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밀가루괴물 님의 서재입니다.

영주님의 놀이동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최근연재일 :
2022.01.27 22:00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843
추천수 :
54
글자수 :
303,890

작성
21.12.30 22:00
조회
82
추천
1
글자
20쪽

010화.

DUMMY

분명 높지 않은 중턱이었다.


‘...아직 먼 거야?’


그런데 내가 지구에서 현역이던 시절 자대의 훈련 장소였던 589고지에 올라가는 것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헥헥.”


아니, 이 새끼는 얼마나 술을 처마시고 운동을 안 했으면 조그만 산을 걷는 것도 이렇게 힘들까.


“눈, 누나! 잠깐만!”


첫눈에 반한 여자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다급하게 레이시아를 불렀다.


“네.”

“허억 허억... 나 물 좀 마시고 갈게.”

“네. 영주님.”


마트나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환경오염의 주범 500ml 생수병이 그립다. 학교에서 기념품으로 받았던 구린 텀블러조차 생각난다.


‘...가죽 물병이 뭐냐고. 젠장.’


차라리 중금속의 문제가 있더라도 금속 물병이면 이렇게까지 투덜거리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기 베렌령에서는 가죽주머니로 물을 보관한다. 밖에 고풍스럽게 가죽이 덧대진 것이 아니라, 안에 방수용도로 가죽이 대어진 것. 첫날 물맛을 맛봤다가 찝찝해 죽을 뻔 했었다.


‘웩. 또 생각났어.’


그래서 당장에 만들 수 있는 건 없어도 물의 정령이 1티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의 정령아. 나 좀 살려줘라.’


소환에 마나 1.

그리고 한 방울 마다 마나 1.

푸른 일렁거림이 허공에 물을 만든다.


꼴깍꼴깍.


나는 덩어리째 그대로 냠 물어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 물맛 좋네. 후우. 살겠다.’


지금 이 순간만은 더운 여름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이온음료나 얼음이 잔뜩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 못지않다. 유격 행군 중간에 먹는 물맛에는 비견할 만하다. 일단 민생고를 해결하고 나니 레이시아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겸연쩍게 뒤늦게나마 레이시아에게도 물을 권했다.


‘큭... 레이디 퍼스트를 깜빡하다니. 젠장, 이런 데서 점수를 땄어야 하는데...’


아차차. 진짜 생각이 짧았다.


“누, 누나도 물 한잔 해.”


다행히 레이시아는 별로 서운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습니다.”

“어. 그래도 한 잔해. 아니, 마셔.”

“영주님, 정말 괜찮습니다.”

“어... 그, 그래.”


아깝다. 간접키스 할 수 있었는데...


“그, 그럼 올라갈까?”

“네. 영주님.”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오붓한 산길을 걸어서 수련장에 도착했다.


“음... 쓰읍.”

“영주님,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아냐. 괜찮아. 누나는 그냥 그대로 있으면 돼. 사실 나도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나! 그럼 내가 이제 보여줄게. 이거 보여주면...”


우리 사귀는 건 아니고.


“어제 약속한 대로 하는 거다?”


어쩐지 레이시아는 살짝 망설인 후에 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누나, 진짜 약속한 거지? 딴 말하기 있기 없기?”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그마치 기사의 맹세까지 걸린 약속이었다.


“오케이. 그럼 간다. 어차피 한 시간 정도 걸릴 테니까 누나는 거기 편히 앉아 있어.”


물론 그렇게 말을 한다고 편히 앉아있을 레이시아가 아니었기에 나는 직접 손을 이끌고 작은 바위 위에 레이시아를 앉혔다.


‘아싸, 손잡기 성공. 큭큭.’


메모. 검술을 수련하는 여자 손은 딱딱하다. 그렇지만 좋다. 밑줄 쫙.


‘아... 핸드크림 발라주고 싶네. 나중에 이렇게 쫙 짜서 위아래로...’


드라마나 예능에서 참 부러웠던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핸드크림은 있지만 여친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은 여친 후보는 있지만 핸드크림이 없어서 할 수가 없다. 어차피 둘 다 못하는 거지만 느낌이 확 다르다. 이래서 있어본 놈들은 항상 여유가...


“...영주님?”

“...아? 아. 하하. 누나 여기에 앉아.”


아무리 여기사라 하나 엄연히 레이디이기에, 나는 레이시아를 위해서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탈탈 털어 바위에 깔아주기도 했다.


