었습니다.”

“이야, 그 정도란 말이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녀석을 보며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선물은 그쪽에서 사는걸로 해야겠다.

일단 고민이 해소되고 나니 이제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 양씨포목점은 신시정(16~17시)까지 문을 여냐?”

“아닙니다. 워낙 인기라 보통 신시초(15~16시)에 문을 닫는다 들었습니다.

“그래?”

내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아까전 미시초(13~14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반각전에 들렸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넉넉잡고 한시진 안에 일을 끝냈었는데 오늘은 더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나는 거미줄을 타고 어깨에 내려앉은 거미를 털어내고 녀석의 앞에 섰다.

내 얼굴의 다급함을 읽었는지 녀석의 얼굴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때와 같이 굳어갔다.

나는 목을 좌우로 꺾고 허리에서 도구를 꺼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던 녀석은 내가 꺼내든 도구를 보고 사색이 되어 외쳤다.

“대협! 대협! 살려주십시오! 제가 한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년이 혼자 도망 간겁니다!믿어 주십시오!”

지하공간에 녀석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녀석은 더 목청을 높였다.

시끄럽다.

나는 녀석의 허벅지에 꼬챙이를 박아 넣었다.

비명이 귓전을 때렸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고통에 헐떡이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시간이 없다. 보통 느긋하게 괴롭히면서 입을 열게 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초고속으로 입을 열게 해줄테니 고맙게 알아.”

두려움에 떠는 녀석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분명히 금 스무냥의 가치가 있는 여자라고 들었다.

돈의 가치 대로라면 꽤나 미색이 출중한 여자라는 말이겠지.

아마 여자가 갇혀있던 방문을 열고 도망을 치게 만드는 동안 이성이 마비되어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보통 아는게 많다고 생각하는 녀석 일수록 그런데는 약한 법이니까.

아마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게 분명했다.

여자를 탈출시킨 후 어디에서든 만나자고 작당은 했겠지만 그 약속 장소에 여자가 나올 일은 없었다.

이제까지 이런 녀석을 숱하게 고문해온 다년간의 경험에 따르면 그런 경우는 결단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녀석의 허벅지에 꽂은 꼬챙이를 비틀며 녀석의 눈을 들여다봤다.

예전에 양놈들의 학문을 배웠다는 녀석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인간에게는 무의식이라는게 있고 그걸 자극하면 뭐라도 나온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한 그 녀석은 자신이 지껄인 그 말대로 정말로 ‘뭐라도’ 내뱉고 뻗었다.

아마 이 녀석도 뭐라도 지껄이고 뻗을 것이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뭐라도 지껄이면 그걸로 내 일은 끝이니까.

꼬챙이를 뽑았다.

피가 맺힌 꼬챙이를 녀석의 눈에 가져다 대며 나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빨리 불어. 그래야 고통도 짧을 테니까.”



그리 짧지는 않았다.

대략 햇수로 칠년은 되지 않았나 싶다.

처음 청죽원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세상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라는 호승심으로 넘쳐흘렀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도 청죽원에 들어가 일년이 지났을 때 끝장났지만 말이다.

애초에 꽤나 규모가 크다고는 해도 결국 뒷골목 왈자패 였다.

그것도 보통 왈자패 보다 더 더러운 일을 한다는 것 정도로 차별화가 될 뿐이었다.

한마디로 일년이 지난 시점에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직장에 발을 디딘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지내며 짬이 차서 재능을 인정받고 고문조의 조장이 되었을 때는 정말 이제 내 인생 쫑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처음 조직에 들어갈 때 어머니께서 했던 말이 떠오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육갑한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의 이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고문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걸 즐기고 있을때나 아무렇지도 않게 고문할 인간과 대화를 할 때 였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육갑질을 한게 되네.

하지만 이 일 그러니까 육갑질도 어머니의 환갑잔치와 함께 끝난다.

고문조의 조장이 되고 어머니의 그 말이 떠올랐을 때부터 그렇게 정한 일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그러니 삼년 후에 손을 씻게 해달라.

두목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허락을 받았다.

물론 아무 대가 없이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왼손 약지가 잘렸고 허락을 받을 때 삼년 동안 받을 봉급의 칠할과 오른손 약지가 잘렸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래도 그 덕에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게 된 것 아니겠나.

약지 없는 왼손에 어머니의 솜저고리를 들고 말이다.

“거기 신씨 총각 아닌가?”

열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유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이웃집 왕영감이 그 유등 아래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왜 나와 계십니까?”

내 말에 왕영감은 너털 웃으며 말했다.

“자네 어머니 성화에 내가 나선게지. 육십 먹은 노친네가 밖에 나와서 아들을 기다린다는데 쪼그라들기는 했어도 거시기 달린 체면에 어찌 보고만 있겠나.”

어찌 된건지 알만 했다.

나는 왕영감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그 옆에 앉았다.

“얼른 들어가보지 않고 뭐하나. 자네 어머니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계실텐데.”

그 말에 한참 뜸을 들이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끼었는지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영감님.”

“왜?”

“영감님은 제가 뭐하는 놈 같습니까?”

“그게 뭔 소리냐?”

“아니, 뭐 그냥 어떤 놈 같냐는 말입니다.”

왕염감은 무슨 객쩍은 소린가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모습에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헛소리라 생각하십쇼. 그럼 어르신 들어가 쉬십시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을 끝으로 일반인이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감성적이 된 듯싶었다.

오늘따라 잡소리가 많았다.

사람이 평소에 안하던 일을 하면 그게 죽을 날이라고 하던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등 뒤에서 왕영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어미 생각하는걸 보면 좋은 놈이지. 잡소리 그만하고 들어가 쉬게.”

서둘러 사라지는 발소리와 함께 유등의 불빛이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왕영감의 말이 남아 마음을 울렸다.

그래, 이제까지 못해본 만큼 좋은 놈이 되자.

그렇게 떠오른 상념을 되새기며 진창이 된 길 위를 걸었다.

“그래! 이제까지 못해본 만큼 좋은 놈이 되자!”


“지랄하네.”

“응?”


왠지 가벼워진 머리가 공중을 날았다.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없었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밤, 시야는 완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다.


“야, 그런 다짐은 칠년전에 했어야지.”


머리에 육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후우~,한건 끝냈네. 이제 몇 명 남았지.”


둔해지는 감각 속에서 담뱃불에 슬핏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 였다...


1장



또 떨어졌다.

벽보를 보고 이 객잔까지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며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어딘지 모를 객잔에 들어앉아 탁자를 끌어안고 술을 푸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여기 죽엽청 한병... 아니 항아리에 담아와!”

술을 주문하고 마시고 주문하고 마시고 이 짓을 세시진 동안 반복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취하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술이 묽게 느껴졌지만 그건 취한 탓에 미각이 둔해져서 일테지.

어느새 탁자 위에 놓인 항아리에 잔을 담궈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해지는 정신 속에서 고향일이 떠올랐다.

산동 향시에 합격해 전시를 보기 위해 북경에 올라온다.

후자는 같지만 전자는 벌써 십년전 일이었다.

처음 향시에 떡하니 붙었을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부모님께서도 무관에서 천재가 났다고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평소에 구박만 하던 누님도 그때만큼은 손에 용돈을 쥐어주며 기뻐해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년...

집안의 자랑이 왠수가 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처음 전시를 보기 위해 상경 할때만 해도 두둑하게 쥐어주던 여비는 두 번째 세 번째 이후부터는 갈수록 빈약해져 갔다.

이번 시험도 누님이 북경에 볼일이 있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었다.

“하아...”

그러고보니 나는 도대체 무슨 돈으로 이렇게 술을 퍼마시고 있던거지.

나는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몸을 숙여 전낭 안을 살폈다.

구리돈 한냥이 들어 있었다.

몸을 일으켜 탁자 위를 쓸어보니 죽엽청이 병으로 열병이 넘었고 항아리 안에 든 술은 그렇게 퍼마셨는데도 족히 스무병은 됨직한 양이 남아 있었다.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또 한잔 들이켰다.

그 상태로 객잔 안을 빙 둘러봤다.

객잔 안은 한산했다. 그 한산함 속에서 점소이와 객잔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외에도 손님이 몇 있었음에도 그 둘은 나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설마 먹고 튀기라도 할 것 같단 말인가?

나는 차오르는 분기를 달래기 위해 또 한잔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취기는 올라오지 않고 머리는 갈수록 맑아져만 갔다.

맑아지는 머리에 분기가 가라앉으니 왠지 취하지 않는 술이 원망스러워 졌다.

차라리 취하기라도 했다면 신나게 깽판을 부리고 엎어져 버렸을텐데.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못난 동생이라도 누님이 찾으러 왔을 텐데 말이다.

괜히 술에 강한 몸뚱아리까지 원망스러워 졌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자괴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세수라도 해야 겠다.

맑은 정신으로 자리로 돌아와 점소이에게 주씨무관 북경 지점에 연락을 넣어 달라고 해야지.

누님에게 신나게 얻어터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무전취식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명색이 그래도 문인이니까.

나를 따라 움직이는 점소이와 객잔 주인의 시선 속에서 측간으로 갔다.

측간에는 물이 가득담긴 항아리가 있었다. 그리고 문의 맞은편에는 작은 나무창이 뚫려 있었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이 가득 든 항아리로 문을 막아 시간을 벌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평소 누님에게 비루먹은 당나귀 마냥 삐쩍꼴아 있다는 소리를 들어왔기에 좁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불가능이 가능해 보였다.

비로소 취기가 돈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은 불가능 했다.

나는 창문에 끼었고 억지로 열린 문에 항아리가 엎어졌다.

그로인해 측간은 물바다가 되었고 에꿎은 항아리만 작살이 났다.

“야, 이 자식아. 돈이 없으면 처마시지를 말았어야지. 엉? 넌 상도의도 모르냐.”

내 앞에서 훈계를 늘어놓는 점소이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내가 자네보다 연상인 것 같은데... 내 잘못은 아나. 존칭을 써주었으면 하네.”

내 말에 점소이는 얼굴 한가득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내며 내 어깨를 발로 찼다.

아팠다.

“무전무적(無錢無敵)이라더니. 넌 니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냐? 아오! 이걸 그냥!”

나는 점소이 치고는 꽤나 유식한 언어구사를 하는 그를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 하셨소. 돈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이오. 내 돈을...”

또 어깨를 쳤다.

같은 곳을 또 맞아서인지 그 고통이 예사롭지 않았다.

“공자고 나발이고 돈 어쩔거야! 몸이라도 팔래 아니면 달리 변통할 곳이라도 있냐?”

나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이었다.

“막 말하려고 했소. 괜히 폭력을 써 일을 순리에 어긋나게 만들 필요가 어디 있겠소. 어허 알았소. 말하겠소이다.”

다시 한번 올라간 점소이의 발을 보고 나는 서둘러 품에서 종이 한 장과 세필붓 한필을 꺼냈다.

막 종이에 누님께 보낼 서찰을 쓰려는 순간 점소이가 끼어들었다.

“그 붓 비싸보이는데. 그냥 그걸로 값 치르지 그래?”

“뭣! 이런 불학무식한 놈을 봤나. 내가 이리 고초를 당하고 있다고는 하나. 명색이 거인이다! 어찌 붓을 팔고 명줄을 이어나가겠는가! 차라리 죽어라고 말하는게 나에 대한...“

바닥을 굴렀다.

아까와 같은 어깨를 맞아서였다.

너무도 아팠다.

“알았으니까. 그냥 쓰던거나 계속 써.”

왠지 지쳐보이는 점소이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조용히 서찰을 써내려 갔다.

대충 내용은 실의에 빠진 아우가 악한의 꾐에 넘어가 위기에 처했으니 전문대가 제三골목으로 은 세 냥을 들고 찾아와 달라는 것이었다.

크게 틀린 내용은 아니었기에 나는 일말의 죄책감 없이 서찰을 작성해 점소이에게 넘겼다.

점소이는 말없이 서찰을 쓸어보다 똥 씹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말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한숨이 나왔다.

순간 글자를 알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글을 읽고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저 점소이는 글을 모르는게 분명했다.

이제 누님에게 서찰이 도착한다면 최소한 저 점소이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니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왠지 희미해지는 듯 했다.

오른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기다리는데 일다경이나 지났을까 점소이가 들어갔던 문으로 두명이 걸어나왔다.

한명은 객잔주인인 노인이었고 다른 한명은 앞치마를 두르고 오른손에 식칼을 든 남자 였다.

아마 객잔의 숙수이리라.

“이보게 공자.”

노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내렸다.

말을 하는 노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서 였다.

“서찰을 그리 쓰면 어찌하나.”

“그게 무슨 소리외까?”

내 말에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 공자가 세상물정을 모르는 듯하여. 그냥 술값만 받고 넘기려고 했다네. 하는 냥이 진지함이 없고 항시 장난이니. 어디 귀한 집에서 자랐다 싶었기 때문이지.”

노인의 옆에 서있던 숙수가 내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왔다.

“본시 내 객잔은 술을 파는게 주목적이 아니라네. 그래서 왠만하면 주목을 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 예를 들어 찾는 사람이 많을 귀한 집 자식이 실종되는 일 같은 것 말일세.”

또 한발자국 다가오는 숙수와 노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침을 삼켰다.

“분명히 말해서 나는 공자에게 기회를 줬다네. 서찰을 작성하도록 말이지. 공자에게 어설픈 객기만 없었다면 아마 서찰의 내용이 그러하지는 않았겠지. 평범하게 자신의 실책을 고백하고 돈을 달라는 내용이었을거야.”

이제 숙수는 바로 내 코앞에 서있었다.

숙수의 덩치에 가려 노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공자의 누이는 이 객잔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이 우리에게 돈을 던지고 자네를 끌고 사라졌겠지. 서로에게 좋은 결말이 되었을거란 말일세.”

나는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평소보다 배는 빨리 돌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내 지척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숙수 몰래 주위를 곁눈질로 살폈다.

해는 오래전에 져서 객잔에 달린 몇 개의 유등만이 객잔의 뒤뜰을 비추고 있었다.

슬쩍 올려다본 하늘에는 달도 별도 뜨지 않아 유등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은 매우 어두웠다.

“하지만 공자가 서찰에 써놓은 글을 보니. 내가 이 서찰을 찢어버린다 해도 우리나 객잔에 대해 공자의 누이에게 있는 사실 없는 사실 전부를 말해 댈 것 같더군.”

나는 노인의 혜안에 감복했다.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공자를 보내려던 생각을 수정 할 수밖에. 공자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만. 역시 사람은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면 안되는 게야. 그러니 나를 원망 말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나.”

노인은 그렇게 마무리 하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사라지고 적막한 어둠 속에 나와 한 덩치 하는 숙수만이 남았다.

한손에 식칼을 든 숙수와 말이다.



담벼락 뒤에 숨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찬기가 느껴지는 토담에 등을 기대고 있으려니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무척이나 불안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지.

나는 위기의 순간에 웃으며 적을 격파 할만한 담력도 없고 눈앞에 드리워져 있는 칼 앞에서 농담을 내뱉을 수 있을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지도 않다.

그 대신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즉 목에 칼이 들어왔을때는 얌전히 있겠지만 칼이 들어오기 전에는 도망칠 생각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겁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누구 집인지는 모르나 어찌되었든 내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노인의 객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말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도망치는 와중에 다리를 베여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과 담벼락 바로 너머에 식칼을 든 숙수가 요릿감을 찾고 있다는 것 정도 였다.

이렇게 앉아 숙수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은지 대략 일다경 정도가 지났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담 너머의 숙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등불을 비추며 주변을 쓸어보기만 할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왜 나를 찾아 움직이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일다경이 지났다.

지혈하고 있던 천이 피에 젖어 조금씩 핏물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점차 감각이 희미해져 가는 다리 상처에 초조해져 갔다.

그에 동정을 살피고자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눈을 빼곰히 내밀어 담너머를 본 순간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줄 알았다.

한쌍의 눈이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이만 가지. 방금 전 나를 피해 달아난 자네의 기지는 칭찬 할 만하네. 그러니 예정을 바꿔서 고통 없이 죽여주지.”

나는 침을 삼키며 담 아래로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던 등불이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빛에 담벼락을 따라 점점이 이어진 핏자국이 보였다.

아마 담 너머에도 같은 자국이 이보다 더 진하게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자네를 그리 잘아는건 아니지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네.”

숙수의 말에 나는 반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죽을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자네는 순간적인 기지는 꽤 뛰어난데 그에 반해 치밀함이 부족한 것 같더군.”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이제 곧 죽을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군요.”

내 말에 그는 냉막한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을 지으며 팔을 뻗었다.

그리곤 한 팔로 나를 들어 올려 담 밖으로 끌어냈다.

“그래, 걸어갈텐가? 아니면 내 손에 끌려가겠나?”

내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하는 그의 배려에 나는

“끌려가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다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에 올라탄채 나는 한숨을 내쉬웠다.

이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무전취식을 하다 걸려서 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등불이 흔들림에 따라 내 몸도 흔들렸다.

그의 허리끈에 고정된 식칼도 함께 흔들렸다.

식칼에는 미처 닦을 시간도 없었는지 피가 굳은채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그 물건에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안있어 이 물건이 내 목에 쑤셔 박히리라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왔던 길을 되짚어 간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가 갑자기 멈춰섰다.

“무슨 일입니까?”

내 말에 숙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멈춰 섰던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일로 그가 멈춰 섰는지 궁금했지만 물음에 답을 해주지 않으니 알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그가 멈춰 섰던 지점을 막 벗어나려 할 때, 내 왼쪽에 있던 집의 대문이 열리며 등불이 내밀어졌다.

“성요니? 성요야?”

등불과 함께 얼굴을 내민 건 한 노파 였다.

그리고 그 노파의 등장과 함께 대문 앞에 엎어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숙수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었다.

“서...성요야!”

외마디 외침과 함께 노파가 들고 있던 등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등불의 흔들림으로 생긴 그림자가 노파의 격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려 숙수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갈 뿐이었다.

나는 그런 숙수의 반응에 다급히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에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노파의 외침 때문인지 주변 집들에서 하나둘씩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이미 집밖으로 나와 무슨 일인지 살피고 있었다.

이에 나는 서둘러 손을 쓰기로 작정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내 갑작스런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과 등불의 불빛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에 급히 손을 써 숙수의 등허리에 매여 있던 식칼을 뽑아들어 사람들 앞으로 집어 던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것에서 내게로 곧이어 내가 집어 던진 식칼로 모여들었다.

떨어진 식칼이 절묘하게 바닥에 꽂히며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묻어 있는 피는 덤 이었다.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식칼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에게 정확히는 나를 어깨에 들쳐 맨 숙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거리에 나온 아낙들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옆에 서있던 남자들은 서둘러 집에 들어가 연장 하나씩을 챙겨들고 나왔다.

그리고 여자들이 벌어진 입을 활짝 열어젖히며 비명을 내지른 순간 그 신호탄과 함께 남자들이 등불을 뒤로 하고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숙수에게 말이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건 쉽게 상상 가능한 일인지라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게 있다면 그 산만한 덩치의 숙수가 지금은 내 발밑에 깔려 신음을 내뱉고 있다는 것 정도다.

나는 거리 주민들의 도움으로 다리를 치료 받고 노파의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떠오르는 동녘의 햇살이 하늘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처럼 보였다.

마치 하룻밤 동안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던 내 목숨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노파가 껴안고 있는 그것을 바라봤다.

그것은

목 없는 시체 였다.

노파는 시체를 껴안은채 계속해서 같은 이름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물은 이미 메말랐는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충혈 된 눈이 눈물보다 더 짙은 슬픔을 말하고 있었다.

“성요야.. 신성요.. 내 아들..”

노파가 부르는 이름을 들으며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체 덕분에 내 생명줄이 이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 시체가 나자빠져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에 저 노파가 때마침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무기력하게 숙수에게 끌려가 죽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객잔에서 최선을 다해 탈출을 했고 그 후 담벼락에 기대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던 마지막 기회가 무너졌을 때, 나는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어찌 할 방도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단 하나의 시체를 계기로 깨어져 내 목숨을 살렸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노파의 슬픔이 지배하는 풍경 속에서 대놓고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없었지만 입가를 끌어올리는 미소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좋다고 웃는군.”

숙수의 말이었다.

나는 숙수를 내려다 봤다.

숙수의 얼굴에는 여기저기 멍이 나있었다. 그 멍 때문인지 그는 말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꽤나 아파 보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니 좋아할 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숙수는 쓴웃음 지으며 말했다.

“곧 이 제三골목을 전담하는 포두가 찾아오겠지.”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렇다고 당신이 잡혀가는 이야기가 바뀌지는 않을텐데.”

숙수는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그게 바뀔 수가 있다네. 이 전문대가 뒷골목 세계에서는 말이야.”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이들이 노파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어디에나 있을 보통사람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가 다르다고 말하는 뒷골목의 평범한 풍경을 보다 나는 구경꾼들 사이에서 열서너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구경꾼들 사이에 서있던 아이는 내 손짓에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아이에게 쥐어줬다. 그런 후 아이에게 몇 가지 말을 해준 후 떠나보냈다.

아이는 재빠르게 움직여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뭘 한건가?”

숙수의 물음에 나는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객잔에서 적었던 서찰의 내용과 같소. 유비무환이라.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대비 하나쯤은 해두어야지요.”

내 말에 숙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누님이 어느 정도의 여장부 인지는 모르겠으나. 왠만하면 이 골목으로는 부르지 않는게 좋을 걸세.”

그의 말에 분명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르고 걱정 남 걱정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 누님에 한해서는 정말 아무 쓸모도 없는 걱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객잔에서 진즉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내 말에 숙수가 말했다.

“객잔에서야 불러도 상관없었지. 찾아오면서 객잔 이름만 댄다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테니.”

아 그렇습니까.

객잔 이름까지 갈 것 없이 누님 자신의 이름만 대도 안전하게 올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뒷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숙수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긴장이 풀리자 허파에 가득 찼던 숨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니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 했다.

여유가 생기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어설픈 담벼락이 보였다. 지붕 위에 올려진 기왓장은 태반이 깨져 있었다.

아마도 비가 오면 줄줄 새는게 이곳에서는 당연한 상식 일 것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다른 집에서 비오는 날 하룻밤을 자면서 이상해 할 것이다.

왜 지붕에서 비가 안 새지.

그 아이들에게 비가 새지 않는 지붕이란 참새가 봉황이 되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일게 분명했다.

이 거리의 상황을 고향에 돌아가서 친우들에게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게 뻔했다.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설마 대명천지의 수도 북경 그곳에서도 가장 번화하기로 이름 높은 전문대가의 화려한 이면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뒷골목의 객잔에서 무전취식을 하다 죽을 뻔 했다고 하면 더더욱 믿지 않겠지.

그래도 고향에 돌아가 떠들어댈 무용담 하나 얻은게 어딘가 싶다.

새삼 전시에서 떨어진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친우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외치며 얼마나 호언장담을 해댔던가.

분명히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장장 보름 이상은 친우들의 놀림 속에서 지내야 할게 눈에 선했다.

벌써부터 위가 쑤시는 듯 했다.

그렇게 사서 걱정을 하고 있을 무렵 구경꾼들을 제치며 한사람이 사건현장에 등장했다.

비대한 몸매와 출렁이는 볼살, 이마의 정중앙에 박힌 왕점 하나. 그 외모는 고리대금업을 전문으로 하는 전형적인 왕서방 풍채 였지만 그가 입고 있는 의복이 생김새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항변하고 있었다.

흑색 겉옷에 붉은색 손목줄.

포두의 등장이었다.

등장한 포두는 건조한 시선으로 모여든 구경꾼들을 쓱 훑어본 후 시체와 노파 그리고 나와 숙수에게 순서대로 시선을 던졌다.

숙수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까 전 숙수의 말을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저 포두와 숙수는 면식이 있는 듯 했다.

나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슬쩍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만일 일이 잘못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 였다.

누님이 올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목숨을 보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무렵 어느새 숙수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포두는

가차 없이 숙수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숙수는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기절을 해버렸고 포두는 몸을 숙여 기절 여부까지 확인을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황당함에 멍하니 서있을 때

포두는 내 쪽을 돌아봤다.

그리곤 내게로 걸어 와서는 앉아 있던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전문대가 제三골목 백성 여러분. 그 동안 얼마나 공포에 떨어 오셨습니까? 지난 오년간 귀녀(鬼女)라 불리는 살인귀에게 시달리며 밤에는 살얼음판 걷듯 그렇게 불안하게 살아왔지요.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입니다. 오늘!”

내 팔이 억지로 들려졌다.

“또 한명의 희생자가 될뻔 했던 이 청년이! 기지를 발휘하여 오늘에서야! 귀녀의 살인 행각이 그 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에게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포두의 말과 함께 구경꾼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는 포두의 손에 의해 강제로 흔들리는 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귀녀(鬼女)라면 여자 아닌가?

저 덩치 큰 숙수는 아무리 봐도 거시기 달린 남자처럼 보이는데.

아니 애초에 귀녀는 뭐고 지난 오년간의 시달림은 또 뭐야?

나는 정신없이 떠오르는 오만가지 상념에 머리가 복잡해져 감을 느꼈다.

그러다 그 모든 상념을 한번에 정리해 줄 단어가 떠올랐다.

뭐 어때.

어찌되었든 살았으면 된거지.

숙수는 기절했고 포두에게 나는 영웅이다.

적당히 합을 맞춰주기만 하면 집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늘어져 있던 반대쪽 팔까지 들어 올려 구경꾼들의 환호에 응해주었다.

그래, 이러면 된거다.

숙수가 본래 저 시체와 아무 상관도 없는건 아무도 모르니까.

포두도 그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니 그냥 대충 맞춰주고 끝내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구경꾼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였다.

군중 사이에서 나이가 사오십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는 모습이 섬뜩했다.

그 중년의 남자는 한동안 나를 보다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시기적절 했는지 한순간에 구경꾼들 사이의 환호가 잠잠해 지고 그 수많은 이들이 그의 지팡이를 주목 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들었던 지팡이를 내리며 그는 헛기침을 한번 내뱉었다.

그리곤 구경꾼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그때까지도 바닥에 꽂혀있던 식칼 앞에 섰다.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그 자연스러운 요구에 포두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의 작은 행동으로 상황을 지배한 그의 말은 이 뻔뻔한 포두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중년남자는 바닥에 꽂혀 있던 식칼을 들어 올려 날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손으로 피가 굳어 있는 칼끝을 만져보곤 식칼을 원래대로 바닥에 꽂아 놓았다.

곧이어 그는 시체를 옮기려는 포쾌들의 손을 뿌리치고 있던 노파에게로 다가갔다.

노파에게 다가간 그는 시체를 움켜쥐고 있던 노파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노파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노파는 그 한순간의 시선교차만으로 그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중년남자는 머리가 사라진 목의 단면을 살피고 목을 따라 흘러내린 피를 만졌다. 그리고 난자된 칼부림에 넝마가 되어버린 시체의 몸을 살폈다.

그는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시체를 살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팡이에 몸을 기댄 그는 한동안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나와 포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며 떨렸다.

그는 그런 내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선을 돌려 구경꾼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말을 내뱉었다.

“거짓으로 만족하시겠소이까?”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구경꾼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못한채 우물쭈물 하며 조용히 서있었다.

“거짓에 만족하고 오늘 이 자리를 뒤로 하겠다면 이 서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가겠소.”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구경꾼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망설이던 구경꾼들은 이내 하나둘 입을 열어 대답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겠지만 거짓이 있다면 속 시원하게 말해주시오.”

그 말에 동조하며 구경꾼들이 진실을 요구했다.

그와 더불어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중년사내가 뭘 어떻게 해결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 한구석에서 바늘이 돼서 찔러 대고 있었다.

누님 어서 와주십시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일진이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그런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중년사내는 무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중년사내는 그 말과 함께 땅에 꽂혀있는 식칼을 가리켰다.

그의 지팡이를 따라 구경꾼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저 식칼의 날이 어때 보이십니까? 거기 부인 어떻습니까?”

중년사내가 가리킨 부인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요.”

그 말에 중년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평범한 칼이죠.”

“그게 어쨌다는 말이오!”

