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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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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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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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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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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귀환(Return) (1-1)

DUMMY

7화 : 귀환(Return)


-1-


마약 수색 작전 이틀 후, 1988년 2월 15일 월요일 6시 27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모처(某處).


즐거운 꿈이 악몽으로 바뀌는 때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상어가 꾸고 있는 것도 편안하게 거리를 걷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 꿈이 곧 악몽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익숙한 거리였다. 바닥에 깔린 포석이 발을 간질였다. 아기자기한 동유럽의 거리는 쌓여온 세월만큼이나 포근했다.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주변을 밝혔다. 그는 앞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한 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모녀가 뒤를 향해 돌아보았다. 30대 초반과 8~9살 정도의 동양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어를 향해 웃고 있었다. 손을 흔들었다. 자신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모퉁이를 돌면 시장이었다. 딸의 들뜬 걸음은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상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모녀를 따라 건물벽을 돌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며 주변이 바뀌었다.


“?!!”


기대했던 노천 시장이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얼마 전 봤던 속초 시장의 입구였다.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입김이 나왔다. 복장도 어느 샌가 그날 입었던 두터운 외투로 바뀌어 있었다.


이때 걸어가는 모녀의 모습이 몇 번 번쩍였다. 반전을 거듭하며 실루엣 안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더니, 곧 망막에 맺힌 피사체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


상어는 금방 그 모습을 알아보았다.

그날 보았던 「그릇」과, 그녀의 어머니였다.


두 사람은 차분함 속에 행복을 지닌 발걸음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상어가 둘을 따라가기 위해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균형을 잃은 그는 바닥에 양손을 짚고 쓰러졌다. 숨이 가빠졌다.


“컥...!!!”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리가 색을 잃으면서 바깥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백의 좁은 방으로 바뀌면서 어둠이 들이찼다. 악몽이 다가왔다. 상어는 오열했지만 울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멈춰있던 달이 시계바늘처럼 돌며 작은 창 너머에 떠올랐다.


차가운 달빛은 방 한 쪽 벽에 두 개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천정에 매달려 느리게 흔들리는...


두 개의 목 맨 그림자를.


모녀의 시체는 창틀 그림자가 만든 격자에 갇힌 채 흔들리고 있었다. 시계추와 같이, 서로 다른 시간을 그리는 두 개의 그림자는 상어의 시선을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오래된 호텔방의 천정이 비틀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 아래로 몇 개의 편지봉투가 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림자 속에서 뜬 눈을.

원한에 사무쳐 피눈물을 흘리는 네 개의 눈동자를.


“아아아아아악!!!”


눈을 뜬 상어가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 전 악몽에서 깼던, 그날과 같은 방이었다. 침대 옆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식어가며 땅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헉... 헉...”


땀이 마르면서 한기가 덮쳐왔다. 상어는 턱을 떨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때와 같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나온 미지근한 물이 그의 몸 위를 흘렀다. 그러나 가쁜 호흡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상어가 고개를 숙였다. 물은 코끝을 타고 방울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째서...’


속초에서 그릇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는 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몇 년의 세월이 날아갔음을 깨달았다. 직접 땅에 묻은 모녀의 모습을 속초에서 본 순간, 세상은 무너졌고 기억은 색을 되찾았다. 슬픔. 고통. 후회... 감춰뒀던 모든 감정들이 붉은 용암처럼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타들어 가는 심장과도 같이,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이기적인 이유 하나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부정하기로 결심했다. 위선이었고 제멋대로의 생각이었고 그저 자신이 편하자고 하는 짓이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속초에서 본 그 아이가 「그릇」이라는 걸 알아낸 그때였다. 아마 시장을 들어가는 뒷모습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심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왜, 그때 본 두 사람에게서 모녀의 뒷모습을 본 걸까. 그리고 왜, 그 아이가 「그릇」이었던 걸까. 「그릇」이었기에 죽었던 그 아이의 뒷모습을 왜 겹쳐 보았던 걸까. 왜, 그때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모습을 봤던 걸까.


