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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괴물 님의 서재입니다.

영주님의 놀이동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최근연재일 :
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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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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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005화.

DUMMY

당장의 시스템 확인도 중요하긴 하지만, 나에게는 확인해야 할 것들이 더 있다.


‘하아... 일단은 기억부터 정리하자.’


그래야만 앞으로 레이시아를 어떻게 대할지, 또 시스템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럼 일단 제이크 이 놈부터...’


한때는 아델린 왕국 전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재능을 보유했던 제이크가 지금처럼 망가진 이유는 오러의 폭주 때문이었다.


‘쯧쯧.’


12세에 있었던 사고. 사실 일단 그 나이에 오러 폭주가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제이크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부분이긴 하다. 그나마 고위사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망가진 오러홀은 신성력과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초반에는 악착같이 수련을 하긴 했는데...’


그렇지만 오러를 활용할 수 없는 기사의 한계는 명백하다. 지구의 스포츠라면 몰라도 여기 세상에서는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압도적인 피지컬의 차이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중학생과 고등학생이라면 어떻게 기술로 극복할 수는 있었겠지만, 유치원생이 성인 남성을 기술로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인 것처럼 오러라는 힘은 기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또 포기하지 않고 이것저것 노력을 하긴 했었지?’


제이크는 기사의 꿈이 좌절되자 마법도 배우고 신전에 찾아가 기도를 올리기도 했었다. 다만 오러의 재능이 뛰어났던 것에 비해서 마법과 신성에는 거의 재능이 없었던 제이크는 결국 실망하고 자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쯧, 생각해보면 진짜 불쌍한 놈이었네?’


왠지 울컥해졌다. 어쩐지 괜히 죄책감도 들었다. 이렇게 불쌍한 놈의 몸을 내가 강탈한 셈이니까.


‘......’


그렇지만 나도 엄연한 피해자 아닌가. 내가 여기 세상으로 오게 된 것도, 뺏고자 했던 것도, 자의가 아니었기에, 그런 감상 따위는 빠르게 지워버리기로 했다.


‘내가 빙의 안 했으면 어차피 죽었을 거야. 그게 클리셰니까. 안 그래?’


죄책감 대신에 내가 책임지고 잘 살아주기로 결심했다.


‘야 인마. 그냥 곱게 성불하라고. 레이시아도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어?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백작 양반도 재산 한몫 두둑이 챙겨주고.’


제이크의 부친인 데이안 타나티안 백작과의 일도 생각했다.


‘음... 역시 그렇겠지?’


제이크가 이곳 베렌령으로 오게 된 이유는 명목상으로는 제이크가 능력 부족으로 후계에서 탈락하여 가문에서 쫓겨난 것이지만, 아무리 술집과 도박장을 전전하던 백작가의 망나니 제이크라도 사실은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불온한 기류가 흐르자 백작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분가시킨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면 백작 양반도 나름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그래. 앞으로는 다른 기대를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 양반도 비상금까지 다 털어서 몰래 챙겨줬으니까 그 정도면 할 도리는 다 한 거지 뭐. 쓰읍. 문제는 현 백작 부인인데... 그 아줌마도 여기까지 쫓아냈으면 이제 만족했겠지?’


다만 앞으로 내가 시스템으로 힘을 얻거나 부를 얻게 되면 혹여 견제나 방해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 주의하기로 생각했다. 사실 드라마나 소설 같은 것을 보면 주된 클리셰니까 나는 잊지 않고 방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음... 그러면... 거기까지는 오케이. 그러면... 여기 영지 일은 어떻게 하지?’


문제는 제이크의 기억 속에 여기 베렌령에 대한 정보라고는 북동부의 작은 어촌마을 정도라는 것뿐과 영주로서의 업무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역시 레이시아 눈나의 도움이 필요한 건가?’


나는 자연스레 조력자로 기사 레이시아를 떠올렸다. 제이크의 기억 속에서 보자면, 제이크는 레이시아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제이크는 사실 그녀의 장래를 걱정하여 레이시아가 베렌령까지 따라오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


레이시아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음. 백작 양반과 레이시아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래도 아끼는 자식을 믿고 맡긴 상대이고, 또... 분명 몬스터에게 습격당했을 때 날 구했으니까...’


일단은 내 편이라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느냐는 건데...’


앞날이 창창한 엘리트 여기사 레이시아가 누가 봐도 어떠한 비전과 메리트도 없는 제이크를 여기 이 시골까지 따라왔다는 건?


일단 이건 누가 봐도 레이시아 그녀가 제이크에게 매우 큰 호의를 품고 있음이란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 영주란 직위가 뒤통수를 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 왕국 기사단에 스카웃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었어.’


