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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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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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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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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귀환(Return) (2-5)

DUMMY

이후의 반응은 더 볼 것도 없었다. 상상 외로 커져버린 일에 대표들은 경악했다. 지수는 자신과 지애림이 당한 일과 「절해」의 배신, 외국계 볼리셔니스트의 개입, 거대한 조직의 존재 등을 알리며 현재 상황의 심각함을 이야기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수는 침착한 어투로 말을 마쳤지만, 그 역시 질린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게 공동체 전체의 붕괴는 가까스로 막긴 했습니다만, 위협은 여전합니다. 거기에 절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죠.”


지수가 약간 뜸을 들였다. 절해의 처분은 대표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 지수는 드디어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안기부는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저희 쪽에 전면적인 협력을 요구했습니다.”

“?!!”


이제 흐트러진 시선이 집중되는 건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눈빛보다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불안, 초조, 트라우마... 심리적 불안함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실미도를 다시 하자는 건 아니겠지.”


지금껏 아무런 말이 없었던 강북 대천(大天)의 임태춘이었다. 주름진 얼굴이 꿈틀거리며 수엽이 흔들렸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방금 시선에 담겨 있던 대표들의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지수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권력에 힘을 빌려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실미도 때도 그들은 똑같이 얘기했소. 하지만 돌아온 건 무덤뿐이었소. 지금 수장이 말한 모든 것이 안기부의 자작극이라면 어떻게 할 거요?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 적이 아니라 또 다른 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소?”


실미도 사태는 이 나라 의기력자들이 권력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계기였다. 당시 권력에 토사구팽 당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공동체들은 현재까지도 권력에 극심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전면적인 협력이라는 건 모기업까지 동원해 달라는 거 아니오? 이 일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요? 끝나고 내팽겨 칠 것이 뻔 할 텐데!!”


차분함으로 시작한 말이었지만, 말미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담겼다. 지수는 아무 대답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임태춘의 분노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 지수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습니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안기부와 협력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고집스러운 임태춘의 대답에 지수의 목소리도 올라갔다.


“인정할 건 인정하셔야 합니다. 협력을 거절하고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죠. 실력 있는 의기력자 구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의지망 만으로 뭘 어쩔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지역 공동체 하나가 배반한 마당에?”


아픈 점을 지적하자 분위기는 혼란에 빠졌다. 지수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최근 몇 년 간 의기력자 규모나 훈련 수준이 급격히 떨어진 건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칼자루를 놓아버린 상황에서, 더 도망칠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칼을 빌려 쓰고 나중에 목을 내밀라, 이 말이오?! 그 칼이 우리 모가지를 칠 것이 불 보듯 뻔한 데도?!”


완강한 임태촌의 말에 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그리고 비장하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약속 하나 드리겠습니다.”

“약속?”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깟 안기부의 마법사 조직 따위 날려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혹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제가 나서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순간 어제의 일과 함께 섬뜩함이 대표들 사이에 흘렀다. 지수는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확인하고는 살짝 놀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이러려는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결과를 당장 부탁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자리를 한 번 만들까 합니다.”

“자리?”

“상대의 장(長)과 만날 자리를요. 한 번 만나보신 후에 결정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니까요.”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의 웅성거리는 소리만 자잘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그러다 임태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깊은 한숨이 함께 실려 나왔다.


“알겠소. 수장이 거기까지 말씀하시니 고려는 해보겠소. 다만, 만날 시간과 장소는 이쪽에서 정할 수 있게 부탁드리오.”


좌장(座長)의 판단력은 이런 곳에서 드러났다. 현실과 현실인식을 조율하는 건 어지간한 연륜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안기부와 좋은 관계를 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닥친 위험과 상황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표들의 의지대로 분노를 쏟아내되,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인 것이었다. 그의 말에 지수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소와 시간을 정해주시면, 자리를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여기까지 온 것을 확인한 반채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기부와의 협력을 공식적으로 회의에 올렸고, 만남을 전제로 했지만 조건부 합의도 이끌어냈다. 이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바로 절해의 처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금방 결정 나지 못했다. 박철수의 배반행위에 절해 조직원들이 어디까지 개입했는지에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어제 나타난 사람들도 박철수와 정한수 - 지수가 의도적으로 살려 현재는 병원에 있는 - 를 빼고는 전부 외국계 의기력자였다. 이는 절해 조직 전체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처분, 제재, 그리고 후임 회장 인선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빠르게 후임 회장을 뽑아 절해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정한수가 깨어나면 얘기를 들어봐야겠군요.”


지수가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조사하는 건 모양새가 좀 그런 거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이니, 감정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순간 대표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수의 이 말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이번 일을 책임감 있게 조사할 수 있는... 조사관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조사관이라는 지수의 말에 대표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고 새로운 회장을 뽑는 동안, 절해와 모기업에 대한 관리는 조사관의 권한이 될 것이 분명했다. 요컨대 점령지 관리를 맡은 사령관과 비슷한 위치가 될 터였다. 그리고 다들 사업가인 공동체의 대표들은 이것이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대표들은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제가 하죠.”


그렇게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회의 탁자 제일 끝부분에서 누군가 손을 들며 말했다. 바로 제주 고도(孤島)의 양선아였다. 지수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


“양 조합장께서 직접 하신다고요?”

