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Volition : 1988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새글

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최근연재일 :
2024.05.04 21:25
연재수 :
251 회
조회수 :
17,958
추천수 :
127
글자수 :
1,418,138

작성
20.12.10 20:09
조회
32
추천
0
글자
12쪽

6화 : 슬픔(Grief) (5-3)

DUMMY

* * * *


잠시 뒤, 1988년 2월 11일 목요일 9시 2분.

서울시 모(某)처.


지수는 서둘러 장비를 챙겨 수장부를 떠났다.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필요한 것을 집어 들었다. 머리가 완전히 백지장이 된 터라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방금 있었던 박철수와의 통화에서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화 저편에서 들린 고통에 찬 여자의 신음소리와 짐승 같은 숨소리만이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애림의 것임을 깨달은 순간,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역시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차문을 열었다. 거칠게 자리에 앉은 지수가 차문을 강하게 닫았다. 쾅 소리와 함께 차가 흔들거렸다. 그리고 차가운 핸들에 왼손을 올리고, 오른손으로 키박스에 열쇠를 꽂았다. 곧 시동음과 함께 엔진이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리에 뭔가 정신이 확 들었다. 이런 일이라면 응당 옆자리에 있어야 할 그녀는 지금 없었다. 상실감에 일어난 분노가 현실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지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머리를 핸들에 몇 번 부딪혔다.


“바보새끼!!”


자책감이 심장을 조여 왔다. 그러나 지금은 대책 수립이 먼저였다. 그는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했다. 먼저 박철수는 말을 떠올렸다. 그는 지애림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오늘 밤 10시 부산 금정산 중턱에 있는 OO암의 삼존불(三尊佛) 앞으로 오라고 얘기했다.


함정임이 뻔한 유인책이었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뭔가를 하려면 가야만 했다. 문제는 놈들이 준비했을 함정이었다. 이 정도로 큰일을 꾸밀 정도라면, 이중 삼중의 계획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설령 자신이 현장에서 모든 적들을 때려눕히더라도 애림이를 구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확실히 얕보이긴 한 모양인데...’


지수는 상어에게 패배 - 1:1로는 압도했지만 기습해온 적에게 당한 - 한 것을 뇌까리며 쓰게 웃었다. 동시에 박철수가 말한 ‘복수’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확실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복수라...’


의기력자 공동체의 연합체인 ‘강(江)’의 창설 과정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그저 결투를 통해 상대를 꺾어가며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근본만 본다면 힘에 의한 독재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터. 그렇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공동체의 소소한 반발은 항상 있어온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와서, 이렇게 크게 터질 일인 지는 의문이 들었다.


‘젠장.’


조짐의 유무를 떠나서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애림이를 구해낼 방법을 떠올려야만 했다. 머리에 닿은 핸들에서 엔진 진동이 올라왔다. 불규칙적인 흔들림은 그의 머리를 때리고 또 때렸다.


“......”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동을 끄고 차 밖으로 나왔다. 다시 건물로 들어간 지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들었다. 명함책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 후, 신호 끝에 누군가가 받았다.


“한강진 국장님? 부탁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잠시 뒤, 지수와의 통화를 끝낸 한강진 국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급히 다시 전화를 들었다.


“서 대리? 성진이하고 혜림이 준비시켜서 내 방으로 보내주게. 그래, 지금 당장.”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차량 한 대가 경부 고속도로 하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네모진 해치백 자동차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는데, 지수와 이성진, 민혜림 대리가 그들이었다. 운전석의 이성진 대리는 갑작스러운 출동을 궁금해 하며 한강진 국장의 말을 떠올렸다.


‘강(江)에서 도움을 요청했네. 옛 서울 톨게이트 부지에서 수장과 합류하게. 그리고 전투가 있을 테니 준비는 확실하게 하고.’

‘도움이라뇨?’

‘자세하게 얘기는 안 했지만, 목소리만 봐서는 큰일 같더군. 예지가를 콕 집어서 요청한 것도 그렇고.’

‘예지가를요? 노출해도 될까요?’