이미 영지까지 따라온 것으로 정착 지원금(?)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영지의 2인자를 노렸다기에는 고작해야 어촌 마을인 베렌령은 너무 보잘 것 없었다. 실제로 레이시아가 제이크를 포기했다면 그녀에게 펼쳐질 장래가 너무 창창했고, 제이크의 기억 속에는 하녀들의 이런 수군거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잘 나가는 집안에서 청혼도 제법 들어왔다고 했었지?’


그것도 백작가 이상에 후계자 자리가 유력한 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몰락 귀족이라고 하나 엄연히 작위는 가지고 있었고, 젊고 예쁘고 실력까지 갖춘 레이시아는 타나티안령 주변뿐만 아니라 왕국 곳곳에서 매파가 날아올 정도로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비린내만 물씬 풍기는 어촌까지 따라왔다?’


당연히 누가 봐도 돈, 명예, 권력, 심지어 기사들이 바라는 높은 경지로 향하기 위한 수련을 위해서도 거리가 먼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혹여나 사랑이 아닐까 생각을 잠깐 떠올려봤지만, 폐인에 망나니짓을 일삼던 제이크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품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내가 아무리 연애에 젬병이라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릴 적 기억을 통해 짐작해보면 이건 남매로서의 정이 확실했다.


‘어휴, 우리 레이시아 눈나는 얼굴이랑 몸매만 천사가 아니라 성격까지 천사였네... 허... 하늘이시여. 어찌 레이시아 눈나에게는 모든 걸 다 주셨사옵니까! 크으. 이제 한씨 가문 29대손 한수호만 주면 진짜 완벽하다. 킹. 룡. 정. 점. 가나요?’


물론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


‘흐흐. 지금이야 누나 동생하다가 여보~ 여보~ 하는 거지 뭐. 여기 시골에서 매일 얼굴 맞대고 살면 더 그렇겠지? 크으. 미쳤다 미쳤어. 내 주제에 어디서 저런 초미녀랑 이야기를 나누냐. 흐흐.’


나는 음흉한 웃음을 참았다. 다만 오랫동안 웃을 일이 없어 굳어버린 제이크의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한참을 어색하게 웃다보니 문득 그런 고민이 들었다.


‘아 맞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음... 설마 이거 1인용은 아니겠지? 그래도 열차니까 최소한 둘은 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결심 위에 레이시아와 함께 가겠다는 것을 덧붙였다.


‘와 씨. 레이시아 눈나랑 같이 길을 걸으면... 아니, 놀이동산이라도 놀러 가면...’


이제는 누군지도 모르겠는 이예나의 잔재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귀여운 동물 머리띠를 착용한 레이시아가 완벽히 각인되었다.


‘와... ○○랜드 완전 뒤집어지겠는데?’


그 옆에서 우쭐거릴 내 모습을 생각하니 더욱 짜릿하다.


“할...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무조건... 하자. 할 수 있다아아!!!”


나는 다시 한 번 긍정 파워로 결심하기로 했다.


‘좋아.’


그리고 첫 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작전명, 기억상실증.

나 애기 제이크 응애.

나는 레이시아에게 SOS를 청하기로 했다.



* * *



물론 제이크의 기억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긴 했지만,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습관 등이 불쑥 튀어나올까 우려된 나는 기억상실증 카드를 꺼내들었다.


‘캬 역시 괜히 클리셰가 아니라니까.’


사실 나도 예전에는 드라마에서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을 보면 욕을 했었다.


‘또? 기억상실증이 무슨 만능의 검이야 뭐야.’


그런데 막상 애매할 때는 써먹기가 참 좋더라. 이게 아주 만능의 검이다. 특히나 조금 아픈 연기와 함께 하면 못 벨 것이 없는 무쌍의 검. 게다가 학창시절 야자를 빼먹기 위해서 갑자기 아픈 것도, 실제로 사고를 같이 겪은 레이시아이기에 더욱이 잘 드는 칼이었다.


“으... 누나... 엄마 목걸이에서 빛이 난 이후로 뭔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그러니까 누나가 차근차근히 설명을 해줘. 응? 기억이 잘 안 나니까... 너무... 힘드네. 하아.”


아직 확실할 순 없지만, 제이크가 여기로 오기 전 백작에게 아내의 유품이라고 받았던 그 목걸이가 나를 이 세상으로 빙의시킨 매개체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역시 목걸이가... 아. 정말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응. 아예 안 나는 건 아니고... 어... 드문드문...”

“...당장 사제님을 모셔...”

“앗! 잠시만! 괜, 괜찮아. 그것보다는 누나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누나. 아... 나 손 좀 잡아줘.”


나 아기 제이크 응애.


‘흐흐흐.’


나는 기억상실증이라는 무쌍의 검을 휘두르는 김에 나는 모르는 척 레이시아 누나에게 애교와 의뭉을 떨었다. 실제로는 연상이지만 예쁘고 힘세면 다 누나 아니겠는가? 응? 내가 만약에 마흔이었어도 레이시아는 눈나 맞지.