중년사내의 등장에 주눅이 들어있던 포두가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듯이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포두의 모습에도 중년사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말하자면 평범한 칼에는 평범한 칼의 사람을 베기 위한 칼에는 사람을 베기 위한 칼의 용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중년사내는 바닥에 꽂아두었던 식칼을 뽑아들어 군중을 향해 들어보였다.

그 칼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칼날의 끝에 이르러 폭이 좁아지는 형태 였다.

중년사내는 칼을 아까전의 부인에게 향하며 말했다.

“부인, 부인이라면 아실 겁니다. 이 칼의 용도에 대해서 말이죠.”

부인은 그 말에 주춤거리며 말했다.

“야..야채를 썰거나 생선을 다드드..듬거나 할 때 쓰지요.”

중년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칼을 내렸다.

“말했듯이 칼에는 각각의 용도가 있습니다. 이 칼로는.”

그는 말을 끊고 지팡이로 시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잘린 목의 단면이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뼈까지 베어 낼 수는 없지요.”

중년사내의 말에 구경꾼들 사이에 동조하는 말들이 새어나왔다.

저 칼로는 확실히 살은 베어도 뼈는 베지 못하지 라거나 예전에 돼지를 잡아보려다 오히려 이가 나간 적도 있다 라는 식의 말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만 판단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인지를 넘어선 존재들이 있고 그런 이들이라면 능히 저런 식칼로도 사람의 목을 일도에 베어 낼 수 있었다.

아마도 중년사내 역시 저들과 같은 이유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그가 보여줬던 존재감에 비해 너무도 얄팍한 생각에 나는 왠지 실망감을 느꼈다.

그에 그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나보다 빨리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자네 생각은 틀렸어!”

내 옆에서 아직도 내 팔을 잡고 있던 인물.

포두 였다.

“무공을 배웠다면 충분히 벨 수 있네. 저런 식칼이 뭔가 손날로도 충분히 벨 수 있을 걸세.”

그 말에 군중 사이에서

그래, 예전에 차력꾼들이 왔을 때 손날로 도자기를 베는 걸 본적 있지 라거나 나도 본적 있네 식칼로 철을 무 베 듯 베듯 베더군 이라는 말들이 새어나왔다.

중년사내는 물끄러미 포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범인은 저 숙수 아닙니까?”

“뭐?”

중년사내는 눈짓으로 거품을 문채 쓰러져 있는 숙수를 가리켰다.

“저기 쓰러져 있는 숙수 말입니다. 무공을 배웠다면 단순한 발길질에 저리 기절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포두는 그 말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경우도 있지 않냐 이.. 이 말이네!”

자멸하는 포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중년사내는 그런 포두를 일별 한 후 다시 군중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평범한 숙수가 강호의 절정고수 였다 라는 이야기는 흔히 있는 이야기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팡이로 다시 시체의 절단된 단면을 가리키며 중년사내 말을 이었다.

“설사 그런 가정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구경꾼들은 어느새 중년사내의 말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변사도 괜찮은 직업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과 별다른 관계가 없음에도 그런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목의 단면. 저 숙수가 베었다면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중년사내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그의 말만을 기다렸다.

구경꾼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중년사내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 숙수의 키와 이 유해의 키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 말에 군중 사이에서 감탄사가 드문드문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군중 사이에 있었다면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어 있었을 것이다.

연신 숙수와 시체의 키를 가늠하는 나의 눈에 두 신체 사이의 키 차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충보아도 숙수의 키가 시체보다 네 뼘 이상은 커보였다.

이런 키 차이라면 목의 단면은 사선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절단면은 어떻게 보아도 완벽한 수평이었다.

“범인은 저 신씨 총각과 키가 같은 사람이오!”

내가 한말이 아니다.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군중 사이에서 흥분을 못 참은 한 사람이 내지른 소리 였다.

어찌되었든 나와 같은 생각 인지라.

나는 반쯤 확신에 차서 중년사내를 바라봤다.

중년사내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뭔데!?

나도 모르게 나오려는 불만을 꾹 눌러 참으며 나는 계속해서 중년사내를 주목했다.

그는 시체의 옆구리 쪽으로 가서 식칼과 지팡이를 바꿔들었다.

그러며 나와 같은 생각을 말한 것으로 생각되는 남자를 지목해 앞으로 불러냈다.

“성급하게 생각한다면 키가 같은 사람이라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불러낸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의 뒤에 섰다.

그와 남자의 키는 비슷해 보였다.

그 상태에서 중년사내는 식칼을 들어 남자의 목에 칼을 대었다.

칼날은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구경꾼들 속에서 탄식음이 새어나왔다.

중년사내는 그 소란 속에서도 묵묵히 입을 열었다.

“보통 서있는 것을 베려고 할 때 사람은 뻣뻣하게 서서 칼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중년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선 남자의 무릎을 굽혀 한 뼘 가량 키를 낮췄다.

그리곤 칼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칼이 정확히 남자의 목에 멈춰선 순간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반응은 구경꾼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일도에 목을 베어 냈다면 분명히 앞발에 무게 중심을 실어야 했을 겁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내의 말대로 그는 무릎을 굽힌채 칼을 휘두르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사실 일수록 충격적인 사건 속에서는 쉬이 무시 되고는 했다.

실제로 무관의 자식인 나도 숱하게 보아온 자세임에도 간과 했지 않은가.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즉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목을 수평으로 일도에 베어 냈다는 말이죠. 그러니 범인은...”

“신씨 아저씨보다 키가 큰 사람!”

군중 사이에 서있던 꼬마의 목소리 크게 울렸다.

꼬마야 키는 저 숙수도 크단다.

키가 큰 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지.

꼬마의 목소리에 개의치 않는 듯 사내는 끊겨졌던 말을 조용히 이어갔다.

“이 피해자에 비하여 키가 최대 두뼘 최소 한뼘 정도 더 큰 사람 일겁니다.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면 뼈를 베어낼 만큼 무거운 칼을 사용 할테죠. 그러니 대충 보아도 이 피해자보다 키가 네뼘 이상 커보이며 식칼을 들고 있던 이 남자가 범인 일수는 없는 겁니다.”

사내의 말에 군중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대충 들려오는 소리를 보니 사내의 말에 숙수가 범인이다 아니다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내 어깨를 지긋이 누르는 포두를 돌아봤다.

그는 웃는건지 짜증을 내는건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영웅으로 만들때의 속셈을 생각해 봤을 때, 일이 이런식으로 진행되기는 바라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러니 갑자기 나타난 사내로 인한 짜증을 풀어낼 상대가 필요 할 것이다.

저 표정 너머에서는 분명 숙수가 깨어난다면 반드시 나를 넘기겠다는 각오가 서있을게 분명했다.

그의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한순간에 논란을 일으켰다 잠재운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는 뽑아들었던 식칼을 원래 자리에 꽂아놓고 시체 옆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노파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해보인 후 군중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중 속에서 약관을 막 넘긴 듯 보이는 청년이 튀어나와 사내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런 청년의 행동을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청년의 발걸음에 맞춰 군중 사이를 지나 이 난장을 벗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사내는 왔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사내가 남긴 말만이 활활 타오르다 꺼져버린 모닥불의 연기처럼 남아 이곳을 휘감아 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지랖도 넓은 사람이구나.”

누님의 말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포두에게 붙잡힌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누님이 도착한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지긋지긋한 전문대가 제삼골목을 벗어나 주씨무관 북경지점에서 겨우 한숨을 돌리고 누님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에 피로를 이겨내고 이야기를 했건만 그 결말이 고작 저런 말이라니.

뭐 알고는 있다.

본래 누님은 남의 일에 이리저리 참견하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아마 길가다 칼침을 맞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눈길도 안주고 그냥 지나칠게 분명했다.

그런 누님이니 당연한 말이다 싶었지만...

말을 하는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미묘하게 말과 표정이 엇갈린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말로는 불평을 하고 있지만 표정은 왠지 유쾌해 보였다.

“그래, 그 남자가 어디로 간다던지 들은 것 있느냐?”

더더욱 누님답지 않은 말에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누님이 내 뺨을 쳤다.

알싸한 고통이 뺨을 타고 뇌를 자극 했다.

나는 이제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평정을 되찾을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한 말이 어떤 이유에서 누님을 자극해서 뺨을 맞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지은 어떤 표정이 누님을 자극해서 뺨을 맞는다.

이유는 당연히 모른다.

물론 누님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에서 생겨난 이유 일 것이다.

나는 왼손으로 뺨을 만지며 누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모른다는 내 말에 누님은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이야기 어디에서 누님이 이정도로 관심을 가질만한 부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건 동생이 죽을뻔 했다는 사실은 안중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전언에 달려온 것도 동생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되었다.

아니면 장례비용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과 함께 누님의 표정이 자꾸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제까지 철혈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성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던 누님이 생판 처음일 남성에게 이야기만으로 관심을 가지다니 이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누님의 표정을 살피며 미끼를 던졌다.

“산동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이라는 오소협조차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누님께서 왠일로 관심을 가지십니까?”

내 말에 누님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느 부위를 쳐야 뺨 좀 잘쳤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고민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님을 안다.

누님이 정말 관심없는 질문이라면 뺨은 말이 끝난 순간 좌측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관심이 있다면?

누님은 어느 쪽 뺨을 날릴지 고민을 했다.

결국 어떤식으로 결말이 나도 뺨은 날아간다는 이야기지만 어찌되었든 호기심의 끄트머리 정도는 만족 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거래라고 할만 했다.

쫙!

좀 손해 보는 거래 였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지난 십수년간 쓸 곳 없이 늘어난 뺨의 내구력으로도 감당이 안되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과 함께 누님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넌 그 사내가 그렇게 장황하게 말한 이유를 아느냐?”

기대한 대답과는 상당히 달랐다.

나는 뺨을 만지며 누님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황 했다니요?”

내 말에 누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왜 계속 시험에서 떨어지는지 알겠다. 이 모자란 녀석아.”

말에는 일체의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을 그냥 읽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전시가 개나 소나 다 합격하는 시험인줄 압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입니다.

소동파가 살아 돌아 와도 삼수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갈거란 말입니다!

차마..........

이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나는 그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누님의 말에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누님의 고견을 들려주시지요.”

라고 말했다.

내 말에 누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 자리에서 숙수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밝히고자 했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굳이 어떤 칼을 썼다 키가 몇이다 이런 사실을 언급 할 필요는 없었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님.”

이제는 저런게 내 동생이라니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한숨은 당연히 딸려 와야 하는 덤처럼 계속 새어나왔다.

바람 빠지는 돼지 방광처럼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는 말이다. 앞서의 네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냐.”

누님의 말에 나는 사건을 떠올렸다.

숙수, 칼, 시체, 노파, 중년 사내...

나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들을 주르륵 머릿속에 나열해 놓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

그게 무어란 말인가?

누님은 나의 표정을 보고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너 말이다.”

“저요?”

내가 놀라자 누님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누님은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올렸다. 한모금 차를 들이킨 후 이제는 한숨조차 내쉬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사건 현장 속에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누님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숙수에게 끌려가 죽을 뻔한 피해자, 포두에게는 귀녀를 잡은 영웅(?), 그 중년인에게는 주변인 중 하나.

나는 내 생각을 누님에게 말했다.

누님은 내 말을 듣고는 차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목이 타는 걸까?

“네 말 속의 역할들은 네 생각에서만 비롯된 것들이다. 너 자신을 중심으로 사건을 파악 했을때의 역할들이지.”

“그럼 누님의 말씀은 다른 시점에서 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십니까? 왜 저인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나.”

누님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통했다는 말은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는 말 아닌가?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심하며 나는 생각했다.

다른 시점이라.

다른 시점...

누님은 자신의 말에 충분한 단서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누님은 말 없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님은 그 사건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나라고 했다.

즉 사건을 해명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바로 나라는 말이었다.

그때 그는 어떻게 사건을 해명 했었나.

분명 중년인의 말 속에 ‘나’는 없었다. 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며 숙수의 무죄를 증명 했다.

중년인이 그 현장에 발을 내민 이유 안에 나는 없었다는 말 아닐까?

그렇다면 중년인의 목적은 숙수의 무죄를 밝히는 것에만 있었다는 말이다.

숙수의 무죄를 밝히는데 내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라...

묘한 이치 였다.

숙수에게 죽을 뻔한 내가 숙수의 무죄를 밝히는 확실한 단서가 된다니.

나는 누님의 말에 따라 다른 시점으로 현장을 보기로 했다.

내가 누님에게 심부름을 보낸 소년의 시점으로도 보고 군중 속의 한명의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오히려 더 불명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에 반쯤 포기하고 누님에게 물어봐야 겠다 생각 할 때 불현 듯 포두가 떠올랐다.

내 팔을 들어 올려 귀녀를 잡은 영웅이라 말하던 그가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때야 부하에게 언질을 받았겠거니 했지만 새삼 생각해보니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내가 사건 현장을 지배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 했던 것이다.

사건에 있어 그런 사람은 단 세 사람 뿐이다.

범인

피해자

그리고 목격자.

포두는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 숙수를 기절시키고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물론 곧바로 등장한 중년사내에 의해 까발려지기는 했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했던건 명백하게 사건을 조작하여 공을 세우고 싶어서 였을게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을 지배하는 이들 중 한명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범인은 당연히 불가능 하다.

더군다나 누명을 쓴 범인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피해자?

피해자는 목이 잘린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작당을 하고 싶어도 힘들지.

그렇다면 남는건 나 뿐이었다.

목격자로 위장한 나를 끌어들여 사건을 덮으려 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누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생각하기는 했으나 누님의 말에 대한 답에는 미진했다.

누님은 중년사내의 장황한 설명이 숙수의 무죄를 밝히는데 불필요 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나를 가리켰다.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사건의 목격자로 위장한 나를 말이다.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했다.

마치 꿀단지가 부엌에 있는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맸던 경험과 같았다.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문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관주님. 황씨 어르신께서 일각 후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그에 누님이 알았다고 대답한 후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없으니 더 기다려주기는 힘들겠다.”

누님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산성 없는 고민으로 머리에서 열이 올라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네 생각을 말해보거라.”

그에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내 말에 누님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고기요리를 먹기 직전에 남에게 빼앗긴 표정...

아니 그건 좀 그렇군.

“그래, 꽤 머리를 굴렸구나. 반쯤은... 맞았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마른 목을 축이려 차를 들이켰다.

이제야 속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많이 부족하지.”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많이 부족합지요.

그러니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렇게 비굴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후 누님을 표정을 살피니.

나를 굴러다니는 소똥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위 똥 씹은 표정이라는 그것 말이다.

“왠지 네 표정을 보니 답을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는구나. 그러니...”

역시나 그 변덕이 어디 가겠나.

기분 나쁜 말 늘임에 불길함을 느끼며 나는 누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답은 숙제로 하자구나. 기한은 오늘 밤까지다.”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달성 가능성이 일할의 일할의 일할도 되지 않는 숙제를 내줬으니 이 정도면 자비를 베풀었다고 해도...

“물론 이 정도만 내주는건 네 자존심에도 문제가 될테니. 더 과제를 내주도록 하마.”

“누님 그게 무슨...”

“기한은 마찮가지로 오늘 밤까지. 해야 될 일은 그 중년사내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알겠느냐?”

자비를 기대한게 어리석은 일이었다.

“누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입니다. 어찌 이 넓은 북경 땅에서 생면부지인 그를 찾는단 말입니까.”

내 속사포 같은 애걸에도 누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을 들어 내 뺨을 올려붙였다.

볼이 화끈거렸다.

“말을 두 번하게 하지 말거라. 그럼 기대하고 있으마.”

누님은 그 말과 화끈한 뺨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탁자 위에 엎어졌다.

왜 눈물이 나오지?



누님의 명령에 따라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주씨 집안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누님과 피가 이어져 있지 않거나. 혹은 내가 원수의 자식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함께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 파란만장한 하룻밤을 보내고 고작 세 시진을 잤을 뿐인데 또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가족이란.

가족애가 꿈틀대는 가족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 아닌가.

그것도 생전 처음 본 중년사내를 찾으라는게 이유라니.

못해먹겠다.

그렇다, 내가 누님의 숙제를 풀고 중년사내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작 뺨 맞는게 두려워서?

밥이 고프면 본인이 퍼먹어야 하고 만두가 고프면 본인이 쪄먹어야지.

누님은 그 동안 사람을 부리는 것에 너무 익숙해 진 듯 싶다.

진정한 형제라면 때론 눈물을 머금고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내 마음이 말했다.

때마침 소매 안에 누님이 챙겨준 돈이 두둑하게 들어있었다.

누님에게 스스로 밥을 퍼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기에는 아주 알맞은 때 였다.

그래, 나는 누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결코 도망 가는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전문대가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어이구야!”

깜짝이야.

“뭐.. 뭐냐? 돈이라면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상대의 말에 나는 놀라서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 있는건

“용춘이 아니냐?”

내 말에 읍례하며 용춘이 대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는 가만히 용춘이를 바라봤다.

누님이 항상 호위로 대동하며 주씨무관에서도 수위에 드는 무공실력을 지닌 고수.

그게 내가 용춘이에 대해 아는 전부 였다.

아니 누님의 뒤를 잇는 앞길 창창한 여고수 라는 사실도 추가 해야 겠다.

그 때문인지 산동에서는 별호 외에 소요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요림은 내 누님의 방명이다.

“그런데 네가 여기는 왠일이냐?”

내 말에 용춘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부관주님의 명을 받아 공자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런....

호위는 무슨 감시역이겠지.

나는 터져나오는 울분을 삭히며 용춘을 바라봤다.

주씨무관에서도 누님에 대한 충성심에 있어 첫손가락에 꼽히는 용춘이다. 가란다고 갈 리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상하게 구출되기 전보다 구출 된 후에 한숨이 더 늘었다.

예전에 의원에게 주워들은 말이 떠올랐다.

마음의 피로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던가.

그때는 몸이 썰리는 것보다 마음의 병이 더 고치기 힘들다는 그의 말이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는가.

숙수의 칼에 베였을 때 보다도 지금 더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래, 가자.

오히려 누님 곁에 있는 것보다 전문대가 제삼골목이 내 명줄을 온전히 지키는 방법이 될테니.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어깨도 괜히 들썩였다.

그래서 였을까.

금새 전문대가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 서니 그에 대한 상념이 떠올랐다.

북경의 남문에는 길고 긴 도로가 있다.

사면이 반듯하게 정돈된 돌이 깔려 있어 비가 올 때도 이곳만은 마차를 타고 통행하는게 가능했다.

그 주변을 따라 형성된 상가는 북경의 명소가 되었다. 그로인해 전문대가 라고 하면 누구나 활기 넘치는 상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활기찬 상인들과 물건을 사기 위해 모여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떠올렸다.

하루에만 수천의 인파가 오고 가며 수천종의 물건이 들고 나는 상인들의 천국 그것이 전문대가 였다.

그런 전문대가의 화려한 이면에는 이름도 붙지 않고 그저 골목이라고만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북경의 모든 암조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자.

관부에서 조차 발걸음을 꺼린다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왜 술을 마시고 있었느냐.

그 이유는 몇 달 전 고향에 있을 무렵 자주 찾던 고서점에서 한권의 책을 봤기 때문이다.

<전문대가 일람>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의 어떤 면에 끌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고르는 방법 이라는게 보통 저자를 보고서 고르거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고 고르는게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에 반해 내가 책을 뽑아드는 기준은 간단했다.

제목이 끌린다 싶으면 사는 것이다.

동문수학 했던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제대로 된 도서 선별법은 아니겠으나.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책을 사오면서 실망 했던 적은 없으니 내게는 매우 알맞은 방법이라 할만 했다.

그렇게 보게 된 <전문대가 일람>에는 제목으로 예상 했던 내용과는 꽤나 괴리감이 느껴지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전문대가에서 유명한 상가와 그 역사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전문대가 뒷골목의 조직 일람표와 그 조직과 연계된 전문대가 유명 상점들에 대한 내용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런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책 자체는 일람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지극히 간단한 내용과 짧은 단문들만이 안내문 조로 실려 있는 정도 였다.

그 때문에 이후 더 상세한 자료를 찾고자 했지만 그 이상의 자료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 때문에 겁도 없이 그 객잔에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물론 일람에 전문대가보다 술값이 절반 가까이 저렴하다 라는 말에 혹한 점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 호기심은 몸으로 채울 수 있었다.

고생에도 의미가 있었다면 있었던 것 아닌가.

“어디 가십니까?”

용춘의 물음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분명히 전문대가 뒷골목으로 향하고 있었을 발걸음이 전문대가 근처의 주루로 향해 있었다.

“아니.. 이게 말이지.”

용춘은 시작 되려던 내 변명을 끊으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가던 길로 가십시오.”

그 냉정한 말에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변명을 억지로 집어삼켜야 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갈수는 없다고... 술심이라도 빌려야지.’

내 의식은 누님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몸은 아니었다.

지난밤의 공포가 제대로 몸에 새겨져 있었다.

다시 뭐라도 말해서 용춘을 설득해 볼까 했다. 그러나 돌아본 용춘의 표정은 변명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굳건해 보였다.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 번화한 전문대가를 벗어났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후미진 건물과 건물의 틈 사이에 다다라 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 좁은 건물 사이를 벗어나자.

이제까지 보았던 화려한 전문대가의 거리는 사라졌다.

고작 건물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반전된다. 전혀 다른 낮선 공기 속에서 나는 좌우를 둘러본 후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사건과 조우한 제삼골목까지 가려면 이런 길을 두 번 더 지나야 했다.

나는 전날 내린 눈이 녹아 진창이 된 길 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는 늦은 시간에 지났던 길이라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달리 감상 이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주변의 풍경이 어제와는 달리 세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나온 전문대가의 화려한 건물들에 비해 반대편 건물들은 작고 초라했다.

지붕은 언제 무너지질 모를 정도로 낡고 조악 했고 벽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었다.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로 초라한 모양새 였지만 이 기이한 거리에는 전문대가 못지 않은 활기가 있었다.

그런 활기 속에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동이, 여진족, 왜인 같은 복색 외에는 생김새가 특별히 다르지 않은 이들부터 외모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서역인까지.

그들 모두는 어젯밤의 나처럼 단순히 술을 찾아 이 길에 들어선 이들이 아님에 분명했다.

구경을 위해서라면 전문대가 만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볼거리만이라면 전문대가와 지저분한 뒷골목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무언가 찾고 싶은게 있어 이 지저분한 거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으로는 쉬이 구하기 힘든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다 뒤에서 쏘아내는 용춘의 눈빛에 할 수 없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아쉬움을 삭히며 나는 아까와 마찮가지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났다.

두 번쯤 더 지났을 때, 우리는 익숙한 풍경 속에 들어섰다.

오는 동안 말없이 내 뒤를 따라온 용춘을 눈만으로 슬쩍 바라본 후 나는 오늘 아침 겨우 벗어났던 그 장소로 향했다.

범인은 언제나 범행 장소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왜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범행 장소로 돌아가는건 범인으로 충분할텐데 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작스럽게 억울함이 심장을 두들겨 댔다.

아 화병 걸릴 것 같아.

숙제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고 싶다.

“걸음이 왜 갑자기 느려지는 겁니까?”

용춘의 말에 나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줬다.

재촉을 받으니 더 가기 싫어졌다.

처음 누님에게서 벗어 났을때는 차라리 이곳이 더 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이곳에 도착하고 나니 누님의 싸대기가 그리워졌다.

사람이란 이렇게 이중적인 존재다.

그런 심오한 번뇌와 함께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사건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 입니까?”

용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나는 누님의 숙제를 떠올리며 아침에 내가 앉아 있었던 대문가에 앉았다.

사건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침과는 달리 주위로 둥그렇게 끈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중앙에는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이 남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시체를 껴안고 울던 노파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가 떠오르자 희미한 죄책감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때 중년사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노파는 평생 진범 아닌 자를 진범이라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우중충한 기분으로는 숙제를 풀 수 없다. 나는 스스로 그렇게 위로하며 사건 현장에 눈을 뒀다.

아침에 봤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 위에 발자국만 더 늘어나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발자국을 한참 들여다보다 눈을 돌렸다.

새삼 무언가를 떠올릴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어깨를 떨어뜨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젖힌채 맑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봤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을 눈으로 따라가다 용춘의 얼굴에 다다랐다.

전방을 주시하며 직립부동 자세로 서있는 용춘을 가만히 바라봤다.

소요림이라 불리는 이유에는 출중한 무공 실력 외에도 누님에 버금가는 미모도 있었다.

그 딱딱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미모가 더 빛을 발했을텐데 아쉽게도 본인에게 개선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용춘의 눈에서 코까지 보다 입술에 이르렀을 때 그 입술이 달싹였다.

“저 자를 아십니까?”

“응?”

정신을 빼놓고 있던 나는 용춘의 말에 얼빵한 대답을 하며 용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중년사내가 오늘 아침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서있었다.

떠날 때 보였던 그의 초연함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를 다시는 못 볼 사람으로 생각 했었다.

그래서 밤까지 찾아오라고 했던 누님의 말이 나에게는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말라는 말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그는 제 발로 내 눈앞에 찾아와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그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에 사내의 묘한 행동이 들어왔다.

그는 마치 무언가 조사라도 하듯이 땅바닥을 훑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따금 생각에라도 잠길 때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다 용춘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찾았으니 잡아야(?) 했다.

용춘은 나의 신호를 눈치 채고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였다.

용춘의 움직임에 맞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런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지척에 접근해 말을 걸려는 순간

“당신 누구요?”

그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한채 였다.

이변에 용춘이 급히 나에게 달려왔다.

그런 용춘에게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 할 때 나는 목에 서늘한 감촉을 느껴야 했다.

내 목에 칼이 닿아 있었다.

용춘은 달려오던 그대로 멈춰 섰다.

사내의 시선은 어느새 용춘에게로 향해 있었고 기대고 있던 지팡이는 온대 간대 없이 사라져 있었다.

긴장감에 침이 고였지만 삼킬수는 없었다.

침을 삼키는 순간 목젖이 움직여 칼에 베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체를 물었으면 답 하는게 예의 아니오?”

사내의 말에 앞서 그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제...제 이름은 주..주인백이라고 합니다. 칼질이라고는 모르는 일개 서생 이지요.”

내 대답에도 사내는 칼을 거두지 않았다.

용춘을 보는 시선도 마찮가지 였다.

그 모습에 나는 다급하게 용춘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어서 말해.

내 모습에 불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용춘이 말했다.

“주씨무관 일급무사 오용춘.”

용춘의 대답이 있은 직후 나는 곁눈질로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이 대답이 사내의 적의를 누그러뜨렸는지 알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기대 했던 것과는 다른 묘한 표정이 사내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것은 그리운 추억이라도 상기하는 표정이었다.

“무슨 용건인가?”

찰나간 떠올랐던 표정을 지우며 사내가 말했다.

나는 사내의 질문에 순간 어떻게 답해야 할지 생각했다.

누님이 시켜서요.

누님의 숙제라서 말입니다.

어떻게 말해도 납득 할만한 답이라 할 수는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어날 때 당당한 기개를 곧추 세우며 세상에 나온 남아로서 누님의 심부름에 당신을 잡으러 왔다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자니 대답을 재촉하는 칼날이 무서웠다.

그에 궁여지책으로 대충 떠오른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것이... 위기에서 저를 구해준 보답을 하기 위해서?”

“그게 무슨 소린가?”

“그... 위기 속에서 저를 구해준 보답을 해드리기고자 모셔가려 왔습니다.”

내 말에 입질이 왔는지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내 목에 여전히 칼을 댄채로 사내가 말했다.

“그런데 나는 자네를 본 기억이 없는데... 사람 잘못 본거 아닌가?”

사내의 말에 일순 내 존재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차후에도 얼마든지 가능했으므로 일단 이 날선 위기를 벗어나는게 먼저 였다.

나는 사내에게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의 활약 속에 나도 있었음을 설명했다.

그때서야 그는 ‘아~ OO서원에서 동문수학 했던 OOO 말이군. 하하하 이제 기억나네.’ 라고 말하는 동향친구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칼을 거뒀다.

결국 난 안중에도 없었단 말이군.

“보답 같은건 되었네. 뭘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으니.”

이 말에 그렇군요 라고 답하고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야 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었으나 등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여성과 이보다 더 먼 곳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을 여성이 있다. 그들 때문에 나는 원치 않는 말을 해야 했다.

