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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괴물 님의 서재입니다.

영주님의 놀이동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최근연재일 :
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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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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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020화.

DUMMY

“뭐? 대련?!”


레이시아가 보기에 제이크는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지?’


그리고 나스 대륙인이자 천생 기사인 레이시아의 입장에서는 제이크가 놀라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네... 영주님.”


그래도 일단 대답은 해야했으니 레이시아는 답을 했다.


“아니, 어. 대련. 어. 그... 위험하지 않을까?”


물론 대련은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진검이 아닌 목검을 쓰고 살초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 배려를 하더라도 결국 사건 사고가 아주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강해질 수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마물과 직접 싸우는 것에 비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과의 대련은 100배 넘게 안전한 것이기도 했다.


‘그걸 제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레이시아의 상식선에서는 제이크 타나티안이 대련을 위험하다고 걱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후우. 얼마 전이었다면 제이가 힘들어서 나한테 의지하고 싶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러의 폭주로 인해서 기사로서의 생명이 끝나고 수많은 실패로 좌절한 후에 후계자에서까지 밀려났을 때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감히 자신이 옆에 있어도 될까 조바심이 날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 그건 아닐 거야. 제이는 옛날처럼 밝아졌잖아.’


마치 어릴 때처럼...


한국 나이 23세 한수호는 12세의 소년만큼 유치하다는 말이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레이시아는 또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와 달리 겸손한 레이시아는 자신이 여신과 제이크가 준 영약으로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섰을 뿐,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과 천재성은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제는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몸이라고 할지라도 한 때는 왕국 전체에 위명이 자자했던 제이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레이시아였다. 또한 기사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음에도 재능만 놓고 보면 자신이 가장 뛰어나지 않았음을 레이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 반해 이제 제이크는 앞으로 시간만 있으면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서 우뚝 설 영웅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령사들의 위명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겠지만, 제이크는 그들도 가지지 못했던 19개의 특별한 정령들을 모두 한 몸에 부릴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그 정령들을 모두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부릴 수 있을 것이기에 레이시아는 단순히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대단한 제이크에 비해서 레이시아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제이 눈에는 내가 한참 부족해서 걱정이 되는 거겠지?’


사실 제이크는 현대인이자 팔불출에 겁쟁이의 못난 감성으로 순수하게 걱정했지만, 레이시아는 이런 메커니즘을 거쳐서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허락해주십시오!”

“...에?”

“영주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영주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이크는 막상 어리둥절했지만, 결연함과 절실함으로 레이시아는 대련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하아. 그 대신 누나 진짜 다치면 안 돼. 알았어? 다치면 내가 누나 내 옆에 꽁꽁 묶어둘 거야!”


저 말이 진짜 묶어둔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다치지 말라는 건지 헷갈려 레이시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제이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려는 걸까? 역시... 가족이라서 그런 걸까?’


천애고아였던 레이시아는 친부의 친우였던 타나티안 백작 부부의 사랑을 받고 컸지만, 그렇다고 상실감이 아주 없을 순 없었다. 특히나 자신을 친모처럼 아껴주었던 백작 부인 일레인의 죽음은 오히려 갓난아이라서 아무 것도 몰랐던 제이크보다 더한 상실감을 안겨주었었다. 이때 타나티안 백작은 가문의 위기로 인해서 레이시아를 챙겨주기 힘들었고, 덕분에 레이시아는 제이크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족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 뭐해. 빨리 약속해!”


그런데 그 반대로 제이크는 자신을 정말 가족으로 생각할지 알 수 없었던 레이시아는 조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 누나 진짜 이러기야?”


서운해 하는 듯한 제이크의 모습에 레이시아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기로 했다. 영주님, 아니, 제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가 정말 가족 같아서 이렇게 아껴주는 거냐고...


“영주님...”

“응? 왜?”


그런데 레이시아는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이크는 자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얼음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냉철하던 여기사의 마음에 항상 큼지막한 불도장처럼 존재해왔다.


