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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너 님의 서재입니다.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3.05.22 11:43
최근연재일 :
2023.06.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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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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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한 번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적인 상상과 스케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한 발명품을 아우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 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서구적인 사상과는 다르게,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택했습니다. 모진 시련을 견디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참고 헌신했지만, 권력의 암투 속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에, 어떤 비밀과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는 매우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으로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무협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판타지 소설임에도, 네덜란드의 왕자인 하멜과 조선의 미녀 여주인공이 그려가는 로맨스 또한, 소홀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DUMMY

 *            *            *

 


 “와~ 매머드가 이 정도였다니! 그동안 전장을 누빈 매머드에게 이런 면이 있던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와~~~ 정말 기가 막히네요!” 에보크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때, 느낌이 확 다가오느냐, 후후.” 카오핑이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대령님. 매머드가 이랬으니 코르의 어떤 화공으로부터도 다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이군요! 정말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여기 있는 매머드들은 지상 최강의 무기가 분명합니다!” 카오핑의 안내로 전투를 끝내고 우리에서 쉬고 있는 매머드들을 바라보던 에보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야 우리 퓨그의 전력을 실감하는가 보구나, 후후.” 카오핑은 그저 느긋한 웃음만 지으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대령님. 애당초 작은 나라인 코르가 이 위대한 제국에게 대든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그걸 똑똑히 알겠습니다. 와~ 정말~~ 와~~ 그동안 우리 코르는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꿈만 꾸었었군요... 안 그렇습니까, 대장님?” 에보크는 잔뜩 흥분이 되서 옆에 있던 얀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매머드를 바라보던 얀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어떻습니까, 얀스 대장?” 한동안 얀스의 침묵을 지켜보던 카오핑이 약간 섭섭했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음, 매머드가 이랬다니... 음, 한마디로 정말 대단하군요...” 그제야 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카오핑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황제 폐하께서 이런 매머드를 가지고 계셨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이런 매머드가 내일의 전쟁에서도 최선봉에 선다면, 누구든 매머드와 같은 편으로 그 옆에서 싸우는 건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절대로 두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에보크는 계속해서 잔뜩 들떠있었다. 하지만 얀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는 못했다. 매머드의 위용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얀스와 에보크가 이미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완전히 퓨그 제국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한 카오핑은, 제국군의 주력인 매머드를 한 번 자세히 보여주었다. 그러자 둘은 그 위용과 실체를 확인하며 탄성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제국을 위해 앞으로 무엇인가 꼭 필요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었기에, 카오핑은 얀스와 에보크에게 아낌없이 매머드를 공개하고 있었다. 그만큼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대장군님, 제발 부탁입니다. 내일의 전투에서는 저를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제가 제 손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 반드시 저년의 목을 베어 황제 폐하께 갖다 바치겠습니다!” 에보크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듣고 있던 도르반은 카오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카오핑은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공감의 표시를 보냈다.

 

 화노블(Farnoble)산 계곡에서 하이란이 이끄는 코르군과 호랑이 군단에게 일격을 당한 도르반은, 퓨그의 본진에 합류한 이후 에보크(Evoke)와 얀스(Jans)의 처리문제를 놓고 몇 번이나 고심을 하고 있었다.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져 사지로 내몰린 에반이 자신의 송골매 빌로(Veelo)를 통해 도움을 청했을 때 도르반이 에반과 그의 측근들을 지하 기지로 받아들인 이유는, 잠시 그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의 분노를 역이용해 코르를 공격하는데 어떤 성과라도 내기 위함에서였다.

 

 처음에는 도르반이 원했던 대로 일이 잘 진행되었다.

 하이란을 무찌르겠다는 에반의 복수심은 펄펄 끓어올랐고, 그런 감정은 그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도르반은 그들과 불곰 군단, 늑대 군단을 앞세우고 먼저 화노블산으로 들어서 능선을 몇 개 넘어 코르에게 기습을 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르반이 에반의 분노를 너무 믿었던 것에 있었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때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려하는 의견들이 있었는데, 도르반이 그 점을 간과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어쨌든 코르를 기습하려다 오히려 기습을 당해, 애지중지 키우고 강력한 전사로 성장시킨 불곰과 늑대들은, 적이 보유한 호랑이의 용맹함과 민첩함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전멸하고야 말았다. 에반과 그의 측근들도 적에게 모두 당하고 말았다.