“아닙니다. 꼭 답례를 하게 해주십시오.”

“아니네. 정말 괜찮다네.”

사내는 어느새 다시 복귀한 지팡이를 손에 들고는 겸양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제가 안괜찮습니다. 제발 꼭 답례를 하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어허, 이 사람 보게. 정말 괜찮데두.”

나는 그의 바지 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호소력 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내대장부로서 은혜를 입었음에도 갚지 않는다면 어찌 앞으로 당당한 대장부로서 고향땅을 밟을 수 있겠습니까! 대협께서 계속 이리 거절 하신다면 대협께서 보은을 허락 하실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않겠습니다!”

순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한이 들었지만 그건 마음의 한구석에 밀어두었다.

나의 호소에 사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할 일없이 지팡이를 만지작 거렸다.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뭔가 고민할게 있을 때 곧잘 저러시곤 했다.

나는 사내가 내릴 고민의 답을 긴장과 초조 속에서 기다렸다.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사내는 고민에 대한 답을 내렸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졌네. 답례를 받도록 하지.”

그의 대답에 나는 그보다 더 긴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대협, 감사합니다.”

“그 대신 조건이 있네.”

내 마음을 다시금 불안의 구렁텅이로 집어넣는 그의 말에 절로 침이 삼켜졌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의 답례를 받기 전에 유예시간을 주었으면 하네.”

나는 안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이때 왜 이 말을 내뱉었을까.

그렇습니까? 그럼 나중에 주씨무관 북경지점으로 찾아와주십시오. 그때 뵙지요 라고 말하고 깔끔하게 손을 털었어야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모든 불행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불행의 이유에는 일할의 우연과 구할의 오지랖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의 내 무방비한 질문에 사내는 무거운 어조로 답했다.

“내 손자가 납치되었네.”



2장



인생에는 원치 않는 인연이라는게 존재하게 마련이다.

누구나 그런 인연을 겪은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런 불쾌한 인연이란 언제나 처음부터 감지 할 수 있게 마련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감각을 외면하여 인생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고는 했다.

그런 사실에서 나 역시 예외 일수는 없었다.

“꼭 이곳에서 점심을 먹어야 합니까?”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내 사정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좋은 장소가 어디 있겠나?”

질문에 질문으로 대응하는 그의 모습에 좌불안석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나는 등 뒤를 살폈다.

그곳에는 어제 저녁 나에게 술값을 받지 못해 그 대가로 몸을 팔아치우겠다 말한 객잔 주인이 이쪽을 향해 무감정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객잔의 입구에는 얼굴에 붕대를 감은 거한, 즉 오늘 새벽까지 나를 추격했던 숙수가 서있었다.

원치 않는 인연은 원치 않는 만큼 질겼다.

나는 생전 처음 객잔에 온 사람처럼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괴이쩍어 보였는지 사내는

“왜 그러나? 소피라도 마렵나?”

라고 물었다.

그의 사심 없는 걱정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모습에 그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객잔의 점소이를 불렀다.

그 점소이는 객잔의 뒷문에 서서 객잔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내의 주문에 점소이가 다가왔다.

“어떤 음식으로 해드릴까요? 마침 오늘 새벽에 도축된 돈육이 있는데 그걸로 드릴깝쇼?”

“나는 소면 한사발이면 되네. 자네 둘은 뭘로 하겠나?”

사내가 내 의향을 물으려 점소이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싹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점소이가 안면을 바꾸며 냉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을 보니 이제는 측간조차 혼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사내의 물음에 창밖을 보고 있던 용춘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점소이는 본래의 싹싹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표정의 변화는 그런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런 재주로 왜 점소이를 하냐. 변검이나 하지.

나는 괜히 얼어붙는 혀를 달래 겨우 주문을 했다. 용춘 마저 주문을 끝내고 나자 점소이는 별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 걸어가는 점소이의 등을 보며 물 한잔을 들이켰다.

긴장감에 말라붙어 있던 목을 축이고 나자 마음에 쥐털 만큼이나마 여유가 생겨났다.

그러자 그와 함께 서글픈 자기반성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때...

사내의 말에 한번 들어나 보자는 말을 왜 한거냐.

아니 되었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지 라는 말에 왜 아닙니다! 라고 말한거냐.

그 손자와 내가 무슨 사이라고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 때문에 그럼, 내가 묵는 객잔에 가지 라는 말에 그리하지요 라고 답 한거냐.

객잔 이름을 듣고 꼭 거기여야 합니까 라는 나의 말에 그곳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네 라는 말에 왜 반박을 하지 않은 거냐.

그 무엇보다 더 이해가 안되는건...

결국 상황이 그랬다지만 오늘 새벽 죽을 뻔한 곳에 제 발로 찾아온건 뭐 하자는 생각이냐.

너 돌았냐?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나?”

“예? 아.. 아닙니다. 별 생각...”

사내의 물음 덕에 모멸감에 가득 찬 자기반성에서 탈출했지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불안한 현실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 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나는 사내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대협과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만...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말이지.”

“제 이름은 주인백이라 합니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다섯이 되었지요. 고향은 산동으로 부모님께서 작은 무관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이 옆에 있는 녀석은 아까 들으셨지요?”

그리 소개하며 옆을 돌아보자 뭐가 또 불만인지 용춘이 찬바람 날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이름은 서팔봉이라 하네. 사천 사람이지. 올해 마흔여덟이니 상수로군. 잘부탁하네.”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사이 점소이가 소면을 내왔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심장의 쪼그라듬이 미묘하게 적었다. 적응을 했다는 말이겠지.

내온 소면을 한 젓가락 뜨며 서팔봉을 바라봤다.

그의 행동거지가 새삼 기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기이함을 서팔봉에게 묻자 그는 소면을 먹으며 대답했다.

“자네 말은 손자가 납치 되었는데 내 신색이 너무 평온해 보인다 라는 거구만. 좀 더 이리 방방 저리 방방 하면서 호들갑을 떨어야 마땅한데 말이지.”

그의 직설적인 말에 내가 손사래를 치자 그는 너털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내심으로는 초조해 하고는 있다네. 다만 외면으로 그걸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거기에 믿는 구석도 있고 말일세.”

그 믿는 구석에 궁금증이 일었다.

그에 질문을 하자. 서팔봉은 당연한 질문을 받았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납치범이 남기고 간 천 쪼가리가 있었네.”

“천 쪼가리 말입니까?”

“그래, 보통 부잣집의 영애가 유괴되면 요구조건을 적은 서찰이 남지 않나? 그런 격이지.”

“그런데 그게 믿는 구석이 됩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런 상식적인 질문을 했을 때, 서팔봉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말 하면서도 잘도 먹는군.

“내용에 따라서는 믿는 구석이 되지.”

서팔봉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느긋한 자세로 빙긋 웃으며 답했다.

“-참견마라. 기다려라.- 라는 두 글자 였지.”

서팔봉의 믿음의 근원이 묘한 두 글자 뿐이라니. 그게 어떻게 믿을 만 한거야. 더 불안하구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용춘도 시큼한 식초라도 삼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표정에 그런 마음이 드러난 듯 싶었다.

“참견마라 기다려라... 생각해보게 보통 일반적인 유괴라고 하면 그 목적은 돈 때문이거나 원한 때문이네 그런 경우에 이런 내용을 남기겠나?”

“아니지요. 언제까지 돈 가져와라나 너도 당해봐라 라고 적겠지요.”

“그렇지. 하지만 내가 받은건 그런 것과 거리가 머네. 참견마라 라는건 돈이나 원한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려는데 내가 방해가 된다는 이야기네. 그리고 기다려라 는 끼어들지만 않으면 뭔가 보답을 하겠다는 말이지. 그 보답이 뭐겠나?”

서팔봉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용춘의 목소리 였다. 평소 감정표현이 적은 만큼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 그래서 믿는 구석이라 하신거군요. 그럼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게 좋게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일이란게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지. 일단 기다려라 라는 말도...”

뜸을 들이는 서팔봉을 보며 나는 국물을 들이켰다.

옆에서 용춘이 눈치를 줬다.

“너무 애매모호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뭐요.

라고 대답을 강요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이건 현실이지 집에서 누워 듣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멈추고 고민하던 그는 반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유괴한 범인이 범인이니 만큼 언제 어떻게 상황이 급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네.”

“유괴한 범인을 알고 계십니까? 그럼 끝난거 아닙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게 안다고 해서 바로 위치를 특정할 만한 이가 아니네.”

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서팔봉이 말했다.

“이 넓은 북경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 만큼 유명하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나 사는 곳을 찾지 못하는 이가 있네.”

그 말에 나는 생각했다.

북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면 꽤 유명한 사람이라는거 아닌가.

그런데도 이름을 모른다니... 거기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그럴수가 있나?

고민을 하면 할수록 생각이 꼬여갔다. 그러자 괜히 울화통이 터졌다. 오늘 왜 이렇게 나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많아.

누님의 과제도 그렇고 그 때문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던 전문대가 뒷골목까지 오고 말이지. 거기다 살인 현장까지 찾고 거기서 서팔봉을 만나고....응?

그러고보니 왜 서팔봉은 그 장소에 있었지?

손자를 찾느라 바쁠 사람이 굳이 살인 현장을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있나?

이유가 있다면...


북경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나 사는 곳을 찾지 못하는 이가 있다.


“........귀녀.”

“그렇다네. 그 자라네.”

서팔봉은 내 대답에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그의 갑작스런 반응에 내가 반사적으로 묻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측간에 좀 다녀오겠네.”

갑작스런 서팔봉의 측간 행에 한창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어찌 할 수 없는 분위기에 나는 남은 국물을 모두 들이켰다.

국물을 마시고 탁자 위에 놓고나자 이제는 용춘이 묘하게 쑥스러운 표정으로 잠깐 자리 좀 비우겠다고 말하며 일어섰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눈을 부라렸기에 더 이상 묻지는 못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나니 깜박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 깜박 했던 사실이 내 앞에 앉으며 그 사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었다.

“신수가 훤하구만.”

객잔의 주인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무의식 중에 국수그릇을 집어들었지만 국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나는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핥고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숙수는 입구에 싸가지 없는 점소이는 뒷문에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고보니 객잔 안에 손님이 없었다.

입구에 ‘금일휴업’이라고 걸어두기라도 했나.

“또 잔머리라도 굴리는겐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고개만 젓고 끝내는건 어디서 배운 싸가지인가?”

“아이구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어찌 어르신을 앞에 두고 잔머리를 굴리겠습니까.”

용춘아 어디갔냐.

팔봉 형님 측간에서 애라도 만드십니까?

“뭐 되었네. 어차피 자네를 잡으려고 이 자리에 앉은건 아니니 말일세.”

“그... 그렇습니까?”

신용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달려드는 기색이 없었기에 나는 약간 긴장을 풀고 객주를 봤다.

객주는 그런 나를 마찮가지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시간도 얼마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예 말하십시오.”

“내 자네를 잡지 않겠네.”

객주는 감사합니다 라는 내 입에 발린 감사 인사를 끊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대신, 저 서팔봉이라는 사내와 함께 다니며 귀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 즉각 말해주게.”

“예? 그게 무슨...?”

객주는 내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 부탁이 아니라 조건을 내건 명령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노인은 어떻게 서팔봉이 귀녀를 쫓을거라는걸 안거지.

우리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서팔봉의 생각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구심을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객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 다시 한번 말하지. 무엇이라도 귀녀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말하게. 그럼 자네를 잡지 않지. 하지만 자네가 이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면 자네가 어느 무관의 장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안심 할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될것이야.”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객주는 자리에서 벗어나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측간에서 서팔봉이 걸어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한껏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의 고민도 측간에서 내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온갖 번뇌 속에서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용춘도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대화가 재개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말했었나?”

서팔봉의 말에 나는 그렇다네 그자라네 라고 말한 부분까지 말했다고 답했다.

“맞아 자네가 대답하고 내가 답했지. 그렇다면 이제 자네가 나에게 해야 할 질문이 있지 않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왜 귀녀가 납치범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나는 이 시점에서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을 했다.

객주의 갑작스런 난입은 일단 서팔봉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사실 귀녀가 납치범이라 생각하는 부분에는 감이 팔할 이상이라 해도 무관하네. 아마 내가 사정을 이래 저래 설명을 해도 자네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테지. 거기다 자네가 이 이상 듣는다면 이제 발을 빼기 힘들어질거네. 내 강압에 의해서든 사건의 흐름에 휘말려서든 말이야. 그래도 듣겠다면 말해주겠네.”

서팔봉의 긴 말에 나는 일단 고민하는 척 했다.

하지만 실상 고민 할 필요 따위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나는 발을 들였고 그 발을 빼낼 수 없는 이유가 너무도 많았다.

“말해주시지요. 대협.”

내 간단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팔봉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북경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네. 처음 온 사람에게 은원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나는 금새 떠오른 오류를 지적했다.

“하지만 대협과 은원관계를 맺은 사람이 북경에 와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손가락 두 개를 꼽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이 부분에서 두 번째 이유가 등장한다네.”

“그게 무엇입니까?”

“내게 한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이 있다는 것이라네.”

그 말에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용춘의 표정을 통해서 유추 가능 했다.

서팔봉은 그런 우리들의 표정을 보며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믿기야 힘들겠지. 하지만 단박에 그런 표정을 짓는건 좀 그렇구만.”

그 말에 나는 고향에 계실 아버지가 떠올랐다.

밖에서 알아주는 무인이라 근엄한 모습으로 다니시지만 집에서는 그렇게 쉽게 상처 받는 분도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그 끓어오르는 감수성으로 청혼의 시를 지었다고 하셨던가.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시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칭찬은 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때를 상기하자 새삼 몸에 돋아나는 닭살을 털어내며 나는 서팔봉을 달랬다.

“대협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게 참으로 희귀한 능력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의구심이 들 수 밖에요.”

내 말에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이며 서팔봉이 말했다.

“그렇다면 간단한 실험으로 증명해주지. 마냥 믿으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설마 진짜인가.

서팔봉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이건 사실이다 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심쩍은 감정 속에서 설익은 신뢰의 감정이 돋아났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보여주시지요. 대협.”

내 말에 서팔봉은 눈빛으로 대답하고 나서 내 등 뒤로 시선을 향했다.

“자네 뒤에 숙수가 보이나?”

나는 차마 고개를 돌려 숙수를 쳐다보지는 못하고 짧게 예 라고만 대답했다.

“자네 눈에 보기에 저 숙수가 어때 보이나?”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서팔봉의 말에 생각했다.

숙수가 어때 보이냐니.

들어올 때 슬쩍 본 숙수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파 보였다.

얼굴의 절반쯤을 가린 붕대가 어제의 처절했던 사투를 말해주고 있었다.

달려든 거리 사람들에게 덩치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이며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결국 고꾸라져서 사람들의 삽과 망치와 발길질에 걷어 차였다.

솔직히 저 숙수가 한 덩치 한다고는 하지만 얼굴에 붕대만 감고 직업 전선에 복귀 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레는 족히 정양을 해야 겨우 몸이나 사릴까 싶은 상태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타 정황들을 보았을 때, 내 눈에 보이는 숙수의 인상은...

“고통이 느껴집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생각보다 더 튼튼한 인간이었구나 정도일까요?”

내 말에 서팔봉은 돼지 방광이 터질때나 날법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듣는 쪽이 주변 눈치를 살피게 되는 그런 웃음 있지 않나.

“크큭, 크크크.. 그렇지 그래. 생각보다 튼튼한 몸이지. 큭크큭.”

뭐가 그리 웃기나 이 사람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다지 웃기지 않는 대답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그를 보며 슬며시 그의 정신상태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다.

그에 내가 이쯤에서 진정시켜야 겠다 생각할 무렵 그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야. 생각보다 튼튼해도 너무 튼튼하지. 그 자리에서 일순간이나마 내가 보았던 숙수의 상태는 몇십일은 족히 정양을 해야 할 상태 였거든.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고는 하나 저 덩치가 바닥에 엎어져서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가 능치 짐작이 되지.”

그 말에 내가 수긍하자 서팔봉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고작 반나절만에 저리 일어나서 다닌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

그러고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길거리 어디에서나 흔히 볼법한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모습으로 봐서는 무공을 익힌 사람도 아니었고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에 무죄방면 되지 않았던가.

아니면 저 숙수가 그 상황에서 배우 뺨치는 엄살 연기라도 펼쳤었단 말인가.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훌륭한 연기를?

그건 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사람에게 얻어맞을 때 보인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게 거짓이라면 나는 인간불신증에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

응?

그런데 좀 이상한데...

서팔봉의 말을 들어보자면 저기 서있는 숙수가 그때의 그 숙수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 사건현장에서 나와 만나기 전부터...

나는 그렇게 뒤늦게 떠오른 의심의 고삐를 거머쥐며 서팔봉을 바라봤다.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치워진 국수그릇 대신 놓여진 차를 마시며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순간 오한이 돌았다.

이 모든게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오기 위해 객잔주인이 짜낸 계책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용춘의 실력으로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런 오만가지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서팔봉이 차를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자네 표정이 참 다채롭구만. 골패는 절대 못하겠어. 그러니 도박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게.”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떨리는 목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용춘이 쳐다 보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는 그 표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는 말일세. 그 예로 지금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춰볼까?”

내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자.

암묵적인 동의라 생각했는지 서팔봉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긴장에 심장이 뜯겨져 나갈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보니?

“저 숙수를 요괴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거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는 그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하하하. 걱정말게 저 숙수는 요괴는 아니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숙수의 저런 괴물 같은 모습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세.”

그의 정신 나간 통찰력에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네 숙수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나.”

나는 혼란에 빠져 엉겁결에 그의 말에 대답했다.

“기억은 합니다만... 정확히는...”

“그렇다면 숙수의 코 옆에 작은 점이 있었다는건 기억 못하겠구만. 거기다 그 점이 코의 오른편에 있었다는 것도 말이야.”

“예... 그렇지요.”

“그 사실이 내 기억력을 증명해 줄것이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였다.

흔히 변사들이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 관객들의 긴장감 고조시키기 위해 그러듯이 하지만 내게는 그 뜸이 내 심장에 고문을 가하려는 그의 술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서팔봉이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절반은 맞아 들어간 것이었다.

어렸을 때 누님의 싸대기와 처음 조우 했을 때, 그때 만큼의 고통이 내 심장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자네 표정을 보니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 같구만. 그렇게까지 기대를 해주니 더 뜸을 들이는 것도 고문이 되겠어.”

“예... 그러니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그 다음에 제대로 된 질문 좀 하게 말입니다.

“그러지. 하지만 그 답을 말하려면 먼저 자네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네.”

“하십시오.”

“자네가 보기에 저기 있는 숙수의 점은 어느 편에 있나? 오른편인가? 왼편인가?”

서팔봉의 질문은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아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오른편에 있겠지요.”

그 말에 서팔봉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손자를 납치 당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틀렸네. 지금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게.”

그의 말에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숙수를 바라봤다.

그러자 숙수 역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음이 이어진 사람들끼리는 눈으로도 대화를 한다고 했던가.

그 순간 숙수와 나는 마음의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 내용은 그다지 유쾌한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숙수의 눈에서 시선을 내려 그의 코를 봤다.

서팔봉이 말한 숙수의 점은 정말 미세한 것이었다. 그와 결혼한 마누라가 있다면 그 마누라 조차 평생을 살면서도 찾지 못할 정도였다.

미간을 좁혀 그 점을 찾았을 때, 나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서팔봉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기억을 잘못하신거 아닙니까?”

“아니네.”

서팔봉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거지?

숙수의 점은 왼편에 있었다.

나는 먼저 서팔봉의 능력을 의심했다.

서팔봉이 숙수와 처음 대면 했을 때, 숙수는 쉼없이 얻어터진 후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숙수의 코에 묻은 이물질을 서팔봉이 점으로 착각 했을 여지도 충분했다.

내가 그 생각을 말하자 서팔봉은

“그렇다면 코의 양 옆에 점이 있다고 했겠지. 그렇지 않나?”

라고 답했다.

그럴 법한 말이었다.

내가 계속 고민을 할 때, 서팔봉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고민 할 필요 없네. 이유는 매우 단순하니까.”

“그 단순한 이유가 뭡니까?”

서팔봉은 그에 손가락으로 숙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객잔 안의 이목이 숙수에게로 집중 되었다.

이목이라고 해봐야 객주와 점소이 그리고 나와 영춘 정도 였지만.

“자네는 저기 서있는 숙수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했지. 그가 입은 부상은 열흘 이상은 족히 정양해야 하는 것이고 지금은 서있기 조차 힘들거라고 말이야.”

“그랬지요.”

서팔봉은 들었던 손가락을 내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리 생각하면 되지 않나.”

“어떻게 말입니까?”

“저기 서있는 숙수와 자네가 오늘 아침 봤던 숙수가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말일세.”

나는 잠시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했다.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저 얼굴에 저 덩치인 사람이 또 한사람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는 몸을 돌려 숙수를 자세히 뜯어봤다.

서팔봉이 말한 점 빼고는 모든 점에서 반나절 동안 나를 쫓아다닌 숙수와 빼닮아 있었다.

애초에 서팔봉이 말한 점 조차도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말한 근거를 증명할 기억이 내게는 없다는 말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말하자 서팔봉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내 기억력을 자네가 믿게 만들려면 자네가 기억하지 못할 아주 사소한 무언가를 근거로 어떤 사실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그에 따라 선택된게 숙수라는 말이네.”

그 말에 내가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이제까지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용춘이 입을 열었다.

“그럼 대협께는 그 사실을 증명 할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애초에 그런 자신도 없었다면 이 말을 꺼냈겠나?”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으시니 굳이 대화를 더 끌 필요는 없겠지요. 그에 대한 해답을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용춘의 도전적인 어투에도 서팔봉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들어 뒷문을 막고 있던 점소이를 부를 뿐이었다.

다가온 점소이는 예의 싹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부르셨습니까?”

“음식을 주문 할 생각은 아니네. 잠깐 뭘 좀 물어볼게 있어서 불렀는데 좀 어울려주겠나?”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 손님도 없으니 마음껏 물어봐 주시죠.”

이중적인 점소이의 싹싹한 면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팔봉은 득의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손가락으로 숙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숙수 있지 않나.”

“예, 왜 요리에 불만이라도 있으신지..?”

“아니 그런건 아니네. 다만 저 숙수에 대한 하나의 질문에 답해주기만 하면 되네.”

“그정도야. 어지간한 것만 아니라면...”

“별 것 아니니 곤란하지는 않을걸세.”

“그렇다면 얼마든지 말해드리지요.”

서팔봉의 확언에 점소이는 만족한 듯 능동적인 자세로 서팔봉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서팔봉은 즉각 질문을 날렸다.

“저 숙수, 쌍둥이 아닌가?”

잠시간 서팔봉이 앉아 있는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고작 한다는 생각이 쌍둥이야.

그거라면 지나가던 코흘리게 꼬맹이도 생각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굳이 그런 속내까지는 드러내지 않고 나는 오랜만의 고요 속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이내 그런 고요는 용춘의 참견에 의해 깨졌다.

“쌍둥이라... 너무 좋을 대로의 생각 아닙니까?”

용춘의 그런 반박에도 서팔봉의 얼굴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반들반들한 자갈로 만들어진게 아닌가 싶을 정도 였다.

서팔봉은 용춘의 그런 반응에도 흔들림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그 말이 사실 일때야. 그렇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점소이를 불러서 확인하고 있지 않나.”

왠지 서로의 감정에 상처만 남길 것 같아 나는 이쯤에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협의 생각이 맞소?”

나는 옆에 서있던 점소이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러나 기대하던 대답 대신 놀란 표정의 점소이와 대면해야 했다.

점소이의 파안대소를 기대 했던 나 역시 그 표정에 동참 했다.

점소이의 그런 반응을 감지 했는지 용춘 역시 입을 다물고 점소이를 바라봤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자 그때서야 점소이는 놀란 표정을 수습하며 서팔봉에게 말했다.

“왜...그리 생각하셨습니까?”

점소이의 말에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서팔봉이 답했다.

“보통 이 정도 떡밥이 깔리면 뻔한거 아닌가?”

한마디로 반쯤 감이었다는 말이군.

아무래도 이 사람은 정상적으로 생각하며 판단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점소이는 서팔봉의 말에 한참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든 질문에 답은 해드려야 겠지요. 별로 숨길 것도 아니니.”

서팔봉은 예의 득의만만한 눈빛으로 용춘을 바라봤다.

용춘은 그 눈빛을 굳이 피하지는 않았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게 보였다.

이래서 이해 할 수 없는 사람과는 싸우면 안되는거야.

누님과 생활하며 깨달았던 인생의 격언을 떠올리며 나는 점소이의 이어지는 대답을 기다렸다.

점소이는 눈으로 숙수를 본 후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쌍둥이죠.”

“보게 내 말이 맞지 않나. 이제 내 기억력을 믿어주겠나?”

나는 서팔봉의 말에 수긍하며 그의 기억력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며 오늘 아침 누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히 누님은 그가 쉽게 할 수 있는 증명을 일부러 장황하게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때는 누님의 생각에 동의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서팔봉과 두 번째로 대면하고 보니 그 생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이 자는 뭔가 의미 깊은 의도로 장황하게 말하는게 아니라.

그냥 장황하게 말하는게 좋아서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이다.

“이제 기억력은 증명이 되었는데 대협의 기억력과 귀녀가 범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시죠.”

내 말에 서팔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굳이 기억력을 말했겠나? 그건 북경에 처음 발을 들인 후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의 얼굴을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네.”

이제 와서 못믿겠다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

나는 감탄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 그렇다면?”

“그 기억나는 얼굴들 속에 내 손자를 납치 할 만한 자는 없었네.”

그 말에 걸리는 점을 지적하자.

“물론 그 말대로네. 내 기억 속에 원수의 얼굴이 없다고 귀녀라고 단언 할 수는 있는 이유가 되는건 아니지.. 그래서 세 번째 이유가 존재하는 거라네.”

“세번째 이유 말입니까?”

“그래 세 번째 이유.”

그의 자신감에 나는 반신반의 했다.

이번에는 또 뭘까?

초인적인 기억력이 나왔으니 뭐 다음은 신기 내린 예지 능력이나 그쯤 되려나.

“말씀해주시죠.”

내 말에 서팔봉은 자신의 세 번째 이유에 대하여 말했다.

“내가 생각한 귀녀의 범인상과 납치범의 범인상이 일정 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네.”

나는 어이없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물론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조심했다.

“결국 그냥 추측 일뿐이시군요.”

약간 비꼬는 듯한 어조의 내 말에도 서팔봉은 별다른 감정변화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앞서 말하지 않았나. 내 감이 팔할 이상이라고 말일세. 지금이라도 듣지 않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일면식 없는 자네를 끌어들이는 것도 미안한 일이니.”

그가 새삼 친절하게 선택권을 던져주었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고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알다시피 집에는 내 인생의 선택권을 박탈한 악귀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그저 너무 섣불리 결론을 내린게 아닌가 싶어 해본 말입니다.”

“자네 말이 옳아. 섣부른 결론 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많이 찾아내었네. 아니 이 말을 해도 자네에게 설명이 되지는 못하겠군.”

나는 잠시 서팔봉의 표정을 살피다 심술은 그만 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 내가 의존 할 건 그와의 대화 뿐 이었으니까.

나는 그가 편하게 설명하도록 풀어두기로 마음 먹었다.

“제가 너무 물고 늘어진 것 같군요. 계속해서 설명 해주시죠.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네. 자네가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럼에도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주니. 내 마음이 편하군. 그럼 자네의 말대로 계속하도록 하겠네.”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점소이를 불러 술을 주문했다.

“말이 길어질테니. 마실게 있어야지. 자네도 마시겠나?”

내 대답에 서팔봉은 술잔 두 개를 마저 주문했다.

용춘은 나를 호위 하는 동안은 마실 수 없다며 거절했다.

주문한 술이 탁자 위에 놓여 졌다.

주거니 받거니 술이 오고간 후 서팔봉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대낮부터 술이라니 이 사람도 상당한 주당이군.

“자네는 귀녀가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나?”

상당히 뜬금없는 첫말이었다.