“왜? 뭔데? 뭐 물어보려던 거 같은데? 뭔데?”


무언가 심각한 말을 하려다가 하지 않을 때 듣는 상대가 되어버린 제이크가 집요하게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닌데... 뭔데? 내가 뭐든지 말해줄게. 말해봐. 뭔데? 목말라? 피곤해? 쉬고 싶어? 춥나? 뭐지? 누나~ 뭔데? 나 궁금해서 죽는 꼴 보고 싶어?”


그것도 나스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는 초딩마냥 유치하고 집요했다.


“...영, 영주님의 최종 목표가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레이시아도 얼떨결에 말을 돌렸다.


“...어?”


이번에는 제이크가 흠칫 당황했다.


제이크의 탈을 쓰고 있는 한수호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지구로의 귀환.


신비한 놀이동산 능력이 있고 초미녀 레이시아가 있어도 그래도 그의 목표는 확고하게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다. 물론 레이시아와 동행이란 조건 하에. 그런데 여기 대륙 사람인 레이시아에게 지구라는 이세계로 넘어갈 거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제이크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따라온 앤데 내가 사실은 지구인 한수호라고 할 수는 없지. 젠장, 그렇다고 마왕을 잡는다고 할 수도 없고... 음.’


그래서 제이크 역시 답은 하나뿐이었다.


“흠흠. 내 목표는!”


무언가를 숨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다른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나와 같이 평생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야. 더 이상 마물들도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고 희망이고 최종 목표야. 누나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물론 나도 같이.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헤헤.”


제이크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진실을 속이기 위해서 또 다른 진실만을 말한 제이크의 지금 언행은 레이시아가 생각하기에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레이시아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 누나?”

“영주님. 아니, 제이크.”


레이시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제이크를 불렀다. 갑자기 이름이 불린 제이크는 흠칫 놀랐다. 그렇게 말을 놓고 편하게 하라고 해도 꿋꿋하게 영주님과 존대를 고집하던 레이시아의 갑작스런 이름 부르기. 제이크의 기억 속에서는 레이시아에게 최근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어, 어. 누나.”


제이크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저... 저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어? 어... 어...”


제이크는 살짝 고민했다.


‘악! 뭐라고 하지?! 사실대로 사랑한다 말할까? 지금 결혼하고 싶다는 오바겠지? 으... 누나가 아니라 사실은 여자로 보인다고 할까? 누난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를게? 아니, 사실은 어릴 때부터 짝사랑했다고 할까? 하아... 씨발, 이건 나도 아닌 건 알겠다. 지금까지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레이시아일텐데, 갑자기 얼마나 부담스럽겠냐고!’


이번에는 23년 동안 모태솔로 한수호의 머릿속이 하얘진다.


“......”

“......”


잠깐의 침묵 후에 제이크가 다급하게 답을 했다.


“가, 가족이니까! 어?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래. 누나는 내게 누나잖아. 여동생은 아니니까말이지? 아하하. ...미안. 아무튼! 그, 그러면 내가 누나 행복하게 해줘야지. 안 그래?”

“......”

“그, 그러니까 누나 빨리 일어나. 아 왜 이래.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어? 그리고 바닥 찬 데 이러지 말라고. 차라리 날 깔고 그렇게 무릎 꿇어.”


제이크는 레이시아의 두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오러 익스퍼트 상급 기사의 신체능력은 괴물 수준. 이제는 제법 근육질의 몸매가 된 제이크에 비해 훨씬 팔다리가 가늘지만, 역시 레이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주님.”


아직도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여자에게 힘이 밀린 것이 뻘쭘해서 살짝 주눅든 제이크가 답을 한다.


“...으응?”

“제가 정말 영주님의 가족이 맞습니까?”

“응? 당연하지. 누나가 가족이 아니면 누가 가족이야? 저기 있는 우리 아버지? 뭐 아버지가 계시긴 한데, 새 장가도 가셨고 나는 이제 독립했잖아? 아니, 뭐 아버지가 싫다는 건 아닌데... 흠흠. 그보다는 평생 함께 하는 사람이 더 가족이지 않을까? 누나 나랑 평생 같이 하기로 약속했잖아. 아니야?”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약속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어릴 때처럼 불러도 되겠습니까?”