 사실 도르반의 입장에선 에반이나 그 수하들이 죽든 말든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오랫동안 적으로 지낸 사이였다. 나중에 코르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백성을 자신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고 나면, 누구든 허수아비로 왕 자리에 앉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괴뢰정권으로 운용할 생각이었고, 그런 후보 중에 에반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죽으면 다른 누군가를 앉히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모두 다 죽고 단 둘만이 자신의 군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얀스와 에보크였다.

 도르반은 처음에는 그냥 둘을 처형할 생각이었다.

 황제가 있는 본진에 합류하는 입장에서 화노블산에서의 패배를 호크런이 알게 되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이었다. 코르로부터 넘어온 이 둘의 존재가 발각이라도 되면, 자초지종에 대한 황제나 냉혈족 장군들의 추궁이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비밀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도르반 자신의 과오와 약점이 냉혈족에게 잡히게 되면, 도르반의 입지는 크게 축소될 것이 뻔했다. 아니 그 정도만이 아니라 심각한 징계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도르반은 둘을 없애고 싶었다.

 

 특히나 얀스가 그러했다. 그는 일단 다리를 절었고 나이도 자신과 비슷한 중년이었다. 얼굴의 반은 화상의 흉터로 가득한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건장한 청년인 에보크는 자신의 병사 속에 섞여서 함께 전투에 나서도록 적당히 숨길 수도 있었지만, 얀스는 행동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르반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자신의 심복인 대령 카오핑은 한사코 그들을 두둔하는 편이었다. 분명 나중에 꼭 긴요하게 쓸 데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도르반은 그들을 일단 냉혈족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기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달라는 혈기왕성한 에보크의 청을 들어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예도 출중한 녀석이니 앞에서 싸우게 하면 그만이었다. 싸우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역죄인의 몸인 것을 살려줬으니, 도르반의 입장에선 에보크라는 청년 하나쯤의 목숨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얀스였다.

 카오핑 대령은 그의 천부적인 지식과 능력을 알아챘다고 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또 했다. 언젠가는 분명 큰일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 잘 아껴두자는 부탁도 상관인 자신에게 계속 하고 또 했다. 그래서 도르반도 일단은 두고 보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 얀스라는 작자는 틈만 나면 황제 호크런이 있는 천막 쪽으로 자꾸 기웃거릴려고 하였다. 코르에서부터 넘어온 것을 들키면 안되는데, 이 사람은 도무지 그런 것은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지금 자기의 머릿속에는 코르군을 괴멸시킬 기가 막힌 계획이 있으니, 이를 황제에게 좀 알려야겠다는 주장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황제 가까이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보였다. 그러니 도르반도 적잖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장군님!” 에보크가 다시 한 번 애원을 하였다. 이번에는 무릎도 꿇으며 간청을 하였다. 그러자 카오핑이 에보크의 등을 몇 번 툭툭 두드렸다. 이를 바라보는 얀스는 별다른 표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음, 그런데... 내일의 전투는 오늘보다도 훨씬 더 치열할 텐데...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도르반이 점잖게 물었다.

 “이미 저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아버지마저 이승에서의 운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무슨 희망이 남아있겠습니까?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저 하이란! 한때는 저랑 사관학교의 같은 신입생이자 동기생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건방지게도 황제를 칭한 저년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오직 그 순간만이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 대장군님... 저에게 부디 그럴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간절히 청을 올립니다!” 에보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제 도르반은 그런 에보크의 청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카오핑이 옆에서 계속 거드니 더욱 그러했다. 결국 도르반은 내일의 전투에서 에보크는 매머드와 함께 최선봉에 설 수 있도록 위치를 잡아주었다. 에보크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예를 올렸다.