‘캬... 역시 천사라니까. 이걸 다 받아주네.’


망설임 끝에 내 손을 잡아준 레이시아 몰래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우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후우-. 표정관리, 표정관리.’


누나라는 호칭도 전략적이었다. 영주와 기사보다는 누나와 동생이 좀 더 사적이고 친밀하니까. 병장과 이등병, 선배와 오빠, 부장과 사원. 지위와 호칭에는 힘이 있다는 건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고마워 누나. 앞으로 부탁할게.”


다행히 내가 봐도 어설픈 연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의식을 잃고 수일간 깨어나지 못했던 것을 직접 목격한 상황이라 레이시아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면 진짜 천사라서 그런가? 어후. 사람이 이렇게 순진하니까... 더 이뻐.’


그렇게 나는 일단 기억상실증을 방패로 레이시아 눈나에게 베렌령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 * *



일단 제이크가 있는 아델린 왕국은 나스 대륙의 북동부에 자리 잡은 왕국이다.


과거 신마전쟁의 시기에 활약했던 영웅 아델린이 세운 왕국은 비록 긴 세월 속에 그 영광이 바래졌지만, 지금도 엄연히 대륙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북동부의 패자. 현재 아델린 왕국은 서쪽으로는 드워프들의 왕국 드와이트와 현 대륙의 최강국 에렌치아 제국과 접하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엘프들의 왕국 엘피아를, 남쪽으로는 신흥 왕국 블레랑스와 경쟁 중인 나라였다.


그 밖에는 중앙에 나스 교국과 서쪽에는 테렌 왕국, 남서쪽에는 피테츠 왕국과 이오스 공국이 있고, 남동쪽으로는 듀란 왕국과 미스렌 왕국까지가 여기 대륙에 존재했다.


다시 돌아와 아델린 왕국.


아델린 왕국의 역사에서 타나티안 가문이 세운 수많은 공헌과 헌신의 덕분으로 타나티안 가문은 본거지인 타나티안령과 외떨어진 특별한 세습 가능한 영지를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지금의 베렌령이다.


베렌령은 과거 개척시대의 산물로, 모든 왕국과 이종족이 인류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연합했을 때 세워진 마을이었다. 한 때는 암흑교단의 뒤를 타격하기 위한 비밀 군사항구로 사용된 적도 있었고, 북부에 자리 잡은 마족과 몬스터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남부의 사막 전사들이 배를 타고 도착했던 적도 있었던 아주 유서 깊은 항구 도시였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산물.


일단 오랜 세월 속에 연합이 와해되고 지금의 왕국체제가 정립되면서 아델린 왕국조차도 오래된 왕국이 된 지금. 여전히 마물들이 등장하는 세상이지만 인류가 다시 대륙의 주인이 된 현재에 있어서 베렌령은 인구는 고작 1,000명도 안 될 정도로 작고, 특산물이라고는 차가운 바다의 연안에서나 잡힐 법한 해산물과 그로 인한 부산물이 전부인 쇠락하고 낡은 어촌 마을일뿐이었다.


“아하. 그래서 이 자식이 받을 수 있었던 거구나.”

“네?”

“아, 아니야. 내가. 내가 받을 수 있었다고. 아하하.”


탐나는 자원도 없고 비옥한 대지도 없는데다가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서 지정학적으로도 보잘 것 없는 계륵 같은 땅. 그런 영지였기에 욕심 많은 현 백작 부인조차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이었고,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고 배경도 없는 제이크 타나티안이 별다른 반대 없이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음... 조선시대로 치면 거의 유배지네.’


나는 레이시아와의 대담을 통해서 제이크의 기억 속에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많이 알아낼 수 있었다.


“...이것도 기억이 안 나시는군요.”


안타까워하는 레이시아의 목소리에 조금 양심이 쿡쿡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응애.”

“네?”

“아, 아니야. 흠흠. 어우, 누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아하하. 하하.”


레이시아는 내가 나중에 호강시켜주면 될 일이니까...


“누나 손 참 따스하다.”

“...네?”

“헤헤헤.”


물론 지금 호사를 누리는 건 나인 것 같다.



* * *



제이크, 아니, 음흉한 복학생 한수호의 의도적인 응석은 의외로 레이시아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아... 예전 제이다.’


일단 기억을 잃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여유가 없을 정도로 심적으로 쫓겨있는 상태라고 착한 레이시아는 생각했다.


‘제이가 정말 많이 놀랐었나보구나.’


심지어 레이시아는 며칠 전 동굴에서서도 그랬다. 여자라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는 가슴 습격 사건만 해도 제이크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사실은 한국어)에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내민 것을 보고, 레이시아는 도리어 제이크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여의고 모성에 집착하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던 차였다. 자신을 향해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하며 원망하던 눈빛마저도 어린 자신을 두고 떠난 것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걱정과 죄책감, 그리고 미안함과 애정.