순간 그는 한강진 국장이 강(江)의 부탁을 너무 쉽게 들어준다고 생각했다. 기밀 중에 기밀인 예지가를 노출시키는 것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한강진 국장은 생각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명 보통 일은 아닐 거야. 방금 말 한 것처럼 노출에의 불안도 있지. 하지만 어쩌면... 이번 일은 예지가에 대한 지식을 넓힐 기회가 될 거라고 보네. 지금은 보안도 중요하지만, 기능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차량 내부는 주행 소음만이 가득했다. 조수석의 지수는 생각에 골몰해 있었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성진 대리는 뭔가 말을 걸어보려다가, 창백하면서 고민 가득한 얼굴을 보고 포기했다. 그렇게 삼십분을 더 달렸을 때였다. 마침내 지수가 입을 열었다.


“먼저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돕고 살아야죠.”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이성진, 이쪽은 민혜림입니다.”


지수는 이성진 대리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옅게 웃으며 말했다.


“구면이군요.”

“... 그렇습니다.”


이성진 대리가 쓴 웃음으로 대답했다. 지수가 본격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죠. 부산 지역 공동체 「절해」에 협의 차 내려간 저희 예지가가 감금되었습니다. 그리고 절해의 회장인 박철수는 밤 10시, 부산의 금정산에서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조건은 그녀의 목숨입니다.”

“...!!”


둘은 지수의 설명에 입을 쩍 벌렸다. 공동체의 배신, 볼리셔니스트의 감금과 협박.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수가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함정이겠죠. 원하는 걸 들어준다고 해도 순순히 그녀를 풀어줄 리 없을 겁니다.”

“라는 말씀은...”

“제가 놈들을 만나는 동안, 저희 예지가를 찾아 주십시오.”


이성진 대리는 갑자기 올라온 궁금증과 막막함에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리고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놈들이 예지가를 약속장소로 데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싸움이라면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실제로 그녀를 풀어줄 생각이었다면, 인적 없는 산 중턱에서 보자고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더구나 초죽음이 된 여자, 그것도 의기력자를 도심지에서 끌고 다닌다는 건 위험부담이 클 테니까요. 아마 감금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하겠죠.”

“......”


마치 화산 폭발 전과 비슷한 말이었다. 단언하는 걸로 봐서는 예지가의 현 상황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가 말한 초죽음과 여자라는 단어는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성진 대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위치는 아십니까?”

“아뇨. 그래서 예지가를 요청 드린 겁니다. 어떤 분이 예지가이시죠?”


이성진 대리가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분명히 예지가입니다. 듣고 있으니 말씀하셔도 됩니다.”


최소한의 신분은 감추고 싶다는 뜻이었다. 지수 역시 그의 말에 수긍하듯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때 뒷좌석에서 듣고 있던 민혜림 대리가 끼어들었다.


“저예요. 제가 예지가예요.”

“혜림아!”

“왜?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그럴 필요 있어?”

“하아... 알겠어.”


이성진 대리가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지수는 뒤쪽의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저희 예지가도 비슷한 연배의 여성입니다. 아무튼, 제가 부탁드리는 건 「목표한정」으로 위치를 특정 하는 것입니다.”


지수의 말에 민혜림 대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목표한정을요? 하지만 전 상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걸요.”


목표한정 방식의 예지는 대상 목표와의 「관계성」이 매우 중요했다. 관계성이 성립되는 기준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거나,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감정의 교환이 필요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보시죠.”


지수는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속에서 사진 하나를 빼냈다. 지애림의 증명사진이었다. 민혜림 대리는 지갑 속 사진에서 둘의 관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척 사진을 받아들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물론 사진을 보신다고 해도 목표한정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예지가는 예지가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조금 추상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녀는 분명히 「구조신호」를 띄웠을 겁니다.”

“구조신호요?”

“예지가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죠. 의지의 흐름을 읽는다는 건, 어렵긴 해도 자신의 의지를 그 흐름에 흘려 넣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할 줄 압니다.”

“아...”

“그 신호에 닿는다면 관계성은 성립될 겁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어요. 위치 매핑... 그러니까, 전 부산이라는 곳을 하나도 몰라요. 신호의 강약으로 찾기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은데요.”

“음...”


예지가가 읽어낸 의지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속칭 「예지」라고 불리는 이것은 볼리셔니스트가 지닌 의지의 내용뿐만 아니라, 관련된 위치 역시 담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예지가 추상성을 지닌 일종의 암호에 가까웠기에, 이를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역공학(Reverse engineering)과 비슷했다. 여기서 예지가의 경험이 중요했다. 예지가 보여주는 추상적인 상징과 거기에 대응되는 사건을 매칭하는 과정에서 해석에 필요한 여러 키워드들을 축적하고, 이 경험을 통해 향후 예지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위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징에 대응되는 정보가 있어야만 예지가 말하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보통 이 과정을 매핑(Mapping)이라고 하는데, 세밀한 매핑은 주로 지역 커뮤니티의 예지가들이 능한 부분이었다.