 

 반면 얀스에게는 일단 후방에서 대기하라는 말만 전했다. 카오핑도 다리가 불편한 얀스에게는 당연히 그럴 때라고 생각했고, 막상 얀스 자체도 이 전쟁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욕이 없는 것 같았다.

 오직 얀스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황제 호크런 가까이로 접근하는 것... 그것뿐인 것처럼 보였다.

 


 *            *            *

 


 밤이 아주 깊었다.

 호크런이 날린 거센 바람도, 또 여기에 동조해서 난리를 쳤던 눈보라도 모두 잦아들었다. 광활한 맨츠 벌판은 반짝이는 은하수를 이불 삼아 고요히 잠들어있었다.

 그러나 내일의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 양 국의 수뇌부는 잠을 청할 여유가 없었다. 호크런과 하이란, 황제를 칭한 두 군주의 천막 주변에는 횃불이 계속해서 그을음을 토해내며 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아군의 피해는 어떠하였습니까? 적은 어떤지도 궁금합니다.” 황제가 조바심이 난 듯 말했다.

 “예상보다 아군의 피해가 상당히 큽니다, 폐하. 적도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본토에서부터 워낙 많은 물량공세를 퍼붓는지라, 아군이 입은 피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완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밤부터 바람도 북서풍으로 바뀌어 보라(Bora)가 더욱 강하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한랭전선이 몰려올 것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기온이 생각보다 훨씬 더 떨어지고 있습니다. 맨츠(Mantz)에서 태어나고 자란 적군에 비해 아군 병사들이 추위에 더 취약한 건 사실이지 않사옵니까?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폐하.” 파르코의 음성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짐도 그래서 걱정입니다. 후... 그나저나 우리의 전투기들은 지금 상태가 좀 어떠합니까?” 하이란이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물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폐하... 아까 적의 황제를 공격하러 출격했다가 만난 거센 폭풍 때문에, 솔직히 기체에 손상을 많이 입은 상태이옵니다. 특히나 모든 전투기는 양 날개와 꼬리날개가 심하게 파손된 것으로 확인되었사옵니다. 적진에서 추락하지 않고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나 빙판에 착륙을 한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로, 지금 아군기들의 상태는 아주 좋지가 않사옵니다. 기체가 다시 이륙을 할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장담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샤키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요, 이거 정말 큰일입니다... 어떻게... 내일 새벽부터 수리에 들어갈 수는 있겠습니까?” 황제의 근심은 날로 깊어지고 있었다.

 “날이 밝는 대로 당장 수리에 들어갈 생각입니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는 소신으로서도 확답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내일이 되어 보면, 오늘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손상이 더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심히 염려스럽사옵니다.” 샤키가 냉정하게 그대로 보고했다.

 다들 한숨부터 나오면서 잠시 말들이 끊겼다.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될 것 같사옵니다, 폐하.” 하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특단의 대책이라니요? 어떤 대책을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 아군이 오늘처럼 적에게 먼저 달려들어서는 결국 피해만 늘어갈 뿐이옵니다. 처음에는 잠시 승기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적은 그 수가 워낙 많으니, 적병 다섯을 죽이고 우리 병사 하나가 전사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아군에게 타격이 더 큰 것이 아니옵니까?” 하멜이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방어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근위대장님? 공격을 해서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어찌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선의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는데요...” 샤키는 하멜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하멜은 이에 개의치 않고 황제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늘 우리의 화공에도 끄떡없었던 매머드를 다들 보셨지요? 정상적인 매머드라면 그런 화염을 뒤집어쓰고는 오래 못 버티고 쓰러져 죽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적의 매머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 무엇인가 아주 이상합니다. 매머드의 등에 올랐던 병사들이 산탄을 날리며 방어를 한 것은 굉장히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어쨌든 그 병사들을 우리가 잘 처치는 했는데, 오늘 매머드의 행동을 보면 좀 석연치 않은 곳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덩치는 엄청 큰 것이 맞고, 행동도 포악한 것은 맞지만, 대장 수놈 코끼리가 화났을 때 보여주는 그런 몸부림과 비교를 해보면 어쩐지 정상적인 매머드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머드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에 조사를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고... 하여간 내일의 지상전을 승리로 이끌려면 매머드보다는 우선 적의 전투기들부터 제압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차저차해서 공중전으로 겨우 마무리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아군기들의 상태로 보아 내일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페르베르호와 보라호를 빼고는 이륙조차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적은 내일 이런 상황을 파악하는 즉시, 수적으로 우세인 공군을 앞세워 우리를 폭격부터 하려고 떼로 날아올 것이 아닙니까?”