왜...

그들은 운명처럼 눈앞에 다시 나타난 걸까.


운명 따위를 믿는 건 사치였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왔기에 더더욱 그랬다. 어른거리는 죽음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건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언제나 한 끝 차이로 왔다가 비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마침 놀러 나갔기에 마을을 덮친 폭격에서 살아남은 것도 운이었다. 하얀 마녀에게 큰 상처를 입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운이었다. 모녀를 만나 생명을 건진 것도 운이었다. 다, 모든 것이 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운이었다.


꼭지를 잠근 상어가 거울 앞에 섰다. 처량하고, 슬프고, 과거를 헤매는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모든 것이 운이라고 믿었고 자신감 따위는 가지지 못했던 한 남자가 보였다.


“......”


상어는 수건을 가지고 몸을 닦았다. 그리고 가위로 머리를 정리하고, 면도칼로 수염을 깔끔하게 밀었다. 그는 포마드로 머리카락을 넘겨 빗으며 꼼꼼하게 마무리를 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나자 오른손을 들었다. 상어는 손을 쫙 핀 후 손바닥을 거울에 갖다 댔다.


“!”


약간의 힘을 줬다. 그러자 거울은 손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완전히 쪼개졌다. 조각 하나하나에 얼굴이 비춰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천천히 손을 거둔 상어는 미련 없이 뒤돌아 샤워실 밖으로 나왔다.


황량한 방을 지나 옷장을 열었다. 그는 유럽산 고급 정장을 꺼내 차근차근히 입었다. 귀국한 이후, 지금까지 보였던 후줄근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넥타이핀 위치를 정성들여 잡은 상어가 서랍을 열어 시계를 꺼냈다. 은색의 파일럿용 시계였다. 자본주의 망령이 든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랄 정도로 사치스러운 몸가짐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8시. 곧 「로렌치니」가 올 시간이었다. 역시나 작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어는 넥타이 목 부분을 잡고 살짝 당기며 문을 열었다. 김다빈의 긴장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와.”


상어의 말에 그녀가 하이힐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외투에서 팔을 빼내다 궁금한 듯이 말했다.


“여긴 어디에요?”

“내 전용 안가(安家) 중 하나지. 추적은 없었나?”

“목숨만 달려있는 여편네를 추적할 이유가 있겠어요? 당연히 없죠.”


투덜거리던 김다빈은 외투를 바닥 아무데나 놓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 석유풍로(焜炉) 위의 은색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올라오자, 상어는 찻잔에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차향과 석유냄새 섞인 공기가 집안에 흘렀다.


“그런데 시가지 안쪽에 안가라... 머리 좀 썼네요.”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그거 남조선 속담 아니에요? 말투도 그렇고... 이 사람 위험하네.”

“그럴 지도 모르지.”


피식 웃은 상어는 같은 모양의 찻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 작은 가방에서 두툼한 수첩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김다빈이 받으면서 물었다.


“이건 뭔데요?”

“위장 신분과 여권, 그 외 필요한 것들.”

“...... 진짜 가라는 거군요.”


그녀는 한숨을 아주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한 듯, 수첩을 한 장 두 장 펴 내용을 보기 시작했다. 상어는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일단 필요한 건 다 넣어뒀어. 계획은 꼭 숙지해.”

“알겠어요. 근데... 국경을 육로로 통과하라고요?”

“순안 공항은 「검은색 나무」 영향권 안쪽이야. 어떤 감시가 있을지 몰라.”

“욕 나오네요.”

“혼자 보내는 건 아니니 너무 걱정 마. 지선후 대위가 호위로 갈 거야.”

“지... 누구요?”

“곧 올 테니까 좀 기다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김다빈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수첩을 읽어 나갔다. 거기에는 그의 말처럼 자세한 탈출 계획과 필요한 각종 서류, 자금 등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나름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현실감이 강해졌다. 그래도 명색이 스파이인데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일어났다.