민혜림 대리는 한 국가를 관념체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예지가이긴 했다. 그러나 그만큼 위치적인 정밀도는 떨어졌다. 더구나 지역을 좁힌 정밀한 매핑 경험은 아주 없다시피 했다.


“......”


민혜림 대리는 사진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보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구조신호에 대한 접촉이든 세밀한 매핑이든, 능력을 벗어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더구나 비슷한 나이의 여자 예지가라니. 동질감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연하게 미소 짓는 사진 속의 지애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을 들었다.


“해볼게요.”


운전석의 이성진 대리가 놀라며 물었다.


“괜찮겠어?!”

“한 번 해봐야지.”


지수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신호에 대한 다른 정보 같은 게 있나요? 예를 들어... 느낌이라던가...”


잠깐 고민하던 지수가 대답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무에 붙은 작은 모래조각이라고 했습니다. 모래조각이 작긴 하지만, 빛의 방향에 따라서는 크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말하는 지수나 듣는 이성진 대리나 고개를 갸웃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혜림 대리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지금부터 예지에 들어갈게요. 신호를 찾아보겠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민혜림 대리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양 손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검은색 시야에 마치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어가듯, 의지의 흐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간. 부산.


작가의말

사펑 2077이 나왔네요. 꽤 재미있는 거 같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Volition : 1988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4 7화 : 귀환(Return) (2-1) 21.01.21 40 0 18쪽
133 7화 : 귀환(Return) (1-4) 21.01.16 46 0 12쪽
132 7화 : 귀환(Return) (1-3) 21.01.14 43 0 11쪽
131 7화 : 귀환(Return) (1-2) 21.01.09 46 0 16쪽
130 7화 : 귀환(Return) (1-1) 21.01.07 52 0 20쪽
129 6화 : 슬픔(Grief) (6-4) 21.01.02 46 0 15쪽
128 6화 : 슬픔(Grief) (6-3) 20.12.31 49 0 12쪽
127 6화 : 슬픔(Grief) (6-2) 20.12.26 36 0 13쪽
126 6화 : 슬픔(Grief) (6-1) 20.12.24 36 0 12쪽
125 6화 : 슬픔(Grief) (5-6) 20.12.19 33 0 13쪽
124 6화 : 슬픔(Grief) (5-5) 20.12.17 34 0 10쪽
123 6화 : 슬픔(Grief) (5-4) 20.12.12 32 0 13쪽
» 6화 : 슬픔(Grief) (5-3) 20.12.10 33 0 12쪽
121 6화 : 슬픔(Grief) (5-2) 20.12.05 31 0 14쪽
120 6화 : 슬픔(Grief) (5-1) 20.12.03 38 0 13쪽
119 6화 : 슬픔(Grief) (4-7) 20.11.28 37 0 13쪽
118 6화 : 슬픔(Grief) (4-6) 20.11.26 38 0 12쪽
117 6화 : 슬픔(Grief) (4-5) 20.11.21 41 0 11쪽
116 6화 : 슬픔(Grief) (4-4) 20.11.19 39 0 11쪽
115 6화 : 슬픔(Grief) (4-3) 20.11.14 34 0 11쪽
114 6화 : 슬픔(Grief) (4-2) 20.11.12 43 0 12쪽
113 6화 : 슬픔(Grief) (4-1) 20.11.07 33 0 13쪽
112 6화 : 슬픔(Grief) (3-6) 20.11.05 38 0 12쪽
111 6화 : 슬픔(Grief) (3-5) 20.10.31 36 0 10쪽
110 6화 : 슬픔(Grief) (3-4) 20.10.29 37 0 10쪽
109 6화 : 슬픔(Grief) (3-3) 20.10.22 42 0 12쪽
108 6화 : 슬픔(Grief) (3-2) 20.10.17 44 0 10쪽
107 6화 : 슬픔(Grief) (3-1) 20.10.16 40 0 14쪽
106 6화 : 슬픔(Grief) (2-4) 20.10.15 38 0 14쪽
105 6화 : 슬픔(Grief) (2-3) 20.10.10 45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