레이시아는 조금 망설인 후에 물었다.


“어? 어. 당연하지. 말도 편하게 해. 내가 저번부터 말했잖아. 응?”


그리고 잠시의 침묵 후에 레이시아의 입술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제, 제이야.”


레이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응! 이제야 불러주는 구나! 레이 누나아!”


그리고 해맑은 제이크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뜬 레이시아는 초롱초롱 빛나는 제이크의 신난 눈빛에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누나! 왜 안 쳐다봐!”

“으응.”

“어! 그래! 얼굴 보고 이야기 해야지. 흐흐. 그리고 말 편하게 하니까 얼마나 좋아. 흐헤헤.”


말은 편하게 했지만 아직은 제이크를 마주보고 웃기에는 어색한 레이시아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응?”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레이시아의 눈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제이크의 짓궂은 얼굴이 등장했다.


“헷!”

“...꺅?!”

“큭큭큭. 놀랐어?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자기도 모르게 낸 여성스러운 비명에 부끄러웠던 레이시아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영, 영주님.”

“아니 방금까지 제이라고 불러놓고 왜 또 갑자기 영주님이야.”

“방, 방금은... 죄, 죄송합니다.”

“죄송은 지금 이게 더 죄송해야지. 말을 편하게 했다가 다시 올리는 법이 어디 있어.”


다이어트도 하다가 요요가 돌아오면 더 어렵게 살이 찌고, 인간관계도 한 번 말을 놨다가 다시 올리게 되면 더 불편해진다.


“그, 그렇지만...”


그러니까 낙장불입. 이번 기회에 아예 말을 정리하려는 제이크가 집요하게 레이시아를 몰아붙였다. 연애 잘 하는 고수들의 밀당 개념이라기보다는 후임들의 혼을 빼놓은 선임식의 몰아세우기 방식이긴 했다.


“그렇지만 뭐?”

“아, 아닙니다.”

“여기 안 아니고 밖인데?”

“......”

“어? 왜 말을 하다 말아.”

“그, 그게... 영, 영주님! 호위 기사가 영주님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영지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참 나. 누나가 왜 내 호위기사야. 가족이지. 나랑 호위기사할래? 가족할래? 호위기사할래? 같이 살래? 어? 나랑... 아니다. 흐흐. 누나가 정해!”

“......”

“나랑 가족할 거지?”


사실 연인이고 싶은 제이크의 궁색한 핑계가 의도치 않았지만 레이시아의 약점을 제대로 꿰뚫었다.


“......”

“아 그리고 영지민들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영주고, 누나가 내 가족인데. 어? 영지민들이 뭐라 할 수 있을 거 같아? 안 그래?”

“그, 그래도...”

“그래도 뭐가 또 그래도야. 그냥 편하게 해. 누나가 그런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있으면 오라고 그래. 확! 어? 누나도 엄연히 귀족이잖아. 어차피 누나 지금도 왕국 기사 시험 봐도 합격할 수 있잖아. 신분 상 문제 될 것도 없어. 아 그리고 솔직히 누나도 나 여기까지 따라온 거 가족이라서 그런 거잖아. 내가 영주인데 뭐 여기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그런 거 아니잖아. 아니야? 혹시 여기서 권력 잡으려고 온 거야?”

“네? 아, 아닙니다.”


레이시아가 황급히 부인을 했다.


“밖이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 맞잖아. 안 그래? 내가 괜찮다니까. 내가 원한다고. 나 누나가 나한테 영주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속상해. 응? 자꾸 거리감 생기고 그런다니까. 어? 누나! 만약에 영지에서서 누가 뭐라 하면 말해. 내가 확 조져 놓을게. 확 씨!”


대한민국 예비역 표 허세. 제이크가 당장에라도 깽판을 치러 갈 기세로 액션을 취하자 레이시아가 화들짝 제이크의 팔을 붙잡았다.