“그런데 안기부에 가서 뭘 협상하라는 거죠?”

“사실 협상이랄 것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그릇의 전력화를 포기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것.”

“소박하네요.”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눈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색 주전자 앞으로 이동한 상어가 다시 찻잔을 채웠다. 김다빈은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수첩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한수민... 이던가요?”

“!!!”


흔들린 주전자 주둥이가 찻잔에 부딪히며 쨍 소리를 냈다. 동시에 뒤돌아본 상어의 눈에는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김다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맞죠? 주진영, 한수민.”

“어떻게 그걸...!!”

“옛날 자료에서 스치듯 본 거죠. 당신이 접촉해 왔을 때 나라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니까. 이번 일을 결심하게 된 건, 그들 때문인가요?”

“......”


핵심을 관통한 그녀의 질문에 상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함이 가득했다. 그걸 본 김다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당신도 그런 얼굴 지을 줄 아는군요. 완전 벽창호인줄 알았는데.”

“보고할 건가?”

“그럴 리가요. 그냥 당신이 왜 이렇게 미친 짓을 계획했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


김다빈은 양손을 으쓱했다. 상어는 다시 채운 찻잔을 가지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복잡한 얼굴을 보이며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잔을 단숨에 비운 상어가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주 루마니아 대사관 소속 외교관의 부인이었던 주진영과 그 딸인 한수민... 세 사람 다 현지 체재 중이었죠. 그런데 남편이 82년 말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부인은 이듬해 중순 귀국해요. 이때 딸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곳에 남았어요. 10살 정도였던가? 이상한 일이었죠.”

“......”

“그리고 84년, 딸이 루마니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출국하죠. 그리고... 그녀도 그곳에서 죽어요.”

“그게 전부인가?”

“네. 별 관계없어 보이던 자료라 기억이 나네요.”

“기억력이 좋군...”


한동안 빈 찻잔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상어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초탈한 느낌이었다.


“몇 가지만 덧붙이지. 딸인 한수민은 「그릇」의 전술기 전력화 과정에서 자살했고, 어머니인 주진영은 자책감에 현지에서 자살했어. 그리고 한수민의 전술기 전력화 과정을 결정한 건... 바로 나야.”

“!!!”


충격적인 얘기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김다빈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렸다.


“당신... 설마... 그래서...!”

“또 당시 한수민을 대상으로 전술기 전력화 과정을 진행한 건, 지금 이곳에 있는 「애쉬Ash」지.”

“뭐라고요?!”

“착각하지 마. 이 일이 복수를 위한 건 아니니까.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어. 애쉬가 감춘 건 있었지만 설명은 충분했어. 그래서 위험성도 알고 있었지. 전력화 방법과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하고 대상을 어떻게 다루는 지도.”

“그런데 그걸 하게 했다고요?!”

“외통수였다고 하면... 너무 변명 같나?”


상어의 웃음에는 자책감이 가득했다. 김다빈은 그가 감정을 감추지 않는 것에 놀라며 침을 삼켰다.


“이젠 숨길 것도 없겠군.”


찻잔을 잡고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상어가 말을 시작했다.


1982년 9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있었던 「플라타너스 작전Operation Platanus」이 실패로 끝나고, 상어는 하얀 마녀(정은정)에게 큰 부상을 입고 겨우 그곳에서 탈출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였지만 심한 부상에 죽음의 문턱까지 간 상태였다.


이때 그를 구한 것이 당시 주 루마니아 외교관의 부인이었던 주진영(당시 31세)과 그녀의 딸 한수민(당시 9세)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딸을 데리고 운전 중이던 주진영은 길을 잘 못 들어 공항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한수민이 길 가에 반 쯤 시체가 된 상어를 발견했다. 주진영은 상어를 싣고 병원에 데려갔고,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되지는 않았기에 그는 순조롭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루마니아 내 「마법사의 나무」 세력은 일소된 상태였다. 군사고문으로써의 역할도 끝난 만큼 귀국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작전 실패의 부담에 상어는 귀국을 쉽게 결심하지 못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찾는 사람도 없었다.