“글쎄요... 귀녀라고 하니 일단 여자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아침에 있었던 대협의 말에 따르면 무공을 배웠거나 혹은 엄청나게 힘이 쎈 여자 라는 말이 되겠죠. 더불어 키가 남자 만큼 크다는 점도 있겠네요. 나열하고 보니 상당히 기괴한 여자군요. 귀녀 라는 여자.”

서팔봉은 술잔을 만지며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 말이 끝나자 바로 술을 들이키곤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고금에 다시 보기 힘든 기괴한 여자라 할 만하네. 하지만 지금의 자네의 말 속에는 틀린 전제가 있네.”

“그게 뭡니까?”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지적을 당해서인지 이제는 어지간한 지적에는 무감각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자랑스럽지는 않다.

“귀녀를 여자 라고 단정하는 점이네.”

“계집 녀 자를 붙이니. 여자 아니겠습니까? 북경에서는 모두 그렇게 부르던데요.”

“아니네. 아니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싶지 않나?”

“무엇이 말입니까?”

서팔봉은 내 대답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비웃는 것 같아서 썩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귀녀를 목격 했다고 나선 사람은 없지 않나. 오늘 아침 손자가 납치된 후에 객주에게 물어보니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

“고작 객주 한사람의 의견 아닙니까.”

“아니지. 객잔이란 수많은 풍문이 오가는 자리네. 그리고 이 객잔은 이 골목에서 영업하고 있는 유일한 객잔이고 그러니 단순히 한사람의 의견이라고 폄하하기는 힘들지 않겠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북경 전체의 의견이라고 하기는 힘들지요.”

“그건 자네의 말이 맞네. 그래서 더 물어 본게 있지.”

서팔봉은 내 계속된 반박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반박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에 근거에 근거를 더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피해자들에 대해서지.”

“피해자들 말입니까?”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지. 그 장소가 어디일 것 같나?”

나는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 서팔봉의 의도에 따라 대답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곳 입니까?”

서팔봉은 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나는 배알이 꼬임을 느꼈다.

누님의 미소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맞네. 이 곳 제삼골목이지.”

“그런데 피해자들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가 중요합니까?”

옆에서 용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왜? 내가 뭘 잘못 말했는데?

“말했지 않나. 이곳은 제삼골목에서 유일한 객잔이라고 말일세.”

“아...”

“제삼골목은 골목이라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그 역할 역시 기묘한 장소라네. 사람들은 장사를 할때는 친근하게 굴지만 그 외의 일로는 외부인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그것도 객주에게 물어보신 겁니까?”

“아니, 한나절 지내보며 느낀 내 감상이네.”

아 예 그러십니까.

서팔봉은 내 질문에 답한 후 앞서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배타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냥 뭐 편협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 말도 맞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지. 폐쇄적이라는 말이네.”

“그게...그렇게 됩니까?”

“물론 이 두가지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지. 더군다나 이번 같은 경우라면 말이네.”

“이번 같은 경우라고 하시면?”

“연속살인사건 말이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은 자기보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자신이 머무는 틀이 안전하지 못하다면 누가 좋아하겠나? 더군다나 그들은 위험하다고 해서 자신의 틀을 벗어나지도 않네. 이번 귀녀건만 봐도 그렇지. 귀녀에 의한 살인이라 추정되는 사건이 오년간 열세건이네. 보통이라면 집단 이주도 생각해볼만 하지. 하지만 객주의 말에 의하면 이 골목을 떠난 사람은 오년간 둘이 넘지 않는다고 하네.”

확실히 기형적인 일이기는 했다.

살인사건이 한 두번이라면 그래도 삶의 기반을 버리기는 힘드니.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쌓아온걸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오년간 열세건?

그 사이에 떠난 사람이 고작 두명 뿐 이라고?

이건 아무래도 정도가 심했다.

“그런데 목격자에 대해 말하다가 말이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 대협.”

내 말에 빈 술잔을 술을 따르던 서팔봉이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보며 말했다.

“관계가 있기 때문이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데다 자기보신에 적극적인 사람들이네. 관부에서 귀녀를 못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손을 놓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아마 자체적으로 조사를 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의뢰를 했을거네. 그런데도 실질적인 목격자가 한명도 없다. 거기에...”

“거기에 무엇입니까?”

그렇게 빠져들지 말자 생각했음에도 능숙한 변사의 말에 빠져드는 자신에게 굴욕감을 느끼며 나는 서팔봉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본 적도 없는 살인범을 귀녀 라고 부른다. 이상하지 않나? 거기다 근거도 없이 모두가 그리 확신한단 말이지.”

“그럴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적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한번 말해보게.”

괜히 말했다.

또 삼천포로 빠지는거 아니야?

그럼에도 서팔봉의 재촉에 반항하지 못하고 나는 그때 일을 말했다.

“별건 아닙니다. 어렸을 때,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을 먹는데 천장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처음에는 쥐인가 했습니다. 한번으로 끝나나 했는데 계속해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에 괜히 장난기가 발동해서 제가 ‘사람 소리 같지 않아?’ 라고 말했죠. 지금 생각해도 웃기긴 한데. 제 말이 나온 순간 아버지께서 밥을 드시던 중에 자리를 박차고 천장을 뚫고 올라가버린 겁니다. 저야 어안이 벙벙 했죠.”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서팔봉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결말을 이야기 했다.

“뭐 처음 가족들의 예상대로 쥐 였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저녁 내내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죠. 어디에나 있는 시시한 이야기입니다.”

옆에서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을때가 있구나.

그에 반해 서팔봉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자네 생각에는 자네 부친이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하나?”

서팔봉의 물음에 나는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건 어린 시절의 우스운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그냥 놀라셨나 보죠.”

내 말도 안되는 대답에 서팔봉은

“그래, 자네 말대로네. 놀라서 그러신게지.”

“예...?”

“자네 집안은 무관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했지? 아마 자네 아버지는 그 업 때문에 놀라신 걸거네.”

업?

무슨 업 말인가?

업보의 업을 말하는 건가?

“업이라니요?”

“생각해보게. 무관을 한다는건 결국 무림에 속해 있다는 말이네. 자네는 그 무림이라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은원관계가 생기는지 아나? 자네는 상상도 못할걸세. 별의 별 하찮은 이유로 평생 원수가 되는 것도 흔한 세상이니까.”

서팔봉의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옆에서 용춘이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런 옛날 이야기와 귀녀의 이야기에 연관이 있습니까?”

그 말에 서팔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녀 라는 단어와 그가 어린 시절 내뱉은 한마디. 내 생각에 지금 상황 속에서 그 둘은 크게 다르지 않네. 문제는 누가 주공자의 아버지 역할을 맡느냐지.”

계속해서 용춘이 서팔봉의 말에 합을 맞췄다.

“그 말씀은...?”

“단순한 이유지...”

서팔봉은 말을 하며 나와 용춘을 번갈아 쳐다 봤다.

“귀녀 라는 단어에 이곳 제삼골목 사람들을 쉬쉬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말이네.”

“이곳 사람들과 귀녀가 살인사건이 이전부터 관련이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용춘의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귀녀의 존재가 본디부터 존재 했다기보다 귀녀라는 상징을 통해 연상되는 이가 있을 거라는 말이네.”

“아...”

“이제 알아차렸나 보군.”

서팔봉의 말에 용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소리 같지 않아’ 라는 말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건 귀녀 라는 말이 이곳 사람들의 과거의 어떤 죄과를 떠올리게 한 말이었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그 말대로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제삼골목 사람들이 이주를 하지 않는게야.”

이주를 하지 않는 이유와 그 죄과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충격에서 벗어나 서팔봉의 말을 쫓았다.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용춘도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없이 서팔봉의 대답을 재촉했다.

“비유를 해보도록 하지. 불이 났을 때, 도망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네. 응당 두려움에 몸을 사려야 할 사람들이 큰 불이 났음에도 희희낙락 한다면 그게 무슨 이유에서 겠나?”

그 말에 나는 궁리 했다.

불이 났을 때, 도망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몸을 사려야 하는데도 희희낙락하며 평소의 생활을 계속 해나간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용춘을 바라봤다.

혹시 용춘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용춘 역시도 답을 찾지 못했는지 미간에 주름이 가득했다.

분명히 답은 서팔봉의 말 안에 있다.

반다경에서 좀 지났을 무렵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짜증이 활화산처럼 솟아났다.

그런 내 모습을 맞은편에 앉은 서팔봉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사람 마냥 술잔을 홀짝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은 질문을 낸 사람이니 내 고민과는 관계 없다는 말이겠지.

나는 술잔을 들었다.

술잔 안에서 술이 찰랑거리며 흔들렸고 그 안의 내 모습이 흔들려 보였다.

나도 그냥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할까.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옆에 용춘이 있다.

하다보면 용춘이 해답을 말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순간 번뜩 하고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강 건너 불구경...”

속삭이듯 튀어나온 내 말에 서팔봉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서팔봉의 반응에 용춘이 나를 돌아봤다.

나 역시 용춘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용춘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섭섭 했지만 나는 일단 앞서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팔봉을 보며 말했다.

“확신은 없습니다만... 혹시 대협께서 말씀하고 싶으셨던 건 지난 오년간 벌어진 연속살인사건에 이곳 사람들이 스스로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말 아닙니까?”

서팔봉은 술잔을 흔들며 되물었다.

“왜 그렇지?”

“그건...불이 났는데도 도망갈 필요가 없는 사람은 강 건너에서 불구경을 하는 사람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협께서 이런 수수께끼를 내준 건 그런 의미 아닙니까? 피해자들은 화재의 당사자들이지만 제삼골목의 다른 주민들은 방관자들이라는..,”

서팔봉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잘 알아냈군.”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는 서팔봉을 빤히 바라봤다.

대답은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제는 서팔봉이 설명해야 할 내용이 남아있었다.

“그래, 그 말대로네. 이 곳의 주민들은 ‘귀녀’라는 말과 연속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을 통해 깨달은게지. 우리는 이 화재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이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건 무엇이겠나?”

서팔봉의 말에 나는 즉각 대답했다.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자들의 배경조사를 해야 하네. 살인은 오년전부터 일어났고 귀녀 라는 단어와 피해자들의 관계를 마을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그건 신체적이거나 직업적인 특징이 아닌 과거의 어떤 일과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일테니까.”

서팔봉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 한 후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대협의 손자 되는 분의 신원을 그렇게 오랜 시간 귀녀의 손에 맡기기에는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불편한 사실을 상기 해버렸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걸세. 다만 좀 불편한 조사가 되기는 하겠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물론 그렇기는 하지 문제는 우리가 이제부터 만나야 할 사람들이네.”

나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물었다.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이들 입니까?”

“아니네. 다만 양심에 걸릴 뿐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그 사건의 유족들이네.”

그 말에 서팔봉이 불편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유족 안에는 새벽에 아들을 잃은 그 노파도 있을 테니까.

노파가 있다.

나는 내내 서팔봉이 오늘 아침의 사건에 끼어든 이유가 숙수가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게 될 것을 염려해서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바로 근처에 숙수의 형제가 있음에도 서팔봉은 그 숙수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무관심 해보였고 도리어 숙수의 특징을 나를 설득하는 근거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과 지금 서팔봉이 짓는 표정을 보니 불현 듯 오늘 아침 서팔봉이 노파의 어깨에 손을 얻고 무언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말소리는 작아 들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 노파의 곡성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오늘 아침 서팔봉이 사건에 끼어들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물론 내 비약 일지도 모르지만.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앞에서 들려온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 바빠 질거네.”

“지금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물론이지. 그래야...”

서팔봉은 마지막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을 넘기기 전에 사건을 해결 할 수 있지 않겠나. 귀녀가 납치범인 마지막 이유는 걸으면서 말해주겠네.”

그 말과 함께 나와 용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앞장서고 우리는 그를 따라 객잔 문을 나섰다.



“나와 과거에 원한을 졌던 자는 북경에 없네.”

서팔봉은 일직선으로 된 제삼골목을 걸으며 말했다.

통칭 제삼골목이라 불리는 이곳은 하나의 길을 따라 양 옆으로 건물이 늘어선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구조이니 만큼 시작과 끝이 존재 했고 그 둘은 아주 거대한 건물의 벽면으로 존재 했다.

그 길을 걸으며 서팔봉은 객잔에서의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다면 내가 이 곳 북경에 와서 처음 원한을 진 자가 손자를 납치해 갔다고 봐야지 않겠나?”

나는 서팔봉의 말에 대답했다.

“대협 말씀은 귀녀와 원한을 졌기에 손자분이 납치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나는 앞서 걷는 서팔봉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서팔봉이 말하는 원한이란 오늘 아침의 일 일게 분명했다.

그 외의 일이 있다면 서팔봉 이자는 어지간한 사고뭉치라는 말 밖에 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대협, 그 정도 일로 원한이라 할 수 있습니까? 대협은 그저 억울한 처지에 처한 이를 도운 것 뿐이지 않습니까? 실상 귀녀에게 뭔가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들고 있던 당과 하나를 씹었다.

아그작 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자극했다.

“대협 제 말이 틀립니까?”

아그작 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서팔봉이 입을 열었다.

“원론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네. 맞아 자네 말대로 사실 별 일 아니지.”

“그렇다면 왜...?”

서팔봉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내 말에 답했다.

“별 일이 아니다. 그걸 누가 정의하겠나.”

“그야... 누가 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등을 돌린 상태에서 젓는 고개는 새로운 느낌이 있었다.

뭔가 더 심도 깊은 굴욕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기분 참 더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니지. 오늘 아침의 일을 별 일 아니다 라고 말하는 건 바로 자네의 주관이고 나의 주관이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건과 별개인 구경꾼들 역시 그렇지.”

“대협의 말씀은 그 일이 귀녀에게는 별 일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말은 오늘 아침 내가 귀녀에 대해 꽤 근접한 근거를 내놨다는 말 아니겠나.”

나는 잠시 서팔봉의 등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은 좀 심한 자뻑 증상이 있었다.

“대협 그렇지만 말입니다. 대협의 확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귀녀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서팔봉은 고개만을 살짝 돌려 나를 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지적이군. 하지만 자네가 잊은 말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이지.”

설마 이거 말장난인가?

한순간 튀어나온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장난이든 뭐든 그의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눈으로 봐야지만 알 수 있는건 아니다.

말로도 충분히 전달은 된다.

그건 서팔봉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 말이 반나절만에 제삼골목 너머까지 알려졌겠습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두 번째 당과를 씹어 삼킨 후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너무 이른 시간이지. 아무리 발 없는 말이 빠르다 한들. 그 시간에 북경 전체 아니지 전문대가까지 퍼져나가지도 못했을게야. 그렇다면 이런 가정이 생기지 않겠나?”

“어떤 가정 말입니까?”

“그거야 물론 귀녀는...”

“제삼골목의 거주민 일수도 있다는 말이로군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서팔봉의 마지막 말을 가로채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용춘의 말에 앞에서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오늘 처음으로 용춘이 마음에 드는군.

“그 말대로네.”

“귀녀가 이곳에 산다 그건 그렇다 치죠. 그렇다 해도 억측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네. 하지만 아까 객잔에서 자네도 듣지 않았나. 귀녀에게 있어 내가 했던 말이 위협이 되었다는 증거를 말일세.”

서팔봉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을 마친 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점은 내 누님과 닮아 있었다.

숙제를 내주고 답을 기다린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답이 늦게 나오든 틀리든 뺨을 때리지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또 모르지 남이 아닌 사돈의 팔촌쯤이나 되었다면 뺨을 때렸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엉덩이를 때리거나.

그런 기괴한 생각이 들 만큼 서팔봉은 누님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안좋은 쪽으로.

그런 오한이 드는 생각을 털어내고 나는 서팔봉이 말한 증거에 대해 생각했다.

객잔에서 서팔봉이 보여준 귀녀 납치범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

서팔봉의 말 속에서 나는 생각해야 할 부분의 범위를 한정 했다.

그리고 객잔에서의 일을 더듬어 갔다.

순간적으로 객잔에서 서팔봉과 나눴던 대화와 소소한 일들이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그 생각 속에서 증거라고 할 만한 하나의 물건이 떠올랐다.

“혹시... 납치범이 남기고 갔다는 천쪼가리를 말 하는 겁니까?”

“이번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군. 맞네. 그것이지.”

나는 순간적으로 왜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기실 서팔봉의 머릿속 생각을 알아서 내놓은 답이 아닌 일종의 때려 맞추기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말이 없군. 궁금하지 않나?”

서팔봉의 말이 도발적으로 들려온 건 내 착각 일까.

그 말에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순순히 서팔봉의 도발에 무릎 꿇었다.

“궁금합니다. 말해주시죠.”

내 대답에 서팔봉은 세 번째 당과를 씹어 삼켰다.

“단순한 이유라네.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었기 때문이지.”

“즉각적이라니요?”

“생각해보게. 북경에 나에게 원한을 진 자가 있다고 쳐보지. 그렇다면 자네라면 어쩌겠나. 보였다고 바로 손자를 납치하고 그런 애매모호한 서찰을 남기겠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 후 말했다.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좀 더 동태를 살핀 후에 행동을 했겠죠. 서찰 또한 좀 더 명확한 요구 사항을 적어서 남겼을 겁니다.”

“그렇네. 내 손자를 납치한 범인은 오랜 시간 원한을 쌓아서 나를 노린게 아니야. 애초에 내게 고통을 주려는 낌새 자체가 느껴지지를 않으니 말이지. 오히려 오랜 시간 생각해온 계획된 범죄라기보다는 우발적인 범행에 가깝게 느껴지네. 즉 납치범은 당황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이지.”

나는 서팔봉이 말한 당황 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의문점을 그에게 말했다.

“당황 했다니요? 귀녀는 잡히지 않았고 실제 대협이 말했던 귀녀의 범인상이라고 해봐야 귀녀에게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애초에 그 숙수의 혐의만 벗길 수 있을 정도로만 말을 한 것이었으니까.”

서팔봉의 그 말에 나는 순간 오한이 들었다.

즉 서팔봉의 말은 거기서 더 나갈 생각만 있었다면 더 많은 사실을 말 할 수 도 있었다는 말 아닌가.

그 극히 짧은 순간 맞닥뜨린 사건 속에서 말이다.

내 생각에 아랑곳없이 서팔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귀녀에게는 그게 아니었던게지.”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면...?”

서팔봉은 마지막 당과를 씹어 삼킨 후 내 말에 대답했다.

“그 몇가지 사실만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그 위협을 사전에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이지. 그것도 아주 다급하게 말이네.”

“이상하군요.”

“아니, 이상할거 없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귀녀라는 단어에는 제삼골목의 과거와 연결된 뭔가가 있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이어봤을 때, 귀녀 역시 과거의 사람인거네.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되는... 과거의 사람 말이지.”

서팔봉의 말이 끝나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귀녀 사건은 도대체 언제 시작된 것인가.

서팔봉의 말대로라면 귀녀는 단순히 오년전부터가 아닌 그보다 더 오랜 과거 속에서부터 존재 해왔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생각 해왔던 귀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암시된 것은 귀녀가 단순한 살육에 미친 살귀가 아닌 길고 긴 시간 속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어둡고 깊은 어떤 것을 쌓아온 존재 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단순한 살귀 와는 다른 충격을 내게 주고 있었다.

“자 들어가지.”

“예?”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었나. 다 왔다는 말이네.”

“어디에 말입니까?”

“어디겠나. 피해자들의 유족 중 한명의 집이네. 들어가지.”

그 말에 순간 망설임을 느꼈다.

이 안으로 한발짝 더 내딛으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시간이 없네.”

그 말에 나는 한발 내딛었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선 건물은 빈말로도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보았던 담벼락 역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해보이지 않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그런데 그 내부는 그보다 더 했다.

초가지붕은 세월에 대부분 날아가 버려 그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집 벽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서 그 구멍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 있었다.

“계십니까?”

서팔봉의 말에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서는게 힘에 부치는지 얕은 신음소리가 딸려 나왔다.

아마도 이 집의 주인은 무너져가는 집만큼이나 쇠약해져 있는 듯 했다.

“뉘시오? 혹 방가 라면 나중에 다시오오. 내 지금은 줄래도 줄게 없으니.”

예상 했던대로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는 우인객잔의 객주 소개로 온 사람들입니다.”

서팔봉의 말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더니 목소리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노파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황객주 소개로 오셨다구?”

“예, 그렇습니다. 좀 여쭤볼게 있어서요.”

그 객주의 성이 황씨 였군.

나는 그 곤욕을 치르고도 처음 들은 객주의 성씨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황객주 말이라면... 한번 들어나 보지. 허나 내 곧 일을 나가봐야 하니. 그리 오래는 못 있을게요.”

“괜찮습니다. 길게 묻지는 않을 테니.”

노파는 그 말에 문간 옆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지만 의자는 더 없소. 집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 말이오.”

노파의 말에 서팔봉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나 역시 굳이 노파를 밀어내고 의자에 앉을 생각을 없었다.

“물어볼게 뭬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노파를 보며 나는 이 노파가 소싯적에는 한 성질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시덥 잖은 추측을 했다.

그에 굳이 예를 차릴 필요가 없다 생각했는지 서팔봉 역시 바로 질문에 들어갔다.

“어르신의 죽은 아드님에 대해서입니다.”

“그걸 물어서 무에 쓰게?”

노파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채 대답했다.

“귀녀 때문에 곤란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고년이 아직도 살아있으니 곤란을 겪는 사람이야 계속 생기겠지. 들어보니 아랫집 아들도 당했다던가?”

“잘 아시는군요.”

“근처 사는 사람들이 오지랖이 넓어서 말이야. 그런 일이라면 바로 와서 말해주지. 그딴 소문보다 쌀이 더 급한데 말이지.”

노파의 냉소적인 말에도 서팔봉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노파가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을 뿐 이었다.

그리고 노파의 말이 끝나면 조급해하지 않고 할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야. 언제나 그렇지요. 괜찮으시다면 이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서팔봉의 말에 노파는 눈을 살짝 치켜떴다가 이내 내리깔며 말했다.

“하시오.”

노파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팔봉은 바로 질문을 했다.

“어르신의 아드님은 피살될 당시 몇 살이었습니까?”

“서른둘이었소.”

“혼인은 했습니까?”

“했으면 내 꼴이 이러겠소?”

“외모는 어땠습니까?”

“나와 많이 닮았소.”

못생겼겠군.

나는 입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키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당신만 했소.”

서팔봉의 키는 칠척 정도 되었다.

내 키도 딱 그 정도 였다.

“무공을 익혔습니까?”

“지금보다야 나았지만 그 애가 살아있었을 때도 그럴만한 돈은 없었수다.”

“사체가 발견된 곳은 어디였습니까?”

“집 앞이었소.”

서팔봉과 노파는 그 이후로도 피해자의 신변에 대해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대화에 하품이 나오기 시작 할 무렵 서팔봉이 마지막 질문을 했다.

“어르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만 하고 저희는 가도록 하지요.”

“그러시오. 시간도 딱 맞췄구만. 일 나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서팔봉은 잠시간 노파를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아드님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노파는 서팔봉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 하려다 숨을 들이키며 나가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서팔봉을 올려다 봤다.

“그건 왜 물으시오?”

“왜 곤란하십니까?”

나는 그 질문에 이제까지의 분위기가 반전 되는걸 느꼈다.

이제까지 문답을 하는 중에 주도권은 노파에게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 했었다.

서팔봉은 계속해서 자신을 굽혔고 노파는 꼿꼿하게 할 말만 하고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느꼈는데...

직업에 대해서 묻는 순간 노파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 했다.

“정말 황객주가 소개 해준거요?”

서팔봉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노파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이제까지의 노인공경을 아는 중년인의 모습은 온대 간대 없었다.

서팔봉은 표정만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 나도 말 안한다.

이렇게 말하니 좀 치졸해 보이는데 직접 보면 상당히 박력 있는 모습이었다.

“예, 맞습니다.”

서팔봉이 입을 다물었기에 내가 대신 답했다. 노파는 내게로 시선을 주다가 이내 서팔봉에게로 시선을 복귀 시켰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수.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애들이라면 필히 하게 되는 일이었지.”

“그게 무슨 일이었습니까?”

서팔봉이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본인이 원하는 답을 강요했다.

“말은 해주겠지만 그걸로 내 아들을 판단하지 마시구랴. 그 애도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었습니까?”

서팔봉에게 더 이상의 동정을 바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죽림원이라고 아시오?”

그 말에 나는 용춘을 돌아봤다.

그녀도 모르겠는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제삼골목에서 그들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소.”

서팔봉이 노파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피고는 노파에게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볼 일 보십시오.”

서팔봉은 그대로 몸을 돌려 집에서 걸어 나갔다.

그 등에 대고 노파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들은 죽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소.”

서팔봉은 그대로 문을 나섰다.

나 역시 서팔봉을 따라 나갔다.

하지만 궁금증만은 남아 문 밖으로 나가기를 망설였다. 노파와 서팔봉 간의 대화 속에서 너무 많은 의문들이 설명되지 않고 축소 되어서 였다.

문 밖을 나와 쉬지 않고 곧장 길을 걷는 서팔봉을 보며 나는 물었다.

“죽림원이 무엇입니까?”

서팔봉은 내 말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모르네.”

서팔봉의 말에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나오신 겁니까?”

“그 이상 물어도 노파는 더 말하지 않았을 것이네. 하지만 죽림원이 뭘 말하는지는 대충 알겠더군.”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모르지만 알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생각하기에 죽림원이 뭘 말하는 것 같나?”

“글쎄요. 서원 같은거 아닐까요?”

내 말에 갑자기 서팔봉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자네 상상력도 좋구만.”

“비꼬시는 겁니까?”

“아니네. 아니야. 생각해보게 노파가 말하지 않았나. 죽림원은 제삼골목에 있고 그 세력은 제삼골목을 틀어쥐고 있을 정도 라고 말이네. 자네 보기에 이곳에 문인들이 살 것 같나?”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실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까지 걸어오면서 봐왔던 풍경이 계속 반복될 뿐이까.

낡고 허름한 벽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을 것 같은 서까래.

빈 말이라도 문인들이 살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죽림원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냥 이름 일뿐이네. 그 정체야 뻔한거지.”

“뻔한거라 하심은?”

“자네야 좋은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으니 모를수도 있겠군. 어느 지역에나 화려한 번화가의 뒷면에는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네. 그 그림자 속에 빛이 강해지면 강해 질 수 록 그에 따라 그림자가 짙어지면 짙어 질 수 록 이득을 보는 무리들이 있지.”

나는 불현 듯 집에 두고 온 [전문대가 일람]이 떠올랐다.

그 안에 죽림 머시기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명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크게 관심 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곳 사람들은 죽림원을 죽림원이라 부르지 않을 걸세.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서팔봉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죽림파 라고 말이야.”

“죽림파 라면... 무림문파 입니까? 그런 조직을 저희가 상대 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서팔봉은 파안대소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는 몸을 떨었다.

좀 부담스러운데요.

“이...이거 참 내 설명이 미진했구만. 자네가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지 잊었었네. 내가 미안하네. 미안해.”

미안하다면서도 그는 쉽사리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하는 냥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또 옆에서 까지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용춘의 웃음이었다.

이걸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다고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 예상이네만 죽림파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닐거네.”

겨우 웃음을 멈춘 서팔봉이 다시 몸을 돌리고는 앞서 걸으며 말했다.

“뭐가 다릅니까?”

“사실 역할이야 크게 다르지 않지. 자기들끼리의 패싸움에서 보호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자릿세를 받으니 말이야.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가진 힘의 크기 라네.”

“이유가 그 뿐이라면 다를게 없는 거 같은데요.”

서팔봉의 말에 내가 약간 야유 섞인 어투로 대답 했지만 서팔봉은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앞서 한 이야기를 침착하게 이어나갈 뿐이었다.

“아니네. 이게 결정적인 차이가 된다네.”

“어찌 그렇습니까?”

“그로인해 살아가는 방법도 달라진다네. 칼이 있느냐 없느냐로 말이지.”

“칼은 누구나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용춘이 끼어들었다.

“서대협의 말은 비유입니다. 무공을 칼에 비유한 게지요.”

그 말에 서팔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림파라 불리는 단체는 무공을 모르는 이들이 모여 만든 것 입니까? 그렇다면 단순한 왈자패 아닙니까? 겨우 그런 이들에게 이 골목이 장악 되다니요.”