자고로 남자는 매너가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추운 북부 지방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일순 차갑게 몸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래도 레이시아 덕분에 망토 안에도 꽁꽁 두꺼운 털옷을 입었던 터라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자! 누나는 여기 엉덩이 떼지 말고 딱 기다려. 아니, 거기 말고. 망토 위에 앉으라고. 괜찮아. 거기 앉아. 어. 여자는 엉덩이가 따스해야 한다고 했다고.”


엄마가 그랬다. 여자는 엉덩이가 따스해야 한다고. 내 고집에 레이시아가 주춤주춤 가죽 망토 위에 조심스레 붙이고 앉았다.


사실 비밀 수련장이라고 해도 별 건 없었다.


보통의 귀족가문의 수련장이 대개 단단한 돌들로 바닥을 만들어놓거나 평탄화 작업으로 고운 흙바닥을 꾸며놓은 것과는 달리 이곳은 그냥 평범한 산 속의 공터였다. 그래도 앞서 선객들이 수련장으로 썼던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서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평평한 곳이었고, 주변은 나무들과 능선으로 막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영주관 뒤편의 산이라서 다른 이들은 아무나 올라오지 못한다는 곳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지 않았을까?


“음... 보자. 이렇게 하는 건가?”


혹여 모를 망은 레이시아가 봐주기로 했기에 나는 걱정 없이 허공에서 시스템을 조작했다. 물론 이 시스템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었기에 더더욱 거리낌은 없다.


[어트랙션] [미끄럼틀] [★]


[크기: ???]

[건설비용: 200 마나+α]

[필요재료: 살아있는 나무 또는 나무 씨앗]

[필요정령: 나무의 정령 1성 이상]

[제작시간: 1시간+α]


내가 가장 먼저 설치해볼 것은 역시 어트랙션에 해당하는 미끄럼틀이었다.



* * *



멀리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


비록 인류가 세운 과거의 영광은 쇠락했지만 자연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런 면에서는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파괴해낸 지구인들이 더욱 대단해보인다. 아무튼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불어온 시원한 바닷바람에 나스 대륙의 초미녀 레이시아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후우...’


시원한 바닷바람에 여기사 레이시아의 한숨이 조심스럽게 섞여든다.


‘어제도 정말 안 보이냐고 물어보더니... 정말 제이에게만 뭔가가 보이는 건가?’


허공을 보며 손짓하던 제이크가 손을 슥슥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를 돌리고 공간을 확보하는 듯한 움직임. 이쯤 되자 레이시아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인가? 하긴 제이가 거짓말을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잖아. 어릴 때는 참 착하고 순진한 아이였는데...’


다만 레이시아가 끝까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제이크의 말이 너무나 그녀의 상식 밖의 일이기도 했지만, 베렌령으로 따라가려는 그녀를 자꾸 밀어내고 냉대했던 제이크의 거짓된 행동들이 익숙해서이기도 했다.


‘설마 이렇게 해서 또 나를 보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후우. 나 왜 자꾸 이러지? 그래. 나는 제이 말을 믿어야지.’


그렇게 혼자서 고민하고 걱정하다 다짐을 했던 레이시아였지만, 사실 모든 것이 괜한 일이었다.


“...어?”


제이크의 손바닥 위에서 나무씨앗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나무씨앗에서 파란 새싹이 뿅하고 튀어나왔다. 흙 속에서 난 것도 아니고 그냥 흙 위의 나무씨앗에서 생긴 새싹은 금방금방 나무로 자라났다. 얼핏 식물형 마수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나, 나무의 정령이라도 저런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상식 속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 레이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놀랐다.


‘세상에... 제이 말이 그러면 전부 사실?!’


레이시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당황하였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마치 한수호가 이세계로 넘어와 놀이동산 시스템이 진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듯, 레이시아 역시 제이크의 말이 진짜라는 것에 더 놀라기 시작한 것이었다.


“......”

“......”


그렇게 두 남녀는 한참을 멍하니 나무가 변형되는 모습을 지켜봤고, 두 사람 중에서는 그래도 이럴 거라고 예상을 했던 제이크가 먼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하... 봐. 누나도 보이는 거 맞, 아니, 내 말이 맞지?”


사실 제이크도 아직 자기가 꿈이 아닌지 확인하는 마음이 반쯤 섞여있는 질문이었다.


“...네? 네.”


그리고 레이시아의 대답에 비로소 안도한 제이크는 건설적인 방향의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음. 하하. 이제 이거 바뀌는 거 내가 안 지켜봐도 되거든. 그러니까... 음... 우리 그 동안 밀린 얘기나 좀 하자.”