“후우.”


한수호의 학창 시절 야자 빼먹기와 말년 때 행보관을 속일 정도로 뛰어났던 연기력이 빛을 발했다.


“...누나.”


제이크가 한 템포를 쉬고 유치함과 단호함을 반씩 담아 레이시아를 불렀다.


“...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도 아니고, 레이시아의 입장에서는 이세계식 밀어붙이기에 당황한 여기사는 평소답지 못하게 얼빠진 목소리로 답을 한다.


“네~? 네에?! 나 이제 누나가 편하게 말 안 하면 누나랑 말 안 할 거야.”

“...네?!”

“어! 이제 ‘네’도 안 돼! 앞으로 그냥 응이야. 응. 누나 계속 그렇게 말 불편하게 하면 진짜 나 말 안 할 거야.”


매운 ‘K-응석’과 ‘K-억지’에 레이시아는 아찔해졌다.


“갑, 갑자기 이러시면...”


레이시아가 당황했지만, 제이크는 흔들리지 않고 답을 하지 않았다.


“.....!”


도리어 감정을 실어서 입을 꾹 닫았다. 만약 효과음이 음성으로 나왔다면 흥! 칫! 뿡! 정도였지 않을까?


“영, 영주님!”

“......!”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이크가 이번에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일순 휑하고 찬바람이 불 정도였다. 예쁜 레이시아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근손실보다 더한 레손실이지만, 이번만큼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로서 어쩔 수가 없었다.


“......”


돌아선 제이크도 불안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제발! 그만 좀 포기해!’


사실 한수호도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혹여 이러다가 레이시아가 아주 튕겨져 나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심장을 자꾸 죄어들었다. 그렇지만 기회는 왔을 때 밀어붙여야 하는 법. 읍참마속泣斬馬謖에 더해서 배수진背水陣의 심정으로 제이크는 침묵을 이어나갔다.


‘레이짱, 빨리 항복해. 나도 마음이 아프니까.’


한수호는 오로지 레이시아가 제이크를 배신할리 없다는 것만 믿고 우직하게 버티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침묵의 끝에 레이시아가 항복 선언을 했다.


“...알겠습니다.”


평소의 레이시아답지 않게 아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뭐라고? 뭘 아는데? 그리고 알겠습니다가 아니고 알겠어라고 해야지.”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제이크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얄밉게 말을 했다.


“...알겠어. 음... 제, 제이야.”


그제야 완전한 항복 선언을 받아낸 제이크가 슬쩍 돌아봤을 때, 레이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헐. 귀여워 죽겠네.’


결국 제이크의 입에서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흐흐. 누나.”

“......”

“응? 말 편하게 하라고 했지 대답하지 말라고는 안 했었는데?”

“...네?”

“쓰으. 네가 아니고 어! 응! 에!”

“...에?”

“에헤헤. 기쁘다. 조금 전까지 엄청 속상했는데 지금은 엄청 기뻐.”


실제로 레이시아가 보기에도 제이크의 얼굴은 싱글벙글 참으로 행복해보였다.


“누나.”

“...네.”

“쓰읍.”

“으, 으응.”

“그래. 그래야지. 누나, 우리 잘 할 수 있겠지?”

“...으응.”

“고마워. 누나가 있어서 진짜 내가 여기서 산다. 후우.”


레이시아야 진짜 속뜻을 알 리 없겠지만, 정말 여기 이세계, 그것도 거지같은 베렌령에서 한수호가 살 수 있는 낙은 오로지 레이시아 뿐이었다.


“우리 꼭 성공하자.”

“으응.”

“우리 이제부터 운명 공동체야. 알았지? 무슨 뜻인지 알지?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평생? 알았지?”

“...응.”

“그러면 운명공동체님.”

“...으응?”

“우리 운명공동체를 기념하는 의미로 엘피스나 나눠먹자.”


때마침 완성된 엘피스 나무를 보며 제이크가 말했다.