“네. 어차피 공신력 있는 제3자를 뽑을 시간은 없어 보이는데요. 수장 말씀대로라면 적의 위협은 여전한 거 아닌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이해관계에서 보면 제가 제일 덜 할 거 같기도 하고... 맡겨 주시면 잘 할 자신은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분위기가 급격히 쏠렸다. 무게감은 있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제주 출신이기에 큰 이해관계가 있을 수도 없었다. 이내 다른 대표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처럼 ‘공신력 있는 제3자를 뽑을’ 시간이 없는 만큼, 이해관계가 덜 한 사람을 조사관에 두고 향후를 보는 게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다른 대표분들 의견은 어떠신가요? 양 조합장이 직접 조사하는 것에 대해서?”


곧 거수투표가 이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분위기대로 그녀가 조사관 직책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지수도 빠른 결정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때 양선아가 다시 손을 들고 말했다.


“수장. 부탁이 있어요. 혹시 호위로 한 명 붙여주실 사람 있나요? 저도 의기력자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적진에 뛰어드는 거니까요.”

“호위라...”


그녀의 말에 지수가 턱을 손 위에 얹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뭔가 떠오른 듯, 말을 시작했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군요. 기억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전 모인 사냥꾼들 중에 최지훈이라는 친구가 있었죠.”


임태춘이 최지훈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놀랬다. 최지훈은 자신이 대표인 강북 대천(大天)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전 상어에게 패배한 이래 최근까지 병원에 있다가, 얼마 전 퇴원하여 복귀를 준비 중이었다.


다만 부상 이후 회복하는 시간동안 공동체에서 반쯤은 버려져 있었다. 최지연과 비슷한 처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출신은 공동체에 딱히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임태춘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지만, 상황을 아는 다른 대표들의 표정은 오히려 수긍에 가까웠다.


“대천(大天) 출신이니 좌장께도 면이 서고, 나름 실력도 있고 꼼꼼하죠. 좀 비판적인 성격이긴 합니다만... 오히려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뜻은 숨겨졌지만, 이해관계가 희미해졌기에 적격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조사관과 호위까지 결정나면서 회의는 막바지를 향해 갔다. 공동체 대표 회의는 간사나 서기를 따로 두지 않았기에, 결정난 내용은 그 자리에서 바로 타이프를 쳐서 나눠가지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지수 자신이 직접 친 내용을 돌려가며 서명하는 시간이었다. 양선아는 제일 아래쪽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본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볼펜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참, 수장. 아직 질문 하나가 더 남았어요.”


그녀에게는 아직 두 번째 질문이 남아 있었다. 약간 늘어졌던 긴장이 다시 팽팽해졌다. 관심이 모인 걸 확인한 양선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수장은... 그릇을 찾아서 어떻게 하려고 한 거죠?”

“...!!”


제일 중요한 물음이 나왔다. 어쩌면 가장 먼저 나왔어야 할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제 일의 충격에 다들 그것을 잊고 있던 터였다. 이내 대표들의 눈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듯 지수에게 쏠렸다. 침묵 속에 엄청난 긴장이 흘렀다.


지수는 테이블 중간 정도에 시선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조용히 양손을 모으면서 대답했다.


“... 「봉인」할 생각이었습니다.”


-3-


이틀 뒤, 1988년 2월 22일 월요일 9시 3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모처(某處).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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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7화 : 귀환(Return) (2-1) 21.01.21 42 0 18쪽
133 7화 : 귀환(Return) (1-4) 21.01.16 47 0 12쪽
132 7화 : 귀환(Return) (1-3) 21.01.14 44 0 11쪽
131 7화 : 귀환(Return) (1-2) 21.01.09 47 0 16쪽
130 7화 : 귀환(Return) (1-1) 21.01.07 55 0 20쪽
129 6화 : 슬픔(Grief) (6-4) 21.01.02 47 0 15쪽
128 6화 : 슬픔(Grief) (6-3) 20.12.31 50 0 12쪽
127 6화 : 슬픔(Grief) (6-2) 20.12.26 37 0 13쪽
126 6화 : 슬픔(Grief) (6-1) 20.12.24 37 0 12쪽
125 6화 : 슬픔(Grief) (5-6) 20.12.19 34 0 13쪽
124 6화 : 슬픔(Grief) (5-5) 20.12.17 35 0 10쪽
123 6화 : 슬픔(Grief) (5-4) 20.12.12 33 0 13쪽
122 6화 : 슬픔(Grief) (5-3) 20.12.10 34 0 12쪽
121 6화 : 슬픔(Grief) (5-2) 20.12.05 32 0 14쪽
120 6화 : 슬픔(Grief) (5-1) 20.12.03 40 0 13쪽
119 6화 : 슬픔(Grief) (4-7) 20.11.28 38 0 13쪽
118 6화 : 슬픔(Grief) (4-6) 20.11.26 41 0 12쪽
117 6화 : 슬픔(Grief) (4-5) 20.11.21 42 0 11쪽
116 6화 : 슬픔(Grief) (4-4) 20.11.19 41 0 11쪽
115 6화 : 슬픔(Grief) (4-3) 20.11.14 35 0 11쪽
114 6화 : 슬픔(Grief) (4-2) 20.11.12 44 0 12쪽
113 6화 : 슬픔(Grief) (4-1) 20.11.07 34 0 13쪽
112 6화 : 슬픔(Grief) (3-6) 20.11.05 39 0 12쪽
111 6화 : 슬픔(Grief) (3-5) 20.10.31 3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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