서팔봉은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바라봤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곳은 그림자라고 말일세.”

“그게 이유가 됩니까?”

나는 서팔봉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 제삼골목까지 오는 동안 나는 제일,제이 골목을 모두 지나왔다.

그 골목들은 하나 같이 활기가 넘쳤다. 다양한 문물이 오고 갔고 다양한 인종이 오고 갔다.

그것은 제삼골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도 주변으로 화려한 옷차림의 왜인들이 골목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저는 대협의 그림자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곳을 보십시오. 이렇게 활기찬 곳인데. 그림자라 부르는게 가당키나 합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걸음을 멈췄다.

오고 가던 이들이 불평을 내뱉으며 지나쳐 갔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림자란 무엇인가?”

몸을 돌린 서팔봉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불만을 담아 답했다.

“사람들이 의식주 모두를 충당하지 못하는 곳을 그림자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림자는 장소에서 비롯 되는게 아니네.”

“그럼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입니까?”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주변을 둘러보게. 어떤가? 자네 말대로 사람이 많고 떠들썩하며 많은 물건이 오가네. 하지만 건물들은 어떤가?”

“그야...”

“아까 노파의 집을 봤지. 노파의 집 앞에도 사람이 없던가? 물건이 없던가?”

“아닙니다...”

“모든게 노파의 집 앞을 오고 갔지만 노파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네. 길거리의 활기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비켜간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아나?”

나는 머리를 쥐어짰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 모든게 정상적인게 아니기 때문이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이 활기가 말일세.”

“정상이 아니라니요?”

“자네도 아침에 봤을 게야. 관의 포두라는 자가 어떤 행동을 하던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팔봉을 바라봤다.

그게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서팔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엄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사건을 종결시키려 했지. 그게 정상인가? 아니지. 내 생각이네만 아마 포두가 그리 한 것은 이 골목을 휘어잡고 있는 이들이 귀녀가 계속해서 나다니는걸 원치 않아서 일거네.”

“그 말씀은 죽림파 라는 곳이 뒤에서 힘을 썼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무림의 명숙들이 그 죽림파를 밀어내고 제삼골목을 관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서팔봉은 빤히 나를 쳐다봤다.

“그게 자네가 죽림파를 일개 왈자패로 보는 이유인가?”

“제 말이 틀렸습니까?”

서팔봉은 내 대답에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지에는 음지의 생존법이 있는 법이네. 이끼처럼 말이지.”

“그 말씀은 무림문파로는 이곳을 장악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네.”

나는 순간 쾌재를 불렀다.

서팔봉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생각해서 였다.

“죽림파가 이곳에 얼마나 잘 적응했든 그들의 힘은 미약 합니다. 더군다나 무림문파에는 못해도 그들보다는 몇배 유능한 인재들이 있습니다. 일단 저희 무관만 해도 그렇습니다. 옆의 용춘만 하더라도 단신으로 장정 다섯은 제압 할 수 있지요.”

“자네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내 말은 힘으로 누를 수 없을 거라는 말이 아니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

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처음 자네가 말 했던대로 이곳에는 많은 물건과 사람이 오가네. 그런데 생각해 본적 있나?”

“무엇을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 제삼골목에 오는지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 말이야.”

서팔봉이 말하기 전까지 생각해 본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 지적에 나는 어물어물 거리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용춘을 봤다.

용춘이라면 나의 생각에 동의 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춘은 그런 나의 기대를 냉정하게 외면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에 나는 힘없이 서팔봉의 물음에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서팔봉은 내 대답에 잠시 나를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길 가던 행상인을 불러 세웠다.

“그거 얼마요?”

행상인은 앞에 걸고 있던 판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판 위에는 색색깔의 종이가 놓여져 있었다.

“이 앞에 빨간 것은 은 닷냥, 퍼런 것은 은 석냥이오. 노란건 은 한냥이고.”

서팔봉은 망설임 없이 노란색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째서 그랬는지. 나는 순순히 소매부리에서 은 한냥을 꺼내 서팔봉의 손에 쥐어줬다.

서팔봉은 그 돈을 행상인에게 지불했다.

행상인은 돈을 받자 바로 자리를 떴다.

서팔봉은 떠나간 행상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 앞에 노란색 종이를 내밀었다.

“자, 자네 수업료네.”

나는 머뭇거리다.

서팔봉이 내민 종이를 집어 들었다.

“펴보게.”

서팔봉의 말을 따라 나는 접혀져 있던 종이를 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이게 뭡니까?”

“뭘거 같나?”

“밀가루 입니까?”

“자네 고향에서는 밀가루를 이리 소량으로 파나?”

“그럼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이네.”

나는 놀라서 그것을 쳐다봤다.

해는 중천에 떠있다. 점차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을때 였다.

“대명 천지에서 이런...”

내 말에 서팔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급히 쫓으며 나는 이 황당한 사실에 대하여 서팔봉에게 물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것 입니까? 황제의 발치에서 아편을 팔다니요.”

“그게 어찌 가능하다 생각하나?”

서팔봉의 말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

“그럴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발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고 해봐야 소용없을 거네. 그 전에 내 말에나 대답을 하게나.”

일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나도 평온한 서팔봉의 신색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 속 한구석에서도 서팔봉의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앞서 서팔봉이 말한 포두와 죽림파의 관계를 생각하기만 해도 뻔한 일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봤다.

“관부 역시 연루되어 있기 때문 아닙니까?”

“맞네. 그 것도 있지.”

그것도 있지 라고?

그뿐이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서팔봉의 등을 보며 말했다.

“그것뿐이 아니란 말입니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무림에서 관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서팔봉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아니, 나는 틀렸다고 하지 않았네. 그럴 이유가 없다고 했지.”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니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

"그렇다면 대협 말씀은 무림문파들이 할 수 있음에도 하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까?“

“그렇네. 생각해보게 자네 말대로 이 곳은 많은 이권이 오가지. 아편 거래만이 아닐게야. 자네 생각이야. 무림세력이 이 판에 끼어들어 아편을 몰아내어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자 라는 거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네.”

“어찌 그렇습니까?”

나는 겨우 진정 되었던 마음이 다시 격앙 되는걸 느꼈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생각해보게 무림문파들의 힘은 막강하네. 나라를 넘볼 수는 없지만 이런 거리야 쉽게 차지 할 수 있지. 하지만 국법으로 금지된 아편을 거래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관부와 무림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이 무림에만 예외로 적용되는건 아니기 때문이지.”

나는 서팔봉의 말에 집중했다.

“거기서 무림세력이 이 거리에 끼어들지 않는 이유가 만들어지지. 법의 안팎을 오가기 위해서는 많은 요령이 필요하네.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온갖 추잡한 일을 처리해야 하기도 하지. 자네가 생각하기에 무림문파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할 수 없네. 그런 일은 날 때부터 이 거리의 생리를 잘 알고 살아남기 위해 선천적으로 법의 안팎을 넘나든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러니 생각해보게 자네라면 굳이 수고를 들여 이 거리를 차지 하겠나?”

서팔봉의 물음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왜 인가?”

“차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적당히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게 무언가?”

나는 망설이다.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거리를 차지하지 않는 조건으로 뒷돈을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네. 이익 이라는게 꼭 도박판에서 골패를 만져야 들어오는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지.”

“하지만 그건...”

“좋은 일은 아니지. 이 거리를 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나 진배없으니 말이네.”

나는 서팔봉의 말이 끝난 후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전문대가 일람]에서 이 거리의 역사에 대해 읽었다.

전문대가가 북경에서 거대상권으로 자리 잡은 직후부터 생겼다고 했던가.

골목이 자리 잡은 이유는 전문대가의 상가에서 그날 그날 품삭을 받으며 연명하던 이들이 살 곳을 찾고 찾다 당시 버려져 있던 이곳에 자리를 틀었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갈 곳이 없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찾은 곳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곳에서 또다시 그들은 버림받고 있었다.

서팔봉의 말대로라면 그들이 보듬고 그들이 키웠던 아이들에 의해서 말이다.

“자네, 진사시험을 보러 북경에 올라왔다 했지?”

서팔봉의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풍경을 둘러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개만을 살짝 돌린채 나를 보고 있었다.

“예 그렇지요. 떨어졌지만 말입니다.”

“뭐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볼 것 아닌가?”

서팔봉의 말에 나는 계속해서 줄어들던 용돈을 떠올렸다.

또 본다면 더 적어지겠지.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만약 또 본게 된다면 그때는 이 골목을 잊지 말게나.”

나는 서팔봉이 말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팔봉은 미진한 내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는지 앞으로 고개를 돌려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너무 시간을 끌었구만. 서두르지. 자시초까지 네시진도 안남았으니 말이네.”

나는 그 말에 의문을 느꼈다.

우리가 앞으로 만나야 할 유족은 이제 열네명이다.

그들이 모두 모여 산다면 모르겠지만 지금만 해도 우리는 골목의 반대편에서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제삼골목은 폭은 좁았지만 길이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느껴질 정도로 길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팔봉이 말한 네시진 안에 유족을 모두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에 귀녀를 찾고 손자까지 찾는다니.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대협, 그 시간안에 남은 열네명의 유족을 모두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전부 만났다면 그럴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어찌...?”

“전부 만나지 않으면 되지 않겠나.”

“예? 하지만 피해자의 공통점을 찾으려면 모두 만나야 하지 않습니까?”

서팔봉은 한 대문 앞에 멈춰서며 대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우리는 앞으로 세 사람만 더 만나면 된다네.”

나는 그 말에 의문을 느끼며 서팔봉을 쳐다봤다.

내 의문에 서팔봉은 대답하지 않고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시진이 지났다.

우리는 노상찻집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맞은편의 서팔봉을 바라봤다.

그가 단언 했던 대로 였다. 그는 네 명의 유족만을 만났다.

그리고는 목이 마르다며 우연히 발견한 노상찻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를 주문한 그는 말 그대로 일다경 동안 차만 마시며 침묵했다.

그 일다경 동안 내가 서팔봉의 행동에 의문을 느낀 건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네 명의 유족을 만나는 동안 드러난 사실은 별것 없었다.

앞서 처음 만났던 노파와 다르지 않은 문답이 오갔고 그 내용도 대동소이 했다.

한마디로 특별할게 없는 대면이었다.

“대협, 얻은게 있으십니까?”

나는 서팔봉에게 물었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내 말 때문인지 아니면 찻잔을 내려둘때가 되어서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찻잔을 내려두었다.

“자네는 얻은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나 보군.”

서팔봉의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 했다.

“아닙니다. 대협이 아닌 제가 그 문답에서 얻은게 없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피식 웃었다.

그래, 마음껏 비웃으십시오.

“왜 그 문답에서 얻은게 별로 없다 생각했나?”

나는 서팔봉의 질문에 생각했다.

물론 아주 얻은게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처음 노파와의 대면에서 서팔봉은 직업에 대해 물어보았고 그 덕에 죽림파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죽림파의 등장으로 귀녀의 과거가 좀 더 구체적인 사실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건 확실한 수확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만난 세 명의 유족들에게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그 의문을 서팔봉에게 말했다.

서팔봉은 그에 차를 한잔 더 주문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뭐 하자는 겁니까?

“아 미안하네. 의외로 이 곳 차 맛이 좋아서 말이지.”

나는 목이 타는 걸 느꼈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는 서팔봉을 쳐다봤다.

내 모습에 서팔봉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생각은 한마디로 내 질문들이 무의미 했다는 말이로군. 내 말이 맞나?”

단도직입적인 서팔봉의 말에 나는 애매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박에 부정하는 건 실례다 싶어서 였다.

“틀린 말은 아니네.”

“예?”

“물론 거기에는 단서가 붙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질문을 했을 거라는 단서 말이네.”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어 젖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내가 이 사람을 끝까지 따라 갈 수 있을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네. 옆의 오소저도 그리 생각하지 않나?”

나와 용춘을 향한 질문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용춘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게 느껴졌다.

사실이 그랬으니 어떻게 반박을 하겠는가.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나는 유족들과의 면담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이 밑바탕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그럼 이유를 말해 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자네 생각대로 내 질문은 일견 무의미 해 보인다네. 소싯적에도 그 때문에 타박을 받은 적이 있지.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주지. 자네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니까.”

안해주셔도 됩니다.

“우선 자네는 내 질문이 너무 단순하다 생각 했을 거네. 누구라도 물어볼 법한 질문들 뿐 이었으니까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네가 간과 하는 부분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왜 내가 그런 질문을 했는가네.”

“그것은...”

나는 그가 왜 그런 질문들을 했는지 생각했다.

달리 질문할게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유족들이 비협조적 일 걸 염려해서?

나는 떠오른 생각들을 서팔봉에게 말했다.

“그럭저럭 잘 생각했군. 다 맞는 말이네. 하지만 자네가 말한 것들 중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의도는 없네.”

“그 외에 달리 의도가 있으시다는 말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목기를 옆으로 밀어냈다. 목기를 밀어낸 자리에 팔꿈치를 올리며 서팔봉은 말했다.

“왜 없겠나? 자네 말대로 우리는 시간이 없네. 그러니 비협조적인 유족들에게 복잡한 질문을 강요해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되지. 그에 당연히 질문을 선택 할 수 도 없네. 그렇다면 남는 건 뭐겠나?”

서팔봉의 질문에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그 생각 중 그나마 그럴듯한 것을 나는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끼워 맞추기 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호오 하며 마치 시키는 재주를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낸 개의 새끼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뭘 해도 보람보다 굴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말대로네. 내 추론에 유족들의 대답을 끼워 맞추는 게지.”

“그건 틀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서팔봉이 막 내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주문한 차가 나왔다.

서팔봉은 팔꿈치를 떼고 주문한 차에 자리를 양보 했다.

그리고 점원이 들고 있는 쟁반 위에 동전 한 닢을 올려 계산을 치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궁금증에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아내야 했다.

점원이 떠나고 서팔봉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나는 서팔봉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틀릴 수도 있다 까지 했지?”

“예.”

“흠... 물론 틀릴 수도 있네. 하지만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자네는 내가 유족에게 한 질문과 질문의 답에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

“글쎄요. 피해자들의 나이와 혼인여부가 천차만별이라는 점과 죽은 자의 살아생전 외모 역시 모두 달랐다는 점 정도 일까요? 거기에 무공 수련 여부 역시 모두 달라서 공통점이라고는 직업 외에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지요.”

“꽤 많은 사실이 보이지 않나?”

서팔봉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보이죠.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점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여유부리지 말고 다른 유족들을 더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네는 질문을 왜 하는 거라 생각하나?”

“대협께서 이전에 말 하셨잖습니까?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이지요.”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사람이 타인에게 질문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말 하는 거네.”

나는 서팔봉의 말에 아주 잠깐 생각 한 후 말했다.

“궁금하니 물어보는거 아닙니까?”

“아니네.”

서팔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어 말했다.

“질문이란 확신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네.”

“확신이요? 그렇다면 뭐라도 알아내신 겁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었겠나?”

그렇게 말하며 서팔봉은 찻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의 눈짓을 따라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흔들리는 찻잔에 찻잎이 떠다녔다.

그 지극히 한가로운 모습을 찰나 간 바라본 후 나는 서팔봉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서팔봉은 찻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켰다.

목을 축인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내가 얻어야 할 확신은 귀녀와 피해자들의 과거가 정말 연결이 되어 있는가 라네. 일단 이 생각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내 가설은 그저 늙은이의 망상 일 뿐이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서팔봉은 귀녀와 피해자들의 과거에 어떤 연결점이 있을 거라 생각 했다.

하지만 서팔봉이 자인 한 대로 실제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그건 가설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때문에 마음 한 켠에 서팔봉의 생각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입증되지 않은 추론에는 가속도가 붙지 않는 법이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황객주에게 피해자들과 유족들에 대하여 물었지. 그리고 그 후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 들린 사건 현장에서 자네들을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일세.”

그러게 왜 그 자리에 있었지?

이미 한 차례 둘러봤던 사건현장에 새삼스럽게 다시 갈 이유가 있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새로운 궁금증이 유족들과의 대화에 대한 내 궁금증을 밀어냈다.

나는 왜 굳이 사건현장에 다시 들렸는지 물었다.

“그건 내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네.”

나의 갑작스런 화제전환에도 서팔봉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침에 숙수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나는 범인의 키에 대해 언급 했었네.”

“그러셨지요.”

“그때 내가 말했을 것이네. 범인이 칼을 휘둘렀을 때, 무릎을 굽혔을 거라고 말이야.”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리 말 하셨지요. 목을 일도에 베어내기 위해서는 무릎을 굽혀 칼에 힘을 싣지 않을 수 없다며 말입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었지.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다만 좀 이상한 점이 있었지.”

“그게 무엇 입니까?”

“족흔이네.”

“족흔 말입니까?”

“처음 사건현장을 보면서 피해자의 사체와 목이 떨어져 있던 위치로 귀녀가 서있었을 위치는 대충 파악 했었네.”

서팔봉의 말에 나는 점차 그의 과거가 궁금해 졌다.

보통 그 순간에 그런 부분까지 파악 할 수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나의 의문을 뒤로 하고 서팔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는 대충 보아 넘겼었지. 숙수의 무죄를 밝히는데 그것까지 언급 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네.”

“족흔이 새삼 중요해진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이네. 자네가 생각하기에 진창 위에서 앞발에 힘을 준다면 족흔이 어찌 남으리라 보나?”

생각 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아주 뚜렷하게 남겠지요.”

“그렇네. 그런데 현장에 남아있던 족흔은 그런 내 예상을 벗어나더란 말이네.”

“어떤 점에서 그러했습니까?”

서팔봉은 찻잔을 손 안에서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족흔이 남아 있기는 했네. 그런데 그 형태가 이상했지. 발의 뒤꿈치 부분과 앞부분의 깊이가 다르더군.”

“그게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글쎄...”

서팔봉은 드물게 말을 끈 후 말했다.

“지금으로선 뭐라 말하기 힘들군. 하지만 귀녀를 쫓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거란 예감은 드네.”

모른다는 말 참 거창하게 하는군.

나는 굳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서팔봉을 가만히 쳐다봤다.

내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때 헛기침이 나온 건지.

서팔봉은 한차례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말이 샌 것 같군. 본론으로 돌아가지.”

발자국에 대한 궁금증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나는 서팔봉의 말에 따랐다.

“황객주에게 피해자들에 대해 물었다는 부분까지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랬지. 나는 황객주에게 유족들에 대하여 전해 듣고 나서 제일 먼저 그들을 선별 했네.”

“열다섯명에서 네 명으로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가 생각하기에 선별의 기준이 무엇이었을 것 같나?”

나는 서팔봉의 말에 이제까지 만나 본 유족들을 떠올렸다.

너무 많은 사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들었다.

그런 내 머릿속을 예상해서 인지 서팔봉이 조언을 해왔다.

“단순하게 생각하게나.”

나는 서팔봉이 말한대로 단순한 사실들을 머릿속에 나열했다.

처음 만난 노파는 어땠나?

빈곤했다.

두 번째로 만난 과부는 어땠던가?

부유했다.

세 번째로 만난 노부는 어떠했던가?

평범했다.

네 번째로 만난 청년은 어땠는가?

빈곤했다.

머릿속에 이제까지 만난 유족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자 무언가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서팔봉이 선별한 유족들은 그들의 대답만큼이나 제각각이었다.

그들이 사는 곳도 달랐다.

첫 번의 노파가 후줄근한 집에서 살았다면 둘째 번의 과부는 꽤나 잘 꾸며진 깨끗한 집에서 살았다. 들어선 순간 이곳이 제삼골목인가 싶은 건물이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도 그들의 집을 보고 그들의 경제사정을 추정했다.

나는 그런 내 생각을 서팔봉에게 말했다.

“보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보이지 않나. 자네 생각대로네. 나는 각각 성별, 연령, 경제사정이 극과 극이라 할 만한 사람들만 추려내었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네.”

서팔봉은 단호하게 말했다.

“같은 사실이라도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사실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 여지 속에서도 같은 질문에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높은 가능성으로 내 추론이 맞을 수 있다는 말 아니겠나?”

“그렇군요. 그런데 그 뿐입니까?”

나는 들였던 시간에 비해 서팔봉이 얻은 것이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뭐라 설명 할 수 없었지만 왠지 서팔봉의 설명이 미진하게 느껴졌다.

서팔봉은 내 질문에도 여유 있는 태도를 고수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네.”

“그렇다면?”

“생각보다 많은 걸 알 수 있었지. 보이지 않던 실체가 윤곽을 드러낼 만큼 말이네.”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용춘에게 눈을 맞췄다.

그 모습에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그 윤곽이 어떤 겁니까?”

내 질문에 서팔봉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걸 묻기 전에 먼저 자네가 물어야 될게 있지 않나?”

“무엇을 말입니까?”

서팔봉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고 서두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유를 부리고 있어서 였다.

아니면 그 보았다는 윤곽이 이 정도 여유는 허용할 정도로 확실한 것이란 말인가?

“당연히 ‘어떻게’ 아니겠나.”

나는 서팔봉의 그 말에 찻잔을 들었다.

어느새 다 마셨는지 찻잔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들어 차를 주문했다.

“왜 말이 없나?”

대답을 재촉하는 서팔봉의 말에 나는 애써 황당함을 감췄다.

정말 손자가 납치 된거 맞나?

사실 피라고는 한 방울도 안 섞인 남이 납치 된 거 아냐?

나는 그런 생각을 굳이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서팔봉이 원하는 대답을 했다.

“그래,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내 비꼬는 어투에도 서팔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말했다.

“앞서 나는 질문은 확신을 얻기 위한 것이라 했네. 그리고 내 생각에 질문을 끼워 맞췄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야 할 점은 내가 질문에 어떤 의도를 담았냐 하는 것이 되지.”

“의도 말입니까?”

“그렇네. 여기에 조각난 그림이 있다고 해보지. 그 그림을 본래의 형태로 짜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 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림의 선을 따라 이어 맞춰야겠지요.”

“그 말 대로네. 즉 질문이란 그 그림의 선이라 할 수 있지.”

서팔봉의 말은 알 듯 모를 듯 애매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하여 질문을 할까 했지만 그만 뒀다.

이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서 였다.

서팔봉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그의 손자가 붙잡혀 있는 현 상황이 전혀 괜찮지 않아서 였다.

“질문이 그림의 선이라면 의도는 무엇이겠나?”

서팔봉의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이 그림의 선이라면 의도는 뭐냐고?

내가 주문한 차가 나오고 그 값을 치를 때까지 생각했지만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특별히 어떤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실망이나 비웃음 같은 감정 말이다.

그에 내가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만 서팔봉의 그런 모습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못했을 때 보이는 누님의 표정이 떠올랐다.

완전히 서로 다른 인물임에도 왜 계속 서팔봉에게서 누님이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림은 누가 그리지?”

서팔봉의 말에 나는 수동적으로 대답했다.

“화공이겠지요.”

“그렇다면 생각해보게 그림의 선에는 누구의 의도가 담기겠나?”

그 말에 내 입에서 아 하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화공...이군요.”

“맞네. 화공이 그린 선과 그 의도를 따라 조각을 맞추는 것이네. 내 질문 역시 이 사건을 그린 화공을 쫓아 흩어진 조각을 짜맞추는 것이네. 그 화공이 누구겠는가?”

“귀녀겠지요.”

“그렇네. 그렇기에 내 질문에는 항시 귀녀의 의도가 담겨야 하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지 유족들에게 한 내 질문의 의도는 무엇이겠나?”

서팔봉의 말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었다.

귀녀가 그린 조각난 그림을 쫓는다. 그것을 위해 그림의 조각들을 찾아 그 그림들의 선을 이어 맞춘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난 그림을 대충 이어 맞춰 큰 틀에서 그림의 전체상을 상상해본다.

서팔봉이 이 노상찻집에 앉아 시작해온 모든 이야기가 지금 막 서팔봉이 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귀결 되어 갔다.

그 범람할 듯 넘쳐나는 생각의 파도 속에서 나는 서팔봉을 바라봤다.

그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서론이 길었군. 이제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지.”

확실히 길기는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겠네.”

아직 안 끝났습니까?

이러다 귀녀를 쫓기도 전에 날부터 새겠습니다.

내 속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팔봉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유족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얻은 내 생각을 말하지. 내가 면담을 하는 동안 했던 질문들을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어떤 질문들이었지?”

나는 앞서의 생각을 말했다.

“그렇네. 처음은 나이 그 다음은 혼인여부, 외모, 키, 무공 수련 여부, 사체의 최초 발견 장소, 직업 순이었지.”

서팔봉의 말 대로 였다.

“나는 그 일곱 가지 질문만으로도 귀녀 사건의 윤곽을 그리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았네.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탁자에 몸을 기댄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모습에 나와 용춘 역시 몸을 내밀었다.

이러니 마치 무슨 작당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우선 나는 나이를 물었네. 처음 노파를 만났을 때의 이유는 나이에서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 였지.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 목적이 조금 바뀌었네.”

“어떻게 말입니까?”

“죽림원이라는 말을 노파에게 들었을 때, 나는 나이를 앎으로서 피해자들의 조직에서의 직급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네.”

“그게 어찌 가능합니까?”

“아주 단순하네. 내가 했던 질문들을 종합해서 생각하는 게지. 우선 보통 그런 조직의 하위 직급은 보통 능력보다 연배로 정해지는 경향이 강하네. 고위 직급부터는 연배만큼이나 능력이 중요시 되지.”

“연배야 들어서 안다 해도 하위 직급인지 고위 직급인지는 어떻게 아는 겁니까?”

내 말에 때 마침 주문한 차가 탁자에 놓여졌다.

서팔봉은 그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내 질문에 답했다.

“자네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서팔봉이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 말이야. 자네가 유족들의 집을 찾으며 떠올린 생각을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 말에 내가 한 말을 되돌려 봤다.

아!

“그들의 재산 말입니까?”

“그렇네. 그 유족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살해당할 당시의 그들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지.”

“그렇군요.”

“그것을 통해 나는 피해자들의 조직에서의 직급이 천차만별임을 깨달았지. 그렇다면 이리 생각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나? 귀녀는 그 조직의 하급부터 고급 직위까지의 인물들과 면식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네.”

그 말에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고작 그 몇 마디로 여기까지 도달한단 말인가?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아직 서팔봉의 말이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생각에 나는 그들의 외모와 키를 더 했네. 고급 직위까지 면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귀녀가 피해자들을 선택한 이유를 찾아 낼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렇겠지요. 우연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입니다.”

서팔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계속 했다.

“처음 자네와 내가 만났던 사건 현장에서 우리는 이미 귀녀의 키에 대해 알았지.”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의 피해자와 귀녀는 최대 두 뼘 최소 한 뼘 정도의 차이가 나네. 이 정도면 귀녀가 체격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그게 중요합니까?”

“물론이네. 자네가 무차별 살인을 한다고 생각해보게. 그렇다면 자네보다 강해 보이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겠나?”

나는 생각 할 것도 없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키에 대해 물어본 것이네. 귀녀의 살인이 어떤 과거의 원한과 연관이 있다면 피해자를 가리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무공을 수련 했는지도 물으신 거군요?”

서팔봉은 웃으며 말했다.

“맞네. 상대의 키가 크고 무공을 배웠음에도 피해자를 덮쳤다면 귀녀가 무차별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지니 말이네.”

나는 텁텁해진 입에 차를 들이부었다.

그런 후 다시 서팔봉의 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외모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물어보신 겁니까?”

“잘 따라오는군. 그 생각도 맞네. 외모적 공통점 역시 연속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해서도 물었지. 그 결과는 자네도 알다시피 천차만별이었네.”

나는 이쯤에 이르러서야 서팔봉이 유족들과의 면담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팔봉은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다른 동기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 역시 줄여나가기 위해 이 면담을 해야 했던 것이었다.

서팔봉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내부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이었다.

“당연히 사체의 발견 장소를 물어보신 것도 이유가 있겠군요?”

“물론이네.”

서팔봉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이미 귀녀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지. 자네도 봤겠지만 사건 현장에서는 굉장한 분노가 느껴졌네.”

나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살인사건을 되짚어 가며 즐거움을 느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나는 서팔봉의 말에 더욱 집중하며 그 감정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오늘 아침의 사건현장을 떠올렸다.

