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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너 님의 서재입니다.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3.05.22 11:43
최근연재일 :
2023.06.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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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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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한 번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적인 상상과 스케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한 발명품을 아우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 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서구적인 사상과는 다르게,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택했습니다. 모진 시련을 견디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참고 헌신했지만, 권력의 암투 속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에, 어떤 비밀과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는 매우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으로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무협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판타지 소설임에도, 네덜란드의 왕자인 하멜과 조선의 미녀 여주인공이 그려가는 로맨스 또한, 소홀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DUMMY

 30. 붉은 소나무의 비밀


 10월 말, *크란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전몰장병의 묘지’,

 굳게 닫혀 있던 충혼문이 열리고, 황제와 대신들은 충혼탑을 향해 엄숙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 본 판타지 소설에서 크란산은 관악산을, 전몰장병의 묘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진주의 친정인 드루파 마을은 낙성대를 모델로 하였음. 다만, 지금 서울의 지리처럼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묘지와 마을이 크란산 북쪽 기슭에 서로 가까이 붙어있는 공간으로 설정하였음.

 

 하이란에게 지금의 감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만큼 복잡했다.

 우선은 잊혀졌던 자신의 과거를 되찾고 친부모님이 계신 곳에 나아가, 당신의 딸이 황제가 되어 이제야 찾아왔다고 고하는 순간이었다.

 조국의 재건을 위해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타향에서 몸부림치신 부모님이었는데, 숭고한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잠들어 계신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밀물처럼 그녀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참배를 마치고 나면 곧 맨츠로 가야한다는 사실이 하이란의 마음을 더욱 아련하게 만들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참배였다.

 맨츠에서의 전쟁이 어려워진다면, 그래서 패배의 쓴잔을 맛본다면 그때는 자신이 이곳에 묻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부모님의 옆에 묻힌다는 것은 그나마 맨츠에서 잘 싸웠다는 뜻이 될 수 있을 것이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투에서 적에게 참패를 당한다면, 자신의 시신은 거두어지지도 못 하고 맨츠 벌판의 어느 한 구석에서 그냥 썩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하이란은 잘 알고 있었다.


 브리젠(Brizenn) 세자의 이야기에 누구보다도 가슴이 아팠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하멜이었다.

 유주 대륙의 하늘을 지나간 신비한 유성 ‘사자의 심장’을 찾겠다고 탐험에 나섰다가, 지금은 호렌 세상의 가장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인 코르(Corr)를 위해서 싸우고 있고, 자신의 조국인 네론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르고 산 지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중이었다.

 코르 땅 안에 갇힌 채 타향에서 지금 자기가 발버둥 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네론(Nehron) 왕국의 밝은 미래를 위함인데, 역시 타향에서 볼모의 몸으로 처절하게 발버둥치다 겨우 조국에 돌아와서는, 뜻하지도 않게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브리젠 세자의 이야기는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자신도 이렇게 별을 찾아 헤매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브리젠과 자신의 처지가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지 동병상련이 계속 밀려왔다.

 그래서 브리젠의 죽음은 더욱 가슴 아팠고, 시아버지이자 당시의 국왕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그의 부인인 진주(Jinju)의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커가면서 어렴풋이 전해들은 이야기였지만, 아버지인 요한슨 왕자의 원정을 극구 반대했던 어머니 마리앙을, 할아버지인 마크(Mark) 1세가 아주 싫어했었다는 소문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이란의 부모인 브리젠과 진주의 죽음처럼, 혹시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도 어떤 음모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계속해서 소용돌이치며 뿜어져 나왔다.


 *           *           *


 에반(Evan)과 에보크(Evoke)와 측근들 그리고 얀스(Jans)는, 함거에 실려 길가에 나온 모든 백성에게 “대역죄인들이 지금 죽으러 전방으로 가고 있다!”는 조롱을 들으며 계속 북쪽으로 이동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프로스궁의 대전 안에서 당장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저 다행이라고 자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쨌든 황제의 관용으로 조금 더 생을 연장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뿐이었다.


 한즈(Hanz)를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이들은 겨우 두크린(Duckreen)강 하구에 있는 유스토(Usto)항의 국경 수비대에 도착을 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의 갖은 수모를 다 견디며 에반이 겨우 이곳에 다다르니, 그런데 일반 백성보다도 더 자신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국경 수비대의 대장인 해군 대령 스푸든(Spoodn)이었다.

 비록 에반의 수하들이 꾸민 계략을 미리 눈치채지 못하고 부대의 경계에 실패하여 자신의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을 당하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지만, 그의 자녀인 샤키와 샤니가 맨츠에서 퓨그군의 진격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운 덕분에, 스푸든도 결국은 재기를 할 수가 있었다.


 아군이 아군을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치밀한 반란을 꾀한 장본인은 바로 에반과 그의 측근들이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바람에, 스푸든은 현 황제인 하이란으로부터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에반은 이미 역적이 되었고, 스푸든에게는 다시 국경을 수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으로 하멜이 건의를 했고, 또 하이란이 그대로 하라고 황명을 내린 때문이었다.


 대장 앞에 당도한 죄인들을, 병사들은 함거에서 거칠게 끌어내렸다.