레이시아는 흘끔흘끔 기이한 형태로 모습을 변화시키는 나무를 보며 대답했다.


“...네.”


서로 복잡한 마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기를 한 시간 쯤.


“오! 이제 다 됐다!”


한 시간 만에 만들어진 커다란 목조 미끄럼틀 하나는 아델린 왕국 기사학교의 얼음꽃 레이시아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나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목조 미끄럼틀 하나.


디자인은 스킨이나 테마가 적용되지 않은 오리지널 기본 형태였지만, 원목이 주는 자연스러운 따스함과 멋들어짐이 느껴지는 미끄럼틀이었다.


“헛!”


자신이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 믿고 있던 여기사 레이시아는 당연히 놀랐다.


“봤지? 이, 이거거든.”


그리고 완성품의 하이 퀄리티에 막상 본인도 살짝 놀란 제이크가 후다닥 미끄럼틀 옆으로 간 사이에 레이시아는 슬쩍 몸에 힘이 들어간 채로 새로 생긴 목조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이게 미끄럼틀?!’


제이크의 설명으로는 미끄러지며 노는 놀이기구라고 했다. 사실 나스 대륙의 기술 수준으로 미끄럼틀이 어려운 구조는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레이시아는 확실히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음... 확실히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계단으로 올라가서...’


레이시아가 단순히 북부의 촌구석 출신이라 모르는 것만은 아니었다.


몬스터와 마수와 마족을 비롯한 마물 및 그들과 야합한 인류의 배반자들과 같이 상시 현존하고 있는 위협과 부족한 식량생산력 등으로 지금껏 나스 대륙의 삶이란 생존을 최우선으로 둘 수밖에 없었다. 일단 노는 것도 생존이 전제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나마 발전한 문화는 대부분 목숨을 내건 치열한 전투를 마친 이들을 위한 유흥과 그 틈에서 부를 쌓은 이들의 여흥을 위한 것에 그쳤기 때문에 평범한 이들을 위한 놀이 문화가 거의 존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응? 저기로 미끄러지는 건가?’


그나마 레이시아가 미끄럼틀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눈이 많이 내리는 아델린 왕국 북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 놀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어릴 때도 타나티안령에서 레이시아가 제이크를 안고 언덕에서 썰매를 탄 적도 있었다.


“와~ 이 정도면 가시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레이시아의 귀에 제이크의 혼잣말이 들렸다.


‘가시?’


레이시아는 제이크처럼 계단을 타고 올라가 혼자 감탄을 토하는 제이크의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제이크가 쭈그리고 앉아서 손으로 만지고 있는 것은 미끄럼틀에서 가장 중요한 미끄러지는 부분. 사실 제이크가 처음에 걱정했던 건 목재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 있을 지였다.


‘정말이네? 나무인데도 매끄러워. 음... 그런데 이 투명한 건...?’


레이시아도 제이크를 따라 미끄러지는 부분을 보았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투명한 물체. 기사 아카데미가 있는 왕국의 수도에서도 쉽게 보기 힘들 값비싼 수정처럼 햇살에 반짝이는 투명한 무언가가 매끈하게 나무틀을 덮고 있었다.


“음음. 이거 수액인가봐.”


레이시아의 궁금한 마음을 알아챘을까? 제이크가 묻지 않았음에도 답을 해주었다.


“...수액이요?”


수액이라면... 나무에서 나오는 액체?


“응. 스웩~ 아니고 수액. 나무 정령이니까 수액이겠지. 딱 봐도 그렇네. 이야 친환경 지렸다. 이거 이 정도면 웬만한 플라스틱보다...”

“플... 라스틱?”


그런데 플라스틱은 또 뭘까? 기절했다가 깨어난 제이크는 자꾸만 신기한 말을 하고는 했다. 레이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제이크의 말을 따라하며 반문을 하고 말았다.


“아! 뭐? 뭐라고?”


그리고 자신의 말실수에 제이크가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런데 방금 영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플라스틱이라고...”


설마 아직도 기억이 이상한 건가? 사실 레이시아는 궁금증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에이~! 잘못 들었겠지. 아니면 내가 기억이... 크윽. 미안. 누나. 나 기억이...”


제이크는 자신의 말실수를 만능의 검 기억상실증으로 무마시키기로 했다.


“아, 아닙니다!”


제이크가 머리를 손으로 잡자 레이시아는 화들짝 놀라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으응. 괜, 괜찮아. 아! 맞다. 누나 이거 한 번 타볼래?”