눈을 부릅뜬채 지면이 몸이라도 되는 듯 놓여있던 머리와 그와 멀지 않은 위치에서 피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시체.

더군다나 그런 참사가 피해자의 집 앞에서 이루어졌다면 상상 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분노가 귀녀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기지. 귀녀는 왜 굳이 피해자들의 집 바로 앞에서 살인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말이네.”

“듣고 보니 그렇군요.”

나는 유족들을 방문하며 보았던 피해자들의 집을 떠올렸다.

그들의 집은 때로는 볕도 들지 않는 으슥한 곳에 있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통행량이 많은 골목길 바로 옆에 있기도 했다.

그쪽 방면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살인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이런 추측이 가능해지지. 귀녀는 내 손자를 납치했네.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말이지. 거기다 친절하게 쪽지까지 남겼네. 제대로 글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굳이 아는 단어를 짜내서 말이야. 하나의 가정이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나? 귀녀는 무차별 살인을 하지 않는다. 유족들 앞에 시체를 버려두는 것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것은?”

서팔봉은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기다릴 수밖에.

그렇게 갑자기 대화가 끊긴지 한식경 정도 지났을 무렵.

서팔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서둘러야 겠군. 가지.”

서팔봉의 갑작스런 반응에 나는 식어버린 차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춘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발걸음을 놀리는 서팔봉을 쫓으며 나는 대화 속에서 서팔봉이 이리 다급하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서팔봉이라는 이름의 미궁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썩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 동안 걸으며 점차 익숙한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서팔봉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그 순간까지 서팔봉에게는 말을 걸기 힘든 긴장감이 감돌고 있어서 였다.

“대협, 이 길은 객잔으로 가는 길 아닙니까?”

내 말에 오히려 서팔봉은 더욱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도 이제까지와 마찮가지로 성실하게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맞네.”

나는 궁금증에 되물었다.

“왜 되돌아가는 겁니까?”

서팔봉은 지팡이로 길 중앙에 놓여있던 돌을 밀어내며 내 말에 대답했다.

“빼먹은 게 있었네.”

“무엇을 말입니까?”

“자네, 유족들과의 대화 속에서 꼭 등장하던 인물을 기억하나?”

서팔봉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특별한 인물이 거론된 기억은 없었다.

“특별한 건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리 생각했지. 그래서 간과 했던 거야.”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이제까지 놓쳤던 것이 방금 떠올랐단 말이네. 자네 직업에 대해 물을 때, 유족들이 보였던 반응 기억나나?”

나는 서팔봉의 말에 따라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요. 모두 처음에는 말하기 꺼려했지요.”

“그것 외에 또 있지 않았나?”

그 말에 나는 기억을 더 상세하게 떠올리려 노력 했다.

“아!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 서두르는지 알겠는가?”

서팔봉의 수수께끼에 나는 유족들의 반응에 서팔봉의 말을 겹쳐 보았다.

기억 속에서 유족들은 피해자들의 직업을 말하는데 어딘가 꺼리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이해 할 수 있는 있었다.

서팔봉의 말에 따르면 죽림원이라 지칭되는 조직은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곳은 아닐 테니.

말하기를 꺼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족들은 결국 피해자의 직업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고백은 모두 앞서 한 명의 이름이 언급된 후에 이루어 졌었다.

“황객주 때문 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서두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둔하시네요.”

옆에 있던 용춘이 말했다.

둔하다니 그거 나에게 하는 말인가?

“말을 하지 않다가 황객주가 언급된 후에 말한다. 이상하지 않나요?”

“그냥 황객주가 그들에게 신용을 얻고 있다는 말 아닌가?”

내 말에 용춘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서대협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에요. 황객주의 이름이 나온 시점에 의문을 가지신 거죠.”

황객주의 이름이 나온 시점?

그게 그리 중요한가?

내 대답에 용춘은 감정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황객주의 소개로 왔다는 사실은 사전에 밝혔지.”

용춘이 나에게 보내는 눈빛 사이로 서팔봉의 말이 끼어들었다.

고맙습니다. 대협.

“하지만 유족들은 직업을 물을 때, 다시 한 번 황객주의 소개로 왔는지 확인했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나?”

서팔봉의 말에 옆에서 용춘이 이제는 알겠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차마 그 눈빛에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후 입을 열었다.

“황객주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내 대답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채 말했다.

눈치를 살피니 용춘은 고개를 앞으로 한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용춘의 눈총이 없다.

그에 내가 정답을 찍었다는 사실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맞네. 처음 만났던 노파가 말했었지. 제삼골목에서 그들을 거스르는 자들은 없다고 말이야. 대답을 꺼리는 그들이 대답을 해도 된다는 허가를 내리는 존재. 황객주가 그들에게 그런 존재라면 뻔한 것 아니겠는가?”

나는 서팔봉의 말에 모든 사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즉 서팔봉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죽림원 아니 죽림파의 두목은 황객주다!?”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아니지. 그렇다고 해서 그리 단정 지어 말 할 수는 있는 건 아니네.”

서팔봉의 말에 김이 빠진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그럼, 뭡니까?”

“죽림원과 관련은 있을 테지. 하지만 그게 꼭 황객주가 죽림파의 두목이라는 말은 아니지 않겠나. 언제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지.”

나는 입맛을 다셨다.

옆을 돌아보니 용춘이 아까 전과 같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더 이상 바라보기 힘들어 나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멀리 보이는 우인객잔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자 불현 듯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은 어젯밤 술값을 치루지 못한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버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 고작 뒷골목의 객잔주인에게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서팔봉의 말을 듣고 새삼 생각해보니 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이 골목의 제왕이었다.

그 누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까.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우인객잔이 열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에서 나는 침을 삼켰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 조금도 예측 할 수 없어서 였다.

“자네 둘은 여기서 기다리게.”

우인객잔의 문간에 선 서팔봉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내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서대협, 여기까지 왔으니 저희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춘의 말을 원망하며 나는 서팔봉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봐야 했다.

그 직후 서팔봉은 그대로 한 걸음 내딛어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3장



객잔 안의 풍경은 우리가 자리를 떠났을 때와 크게 변해 있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자리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을 때, 주방이 아닌 입구 옆에 서있던 숙수가 제대로 주방에 들어가 있었다는 점 정도일까.

내가 그렇게 객잔 안을 휘 둘러보고 있을 때, 서팔봉은 객주를 눈으로 찾더니 그가 여전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살아있군.”

그 말에 나는 서팔봉을 보며 물었다.

“죽었을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서팔봉은 내 질문에 자리를 찾아 앉으며 말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

“왜 입니까?”

“귀녀가 남긴 천쪼가리가 때문이네.”

“그게 이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이네. 생각해보게. 그 천쪼가리에는 분명 참견마라 기다려라 라는 말이 적혀 있었네. 그 말은 내 손자를 돌려주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하겠다는 의미 아니겠나. 그렇다면 죽림원의 일원인 황객주의 목숨이 노려질 가능성이 있지.”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아마 황객주가 귀녀의 살생부에 올라 있지 않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직 죽일 때가 아니라 생각 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인지 지금 확인해 보지.”

서팔봉은 그 말을 하며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점소이는 예의 싹싹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신지 얼마 안되셨는데 벌써 돌아오셨군요.”

서팔봉은 얼른 점소이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자네 주인어른 모셔오게.”

그 말에 점소이가 여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자네와 말 섞을 시간 없네.”

서팔봉의 냉정한 말에도 점소이는 별반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점소이는 서팔봉의 말 대로 객주에게 다가가 말을 전했고 객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손님, 무슨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객주는 한 객잔의 주인다운 미소를 지으며 서팔봉에게 말했다.

서팔봉은 그 미소를 보며 별 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객주, 당신 목숨이 경각에 달린걸 아시오?”

갑작스런 서팔봉의 말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나보다 더 당황해야 할 게 당연한 객주는 오히려 침착한 신색을 유지하며 서팔봉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 모습에서 더 이상 객잔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느껴지지 않았다.

“손자가 납치되고 보니 정신이 나가셨나 보구만.”

객주는 이제까지의 모습은 집어 던지며 서팔봉의 말에 답했다.

“언제부터 귀녀가 당신들을 쫓는다는 걸 알았소?”

그 말에 객주는 피식 웃었다.

“고작 몇 시진 만에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기대 이상이구려. 우리가 열 명을 잃고 나서야 알아챈 걸 그 단시간에 알아내다니 말이외다.”

객주의 말은 일견 칭찬으로 들렸지만 그 어투에서는 그러한 호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팔봉은 굳이 그런 객주의 모습에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그런 시답지 않은 공치사는 그만 둡시다. 나는 손자를 찾아야 하고 당신은 목숨 줄이 끊어지지 않게 잘 쥐고 있어야 하니. 피차 낭비 할 시간이 없지 않겠소?”

객주는 서팔봉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팔봉의 눈을 바라봤다.

옆에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객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오?”

서팔봉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들의 사업에 대한 설명과 당신들이 뽑은 귀녀 후보 명단이 필요하오.”

“내가 줄 거라 생각하나?”

“주겠지. 목숨을 아낀다면.”

서팔봉의 대답에 객주는 혀를 차며 말했다.

“가져와라.”

객주의 한마디에 주방에 있던 숙수가 종이 한 다발을 들고 나왔다.

숙수는 말없이 들고 나온 종이 다발을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 놓아두고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객주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목숨 줄이 급하긴 급한가 보네. 저 나이 먹어서도.

“귀녀를 찾으면 우리에게도 알려주겠나?”

서팔봉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기분 내키면 알려주도록 하지.”

그 말이 답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서팔봉이 말과 함께 서류 속에 얼굴을 처박은 사이 객주는 내게 한차례 눈길을 주고는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몇 시진 전에 객주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한 듯 했다.

나는 그 기억을 애써 털어내고 서팔봉이 보고 있는 서류에 시선을 줬다.

“도움이 되는 게 있습니까?”

“도움이야 되겠지.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며 서팔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한이 한도 끝도 없군. 이래서는 꽤나 시간을 소모하걸 같구만.”

그 말대로 귀녀 후보 목록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아니네. 내가 직접 봐야만 의미가 있지.”

서팔봉의 말 대로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우리가 의지한 것은 서팔봉의 통찰력이었고 서류를 보는데 필요한 능력 역시 그런 서팔봉의 통찰력이었다.

나는 하나마나한 제의를 거절 당하고 할 일 없이 객잔 내를 바라봤다.

그런 내 시야에 뒷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후줄근한 옷차림이었다.

겨울임에도 겉에 외투 하나 걸치지 않았고 신발 역시 닳고 닳아 헤져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제대로 표정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런 외향에 어깨에 막 도축한 돼지를 걸치고 있으니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추레한 모습이 되었다.

그 별 볼 일 없는 모습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서팔봉이 보고 난 귀녀 후보 목록이나 살피는게 훨씬 영양가 있는 시간 낭비가 될거라 생각해서 였다.

그런데 정작 서류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야 할 서팔봉은 서류에서 눈을 뗀 채 그 후줄근한 옷차림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저 사내에게 서팔봉이 주목 할 만 한 뭔가가 있나 싶어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도축한 돼지를 주방에 놓아두고 다시 나왔다.

객잔의 숙수나 점소이와는 안면이 있는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그렇게 할 일과 할 말을 모두 끝냈는지 그 사내는 숙수에게 돈을 받고는 올 때와 마찮가지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특별할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에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서팔봉은 어느새 다시 종이 다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렇게 한식경 정도가 흘렀다.

한식경 동안 나는 주문한 만두를 먹었다.

당연히 주문을 할때와 만두를 받을 때, 점소이의 눈총을 덤으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눈총에 예전처럼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거리낄게 없어서가 아닌가 싶었다.

서팔봉과 만나 이 객잔의 정체를 알기 전의 나는 마음 한 켠에 거리낌이 존재 했다.

그것은 내가 술김에 했던 무전취식 때문이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수난을 겪었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재는 저울의 무게 추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게 마련이다.

이제까지 내가 배워왔던 유학의 가치관과 내 서생으로서의 자부심이 그러한 거리낌을 만든 이유 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와 숙수에 대한 공포 때문에 줄곧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객잔 안에서 객주의 눈을 마주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래, 다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차 만두를 씹었다.

이러저러한 상념과 함께 내가 만두를 씹어 삼킬 무렵 서팔봉은 서류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른 만두를 삼켰다.

“대협,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서팔봉은 한마디만 했다.

“나가지.”

그리 말하며 서팔봉은 일어선 그 기세로 객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용춘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서팔봉이 객잔 문을 나서고 나 역시 막 문간을 넘으려던 순간 나는 서둘러 객주에게 다가갔다.

그는 묘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이 순간까지 나는 그와 단 둘이 남는 상황을 피해왔으니 어련할까.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소매에서 은전 두 냥을 꺼내 내밀었다.

그는 어떨 결에 그 돈을 받았다.

“이게 뭔가?”

그의 말에 나는 한마디 대답만을 남기고 서둘러 서팔봉을 따라 나섰다.

“술 값.”



문 밖으로 나서니 이미 서팔봉은 꽤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용춘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용춘과 함께 서팔봉의 뒤에 붙었다.

“대협, 서류에서 뭔가 알아내신 게지요?”

내 말에도 서팔봉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서류에는 별거 없더군.”

“그렇다면 어찌 그냥 나오신 겁니까? 객주에게 뭐라도 더 캐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뒤에서 보는 내 시선에 서팔봉의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서류에는 별거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헛웃음소리를 냈다.

뭐 웃기는 말이라도 있었나?

“칼밥 좀 먹는다는 놈들의 정신은 이해 할 수가 없어.”

“예?”

나는 순간 서팔봉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별건 아니네. 그냥 서류의 내용이 떠올라서 그런거니 마음 쓰지 말게.”

마음 쓰지 말라고 해도 마음이 쓰였다.

“무슨 웃기는 내용이라도 쓰여 있었습니까?”

“웃기다면 웃기는 내용이었지. 자기 목숨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도 사업을 지키겠다고 정보가 누락된 서류를 줬더군. 목숨보다 돈이 더 귀하다는 게지.”

서팔봉의 말에 나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서류에서는 많은 걸 기대 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귀녀를 향한 실마리가 이렇게 흐지부지 되는 건가 싶었다.

속으로 실망감을 삭이면서 나는 서팔봉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실망감이 크다면 나보다 더 클게 서팔봉이었다.

나는 어떻게 위로 할 말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달리 어떤 말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대신 정처 없이 발걸음을 놀리는 서팔봉에게 말했다.

“대협, 어디 앉아 쉬시지요. 이제까지 쉬지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애가 뭔 소리 하는 거야 라는 의미를 가득 담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쁜데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대협, 대협 말씀으로는 서류를 찾아본 건 시간 낭비만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디 앉아서 다음 행보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지요.”

내 말에 서팔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오해를 했군.”

“무슨 오해 말입니까?”

“자네 눈에는 내가 몇 살로 보이나?”

“예? 그게 무슨?”

서팔봉의 황당한 반응에 나는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 거렸다.

“내 나이에 이유 없이 길을 헤매 다닐 만큼 기력이나 넘쳐 보이나?”

“아니 그것이...아!”

나는 서팔봉의 말에 순간 깨달았다.

“뭔가 단서를 잡으신 겁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류상으로는 별거 없더군. 하지만 건질게 아주 없지는 않았어.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단서를 우연히 발견했지.”

“그게 무엇입니까?”

서팔봉은 내 말에 바로 답하지 않고 제삼골목을 벗어나는 출구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제이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인가?

“객잔에서 자네도 본 총각이네.”

“그 사람이 이번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네. 어쩌면 사건 해결을 대폭 진전 시켜줄 사람 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나는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 했다.

나는 어찌 그렇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우선 떠오르는 의문을 말했다.

“그런데 어이하여 제이골목으로 가는 것 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이 답했다.

“제삼골목에는 객잔이 단 하나. 우인객잔 뿐이네. 그 외에 달리 음식점이 있지도 않았지. 한마디로 식재료를 납품 할 곳이 변변치 않다는 말이네. 자네라면 그런 곳에 푸줏간을 차리겠나?”

“아니지요.”

“그에 반해 제이골목은 제삼골목에 비해 음식점이 꽤 있네.”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내 말에도 서팔봉은 별 달리 불쾌감을 내비치지 않고 말했다.

“단순한 이유네. 객잔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객주가 한 말이 ‘객잔 음식이 입에 안맞으시면 제이골목에 음식점이 좀 있으니 그 쪽에 가보십시오’ 였기 때문이지.”

기억력에 자신이 있다고 할 만하군.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서팔봉에게 말했다.

“그래서 제이골목으로 가시는 거군요. 하지만 그 사내가 있는 푸줏간을 찾기 쉽겠습니까?”

“쉬울 것이네.”

서팔봉은 딱 잘라 말했다.

“생각해보게. 제삼골목도 그렇지만 제이골목 역시 거주민들이 잘 산다고 말하기는 힘드네. 아니 못살지. 그런 이들이 고기를 얼마나 자주 먹을 수 있겠나?”

나는 전문대가 뒷골목의 주택들을 떠올렸다.

균열은 기본이고 구멍은 필수였다.

고기는커녕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집이 많을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주로 고기를 소비하는 건 음식점을 자주 찾는 외부인들이겠지. 당연히 푸줏간들도 그 음식점들과 객잔을 주 거래대상으로 삼고 있을 것이네. 알다시피 푸줏간의 주 거래대상이 되는 음식점은 매우 적네. 이런 곳에 푸줏간이 몇 곳이나 필요하지는 않지. 끽 해봐야 두 세 곳 정도 일게 분명하네.”

서팔봉의 설명에 어느 정도 의문이 해소된 나는 다른 말을 건냈다.

“그 사내만 찾으면 손자 분은 금새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서팔봉은 내 말에 신중한 어투로 답했다.

“글쎄... 그건 그 청년을 만나봐야 겠지.”

그 말을 끝으로 서팔봉은 제이골목으로 넘어가는 좁은 통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와 용춘은 그 뒤를 따랐다.

스무 걸음 정도를 걸어 비좁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통로를 비집고 나온 후 나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제이골목이 초행길이나 다름없다.

용춘은 물론이고 나나 서팔봉 역시 제이골목을 그저 제삼골목으로 가기 위한 통로쯤으로 여겼을 뿐 제대로 돌아본 것은 아니기에 그 몇 없다는 푸줏간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했기에 나는 가장 먼저 제이골목의 객잔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서팔봉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제이골목에 있는 객잔이나 음식점을 찾아보지.”

서팔봉의 말에 나는 골목을 둘러 봤다.

여러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골목은 제삼골목과 달리 간판이 달린 상점이 많았다.

거기다 그 상점들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일상적인 물품을 파는 곳들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삼골목보다 많다는 의미 였지.

내가 일상적으로 보아온 거리에 비하면 매우 적었다.

뒷골목이라는 정체성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주택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음에도 상점이 이렇게 적다면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었다.

상점을 이용할 사람이 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점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골목에 사는 거주민보다 잠깐 왔다 스쳐가는 외부인이 더 많은 듯 했다.

슬핏 스쳐가며 들여다 본 상점 안에는 기이한 복색과 고급스러운 복색을 착용한 이들이 많이 보였고 골목에 사는 이들이 그런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서팔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길가의 노점상에게 객잔을 물었고 그렇게 도착한 객잔에서는 푸줏간을 물었다.

그렇게 알게 된 푸줏간의 수는 둘이었다.

서팔봉은 그에 객잔 주인에게 부차적인 질문을 하나 더했다.

둘 중에 가장 젊은 쪽이 누구냐고 말이다.

그러자 객잔의 여주인은 실실 웃으며 제이골목의 끝자락에 있는 푸줏간이라고 말해주었다.

말하면서도 계속 웃는 여주인에게 내가 왜 그리 웃냐고 묻자.

여주인은 가장 젊기 때문이라는 뜻 모를 말로 대답했다.

뭔 소리야?

푸줏간 주인이 젊다고 여주인이 좋을게 뭐지?

그런 내 의문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제이골목 끝자락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나는 서팔봉에게 푸줏간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서팔봉은 지팡이로 땅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글쎄... 내 예상이 맞다면 끝을 봐야 겠지.”

그 대답에 나는 별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서팔봉과 같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팔봉의 대답이 모호했음에도 내가 특별히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이제는 질문이 아닌 생각을 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팔봉에게 끝이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내 스스로 이 이야기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다만 그 결말의 실체를 모를 뿐이었다.

그 결말의 실체를 알기 위해 나는 서팔봉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나는 진창길을 걸으며 어젯밤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 했다.

다사다난 하고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길고 긴 하루 였다.

그럼에도 이 하루를 보내오면서 나는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기 보다 느낄 새가 없었다고 봐야 겠지.

수많은 질문이 오가고 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이십년 동안 시험을 치고 공부를 하면서 얻지 못했던 충실감이 있었다.

진시에 떨어지고 나서의 공허감에 술을 마시고 무전취식을 했었다.

이전이라면 어떠했을까?

지난 두 번의 경험을 되새겨 봤을 때, 아마도 숙소에 틀어박혀 한껏 우울해 하다가 며칠이고 술만 진탕 마시다 고향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위로를 받고 누님의 호통을 들으며 다음 시험이 있을 때까지 한량처럼 동네 친우들과 어울리며 시간이나 보냈을게 분명했다.

분명히 무기력하게 그렇게 지냈을테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 안에서 기묘한 활력이 자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무인들이 느낀다던 기가 이러한 느낌일까?

누님의 말로는 기가 단전에 자리하면 무한정한 자신감이 마음 안에 자리 잡는다고 한다.

그러며 누님은 말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 일뿐이라고 그 순간 느끼는 자신감은 실체가 아닌 허상 일뿐이라고 말이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이 감각에 대해 생각했다.

이 감각도 착각 일지도 모른다.

허상 일수도 있다.

허나 이 감각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앞서 걷는 서팔봉의 등을 바라봤다.

“여긴가 보군.”

서팔봉의 그 말에 나는 상념을 털어냈다.

이제는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

“뭔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제까지 봐왔던 그 어느 건물보다도 허름한 푸줏간을 보며 말했다.

제이,제삼 골목을 통틀어 두 곳 밖에 없는 푸줏간이라면 돈 꽤나 만졌을텐데...

생각보다 장사가 시원치 않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푸줏간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보통 시전에서 보아왔던 푸줏간과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 이 시간이면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아낙들로 북적일 푸줏간 앞이 먼지만 날릴 정도로 한적해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사람의 출입도 별로 없는지 푸줏간 앞의 진창길에는 발자국도 얼마 안 찍혀 있었다.

내가 푸줏간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서팔봉은 천천히 푸줏간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진열대 앞에 섰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잠깐 멈춰 서서 푸줏간 안을 들여다보던 서팔봉은 갑자기 진열대를 지팡이로 두드렸다.

큰 소리가 귓전을 자극했다.

슬쩍 옆쪽에 시선을 주니 용춘은 서팔봉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랐는지 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다행히 뽑거나 하는 추행은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웠는지 손잡이에 가 있던 손을 꼼지락 거리며 허리 뒤로 물렸다.

그 모습에 실소가 나오려던 걸 겨우 참아내며 나는 푸줏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팔봉이 지팡이로 진열대를 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푸줏간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푸줏간 안쪽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어둠 속에서 천천히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진열대 뒤에 서서 나와 용춘에게 시선을 두다.

이내 자신의 정면에 서있는 서팔봉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서팔봉은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사내 역시 서팔봉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에서 사내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굉장하군요.”

처음 들은 사내의 목소리는 짐작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낮은 저음이었다.

그 저음을 따라 흘러나온 말의 의미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의 첫인사는 과장되게 상대를 칭찬하는 말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밀어내고 서팔봉의 대답을 기다렸다.

허나 서팔봉은 사내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사내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서팔봉의 반응에 사내는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서팔봉을 따라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두 사내의 눈싸움에

괜히 내가 부끄러워 질 지경이라.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푸줏간 안을 더욱 자세히 살폈다.

푸줏간 안은 살풍경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고기를 썰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라고 주장하고 싶었는지

그 사실만을 증명하기 위한 기능들로만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축된 돼지를 걸기 위한 쇠갈고리가 보였고 벽면 한 쪽에는 천이 한 장 걸려있었다.

피를 닦기 위한 것인지 천은 피에 절어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바로 등 뒤에는 도축용 칼이 벽에 걸려 있었다.

딱 그 세가지 뿐이었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사내는 정말 취미라고는 없나 보군.

내 기억 속의 푸줏간에는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물건들이 이것저것 장식되어 있고는 했다.

내 고향인 산동 항선시장의 푸줏간에는 주인의 딸이 만든 인형이 목으로 짐작되는 부위에 못이 박힌채 벽에 장식되어 있기도 했다.

썩 기분 좋은 장식은 아니었지만 그 인형에 시선을 둘 때 마다 푸줏간 주인이 자기 딸내미의 손재주에 대하여 침을 튀겨가며 극찬을 했기에 차마 불길해 보인다는 말은 못했다.

그 외에도 걸어두면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양말을 걸어둔 사람도 있었고 보면 힘이 난다며 딸의 초상화를 걸어둔 사람도 있었다.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걸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고된 일상을 견뎌내기 위한 그들의 소소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그냥 넘겼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전부 딸과 관련된 것들이군.

아들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나.

그런 생각과 함께 우리 집 가정사가 떠올랐다.

확실히 내가 부모라도 나 같은 놈을 집 밖에서 까지 떠올리고 싶지는 않을 듯싶었다.

괜한 잡생각에 기껏 차렸던 기운이 다시 우울해 졌다.

그 순간 서팔봉이 꽤 긴 시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내 나름대로 꽤 분발했다고 생각 했는데 그 생각이 부끄러워지는군.”

서팔봉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리 빨리 찾아와 주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사내의 말에 서팔봉은 피식 웃었다.

“자네 계획에 시기가 중요한가?”

“그렇지는 않지요.”

서팔봉의 말에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나는 용춘을 돌아봤다.

용춘 역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르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래, 얼마나 기다려주면 되겠나?”

사내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반시진만 주시겠습니까?”

“꽤나 거창한 일을 준비하고 있나 보군?”

그 말에 사내는 찰나 간 침묵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 감상을 뒤로 하고 사내는 대답했다.

“마지막이니 꼼꼼히 준비해야지요.”

서팔봉은 사내의 말에 동조하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다 그 훈훈한 분위기를 일소하는 강렬한 눈빛으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그 일이 끝나면 볼 수 있는 건가?”

“반시진 후에 있는 곳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반시진 후에 보지.”

서팔봉은 그 말을 한 후 두말없이 물러났다.

사내 역시 그 말을 끝으로 푸줏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내가 완전히 우리의 시선 속에서 물러난 후 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서팔봉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서팔봉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잘 해결되었네.”

“말 장난보다 답을 원하는데요.”

내 말에 서팔봉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말을 해주고 싶기는 하네만 지금은 안되겠네. 반시진 후에... 아니 그보다 더 있은 후에 이야기 해야 겠군. 그보다 자네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네.”

서팔봉의 알쏭달쏭한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노인네와 만난 이후 속 편하게 답을 안 적이 없다.

언제나 수수께끼에 수수께끼가 이어졌고 마지막까지 이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 해야 할 일이 뭡니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네. 그저 자네가 말 좀 잘해주면 될 일이지.”

서팔봉의 말은 내가 뭔가 해야 된단 말인가?

나는 궁금증이 가득 실린 표정으로 서팔봉을 바라봤다.

서팔봉은 내 표정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우선 자리부터 옮기지. 우리에게는 반시진의 시간이 있으니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서팔봉은 푸줏간 바로 앞에 있는 노점으로 걸어갔다.

향긋한 꼬치구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 향기가 내 위장을 흔들었다.

시간은 때 마침 해가 저물어 올 무렵이었고 멀리서 신시정(16시~17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 였다.



노점에 등이 켜졌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점을 찍 듯이 등이 하나 둘 켜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꼬치구이 하나를 집어 들고 씹었다.

내 옆에서 용춘이 그리고 서팔봉이 함께 꼬치구이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씹던 고기를 삼키고 서팔봉에게 물었다.

“고기가 맛있군요. 아니 아까 말하신 제가 해야 될 일이 라는게 뭡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은 후 고기를 씹었다.