1982년 11월. 퇴원 후 길을 걷던 상어 앞에 큰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부상자를 구해내고 병원으로 옮기면서 부상자가 루마니아 주재 북한 외교관인 것에 한 번 놀라고, 병원에서 가족이라고 온 사람들이 주진영과 한수민인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며칠 동안 중환자실에 있던 외교관은 결국 사망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주진영과 상어와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슬픔을 위로하던 중 관계가 깊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1983년 3월, 주진영과 한수민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외교관인 남편이 죽은 이상 두 사람이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상어는 주진영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고, 공작원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제안했다. 그가 죽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이야...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남편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그런 제안을 해요?”


혀를 차는 김다빈의 말에 상어가 쓰게 웃었다.


“그랬지. 이기적이었어.”


하지만 상어가 제안을 한 직후 일이 터졌다. 딸인 한수민이 볼리셔니스트로 각성한 것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볼리셔니스트가 아닌, 「그릇」의 자질을 보인 것은 충격이었다. 상어는 자신과 한수민의 의지도달공간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경악했다.


문제는 이 사실이 퍼져버린 점이었다. 한수민이 그릇이라는 소문은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결국 루마니아 내 볼리셔니스트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게다가 이 정보가 루마니아 정부를 통해 북한 공산당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결국 그 상태로 귀국할 경우, 한수민도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어려웠다.


“이곳 볼리셔니스트의 말로는 뻔해. 도구로써 이용되다가 죽을 뿐이지.”

“말 너무 막 하는 거 아니에요?”


결국 모녀는 상어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 사람 다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1983년 4월. 그들은 도망치듯 국경을 넘어 불가리아를 향했다. 상어는 신분을 감춘 채 소소하게 사냥꾼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문을 듣고 행방을 캐던 「애쉬Ash」가 마침내 그들을 찾아낸 것이었다.


애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전적 보상을 비롯, 각종 조건을 내걸고 한수민의 전술기 전력화를 제안했다. 상어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 아까 애쉬가 감춘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뭔데요?”

“... 학대에 후유증이 없을 거라고 했지.”

“그 말을 믿었어요? 후유증 없는 학대가 어디 있어요?”

“기억 자체를 억누른다고 했어. 잊어버리고 영원히 기억해 낼 수 없을 거라고.”

“딱 들어도 거짓말 같네요.”


하지만 여기에서도 불행은 이어졌다. 애쉬가 상어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사라진 플라타너스이며, 북한의 공작원임을 알아낸 애쉬는 이 사실을 북한 당국에 알렸다.


“협박했군요.”

“반쯤은 그렇지.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잠적한 외교관의 부인과 딸, 게다가 그 딸은 「그릇」인 볼리셔니스트, 여기에 죽음으로써 자신을 지우고 그들과 새로운 삶을 살려 했던 공작원까지... 원칙대로라면 당연히 모두 처형이지.”

“그래서 딸을 팔아 넘겼나요? 살아남기 위해서?”

“... 그래. 나와 진영이가 죽고 나면, 수민이의 미래도 다를 바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당과 애쉬는 이미 거래를 끝난 상태였지. 수민이의 전력화는 피할 수 없었어. 변명 같겠지만.”


퇴로는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 죽음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면 모든 죄의 사면, 국가영웅 대접, 막대한 금전적 보상, 복귀 시 당 내 지위 보장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상어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1983년 6월, 주진영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다.