 “그럼 어찌 해야 좋을 것 같습니까? 여기서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근위대장님?” 답답함을 토로하며 완저가 물었다.

 “소장도 답이 나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혹시 염두에 두고 계신 다른 계획이 있으십니까, 근위대장님?” 파르코도 완저와 비슷한 표정과 말투로 물었다. 모두가 하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

 “호크런은 지금 마법을 부려 북극에서 발원한 폭풍인 보라(Bora)를 맨츠로 날리고 있습니다. 적의 황제가 얼음의 힘으로 공격을 한다면,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는 불의 마법으로 이에 맞서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멜의 입장은 확고부동했다.

 “불의 마법이오?” 모두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멜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적에게 북극이 있다면 우리에겐 크란(Krann)산의 정기가 있습니다. 초록빛으로 크란산이 활활 타올랐던 그 엄청난 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은 얼음을 녹입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얼음이 녹으면 생명이 태동합니다. 맨츠의 얼음이 녹으면 이 땅속에 가득한 생명이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멜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크란산을 온통 물들게 했던 초록의 영롱한 빛. 그건 저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또한 그로 인해 아군 전투기의 수정 엔진이 더욱 강력해져서 오늘 이렇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잘 싸운 것 아니겠습니까, 근위대장님? 그런데,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게 더 있다는 말씀이신지... 얼음이 녹고 생명이 태동한다는 논리도 현재 이 상황에서 어떤 걸 지적하고 계시는지 저로서는...” 샤니(Shanny)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에겐 불이 있고 폐하께서는 그 불의 마법을 쓰시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는 저는 도통 감이 안 잡힙니다만...” 샤키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샤키 생도는 전에 맨츠 벌판에 가득했던 무시무시한 생물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한 적이 있었을 텐데요...”하멜이 표정을 살짝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네? 무시무시한 생물이오?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샤키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

 “적의 공습으로부터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대공포를 쏘아 적기를 격추시키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적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다 적기의 반만 격추시킨다 하더라도, 나머지 반이 맹공을 퍼부으면 우리는 절대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방법은 단 하나! 내일은 적기 모두를... 동시에 없애야만 합니다.” 하멜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많은 적기를 어떻게 동시에 없앨 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파르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계속 답답해보였다.

 

 “네, 물론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의 힘과 마법이 동시에 만나 최강의 현상을 만들어내게 해야만 합니다. 내일 아군은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장을 해제하여 적에게 무방비로 당하는 것처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적군이 모든 전투기를 출격시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폐하께서는 분명... 그 마법을 해내실 것이라고 소신은 굳게 믿습니다.” 하멜이 하이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황제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하이란은 하멜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는 표정이었지만, 워낙 하멜의 입장이 강렬하여 다른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며 잠시 하멜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직은 하이란도 완전하게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은 지금 근위대장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하기가 어렵사옵니다, 폐하.” 완저가 솔직하게 말했다. 파르코도 다른 장군들도, 샤키와 샤니도 마찬가지였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적과 강대 강으로 맞부딪혀서는 절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적이 모두 몰려올 테니까요. 적이 몰려와야... 몰살을 시키더라도 시킬 것입니다.” 하멜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장 확고한 자신감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때 하이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놀란 대신들이 모두 따라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 시간 이후로, 내일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군대를 지휘할 모든 권한을... 근위대장인 하멜에게 위임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대신들은 이제부터 근위대장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세요. 이는 황명과도 같습니다. 다들 아시겠습니까?” 황제가 근엄하게 말했다.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황명을 받잡겠사옵니다, 폐하!”라고만 동시에 대답했다.