“여기 나무 아래로 와 봐.”


레이시아는 결코 알 리 없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대신할 나무였다.


“여기서 우리 맹세하자.”


마치 게임에서 사과나무에 사과가 달려있듯 카드로 만든 엘피스 나무 역시 그림처럼 탐스러운 열매들이 무려 10개나 달려 있었다.



* * *



엘피스 열매는 지구로 치면 사과와 바나나가 섞인 느낌이다. 모양은 빨간 사과인데 속살은 하얀 바나나 같다고 해야 할까? 도대체 이 녀석으로 만든 엘프주는 어떤 느낌일까?


‘제이크 기억에도 엘프주를 먹은 기억은 없네.’


냠냠. 일단 맛은 있다. 바나나처럼 부드럽고 달면서도 사과처럼 살짝 새콤함이 가미된 느낌? 포만감도 있고 맛도 있는데다가 영양까지 높다고 하니 비싼 이유는 잘 알겠다.


“누나, 어때?”

“맛, 맛있습...”

“어~?”

“...맛, 맛있어...”


얼굴이 엘피스 빛깔이 된 귀여운 레이시아를 보면서 먹으니 나도 더 맛있긴 하다.


“그래? 흐흐. 그럼 많이 먹어. 자.”

“영, 영주님! 이 귀한 것을.”

“에이, 누나보다 귀한 건 없으니까 마음껏 먹어. 나 따라서 여기 촌동네까지 따라오느라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어.”


많이 먹어도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리]에서 [확장].


[성장]: (이미 최대치입니다!)

[과실]: 1개 당 100마나


[Tip. 하루에 생산 가능한 과실의 최대 개수와 한 번에 나무에 달려 있는 과실의 최대 개수는 10개까지입니다.]


마나만 있으면 과실이 무한하기 때문...


‘...이 아니라 열 개가 한계네?’


아니, 게임도 아니고 무슨 과일이 딱 10개가 전부인가. 그것도 하루에 생산 가능한 양도 정해져 있다. 물론 레이시아와 나 둘만 먹기에는 충분하지만 저걸로 돈을 벌기에는 조금 곤란해진다. 엘프주 한 병을 담그는데 몇 개의 과실이 필요할까?


‘에잇, 만약에 올인한다고 치더라도 하루에 마나가 1,000이면... 음... 으음... 한 5천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필요 하루 마나 회복량=1,000

하루 마나 회복량=24시간×0.01×최대 마나량

1,000=24시간×0.01×최대 마나량


그렇다면 필요한 최대 마나량은?


음... 이럴 때는 진짜 문과인 것이 원망스럽다.


“누나.”

“...으응?”

“아주 오래 걸릴 것 같긴 하지만...”


레이시아가 조용히 내 말을 기다렸다. 내 말을 이렇게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주는 여자는 레이시아가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아주 아기였을 때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는 성질 급한 우리 엄마 역시 내 말을 이렇게 차분히 기다려주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게.”


허세라도 이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으... 으응.”


레이시아의 얼굴이 엘피스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속살은 하얗... 크흠. 미친놈아! 좀. 진정. 제발... 후우.’



* * *



정착 지원금, 그러니까 다르게 표현하자면 앞으로 베렌령에서 먹고 살 종잣돈에 레이시아의 노후자금까지 모두 퍼부어 하급 마나석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충전했던 다이아는 총 31,244 다이아였다.


여기서 처음에 놀이 뽑기 10연챠.

그 다음에 동산 뽑기 10연챠.

정령 뽑기 10연챠를 세 번.

마나를 400까지 충전하고, 레이시아가 상행을 다녀온 후에 정령 뽑기 10연챠를 7번. 마나를 1,000까지 충전하고, 동산 뽑기 10연챠를 8번.


그리고 남은 다이아는 50 다이아도 되지 않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보유한 카드와 정령의 능력만으로 새로운 다이아를 벌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나, 엘피스는 출처의 문제가 있겠지?”

“네. 아마도요.”

“음... 역시 그렇겠지? 그리고 누나 또 존대했어.”