고기를 삼킨 후에야 서팔봉은 손을 내리고 내 말에 답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네. 아주 쉬운 일이지.”

“일은 쉬운데 나중에 곤란해지거나 하는 그런 일은 아니죠?”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해질거네. 내 장담하지.”

서팔봉의 장담에 나는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고기를 빼물었다.

고기를 씹으며 나는 생각 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엉덩이를 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고 만일 나중에 닥쳐 올 후환이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귀녀에 대한 수수께끼가 더 궁금했다.

나는 씹던 고기를 삼키고 서팔봉에게 말했다.

“하겠습니다. 대신!”

내 말에 서팔봉은 고기를 씹으며 집중했다.

“일이 끝난 후 모두 설명해주셔야 합니다.”

서팔봉은 꼬치막대를 내려두며 말했다.

“내 약속하지.”

“그럼, 말해주십시오. 제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서팔봉은 노점 주인에게 꼬치구이를 하나 주문하고 나서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자네 뒤에 꼬마 보이나?”

그 말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꼬마가 보였다.

“아까부터 자네를 객잔을 나선 이후부터 계속 따라오더군.”

그 말에 놀라며 나는 그 꼬마를 자세히 바라봤다.

꼬마는 내 시선에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생판 처음 보는 꼬마 였다.

객잔을 나설 때부터 따라붙었다는 서팔봉의 말에 나는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꼬마에게 내 미행을 명령했을 인물을 떠올릴 때,

“아마 황객주가 시켰겠지.”

서팔봉이 내 생각을 먼저 말했다.

나는 놀라서 서팔봉을 쳐다봤다.

그는 나와 황객주의 관계를 아는 것인가?

“그리 놀랄 것 없네. 누구라도 쉽게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니.”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노점 주인에게 꼬치구이를 받아 들었다.

나는 서팔봉의 그 모습을 잠자코 보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서팔봉은 꼬치구이를 씹으려다 내 말에 입을 떼고는 말했다.

“아침에 자네는 숙수와 있었네. 그리 좋은 이유 때문에 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군. 거기다 애초에 진시를 보러온 서생과 뒷골목의 숙수가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많이 의심스러운 모양새 아닌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주억였다.

“분명 좋지 않은 일로 관계를 맺었을텐데. 객잔의 객주와 쌍둥이 형제인 숙수는 자네를 보고도 모른 척 하더란 말이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뻔한 게지. 자네를 가만히 두는 대가로 뭔가 거래를 맺은 거 아닌가?”

그 말에 나는 침음과 함께 동의 했다.

“맞습니다. 그 말대로이지요.”

서팔봉이 말했다.

“그 일로 자네를 타박 할 생각은 없네. 아직 뭔가 말한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서팔봉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리를 나무에 처박는 딱따구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자네가 그럼에도 뭔가 죄책감을 느낀다면... 아니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다면 한 가지 일을 해주게.”

“무슨 일 말입니까?”

서팔봉은 내 대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후 말했다.

“일단 저 꼬마를 불러오게. 닭꼬치라도 하나 먹여야 이야기가 쉽게 진행 될 듯하니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서팔봉은 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는 그런 서팔봉을 보다 몸을 돌려 꼬마에게 다가갔다.

꼬마가 도망 갈 것에 대비해 마치 닭을 모는 것처럼 양팔을 벌려 꼬마의 퇴로를 막아섰다.

그러나 그런 내 기대와 달리 꼬마는 내 하는 냥을 빤히 지켜보더니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더 주실 건가요?”

꼬마의 뜬금없는 말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서팔봉을 뒤돌아 봤을 때 였다.

“황객주가 얼마 주던?”

서팔봉의 말에 꼬마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꼬마는 나와 서팔봉을 번갈아 보다 이내 서팔봉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돈은 할아버지가 낼 건가요?”

“아니, 네 앞의 서생이 낼 것이다.”

그 말에 꼬마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전낭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 계산부터 하죠. 동전 열 냥 주세요.”

정신없이 흘러가는 문답 속에서 내가 소매로 손을 집어넣을 때, 서팔봉의 말이 튀어나왔다.

“일을 그렇게 하면 안되지.”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죠?”

꼬마의 말에 서팔봉은 닭꼬치를 내밀었다.

“우선 이거 하나 먹거라.”

“먹는게 조건 인가요?”

“아니, 여기에 조건은 없다.”

서팔봉의 말에 소년은 내 옆을 지나쳐 서팔봉에게 다가갔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서팔봉에게 다가간 꼬마는 그가 내미는 닭꼬치를 낚아채고는 한 입에 고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는 진기명기를 선보 였다.

한 참을 우걱우걱 고기를 씹은 꼬마는 목울대를 크게 울려 고기를 삼켰다.

“이제 일을 하죠.”

꼬마의 당돌한 말에 서팔봉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동전 열 냥을 주마. 일을 제대로 끝내면 거기에 동전 열 냥을 더 얹어주지.”

서팔봉의 조건이 만족스러웠는지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을 하면 되죠?”

꼬마의 대답에 서팔봉은 내게 눈짓을 해보였다.

이게 내가 할 일이었나?

나는 한 숨을 내쉬며 소매에서 동전 열 냥을 꺼내 꼬마에게 내밀었다.

꼬마는 잽싸게 돈을 낚아 채갔다.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이었다.

“이리 오거라.”

서팔봉의 말에 꼬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밀담을 나누는지 서팔봉은 허리를 숙여 꼬마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무언가를 말했다.

꼬마는 서팔봉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쉬운 일이지?”

지시가 모두 끝났는지 서팔봉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 말에 꼬마는

“그렇네요.”

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잘 알겠지만 동전 열 냥 이상을 욕심내서 우리를 배신 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서팔봉의 말에 꼬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다 포기했으니 알아서 잡수쇼 하는 모습이었다.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군. 이제 가 보거라.”

서팔봉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꼬마는 몸을 돌려 골목의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몸이 무척이나 날래 순식간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런 꼬마를 보다가 서팔봉을 바라봤다.

“뭘 시키신 겁니까?”

“뭐 별거 아니네.”

“그 별거 아닌 게 궁금한 대요.”

내 말에 서팔봉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자네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 해준거네.”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저 꼬마에게 말해주었어야 할 것 말이네.”

저 꼬마에게 해주었어야 할 말?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면 저 꼬마는 황객주가 보낸 끄나풀이다.

그런 황객주의 끄나풀에게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설마 귀녀의 행방이라도 말해주신 겁니까?”

“맞네.”

그 말에 나는 황당한 심정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귀녀는 찾지 못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이 말했다.

“누가 그러던가?”

“아니 누가 그렇게 말했다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도 어지간히 둔하구만. 아 잠시만 기다려주게. 웃음 좀 멈춰야 겠으니.”

서팔봉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팔봉은 자신이 말한대로 한참을 웃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노점상이 내미는 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아낸 후 말했다.

“자네 반응을 보니 귀녀의 정체에 대해 말해주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겠어. 지금 알게 되면 아주 기절을 할테니 말이야.”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참으며 나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건 그렇다 치지요. 지금 물어도 말해주지는 않으실 것 같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 꼬마를 어찌 믿고 보내셨습니까? 황객주를 돈 때문에 배신 했으니 더 큰 돈이 들어 온다면 우리를 배신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이 말했다.

“그래서 돈 말고 다른 것도 먹이지 않았나.”

“닭꼬치 말입니까? 그게 무슨 구속구나 되겠습니까?”

나는 황당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내 반응에 서팔봉은 눈앞의 노점 주인을 보며 말했다.

“보게. 여기에 그 꼬마와 우리가 아주 친근한 사이 였다는 걸 증명해 줄 증인이 있지 않나.”

그 말에 내가 노점 주인을 바라보자 노점 주인은 어깨를 으쓱 해보인 후 고기를 계속 구웠다.

“아마 그 꼬마도 잘 알고 있을 거네. 그리고 자네 그 꼬마 얼굴이 익숙하지 않던가?”

“예? 생판 처음 봅니다만..?”

서팔봉은 내 대답에 혀를 찼다.

“쯧쯧, 나이도 젊으면서 벌써 치매기가 있는 온 건가? 아침에 자네가 손수건에 뭔가를 써 넘긴 꼬마가 아까 그 녀석 아닌가.”

“아!”

서팔봉의 말에 불현 듯 아침나절 누님에게 심부름을 보냈던 꼬마가 떠올랐다.

확실히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닭꼬치를 먹인 것보다 그게 더 큰 이유 였지. 아침에 꼬마가 자네의 심부름을 했던 걸 보면 숙수의 편에만 서있는 것 같지는 않았거든. 한마디로 돈이 되면 뭐든 하는 녀석 같아 보였다 이 말이지. 자네가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나 날 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꼬마가 그 손수건을 잘 전달했기 때문이지 않나?”

나는 서팔봉의 심계에 속으로만 감탄했다.

겉으로 감탄 하는 표정을 내보이기에는 너무 배알이 꼴려서 였다.

“그런데 그 꼬마에게 그런 말을 시킨 이유가 뭡니까?”

내 질문에 서팔봉은 묵묵히 맞은편의 푸줏간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서팔봉은 드물게 말을 끌며 대답하기를 주저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추궁을 할까 하다 그냥 가만히 서팔봉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왠지 분위기가 그랬다.

“딱 잘라 말하기는 그렇군. 연민 때문이라고 할까.. 아니면 동질감 때문이라고 할까.”

서팔봉의 알 수 없는 대답에 나는 고개를 돌려 푸줏간을 바라봤다.

그의 말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내 질문의 의도는 서팔봉이 왜 찾지도 못한 귀녀를 찾았다고 말하라 그 꼬마에게 시킨 이유를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팔봉은 내 질문에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서팔봉은 누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연민을 느낀 것인가?

저 푸줏간 주인인가 아니면 귀녀 인가?

나는 감정을 토로한 후 조용히 침묵하는 서팔봉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더 묻고 싶은 감정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질문을 아껴야 할 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무렵.

유시초(17시~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정확히 반시진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푸줏간에서 그 사내가 걸어나왔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처음 볼 때 와는 달리 두툼한 솜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 였다.

서팔봉이 그 사내를 보며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사내의 대답에 서팔봉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뭐 남길 말은 있나?”

서팔봉의 말에 사내는 품 안에서 고이 접힌 서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로군요.”

“이렇게 추운데 좋은 날은 무슨.”

서팔봉의 타박에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뭘 말인가?”

“전문대가 뒷골목에 사는 말종들의 유일한 낙을 말입니다.”

“그거 꼭 들어야 하나?”

서팔봉의 핀잔에도 사내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이 맘때 쯤 되면 전문대가에서 폭죽을 쏘아 올립니다. 엄청나게 화려하죠.”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북경 밖에서도 꽤나 화제가 되어 전국각지에서 그걸 보러 사람들이 몰려 온다고 했던가?

“실없는 소리군.”

“예 실 없는 소리지요.”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폭죽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내 기억에 폭죽은 이미 이레 전에 쏘아올린 걸로 알고 있었다.

이레 전에 그 자리에 나도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고주망태가 되어 그대로 하인들에게 끌려가 보지는 못했지만.

사내는 그 실없는 소리를 끝내는 마침표라도 되는 듯이 꺼내 들었던 서찰을 서팔봉에게 내밀었다.

서팔봉은 사내가 내민 서찰을 받아 품속에 넣었다.

유언장이라도 되나?

“일이 끝나면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감사합니다.”

사내의 말에 서팔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팔봉과 사내가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저 멀리서 인파를 헤치며 걸어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맨 앞에 서있는 자는 예의 점소이와 숙수 였다.

“꼬마가 말을 잘 전달 했나 보군.”

서팔봉은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뒤로 몸을 뺐다.

어느새 지척에 다다른 점소이와 숙수 일행은 푸줏간 사내를 거칠게 잡아 포박했다.

그리고 점소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걸로 서로 빚은 없는 걸로 합시다.”

그 말에 내가 대답했다.

“술값은 이미 낸 걸로 아는데?”

내 말에 점소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나를 한 차례 쓸어본 후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걸음을 따라 푸줏간 사내도 거칠게 끌려갔다.

어째서인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 푸줏간 사내가 끌려가는지 몰랐기에 나는 그저 망연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는 한쪽 발을 절뚝거리는 불안정한 걸음으로 그렇게 끌려갔다.

내 시야에서 그가 사라졌을 때, 서팔봉이 내 등 뒤에서 말했다.

“이제 가지.”

그 말에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봤다.

서팔봉의 손에는 사내에게 받은 서찰이 펼쳐진 채 들려 있었다.

서찰을 보고 있는 내 시선 때문인지 서팔봉은 서찰을 다시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나는 조금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어디를 말입니까?”

서팔봉은 내 어투에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내 스스로도 왜 저 사내가 끌려가는 모습에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찝찝함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찝찝함 때문에 서팔봉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디긴 어디 겠나? 내 손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손자는 귀녀에게 잡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귀녀를 찾지도 못했는데 어디서 손자분을 찾는다는 말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며 말했다.

“일단 따라오게.”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지나쳐 앞서 걸어갔다.

그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용춘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서팔봉의 뒤를 따르며 나는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가는 길이 익숙해서 였다.

비좁은 통로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오늘 하루만 네 번 왕복했던 제삼골목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추스르고 비좁은 통로를 지났다.

통로를 빠져 나온 후 나는 서팔봉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보면 알지 않나.”

능청스러운 서팔봉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고집에 서팔봉은 별달리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말했다.

“우리가 제삼골목에서 달리 갈 곳이 있나?”

“설마 우인객잔으로 가는 겁니까?”

“맞네.”

서팔봉의 대답에 나는 머리가 혼란해 지는 걸 느꼈다.

아까 전 푸줏간 사내를 끌고 간 이들은 우인객잔의 직원들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죽림원의 조직원이라 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이제는 또 그들이 있는 우인객잔으로 찾아 간다고?

나는 순간 서팔봉의 등을 보며 의심이 들었다.

설마 이 자는 그들과 한 패가 아닐까?

하지만 이내 나는 그 생각을 접었다.

앞뒤가 맞지 않아서 였다.

나는 그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을 지우고 서팔봉에게 물었다.

“그 곳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처마 밑으로 늘어져 있던 거미줄을 쳐내며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는구만. 아까 내가 뭘 하러 간다고 했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을 떠올렸다.

“손자를 찾으러 간다 하셨지요.”

“그 말대로네. 손자를 찾으러 가는 거지.”

서팔봉의 대답에 나는 뭐라 더 말하려다 관뒀다.

어차피 같은 말만 반복되리라 생각해서 였다.

그렇게 말이 끊기자.

객잔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객잔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객잔 앞에 서서 생각했다.

점소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돌아 올 줄 알았다면 좀 더 좋게 말해야 했다.

황객주에게도 술값을 주며 반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객잔 문 앞에서 그런 오만가지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서팔봉은 지팡이로 객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서팔봉을 따라 들어가며 나는 황객주와 점소이의 시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생각했다.

허나 객잔 안에 들어서니 그런 걱정은 기우 였음을 알 수 있었다.

객잔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객잔 안의 불도 꺼져 있었다.

오직 빛이라고는 객잔의 창문을 통해 들이치는 달 빛 뿐이었다.

“아무도 없군요...”

내 말에 서팔봉이 답했다.

“객잔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을 테니 말이야.”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푸줏간 사내를 말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 푸줏간 사내가 누구이기에?

그 자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이기에 문도 닫지 않고 객잔을 비운단 말인가?

내 궁금증에 아랑곳없이 서팔봉은 객잔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서팔봉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어림짐작 했던 것보다 길었다.

이층에 있는 것은 객이 묵는 객방이었다.

서팔봉은 그 많은 방들 중 망설임 없이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급히 따라 들어 간 우리는 서팔봉의 기행을 볼 수 있었다.

침상 위로 올라 간 서팔봉은 침상에 깔려있던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침대 밑에 뭐라도 있습니까?”

라고 묻자.

서팔봉은 걷어낸 이불 아래로 드러난 침상 위를 더듬거리던 손길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며 서팔봉은 침상의 한 쪽을 잡아 들어올렸다.

서팔봉의 어깨 너머로 드러난 그것은...

“그게 뭡니까?”

“보면 모르겠나? 비밀통로 일세.”

아니 그건 알겠는데 그게 왜 거기 있는 겁니까?

여기는 이층이라 바로 아래는 식당 일 텐데요.

나는 마음속에 있던 질문을 미처 내뱉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서팔봉이 곧장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서팔봉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순간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뒤를 따랐다.

호기심을 이길 방법은 없지 않나?

따라 들어 간 비밀통로는 의외로 넓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각 했던 것보다 넓다는 말이지 몸을 움츠리고 무릎걸음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든 넓이였다.

다섯 걸음 정도 이동 했을까?

앞서 걷던 서팔봉의 몸이 갑자기 꺼지 듯 사라졌다.

놀라서 다가가보니.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통로에 약간 경사가 있어 그 경사를 타고 내려갔다.

다행히 바닥에는 짚이 두껍게 깔려 있어 엉덩이뼈가 조각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건물 안 인 듯 했다.

“무사 하십니까?”

위에서 들려오는 말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괜찮으니까 내려와.”

용춘 역시 엉덩방아를 찧을 거라 생각 했지만 미끄러져 내려온 용춘은 과연 무인답게 매끄러운 자세로 착지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용춘에게서 몸을 돌려 서팔봉을 찾았다.

다행히 서팔봉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건물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며 나는 말을 걸었다.

“대협, 이곳은 뭡니까?”

통로를 타고 내려 온 위치로 짐작해보면 우인객잔의 바로 옆 건물 같기는 한데...

내가 그런 어림짐작을 하며 서팔봉에게 다가갈 때 까지 그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대답 대신 뭔가 부산하게 손을 놀리고 있는 듯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더욱 서팔봉에게 다가갔다.

말을 하지 않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밖에 없었다.

지척에 다가서서 어둠 속에서 눈을 좁혀 서팔봉의 앞에 놓인 것을 확인하려 할 때 였다.

갑자기 서팔봉이 벌떡 일어나더니 무언가를 발로 차는 것 아닌가?

“이제 일어나라! 밥 먹으러 가야지.”

서팔봉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내려다보니 그 곳에 있는 것은 스물 초반쯤으로 짐작되는 청년이었다.

그는 잠이 들어있는지 서팔봉의 발길질에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집기까지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서팔봉이 왜 손자가 납치 되었음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뒤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서팔봉과 그 손자의 기행을 보고 있던 용춘은 얼른 나를 보며 눈짓했다.

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팔봉을 말렸다.

“대협, 그만하시죠. 그러다 사람 잡겠습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차는 걸 멈추고 말했다.

“이 정도로는 저 녀석 몸에 흠집도 안나니 걱정 말게. 쯧, 아주 제대로 곯아 떨어졌군.”

서팔봉은 혀를 차며 손자를 업었다.

뒤에서 손자를 업는 걸 도와주며 나는 생각 했다.

왜 찾던 사람을 찾았는데 이렇게 보람이 없지?

마음 한켠이 허해지는 상실감에 괜히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손자를 찾았다면 당연히 따라 나와야 할 답에 대하여 서팔봉에게 질문했다.

“대협, 어떻게 이곳에 손자 분이 이곳에 갇혀 있을 거란 걸 아셨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손자를 업은 채 말했다.

“일단 자네 집으로 가지. 모든 설명은 그때 가서 해주겠네.”

왠지 서두르는 서팔봉의 모습에 나는 입가를 맴도는 말을 하려다 관두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 서팔봉이 읽었던 서찰에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곤히 잠든 손자를 업고 있는 서팔봉에게 추궁하는 것도 그랬고 집에 도착해 말해주겠다고 하니 그만두기로 했다.

호기심 충족보다 배려가 필요한 순간이라 생각해서 였다.

그런 내 감상을 뒤로 하고 서팔봉은 앞서 걸어갔다.

출구 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서둘러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자를 업느라 서팔봉의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출구에 가서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내 뒤에서 벼락처럼 뭔가가 튀어나왔다.

쾅!

귓전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허리 부분을 내려다보니.

다리 하나가 내 허리 바로 옆을 지나쳐 뻗어있었다.

그 다리를 따라 시선을 뒤로 돌려보니 서팔봉이 서있었다.

서팔봉은 내 시선에

“이런 미안하네. 마음이 급해서 그만...”

라고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서팔봉은 빠르게 부서진 문짝을 넘어 튀어나갔다.

내가 그 모습에 얼이 빠진채 서있자.

앞서 뛰어가던 서팔봉이 소리 쳤다.

“멍하니 서있지 말고 빨리 뛰게. 그러다 좋은 구경 놓칠 테니 말이야.”

나는 그 소리에 빠져 있던 얼을 회복시켰다.

옆에 서있던 용춘이 내 팔을 잡아끌며 서팔봉을 따라 뛰어갔다.

그에 맞춰 나도 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제삼골목을 벗어나 제이골목에 이르렀다.

서팔봉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제이골목을 벗어나 제일골목까지 갈 듯 했지만 내가 그 기세를 따라 갈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이 잊은 듯 하여 말하는데...

나는 어제까지 술에 진탕 취해 있다가 개고생을 한 후 새벽에 집에 들어가 겨우 세시진 밖에 못잔 인간이다.

거기다 그 이전에 무공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평범한 문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심하게 달리면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 순리 였다.

나는 폐가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걸 진정시키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 헐떡이는 모습에 용춘이 고개를 저으며 그때까지 잡고 있던 내 팔을 놓아주었다.

“자네도 내게 엎여야 겠구만.”

서팔봉의 농담에 나는 말도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사실은 끄덕이고 싶었지만 남자 체면에 어디 그럴 수 있겠나.

내 모습에 서팔봉은 피식피식 웃으며 풍경을 내려다 봤다.

“뭐, 여기도 괜찮군.”

서팔봉의 말에 나는 그의 시선이 가는 곳을 바라봤다.

때마침 우리가 서있는 곳은 전문대가 뒷골목의 남쪽으로 상당히 경사 진 곳이었다.

그래서 뒷골목의 전경이 일부는 내려다 보였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 된 후 나는 서팔봉에게 물었다.

“뛰기 전에 말하신 좋은 구경이라는 게 뭡니까?”

내 질문에 서팔봉은 웃으며 말했다.

“한 사람의 일생의 숙원이 완성 되는 순간이지.”

“일생의 숙원이요?”

서팔봉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야경에 시선을 던졌다.

푸줏간 사내를 만난 이후로 알 수 없는 말만이 서팔봉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어디에 떨어져 내릴지 예측 할 수 없는 낙엽처럼.

내가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서팔봉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만 내려오지 그러나?”

서팔봉의 말에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는 이제까지 야경에 가 있던 시선을 돌려 어느 한 집의 지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서팔봉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팔봉은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점차 내가 서팔봉의 정신상태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기 시작 할 무렵 지붕 위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서팔봉이 그에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 말과 함께 지붕 위에서 복면을 쓴 인물이 뛰어내렸다.

“십 오년만 인가요?”

복면 안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설마 귀녀인가?

그렇다면 서팔봉은 귀녀와 아는 사이었단 건가?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팔봉과 복면인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우인객잔에 가는 중이었나?”

“역시... 한 눈에 알아보시는군요.”

우인객잔?

복면인의 말에 서팔봉은 나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으며 복면인에게 말했다.

“고생이 많구만.”

서팔봉의 말에 여자는 처음 등장할 때와는 한참 다른 느낌의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기분이 나쁜데...

“내가 그 고생을 줄여주지. 우인객잔에는 갈 필요 없네. 자네가 손쓰지 않아도 해결 될테니”

서팔봉의 말에 복면인이 말했다.

“그럼, 저야 좋지요.”

“쓸 일도 없는데 복면은 계속 쓰고 있을 텐가?”

“아니요. 벗어야지요.”

여자의 들 뜬 목소리에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무척이나 친숙한 느낌의 목소리 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감상과 함께 여자는 복면을 벗었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누...누님!?”

내가 기성을 내지르자.

누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이내 눈빛을 되돌리며 서팔봉에게 말했다.

“모자란 동생이 누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누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침묵하며 시선을 돌렸다.

괜히 눈을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러나 눈을 돌려도 귀는 뚫려 있었기에 말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아니네, 말썽도 안 피우고 얌전하더군.”

내가 여섯 살 꼬마인가?

“예, 그런데 북경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별 일은 아니고 손자 녀석이 병에 걸려서 말이네.”

“어떤 병에 걸렸기에...?”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지.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말이야.”

“예, 그럼 북경에 계시는 동안은 저희 집에 머무시지요.”

“고맙네.”

“서추포께 진 빚에 비하면 한 참 부족한 일이지요.”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누님의 모습에 나를 속으로 생각했다.

평소에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수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질색 팔색 하지도 않았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궁시렁 거리고 있을 때, 서팔봉이 말했다.

“이제 시작 될 시간이군.”

서팔봉의 말과 동시에 멀리서 유시정(18시~19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종소리는 이내 터져 나온 다른 소리에 묻혔다.

그 소리는...

거대한 폭발음이었다.

북경을 덮고 있던 밤의 장막이 크게 흔들리며 들춰졌다.

장막 뒤에서 튀어나온 것은 북경의 뒷골목을 비추기에 충분한 강렬한 섬광이었다.

그 섬광에 나는 눈을 감았다.

폭발 속에서 서팔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서서히 걷혀가는 폭발음 속에서 서팔봉의 목소리가 뇌리에 스며들었다.

"훌륭한 폭죽놀이로군..."



해결


북경을 혼란에 빠트린 폭발 이후 한시진이 지났다.

우리는 폭발이 잠잠해진 직후 전문대가 뒷골목을 빠져나왔고 그대로 우리 집, 즉 주씨무관 북경지점으로 돌아왔다.

무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서팔봉은 자신의 손자를 눕힐 객방을 부탁 했고 누님의 친절한 안내를 듣고 나서 반 시진 후에 조당에서 모이자 말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에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피로가 쌓여 있었고 용춘 역시 그건 마찮가지 였던 듯 두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몸을 씻고 새 옷을 꺼내 입은 후 한 식경 정도 쉰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당으로 향했다.

앙상한 나무로 가득한 정원을 지났다. 조당의 계단을 올라 실내로 들어서니 이미 모일 사람은 모두 모여 길다 란 탁자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제일 상석에는 서팔봉이 그 왼편에는 누님이 그 반대쪽인 오른편에는 용춘이 앉아 있었다.

서팔봉의 손자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좌석 배치를 쓱 훑어본 후 나는 얼른 용춘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 내 행동에 용춘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렇다고 누님 옆에 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모두가 자리에 앉자 서팔봉이 입을 열었다.

“이 늦은 밤에도 누구 한 사람 잠에 들지 않고 이 자리에 모인 거 보니 어지간히 사건의 전말이 궁금한가 보구만?”

서팔봉의 말에 나는 누님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사건의 전말만큼이나 누님이 그 시각 거기에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누님이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서팔봉을 쳐다봤다.

“궁금증을 품에 안고 어찌 잠이 들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잠도 못자고 침상 위에서 시간만 낭비 할 텐데요.”

내 말에 서팔봉이 너털 웃으며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궁금증이 심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는 법이지.”

서팔봉은 그렇게 답한 후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서부터 설명 하는 게 좋을까..?”

그 중얼거림에 나도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들어야 할까?

그러나 그런 고민은 이내 떠오른 한 사람의 존재로 해결되었다.

그래, 물어야 한다면 그 사람부터 물어봐야지.

“푸줏간 사내의 정체부터 설명해 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군. 거기서부터 말해주는 게 좋겠어. 하지만 그전에 긴 이야기가 될 듯하니...”

서팔봉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에게 돌렸다.

그에 누님이 나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팔봉이 찻잔을 돌리는 사이 다관을 들어 차를 따라야 했다.

모두의 잔에 차가 가득 차서 넘실거릴 때, 서팔봉은 말을 시작했다.

“푸줏간 사내의 정체가 궁금하다 했지?”

“예, 그렇습니다.”

내 말에 서팔봉은 품 안에서 서찰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 읽어줄 생각인가 짐작 했지만 서팔봉은 가만히 서찰을 탁자 위에 놓아두고는 말했다.

“푸줏간 사내의 정체라...그 자의 정체는.”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서팔봉의 입에 집중 되었다.