 코르군 수뇌부는 모든 결론을 그렇게 내리고, 내일의 전투를 위해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군대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멜에게는, 오늘과 내일의 경계를 지을 쪽잠조차 사치스런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하멜은 아직도 할 얘기가 더 남았는지, 당장 황제의 천막으로 갔다.


 


 가녀린 촛불만이 흐느적대고 있었다. 그림자로만 가득한 공간에서는 단 둘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하이란은 작은 상자의 두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동그란 초록빛 돌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할 수 있겠지?” 하멜이 짧게 물었다.

 “해볼게. 아니, 해야 해. 내가 반드시 해야 해. 내 목숨과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 하이란이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내 목숨도 걸렸어. 난 믿어. 우리의 황제이니까 분명 잘 해낼 것이라고.” 하멜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이란은 하멜의 품에 왈칵 몸을 던지며 머리를 그의 가슴에 파묻었다.

 “두려워. 솔직히 두려워. 끝도 없는 적의 공세가 정말 두려워.” 하이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하멜은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더니, 하이란을 더 세게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등을 몇 번 톡톡 두드려주었다.

 마지막으로 하멜은 하이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짧은 한 마디만을 던졌다.

 “소신은 무조건 폐하의 지혜와 능력을 믿사옵니다.”

 


 천막으로 돌아온 완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거세진 보라의 위력 때문이었다. 내일 이렇게 차디찬 강풍이 몰아친다면, 전투 중에도 코르군은 자동적으로 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 보라를 막아낼 무엇인가가 절실했다.

 완저는 바닥에 두꺼운 천을 깔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여러 번 숙이며 기도를 드렸다. 고개를 숙인 방향은 물론 코지(Cozee)섬이 있는 쪽이었다.

 갤라(Gaela)산의 신선들에게, 또 그 신선의 왕이 되었다고 믿고 있는 전임 국왕 라이션(Lighcean)의 영혼에게 드리는 기도였다.

 용기를 달라고, 힘을 달라고, 행운을 달라고... 그리고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밤이 더 깊어가고 있는 것은 느낄 여유도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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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0화> -최종회- 23.06.13 2 0 54쪽
40 <39화> 23.06.12 2 0 44쪽
» <38화> 23.06.12 3 0 22쪽
38 <37화> 23.06.10 3 0 20쪽
37 <36화> 23.06.10 4 0 26쪽
36 <35화> 23.06.09 4 0 44쪽
35 <34화> 23.06.09 3 0 60쪽
34 <33화> 23.06.08 11 0 41쪽
33 <32화> 23.06.08 3 0 41쪽
32 <31화> 23.06.07 4 0 65쪽
31 <30화> 23.06.06 9 0 73쪽
30 <29화> 23.06.06 4 0 45쪽
29 <28화> 23.06.05 5 0 50쪽
28 <27화> 23.06.05 3 0 51쪽
27 <26화> 23.06.04 4 0 39쪽
26 <25화> 23.06.04 3 0 29쪽
25 <24화> 23.06.03 4 0 22쪽
24 <23화> 23.06.03 9 0 35쪽
23 <22화> 23.06.02 5 0 36쪽
22 <21화> 23.06.02 3 0 33쪽
21 <20화> 23.06.01 6 0 40쪽
20 <19화> 23.06.01 6 0 48쪽
19 <18화> 23.05.31 4 0 49쪽
18 <17화> 23.05.31 3 0 40쪽
17 <16화> 23.05.30 10 0 54쪽
16 <15화> 23.05.30 7 0 48쪽
15 <14화> 23.05.29 7 0 20쪽
14 <13화> 23.05.29 4 0 22쪽
13 <12화> 23.05.26 5 0 57쪽
12 <11화> 23.05.26 3 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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