사실 미끄럼틀이 스무 살이 넘은 아가씨에게 적합한 놀이기구는 아니었지만, 나스 대륙에 정식 미끄럼틀은 처음이지 않는가. 지금까지 제이크를 믿지 못했던 것이 미안하고, 딱히 위험해보이지도 않았기에 레이시아는 군말 없이 미끄럼틀 끝에 앉았다.


“이, 이렇게 앉으면 됩니까?”


낯선 기구를 처음 사용함에 있어서 레이시아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 굿! 누나, 혹시 어릴 때 썰매 탔던 기억 나?”


레이시아가 제이크를 안고 썰매를 탔던 기억은 한수호가 읽은 제이크의 기억 속에도 소중히 존재하고 있었다.


“네에.”


물론 레이시아의 기억에는 더 크게 존재했고.


“그래. 그거랑 거의 똑같으니까 걱정 말고. 그 손 살짝 앞으로 당기면서 놓으면 돼. 긴장하지 말고.”


긴장?

끽 해봐야 4m 높이의 미끄럼틀.

굳이 이런 거에 오러 익스퍼트가 겁이 날 리가 있을까. 그냥 여기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떨어진다고 해도 무사할 자신이 있는 레이시아였다.


“......”


그러니까 레이시아의 망설임은 낯선 것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괜찮다니까. 누나, 그러면 내가 밑에서 잡아줄까? 아니면 뒤에서 같이 타도... 그래! 생각해보니 위험할 수도 있겠다. 위험해!”


제이크의 반짝거리는 눈이 어쩐지 부담스러운 레이시아가 황급히 답을 했다.


“괜, 괜찮습니다! 그냥 저 혼자 하겠습니다.”


당황인가 부끄러움인가? 살짝 빨간 얼굴로 레이시아는 두 손을 살짝 당기며 놓았다.


스윽.


미끄럼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얼마나 속도감 있게 미끄러지게 하느냐.


샤랄라라-.


보통은 스윽하고 미끄러지겠지만, 별빛처럼 아름다운 레이시아의 미끄러지는 소리는 특별했다. 아니, 사실은 스르륵 하고 미끄러지긴 했다. 지켜보는 한수호의 귀에만 특별한 BGM으로 들렸을 뿐. 부드러운 갈색머리가 찰랑거리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갔다.


“......?!”


레이시아는 오러 익스퍼트 경지의 기사.

당연히 본인이 직접 달려도 수배는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지만, 두 발로 달리는 것과 무언가를 타고 이동하는 것의 느낌은 다르지 않는가. 그리고 원래 미끄럼에는 미끄럼만의 특별한 쾌감이 있는 법이었다.


“아...”


속도감 있게 미끄러지는 기묘한 느낌에 레이시아는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뭐지?’


대한민국에서야 꼬맹이들이나 탈 법 한 미끄럼틀이지만, 그녀에게는 엄연한 첫 경험이었다. 실제로 워터파크나 눈썰매장 같은 곳에서는 성인들도 줄을 서서 대형 미끄럼틀을 타지 않는가. 그러니 나이가 많다고 미끄럼틀이 꼭 재미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이, 이래서... 미끄럼틀?”


레이시아는 자신이 방금 탄 것의 이름을 다시 되뇌어봤다. 미끄럽다는 말에 틀을 붙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물건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자신의 어린 주군은 무슨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아직 미끄럼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로 레이시아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


그곳에는 자신만큼 놀란 제이크의 얼굴이 있었다.



* * *



진짜 깜짝 놀랐다. 심장 떨어지는 줄?


‘와... 실화냐? 미모 이거 실화냐고!’


살면서 쳐다만 봐도 아찔한 초미녀가 눈앞에서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직관한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어우야.’


솔직히 이 순간만큼은 실제로 미끄럼틀이 만들어진 것보다 레이시아가 미끄러지는 모습에 더 놀랐다.


“...영주님?”

“...어? 어. 왜?”

“많이 놀라셨습니까?”


나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후에 몰래 침을 닦아야만 했다.


“...잠시만.”


그리고 레이시아를 잠깐 기다리게 한 후에 [관리]창으로 여기 생긴 나무 미끄럼틀도 ‘관리’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했다.


[확장]

[수리]

[테마]

[제거]


비록 아쉽게도 이동(게임에서는 떼어낸 후에 다른 위치로 옮길 수가 있었다.)은 불가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업그레이드(?)의 요소도 존재함을 확인했다.