그런 마음으로 복잡하게 가득 차있는 레이시아였기에 어딘가 어색한 응석도 제대로 눈치 챌 수 없었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런데... 누나라는 호칭은...”


또한 어설픈 제이크의 수작을 알아채지 못하고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던 레이시아였다.


“에이~ 그냥 누나라고 부르면 안 돼? 여기는 백작 부인도 안 계시잖아. 응? 이 동네에 귀족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고. 그러니 이제 눈치 볼 필요도 없잖아. 그러니까 예전처럼 그냥 시아 누나라고 부르면 안 될까? 그러면 기억이 더 잘 날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레이시아는 몰락귀족이라고 하나 타나티안 백작의 도움으로 무사히 작위를 물려받아 제대로 된 남작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제이크 역시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하면서 그냥 남작이 되었기에 따지고 보면 똑같은 신분이긴 했다.


“...정말 안 돼?”


수년 동안 도박장과 술집을 전전하느라 피폐한 얼굴이었는데 기절해 있던 요 며칠간 더 수척해져서 누가 봐도 불쌍한 얼굴로 제이크가 애처롭게 물었다.


‘제, 제이야...?’


사실 여기 대륙의 감성으로는 남자의 약한 모습은 꽤나 보기 드문 일이었다.


특히나 귀족가의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교육과 훈련을 받기에 더더욱 눈물을 보기는 힘든 일일 수밖에.


그랬기에 레이시아는 더더욱 제이크의 약한 모습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이크는 베렌이라는 오지로 떠나는 것에도 불만을 보였었지만, 10년 만에 돌아온 레이시아가 자신을 따라간다는 것을 더 불편해했었다.


자신이 힘들 때 옆을 지켜주지 않은 서운함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앞날이 유망한 레이시아가 자신의 곁에서 썩기를 바라지는 않았었던 것.


그리고 제이크는 몰랐지만, 레이시아는 제이크가 자신에게 퉁명스럽게 굴던 때의 본심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지금껏 자신을 몰아내고자 괜한 고집과 심술로 일관했던 제이크가 현재 보이는 약한 모습이 더욱 선명한 대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으응? 누나아아... 정말... 안 돼?”


제이크의 속에 있는 한수호는 포상 휴가가 취소되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한껏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앗. 제이야...’


같은 기사로서 오러홀이 파괴된 고통을 레이시아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것도 어설픈 기사가 아니라 왕국 내에서도 창창할 정도로 유망했던 제이크라면...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잃고 오랫동안 홀로였던 것도, 현 백작 부인에게는 정을 받지 못한 것도, 지금은 후계자에서도 밀려나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북동부의 오지로 가는 상황도 레이시아는 잘 알았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기절까지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까지 겪지 않았던가. 게다가 기억까지 많이 잃었다고 하니 더더욱 의지하고픈 사람이 필요하리라고 레이시아는 생각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결국 항복 선언을 한 레이시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이크가 방긋 웃으며 답을 했다.


“고마워~ 누나. 역시 누나밖에 없어.”


음흉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 필사적인 한수호의 노력은 제이크의 얼굴에서는 부들거림과 어설프게 올라가다만 입 꼬리를 만들어내었고, 이마저도 레이시아의 미안함과 죄책감을 자극하였다.


‘하아... 제이가 이렇게 좋아할 것을...’


자신을 거둬주었던 백작 내외, 특히나 제이크의 생모인 일레인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을 품고 사는 레이시아가 기사가 된 것도 제이크를 지켜달라는 일레인의 유언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모든 것 앞에는 제이크를 동생처럼 아끼는 마음이 빠져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네.”


그것이 바로 앞날이 유망한 여기사 레이시아가 타나티안 백작가의 망가져버린 한 때의 천재 제이크 타나티안에게 매여 있는 이유였다.


“헤헤헤.”


제이크의 해맑은 웃음에 레이시아는 애꿎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오랫동안 제이크와 손을 잡고 있어서 아직도 온기가 가득한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제이크가 몰래 훔쳐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을 순진한 여기사 레이시아는 알 수 없었다.


“누나.”


생글생글 웃으며 누나라고 부르는 제이크의 모습에 당황한 레이시아가 한 템포 늦게 답을 했다.


“...네?”

“나 있잖아.”

“......”

“나 진짜 누나 믿어도 되지?”

“네? 네. 그, 그러셔도 됩니다.”

“정말 나 누나 믿고 이야기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편 해줄 거지? 누나랑 나랑 둘만 아는 비밀이야. 알았지?”

“...네.”


레이시아는 속으로 ‘그래. 제이야. 난 언제나 네 편이었어.’라는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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