“귀녀라네.”

“예?”

내 얼빠진 물음에 서팔봉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자가 귀녀란 말일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침묵했다.

나는 서팔봉의 말에 생각했다.

어떻게 그자가 귀녀 일 수 있지?

물론 서팔봉은 이전에 귀녀가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단순히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의미쯤으로 해석했었다.

거기서 그 이상의 의미를 두는 게 이상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귀녀는 여자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로 기억되어 있었고 뒤집을 수 없는 진리로 여겨졌었다.

나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서팔봉을 바라봤다.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마치 어떤 질문이라도 받아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어떻게 그자가 귀녀 일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자는...”

나는 푸줏간 사내의 덥수룩한 머리와 거친 피부 그리고 그의 낮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더 설명이 필요할 듯 하군.”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아, 자네 기억나나? 객잔에서 서류를 정리 할 때, 말이네.”

서팔봉의 말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서팔봉은 서류를 정신없이 뒤적이다.

배달을 온 푸줏간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었다.

“혹시 그때 알아채신 겁니까?”

내 말에 서팔봉이 말했다.

“그렇네.”

“어떻게 말입니까? 별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요.”

“아니, 있었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귀녀의 족흔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말이야.”

서팔봉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그 이상한 족흔 말이군요? 아, 그렇다면 그자의 다리에 뭔가 이상이 있어서?”

“맞네. 묘하게 균형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더군.”

나는 푸줏간 사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서팔봉의 말을 듣고 보니 죽림원 사람들에게 끌려 갈 때, 그가 불안정한 걸음으로 걸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푸줏간 사내를 귀녀라 말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척박한 곳에서 살아 온 이들 중에 다리를 저는 이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런 내 생각을 말하자 서팔봉은 동의 했다.

“자네 말대로 그 사실만으로 푸줏간 사내를 귀녀라 말 할 수는 없네. 하지만 내가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 귀녀에 대해 알아낸 사실들이 있지. 떠올려 보게나.”

그의 말에 나는 푸줏간 사내에 대해 떠올렸다.

귀녀의 키는 서팔봉이 이전에 말한 짐작대로라면 그와 엇비슷할 것이다.

그 외에 또 서팔봉이 무슨 말을 했던가?

그래, 서팔봉은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면 뼈를 가를 수 있을 만큼 날이 두꺼운 칼을 사용 했을 거라고 했다.

내 기억 속에서 푸줏간 사내와 서팔봉이 함께 서있었던 푸줏간의 전경이 떠올랐다.

진열대 안쪽에서 서팔봉과 마주보고 서있었던 그의 키는 서팔봉과 비슷했다. 거기에다 그의 바로 뒤쪽 벽에는 칼이 걸려 있었다.

도축할 동물의 뼈까지 잘라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이는 도축용 칼이...

“하지만 어찌 그런 남자가 귀녀라 소문 날 수 있단 말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매달며 말했다.

“자네는 그의 가까이에 가본 적이 없어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실 처음 그를 쫓았던 건 반 쯤은 감이었네. 그 무성의한 서류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고 초조 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

나는 서팔봉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를 쫓아 마주보기 바로 직전까지도 확신은 없었네. 하지만... 자네 기억나나? 나와 그가 한참 동안 마주보던 걸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마주보고 선 순간 확신이 들더군. 왜 였는줄 아나?”

“뜸 좀 그만 들이십시오.”

내 말에 서팔봉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사내의 몸에서 분 냄새가 낫기 때문이네.”

“분 냄새요? 그 말씀은...?”

나는 푸줏간 일을 하는 남자에게서 분 냄새가 나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건 그다지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그가 귀녀라 불린 이유를 생각해보면 뻔한 일이지.”

“그 말은... 그가 여자로 분장하고 살인을 저질러 왔다는 말입니까?”

서팔봉은 내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묵언의 동의라 생각하며 나는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찬 물에 마음 가다듬으며 나는 생각했다.

왜 여자 분장을 하고 살인을 한 건가?

그가 변태이기 때문에?

하지만 아주 잠시 봤던 그의 모습 때문에 나는 그를 미친놈이라 생각 할 수 없었다.

서팔봉과 대화를 나누던 그의 모습에서는 변태에게 느껴지는 불쾌감이 아닌 범죄의 피해자들에게나 느껴질 법한 애수가 있었다.

내가 그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서팔봉이 입을 열었다.

“그는 정신이상자가 아니네.”

“변태가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나는 서팔봉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살인자에 대한 반발심에 힐난조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내 말에 서팔봉은 잠시 탁자 위의 서찰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며 보아 온 살인들에는 단 한 가지 이유만이 보였네.”

서팔봉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그를 쳐다봤다.

“바로 미쳐서지.”

“살인을 하는 사람이 그럼 정상이겠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인간의 오만가지 감정이 한 번에 담겨 있다 할 만큼 기묘한 표정이었다.

“맞네. 정상은 아니지. 하지만 그거 아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미쳤다 라는 말에도 여러 감정이 담긴다는 걸 말이네.”

서팔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사랑에 미쳐서, 슬픔에 미쳐서, 쾌락에 미쳐서, 물욕에 미쳐서, 그저 살인에 미쳐서... 살인을 하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유가 뭔 줄 아나?”

나는 묵묵부답 대답하지 않았다.

서팔봉의 말에 달리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였다.

“원한에 미쳐서네. 무림의 수많은 원한은 거미줄 같지. 전혀 상관없이 공중을 활공하던 벌레가 거미줄을 자극하면 그 순간 원한의 거미줄에 휩싸이네. 그건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예지 할 수도 없지. 그리고 그건 무림에서만 한정되는 이야기도 아니네.”

나는 가만히 서팔봉의 말을 들었다.

그의 말 속에서 눅눅한 습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습기가 눈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득한 무언가... 일평생을 살며 절대 마음속에 담고 싶지 않은 그런 진득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듯 했다.

“귀녀 역시 그런 거미줄에 휘말려 들었던 것이네. 한번 그 거미줄에 휘말리면 스스로 미쳤다는 걸 알면서도 미친 짓을 하지. 그러니 어찌 귀녀를 정신이상자라 할 수 있겠나.”

나는 서팔봉의 말에 동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공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공감을 따라 나는 서팔봉에게 질문했다.

“그럼, 귀녀가 그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탁자 위의 서찰을 들어 보였다.

“내가 미심쩍어 했던 사실들이 여기 모두 기록되어 있네. 그가 그러니까 귀녀가 남긴 이 서찰에 말이지.”

나는 잠시 그 서찰을 보다 불쑥 떠오른 사실을 서팔봉에게 말했다.

“혹시 그 폭발도 귀녀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 말에 서팔봉은 잠시 침묵하다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네.”

나는 서팔봉과 서찰을 오랜 시간 바라봤다.

나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침묵이 조당 안을 채웠다.

반다경이 지난 후 서팔봉이 접혀 있던 서찰을 펴며 침묵을 깼다.

“이제 귀녀에 대해 말해주도록 하겠네.”

완전히 펼쳐진 서찰을 탁자 위에 놓고 서팔봉은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이 서찰부터 생각해보지.”

“서찰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가 보기에 이 서찰은 지나치게 좋은 시점에 내 손에 들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지나치게 좋은 시점에...?”

서팔봉의 말에 나는 생각했다.

좋은 시점... 좋은 시점이라...

확실히 좋은 시점이었다.

서찰은 마치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귀녀가 끌려가기 전에 서팔봉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이 말하는 건 단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었다.

“귀녀는 대협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귀녀가 내 손자를 납치한 이유에 대한 내 추측이 기억나나?”

“대협이 방해물이 되기에 손자를 납치해 간 거라 하셨지요.”

“그때는 그게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했네. 사실 달리 생각 할 여지도 없었고.”

그 말대로 였다.

서팔봉은 자신이 북경에 처음 발을 들였으며 원한관계 있는 사람 역시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기억력을 증명하기 위해 숙수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서팔봉은 지금 그 기억력을 증명 하는 과정이 헛고생이었음을 스스로 자인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팔봉의 말을 듣고 보니 하나 둘 서팔봉과 귀녀가 만나 나누었던 대화에서 묘한 점이 떠올랐다.

서팔봉을 처음 만났을 귀녀의 첫 한마디는 굉장하군요 라는 감탄이었다.

그 말은 결단코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을 대했을 때, 할 말이 아니었다.

귀녀에게 서팔봉이 방해물이었다면 그와는 다른 말을 했을 테니까.

예를 들어 손자의 안위를 생각해야지 같은 협박성 짙은 말 같은 것 말이다.

거기다 당시 귀녀가 보였던 표정은 불안감이나 적개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귀녀와 첫 대면하고 그의 표정을 본 순간 알겠더군. 그는 내 방문을 반가워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네.”

서팔봉의 말 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귀녀가 서팔봉과 만나 반가워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귀녀가 서팔봉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추측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는 서팔봉을 보며 그에 대한 대답을 기다렸다.

내 기대어린 표정을 마주하며 서팔봉은 왠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한가 보군?”

“당연한지요.”

“뻔한 거네.”

“예?”

“이렇게까지 정황이 모이면 한 가지 결론 밖에 생각 할 수 없지 않겠나?”

“그 말씀은...?”

“귀녀는 내가 그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쫓게 만들기 위해 내 손자를 납치한 것이네.”

서팔봉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 아닌가?

서팔봉을 이용하기 위해 떡밥을 뿌렸고 서팔봉은 그 떡밥을 물었다.

나는 막상 떠올리고도 스스로의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뭐가 말인가?”

“귀녀가 굳이 서대협에게 쫓기고 싶어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다 결국 죽림원 조직원들에게 끌려가지 않았습니까? 얻는 게 뭐 하나 없는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서팔봉은 말했다.

“얻은 게 없다라... 왜 그리 생각하나?”

“실제로 얻은 게 없으니까요.”

같은 말이 반복되자 나는 슬슬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보아도 귀녀가 얻은 건 없었다.

하지만 서팔봉의 말을 들어보면 귀녀는 뭔가 큰 걸 얻었다는 듯이 들리지 않는가.

“아니, 그는 무엇보다 큰 걸 얻었네. 나를 통해서 말이지.”

나는 말없이 서팔봉을 쳐다봤다.

서팔봉은 그런 나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입을 뗐다.

“먼저 유족들과의 면담을 떠올려보게.”

나는 면담을 떠올렸다.

네 명의 유족과 가졌던 면담 그리고 그 면담을 통해 귀녀의 살해 동기에 대한 서팔봉의 추리를 말이다.

그 면담을 통해 서팔봉이 얻은 것은 귀녀의 살해 대상들에게 어떤 신체적인 공통점도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살해하기 힘든 신체능력과 위치의 인물들까지 살해대상으로 선택한 부분을 근거로 원한에 의한 살인 일 가능성을 더욱 확실히 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드러난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죽림원이라 불리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과 우인객잔의 황객주 역시 죽림원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떠올린 사실들을 말했다.

“그 면담을 통해 알게 된 건 귀녀가 죽림파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그렇지요.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는 아직 설명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래서 나는 거기에 한 가지 가정을 덧붙여서 생각해 봤지.”

“그게 무엇 입니까?”

서팔봉은 내 질문에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들은 어떻게 선택 되었는가 라네.”

“죽림원의 조직원이기 때문 아닙니까?”

“물론 그것도 한 요소지.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상대하기 힘든 이들까지 범위에 넣을 필요는 없네. 거기다 선택된 이들의 조직 내에서 짐작되는 직급이 너무 다양하거든.”

“너무 다양하다?”

“그렇네. 황객주에게 서류 열람을 요청 했던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지.”

“그래서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많은 걸 알아내지는 못했지. 먼저 말한대로 그 서류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죽림원이 뭘 주업으로 삼는지는 알겠더군.”

“주업... 이라.”

“서류를 검토한 내용으로 추측만 하고 있었지만 이 서찰 덕에 확실하게 알겠더군.”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서찰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럼 말씀해 주시죠.”

내 말에 서팔봉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은 인신매매라네.”

서팔봉의 대답에 나는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껴야 했다.

그럼 어제 저녁에 그 노인네가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때 제대로 도망치지 못했다면 내 몸은 지금 쯤 배에 실려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배가 아니라 마차에 실렸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내가 번뇌에 휩싸여 있을 때, 서팔봉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주업이 인신매매라는 걸 알고 나니 모든 게 선명해 지더군.”

나는 얼른 번뇌에서 벗어나 서팔봉에게 물었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들이 인신매매를 했다고 한다면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네. 바로 귀녀가 그 인신매매의 피해자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그렇게 단정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맞네. 하지만 귀녀가 피해자라고 한다면 많은 게 설명이 되지.”

귀녀가 피해자라고 가정 했을 경우 설명이 되는 것이라?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귀녀가 피해자다.

귀녀는 그 때문에 죽림원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죽은 죽림원의 조직원들은 마치 보이는 족족 죽인 것처럼 천차만별이다.

거기다 오늘 아침에도 한명을 죽인 후 어째서인지 서팔봉의 손자를 납치 했다.

서팔봉의 말에 따르면 서팔봉이 자신을 쫓아 와주길 바래서 라고 한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망에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였다.

“귀녀가 피해자라고 하여 설명 되는 게 있습니까? 그저 그가 죽림원과 원한관계 라는 사실만 더 확실해 지는 것이지.”

“아니 그렇지 않네. 생각해보게. 귀녀가 죽림원 조직원들을 죽인 기준을 말이네.”

기준...?

죽림원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이는 족족 죽인거라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어...?

보이는 족족?

“설마...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만 죽인 겁니까?”

“어떻게 그들의 얼굴을 알았겠는가?”

나는 서팔봉의 질문이 의도한 뻔한 대답을 했다.

“그들이 납치했기 때문이겠죠.”

서팔봉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납치된 게 아니라네.”

“그럼 어찌 죽림원에 간단 말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탁자에 턱을 괴며 말했다.

“그는 팔린 것이네. 그의 누이와 함께 말이지.”

나는 서팔봉의 말에 탁자에 놓인 서찰을 바라봤다.

“그 서찰에 그리 적혀 있었습니까?”

서팔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가 여자로 분장했던 이유는 누이의 복수를 위해서 였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굉장히 우울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그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 스스로 자신에게 그런 분장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입고 살인을 했던 거겠지.”

“어찌 그렇습니까?”

“자네는 이 나라에 환관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는가?”

서팔봉의 뜬금없는 언급에 나는 대충 생각나는 숫자를 말했다.

“천명쯤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그럼 몇 명입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바로는 팔천명에 이른다 하더군.”

나는 그 상상을 넘는 숫자에 놀랐다.

도대체 아무리 넓다 하나 그 황성에 팔천명의 환관이 머물 공간이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과 동시에 나는 서팔봉이 우울한 미소를 매달고 했던 말을 되새김질 했다.

“설마... 귀녀 역시 환관이었다는 말입니까?”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이었겠지.”

서팔봉은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면...?”

“환관들 중 태반은 배고픔을 못 이겨 스스로 거세한 빈민 출신이 많네. 그 중에는 법으로 금지 했음에도 부모들이 자식을 거세시키는 경우도 있지.”

나는 평소 생각해 본 적 없던 세계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서팔봉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팔봉의 말은 그만큼이나 처절한 이야기 였다.

“하지만 귀녀의 경우에는 좀 달랐던 모양이야. 부모가 죽림원에 그를 팔아넘길 때까지는 멀쩡했으니 말이네. 문제는 죽림원에서 일어났지.”

서팔봉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계속 이야기 했다.

“아무래도 죽림원의 두목이라는 이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상당 했던 듯하네. 그 때문에 이제까지 사온 아이들 중에 가장 얼굴이 반반한 아이를 뽑아 권력의 중추에 있던 환관에게 보낼 생각이었겠지.”

서팔봉은 계속...

계속해서 말했다.

“그 환관에게 보내지기 전의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하더군. 그 환관의 독특한 취향 때문에 남아임에도 한쪽 발을 전족으로 만들기 위해 천으로 압박을 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 였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지.”

서팔봉의 말에 나는 그가 발을 절었던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서팔봉이 말했던 기묘한 형태의 발자국이 생긴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열 다섯살 쯤이 되었을 무렵에 그는 거세를 당했네. 그리고 그 환관에게 보내질 준비를 했지. 그런데 일이 벌어진 걸세.”

“무슨.... 일이 말입니까?”

나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 환관이 죽은 게지. 치열한 권력 다툼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냥 수명이 다해서 말이네. 전족만 아니었다면 그 환관의 죽음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걸세. 하지만 귀녀는 오년간 발에 천을 동여매 왔었지. 서찰에 그때의 심정까지 적어 놨더군.”

서팔봉은 서찰을 들고 읽어내려 갔다.

“그의 죽음에 기뻐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저주 받을 고통을 참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내 일신의 성공을 위해서 죽림원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었다. 나는 오직 내 누이를 위해 그 고통을 참아 왔다. 환관이 되어 누이를 빼내기 위한 그 일념 하나로 버텨온 것이란 말이다.”

서팔봉은 서찰을 읽은 후 나와 누님 그리고 용춘을 쓸어봤다.

서찰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서팔봉은 말했다.

“그가 살아온 이유는 누이 였지. 온갖 오욕과 고통을 참으면서도 말이네. 하지만 그런 누이도 그 반년 후 죽네. 가장 악질적인 포주 밑에서 일하다가 말이지.”

나는 서팔봉의 긴 이야기를 듣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쳐서 살인을 한다.

원한에 미쳐서 살인을 한다.

미쳤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미쳐서 살아간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가 되어 몸 안을 헤집었다.

몸 안은 그 소용돌이에 격하게 흔들리는데 그와 반대로 내 몸은 갑자기 일어난 오한에 떨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때문에 그곳에서 나온 겁니까?”

“누이의 죽음을 알고도 일 년 동안은 그곳에 잡혀서 개처럼 일해야 했다고 적혀 있었네. 그 후 운이 좋아 탈출 했다고 하더군.”

“그럼 살해된 이들은 그가 그 육년 동안 보아온 이들이겠군요.”

“그렇네. 오늘 아침 살해된 자는 그의 발을 전족으로 만든 이라고 하더군. 그때 당시에는 죽림원 고문조 조원이었다고 하네. 얼굴을 아는 마지막 한 사람이고 적혀 있더군.”

그 말에 나는 오한을 털어내며 물었다.

“그렇다면 복수는 끝난 것 아닙니까? 왜 굳이 그들에게 잡힌 겁니까? 그대로 살았으면 되는 건데.”

격앙되어 있는 내 목소리에 놀란건지 서팔봉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가 얼굴을 모르는 한 사람이 있었거든.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자신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원흉 같은 사람 말이네.”

“그게 누굽니까?”

“죽림원주 아니겠나.”

서팔봉의 대답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 둘 모여들며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앞서 귀녀가 얻었다는 큰 것은 죽림원주를 말하는...것이었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찰에 써있는 내용을 봤을 때는 반쯤 도박 하는 심정이었던 듯싶지만 말이지.”

“그렇다면 그 폭발은?”

“자네 생각이 맞을 거네.”

나는 서팔봉의 대답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벽력탄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죽림원주의 얼굴을 몰랐다면 그 본거지도 몰랐을테니 미리 어디에 숨겨두지도 못했을테고 말입니다.”

서팔봉은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끌려갈 때, 그가 입고 있던 옷이 기억나지 않나?”

그 말에 나는 귀녀가 입었던 옷을 떠올렸다.

그리고 귀녀를 만난 후 반시진의 준비시간을 서팔봉이 주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머리가 뜨거워짐을 느껴야 했다.

“그럼 알고 계셨던 겁니까!?”

의자가 내 뒤로 밀려나며 쓰러졌다.

나는 선 채로 서팔봉을 노려봤다.

그때 했던 말들이 그리고 손자를 구한 후에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좋은 구경을 놓친다고!?

그게 무슨 좋은 구경인가!

“알면서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내 고함에 서팔봉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네는 그걸 말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말에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니 말릴 수 없다.

그건 누구라도 마찮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산단 말인가?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느냔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가만히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네. 말하지 않았나. 알면서도 미친다고... 그에게는 그게 인생의 끝이었던거네. 누구나 늙어서 죽는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죽을 거라 생각해 왔던 거지.”

그런 서팔봉의 말을 들으며 나는 힘없이 탁자 위의 서찰을 내려다 봤다.

서찰 위에는 깔끔한 글씨체로 글이 쓰여 있었다.

정말 깔끔한 글씨 였다.

아까울 정도로...

“궁금증은 다 해결 되었나?”

서팔봉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서찰은 곱게 접어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한참을 서찰이 놓여 있던 탁자 위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 시야에 누님과 용춘이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서팔봉이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말했다.

“원한이라는게 정말 미치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내 말에 서팔봉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한참 동안 나를 보던 서팔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당하게 살게. 그럼 원한 살 일도 없고 어느 곳이든 안전 할 테니 말이야.”

서팔봉은 그 말을 내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조당 안에 남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팔봉은 말했다.

정당하게 살면 된다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에 원한을 사지 말라고...

내게는 서팔봉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은 마음에 남아 평생 잊혀지지 않을 듯 싶었다.

그 말을 마음에 품고 나는 조당 밖으로 나갔다.

열린 문을 닫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번 겨울은 정말 춥군.

조당문이 닫히며 사위는 어둠에 잠겼다.



귀녀편 <완>




막간



그 사건으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처음 오일간은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저자도 이제는 벌써 다른 화제로 옮겨 탄 상태다.

지금 나는 무관의 객방에 머물며 고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진시에서 낙방한 이상 북경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뭘 할까?

열흘간 귀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도 이제는 다른 고민으로 갈아탄 상태 였다.

저자나 내 머리나 크게 다를 게 없다는 말이겠지.

그래, 다를 게 없다.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결국은 잊혀 진다.

아니면 희미해지거나.

열흘전 조당에서 그렇게 분기탱천 했던 나도 지금은 고향에 내려가 뭘 하며 살까 같은 시덥지 않은 고민만 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내 일이 아닌 남의 일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 분노 할 수 없다는 말이겠지.

아무리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라도 결국 그런 것이다.

지금에 와서 나는 그런 체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행낭에 짐을 챙겨 넣으면서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짐을 챙기고 나서 나는 방을 나섰다.

더 있어서 무엇 하겠나.

갈 수 있을 때, 떠나는 게 좋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누님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용춘을 만났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에 애교라고는 없는 말투 였지만 왠지 표정에서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면 내 착각일까?

아마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용춘의 작별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응대한 후 누님의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쁜 일은 제일 먼저 겪으라고 했던가?

나는 누님의 처소 앞에 서서 새삼 그런 격언을 떠올렸다.

“누님, 안에 계십니까?”

내 말에 안에서 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누님 말고도 서팔봉이 함께 있었다.

그날 조당에서도 그랬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모양새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둘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집에 돌아 갈 준비는 다 끝냈느냐?”

누님의 말에 나는 짐을 옆에 놓아두는 걸로 대답했다.

“집에 돌아가서는 어찌 할 생각이냐?”

내 고민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누님의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 별 생각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즉석해서 떠올린 생각을 말했다.

“무관에서 애들에게 글이나 가르쳐 볼까 생각 중입니다.”

내 대답에 누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네 놈 속내 따위는 옛 저녁에 다 파악했다 라는 눈빛이었다.

“다음 진시는 언제 있는가?”

상석에 있던 서팔봉의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삼년이라고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었다.

내 대답에 서팔봉은 오래 걸리는군 이라고 말했다.

의례 딸려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남아의 목표는 이루기 전까지 포기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네

라는 말이었지만 솔직히 그닥 와닿지는 않았다.

서팔봉 역시 그냥 해본 말인 듯 표정에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나름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기에 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한동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 공기 속에서 차를 마시던 누님이 갑자기 생각난 듯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저번에 내준 숙제의 답은 알아냈느냐?”

누님의 말에 나는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 열흘전 누님이 내주었던 숙제를 떠올렸다.

어색한 공기를 무마하기 위해 더 어색해 질만한 말을 꺼내다니 과연 누님다웠다.

나는 그 질문에 만사 귀찮아져 대충 대답했다.

“서대협의 친절 아닙니까?”

될대로 되라는 내 대답에 의외로 누님은 지은 듯 만듯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종의 배려지.”

어라? 이게 아닌데...

“숙수의 무죄를 밝히고자 했다면 그냥 네게 질문을 해서 현장에 남아 있는 사실들과 대조를 해보면 되는 일이었지. 숙수가 범행을 저지른 당사자 였다면 네가 목격자 였을 테니. 너는 사건 현장에 벌어진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안다면 숙수가 범인이지만 네가 모른다면 숙수가 범인이 아닌게지. 그런데도 굳이 장황한 증명을 한 이유는 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던 거란다. 아무리 포두가 주도 했다고는 해도 너 역시 날조를 한게 되니 말이야.”

누님의 설명에 나는 새삼 서팔봉을 쳐다봤다.

서팔봉은 그런 내 시선에 자신은 무관 하다는 것처럼 차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던 걸 참고 포권을 해보였다.

그는 내 인사에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답례 했다.

그 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누님의 처소를 나왔다.

주씨무관 북경지점의 정원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북경에 올라와서 진시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인생 시험에서는 떨어진 것 같지 않다고 말이다.

그리고 많은 걸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의 정문에 이르러 나는 몸을 돌려 무관을 바라봤다.

이 안에는 서팔봉이 있다.

나는 아직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잊지 않겠다.

그런 다짐과 함께 나는 몸을 돌렸다.

무관 정문 너머로 북경의 저자가 들어왔다.

이제 이 거리도 삼년 후에 보겠구나.

“그거 들었소?”

“뭐 말이오?”

“이레 전에 있었던 진시 말이외다.”

“아, 그 어려운 시험 말이오? 그게 뭐 어쨌단 말이오?”

“글쎄, 그게... 장원부터 차장원까지 부정행위를 했다 걸렸다지 뭐요.”

“허이구야. 대담도 하구만. 그래서 그 둘은 어찌되었소?”

“어찌되었겠소? 황제께서 대노하여. 북방에 군졸로 보내 버렸다 하더이다.”

“살아돌아오기는 글렀구만. 쯧쯧, 그런 놈들 때문에 진시에 떨어진 사람들만 안됬구만.”

“그래서 황제께서 용단을 내렸다고 하외다.”

“무슨?”

“진시를 석 달 후에 다시 치른다고 포고문을 내렸다고 하오.”

“호오, 용단을 내리셨구만.”

“떨어진 사람들이야 잘 된거지.”

“그러게 말이오.”

두 사람이 무관 앞을 지나쳐 멀어져 갔다.

그들의 대화는 주제를 바꾸고도 계속 되었지만 그 다음 내용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부정행위? 석 달 뒤 시험?

나는 멍하니 정문에 서서 생각했다.

객방에서 정문까지 걸어오는 동안 생각 했던 모든 계획들이 지나가던 행인들에 의해 크게 어그러졌다.

석 달의 유예기간이 생겼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무관 안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전경 안에 막 누님의 처소에서 걸어 나오는 서팔봉이 보였다.

그는 잘 가라는 듯이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해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석 달 동안 어떻게 버팅기지?

석 달이란 시간은 의외로 길다.

시험 준비만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돌게 분명했다.

나는 서팔봉에게 마주 인사하며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남는 시간동안 이번 사건을 기록하자.

나중에 고향에 돌아가서도 친우들에게 할 이야기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말이야.

제목은 어떤 게 좋을까?

그래, 그걸로 하는 게 좋겠군.

기록할 錄(록)을 붙여서...


작가의말

 제가 처음 연재 했던 글 입니다.

 현재는 게시판에서 삭제 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너무 부족한 글이다 싶어

 공개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이 글의 외전격인 살귀록 외전에서 이 글을 보고 싶다고 댓글을 다신 분이

 계셔서 뒤늦게 나마 1권 전체 분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본래 저 같은 경우 워드로 작성 후 게시판 등록 과정에서 퇴고를 하는데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퇴고본은 삭제 되었기 때문에 현재 올라온 글은 퇴고 이전의 원본 입니다.

 당연히 부분부분 오타나 비문도 많이 있고 설정상 약간의 오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독자분들의 아량으로 넘어가주시기 바랍니다. (아편 가루의 색은 노란색으로 이전에 어떤 분이 댓글로 지적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럼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기고 즐겁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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