“네? 네. 죄송합... 미, 미안해.”

“흐흐. 미안할 것까진 없고. 앞으로 조심해. 그러면 하레드 나무랑 데트린 나무가 낫겠지? 걔들은 북부에서 자생하는 나무니까... 목재로 가공해서 파는 걸로?”

“으응.”

“그래. 그러면 촌장하고 행정관하고 상단주? 아니다. 이참에 저번에 식당에 왔던 사람들하고 얘기도 해야겠지? 결국 베렌 상단에게 물건을 맡기긴 해야 하니까.”

“으응. 내가 말을 전할게.”

“그러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하지? 그런데 있잖아. 누나가 보기에는 전부 믿을 만한 사람들처럼 보여? 어때?”


천생 기사인 레이시아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없는데서 누군가를 평하는 것을 불편한 일일 수도 있지만, 다행히 레이시아는 자신의 판단을 내게 말해주었다.


“음... 제이 네가 영지민들에게 나쁘게 굴 건 아니지? 세금을 많이 올린다던가... 노역을 많이 시킨다던가... 그럴 건...”


물론 레이시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하였다.


“에이, 당연히 아니지. 누나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래.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사실 내가 법 없이도 살 사람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범법자까지는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일본의 성인물을 본 것도 범법자라면 범법자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중범죄라고 할 수 있는 형법상의 죄는 범한 적이 없었다. 무단횡단은 한 적이 있어도 음주운전 같은 건 한 적이 없단 말이다.


“아, 아니! 아니야. 제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절대로 아니지!”


어김없이 내 눈치를 보던 레이시아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한다.


“그렇다면... 네가 추구하는 길이 영지민들도 다 잘 사는 길이라면... 그 분들 모두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거야. 도움이 될 거 같아. 나도 긴 시간을 같이 보낸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여기에 있기에 아까울 정도로 능력이 있는 분들 같았어. 그리고 그런 능력으로 욕심내지 않고 영지민들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나쁜 사람들도 아닌 것 같고. 제이 너도 알잖아. 여기 영지가 얼마나 외떨어져있고 척박한 곳인지를... 이런 곳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으로 다른 이들을 뺏지 않고 도리어 베풀면서 살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실 현대인인 내 입장에서도 그 점을 높이 사고 있긴 하다. 지구에서는 역사로 뉴스로 그리고 경험으로 인간의 탐욕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지 않았던가. 여기 사람들은, 특히나 여기 베렌령의 사람들은 지구의 욕심쟁이와 이기주의자들과는 조금 다르긴 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다만...”

“...다만 뭐?”


다만 확신이 필요하다.

나뿐만 아니라 레이시아의 일까지 걸려 있으니 신중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혹시나 하는 거 있잖아. 나는 정말 누나가 안전했으면 좋겠거든. 물론 나도 위험한 거 싫고. 그래서 조심하고 싶었어. 음... 정말 괜찮겠지?”


사실 그건 레이시아가 답을 해줄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내, 내가 열심히 할게.”

“아니야. 누나는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으응. 그, 그래도 노력할게.”


어쩜 레이시아는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진짜 레이시아는 전설이다. 레전드. 레이시아의 ‘레’는 레전드의 ‘레’이지 않을까?


사실 아까부터 마음은 당장이라도 꼭 안아주고 싶지만, 21세기를 살다온 나는 극도의 자제심으로 겨우 참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왜 자꾸 첫날이 생각 나냐?’


갑자기 꿈인 줄 알고 저질렀던 범죄행위가 갑자기 떠오른다.


‘...갑옷만 아니었어도.’


참 좋았을 텐...


“제이야?”

“...어?!”

“어... 미안. 생각 중이었어?”

“아, 아냐. 흠흠. 그럼 그렇게 하자. 누나 말이 맞는 거 같아. 아하하.”


그렇게 레이시아와 헤카인 경과의 대련도 영지의 주요 인사들과의 대화가 있고 난 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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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008화. +1 21.12.28 95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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