동시에 딸인 한수민은 애쉬의 지휘 아래 전술기 전력화 과정에 들어갔다. 애쉬는 대략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만약 한수민이 그 과정을 끝내고 돌아온다면, 세 사람은 북한에서 새롭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상어는 귀국 직후 버마 테러(아웅산 묘소 테러사건, ‘83.10)의 기획을 위해 재출국 했다. 이후에도 여러 건의 공작을 성공시키며 84년 상반기까지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84년 8월. 루마니아에서 급전(急傳)이 도착했다.


한수민이 전술기 전력화 과정에서 사고사 했다는 내용이었다.


“자살이라고요?”

“그래. 사고사로 위장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지. 그리고 그건 그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 둘 다 현장을 본 그 순간 깨달았으니까.”


한수민의 죽음은 과거 전체에 대한 후회로 돌아왔다. 특히 어머니인 주진영의 자책은 극에 달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딸이 극심한 고통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후회는, 결국 같은 행위로 귀결되었다.


그날 밤. 상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호텔방 천정의 보에 줄이 하나 매달렸다.


그렇게 자살한 주진영의 시신 아래로는, 여러 통의 편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모두 그녀가 딸에게 보낸 편지였다. 봉투에는 봉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닿지 않은 편지를 쥐고... 목을 맸지.”

“......”


몇 번 떨리는 심호흡을 하던 상어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난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협박에 굴하면 안됐어.”

“목숨이 달렸었잖아요.”

“아냐. 목숨을 걸고 싸웠어야 했어.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한 거였다면, 세상 끝까지 도망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웠어야 했어.”

“......”

“싸움을 피하는 것이 행복은 아니었는데... 왜 난 싸우지 않았을까.”


고개를 뒤로 젖인 상어의 시선이 천정을 향했다. 그의 머리는 조금씩 흔들리며, 한동안 그곳을 향해 있었다. 김다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방황하던 상어는 그길로 귀국하지 않고 유럽에서 대(對) 올림픽 공작에 투신했다. 그가 또 다시 사라질지 모른다는 당의 불안은, 몇 건의 공작을 훌륭히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이후로는... 지금과 같지.”


상어는 양손을 펼치며 이야기의 마지막을 알렸다. 그의 얘기로 모든 내막을 깨달은 김다빈이었지만, 마지막 궁금증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말해 봐.”

“과거는 알겠어요. 그런데 왜 채휘를 구할 결심을 한 거죠?”


상어가 멈칫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짧게 대답했다.


“뒷모습을 봤어. 행복했던... 뒷모습을.”


* * * *


그날 오전, 1988년 2월 15일 월요일 8시 35분.

서울 예장동 안기부 본부, 대공수사실 회의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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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 귀환(Return) (1-1) 21.01.07 55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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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6화 : 슬픔(Grief) (6-2) 20.12.26 37 0 13쪽
126 6화 : 슬픔(Grief) (6-1) 20.12.24 3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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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6화 : 슬픔(Grief) (5-5) 20.12.17 3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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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6화 : 슬픔(Grief) (5-3) 20.12.10 34 0 12쪽
121 6화 : 슬픔(Grief) (5-2) 20.12.05 32 0 14쪽
120 6화 : 슬픔(Grief) (5-1) 20.12.03 39 0 13쪽
119 6화 : 슬픔(Grief) (4-7) 20.11.28 38 0 13쪽
118 6화 : 슬픔(Grief) (4-6) 20.11.26 41 0 12쪽
117 6화 : 슬픔(Grief) (4-5) 20.11.21 42 0 11쪽
116 6화 : 슬픔(Grief) (4-4) 20.11.19 41 0 11쪽
115 6화 : 슬픔(Grief) (4-3) 20.11.14 35 0 11쪽
114 6화 : 슬픔(Grief) (4-2) 20.11.12 44 0 12쪽
113 6화 : 슬픔(Grief) (4-1) 20.11.07 34 0 13쪽
112 6화 : 슬픔(Grief) (3-6) 20.11.05 39 0 12쪽
111 6화 : 슬픔(Grief) (3-5) 20.10.31 3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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