‘음... 크기 조절도 되고. 크기를 키우면 마나가 더 많이 드는 방식이네. 좋아.’


그리고 조건을 충족하면 뜨는 푸른 홀로그램으로 크기를 줄였다가 키워보고, 재료를 꼭 손바닥으로 들어야 하는지 그냥 손만 대면 되는지 확인도 하고, 재료에서 물의 경우 꼭 물이 존재해야 하는지도 확인했다.


‘후... 물이 있으면 마나를 줄일 수 있고, 물이 없어도 수증기 같은 걸로 만들 수는 있는 모양이네. 좋아. 그러면 나중에 호수 같은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네. 음. 도대체 이런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놀이기구 만들 수 있는 게 확실하니까...’


언젠가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생각과 함께 그것을 위해서 돈을 벌 수단들도 쭉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 됐다. 누나! 이제 돌아가자. 추운데 밖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좋아.”


나는 아직 멍한 표정의 레이시아를 불렀다.


“네? 네.”


게다가 영주관의 고용인들에게 늦을 수도 있다고 알려두긴 했지만, 괜히 오해의 여지를 주는 건 삼가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터였다.


“네? 네. 영주님 추우시면...”

“아, 아니. 나는 괜찮아. 나는 누나가 걱정되어서... 에취!”

“...죄, 죄송합니다!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레이시아는 황급히 아까 내가 깔고 앉게 했던 망토를 탈탈 털어 내게 건넸다.


“어... 괜찮은데...”

“꼼꼼히 매십시오. 제, 제가 매드리겠습니다.”

“어? 어. 그, 그래주면 좋고. 흐.”


보통 넥타이 매주는 모습만 상상했는데, 망토를 걸쳐주는 모습도 너무 좋다.


“크흠. 그럼 이제 돌아갈까?”


실제로 미끄럼틀이 이렇게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건 시스템 상 그럴 줄 알았던 나에게도 놀라운 일들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짐짓 쿨하게 말을 꺼냈다.


자고로 남자는 자신감.


물론 지구에서는 그 자신감이 부족해 연애를 못 했던 것 아니었지만, 미녀인 레이시아가 놀랐기 때문에 반대로 나는 허세로라도 조금 담대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네? 네에... 알겠습니다.”


메모: 레이시아는 놀라니까 더 귀엽다.


“흐흐. 우리 누나 완전 놀랐나보네. 앞으로는 자주 놀랄 텐데 어쩌나. 흐흐흐.”


산에서 영주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반대로 내가 앞장을 서기로 했다.


“앗! ㅈ, 도련님! 괜찮으세요?!”

“으억!”

“영, 영주님! 어디 다치신 데라도...”


잠시 후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나와 어쩐지 얼굴이 빨개진 레이시아의 등장에 영주관을 지키는 병사와 하녀가 어리둥절했지만, 딱히 설명하기에는 구차하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영주님의 놀이동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4 리메이크 공지입니다. 22.01.27 86 0 1쪽
33 033화. 22.01.26 56 0 23쪽
32 032화. 22.01.25 54 1 23쪽
31 031화. 22.01.24 55 1 22쪽
30 030화. 22.01.22 49 0 25쪽
29 029화. 22.01.21 48 0 24쪽
28 028화. 22.01.20 49 1 18쪽
27 027화. 22.01.19 54 1 21쪽
26 026화. +1 22.01.18 53 1 21쪽
25 025화. 22.01.17 61 1 21쪽
24 024화. +2 22.01.15 58 2 20쪽
23 023화. 22.01.14 56 1 23쪽
22 022화. +1 22.01.13 62 1 23쪽
21 021화. 22.01.12 59 1 24쪽
20 020화. 22.01.11 60 1 24쪽
19 019화. 22.01.10 65 1 20쪽
18 018화. +1 22.01.08 69 1 18쪽
17 017화. +1 22.01.07 70 1 19쪽
16 016화. +1 22.01.06 72 1 20쪽
15 015화. +1 22.01.05 70 1 21쪽
14 014화. 22.01.04 75 1 18쪽
13 013화. +1 22.01.03 81 3 18쪽
12 012화. 22.01.01 79 1 18쪽
11 011화. 21.12.31 80 1 16쪽
» 010화. +1 21.12.30 83 1 20쪽
9 009화. +1 21.12.29 89 1 16쪽
8 008화. +1 21.12.28 99 1 16쪽
7 007화. 21.12.27 97 2 15쪽
6 006화. +1 21.12.25 111 1 20쪽
5 005화. 21.12.24 131 1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