 “저런 쳐죽일 놈들이 제발로 여기까지 오다니!!” 스푸든의 얼굴은 이미 분노로 달아올랐다. 에반과 얀스는 그저 담담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러나 에보크나 나리프(Nariff), 토리크(Torik) 등은 그저 고개를 떨구며 치욕에 몸을 떨었다.

 “에반, 이 역적 놈! 국경을 수비하던 그 고귀한 병사들에게 감히 뒤에서 칼을 꽂다니. 인간의 탈을 쓰고도 그토록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할 수가 있었더냐? 그러고도 네놈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스푸든은 이를 갈며 호통을 쳤다.

 “......”

 하지만 에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눈에 스푸든 대령은, 그저 발톱의 때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대역죄인들을 옥에 가두고, 죽지는 않을 만큼 최소한의 물과 식량만 넣어주어라.” 잠시 분을 삭히던 스푸든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스푸든은 죽은 부하들의 원수인 에반을 당장에라도 자기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들을 곧장 최전방으로 보내어 전쟁이 일어나면 화살받이가 되든 공을 세우든 되는대로 내버려 두라는 황제의 명이 이미 떨어진 뒤였기에, 그들에 대한 복수는 엄두도 못내고 그저 가장 험한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스푸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은 바로 화노블(Farnoble)산 중턱에 위치하여, 퓨그와는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보병 부대였다. 코르에서도 가장 높고 험한 화노블산 지형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함은 물론이거니와, 적이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바위틈과 땅바닥에 수천 개의 죽창을 박아놓고 정찰과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그야말로 전방 중에서도 가장 최전방에 있는 최고로 힘든 부대였다.


 한즈에서 그저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에반과 그 일파에게 이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였다. 황제가 비록 그들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대역죄인들에게 더 이상의 관용이나 동정을 베풀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스푸든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자신들은 이스트 포인트를 나온 귀족 명문가 출신이라는 걸 늘 뻐기고 다니며, 스푸든처럼 말단 사병에서부터 군생활을 시작한 일반 장교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에반과 그 일파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도 물론 잔뜩 깔려있었다.

 온갖 힘든 일과 고초를 다 겪어가며 군에서 생활해도 스푸든에게는 아직도 대령이라는 자리밖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상의 장군 자리는 모두 에반과 측근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이들은 사실 국왕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에반을 중심으로 뭉친 군대 안에서의 거대한 사조직이었다.


 *           *           *


 계절로는 아직 가을이었지만 크란(Krann) 산맥을 이루는 여러 봉우리의 정상에는 벌써부터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이처럼 거대한 크란 산맥의 상공에서 보라(Bora)호를 타고 황제 일행의 경호와 정찰을 담당하고 있는 샤키와 샤니의 눈에도 그 절경이 그대로 투영되었고, 남매는 허공에 머물며 그저 감탄만을 자아내고 있었다. 

 보라호의 뒤로는 그동안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동원하여 제작한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제각기 편대를 이루어 날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크란 산맥을 방석으로 삼아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는 광활한 창공에서 갈고 닦은 조종술을 한껏 뽐내기 시작했다. 거친 엔진음으로 크란 산맥 전체에 당장이라도 눈사태가 일어날 만큼 이들의 기개와 포부는 당당하고도 우렁찼다.


 크란산 '전몰장병의 묘지',

 충혼묘역 제일 앞에 세워진 충혼문을 지나 묘역 안으로 들어온 황제와 일행은, 드디어 충혼탑을 목전에 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이란은 이 숭고한 묘역에 온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 시작했다.

 실로 가슴이 뭉클했고 눈시울도 좀 젖어들었다.


 이젠 더 가까이 다가가서 헌화와 분향과 참배를 할 시간이었다. 

 황제가 발을 천천히 내딛자 모두가 그녀의 뒤를 따라서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걸었다. 그 다음엔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인 하이란과, 그녀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평생을 바쳐 헌신적으로 그녀를 키운 양어머니 완저(Wanzer) 총독, 그 완저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결코 에반의 무리에는 섞이지 않았던 해군 사령관 파르코(Parco) 장군, 그리고 지금은 황제의 근위대장을 맡고 있는 하멜까지... 모두가 충혼탑에 다가가는 이 계단 위로는 난생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웅장한 탑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자, 어떤 글자를 적어놓은 큰 돌판이 탑의 밑부분에 박혀 있어 가장 먼저 황제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그 글씨는 계속 확대되었다.


 드디어 큰 향로가 있는 곳까지 와서 하이란이 걸음을 멈추자, 이제는 그 글씨를 또렷이 다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의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단 세 줄의 헌시(獻詩)가 황제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하이란은 천천히 그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어떤 야릇한 느낌이 들었는지 같은 글을 그렇게 몇 번 반복하였다. 다들 바로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를 따라 그 문장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누가... 이 글을 쓴 것입니까?” 황제가 아주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여기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문구였기에...

 "그동안 읽었던 어떤 서적이나 고문에서도 이런 문구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글을 처음 짓고 또 여기에는 누구의 글씨로 쓴 것입니까? 혹시 아시는 분이 이 자리에 있습니까?" 다시 한 번 황제가 물었다. 하지만 모두는 고개만을 가볍게 저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늙고 왜소하지만, 늘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수석 내관인 로야리(loyari)였다.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전몰장병의 묘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모델로 하였으며, 실제로 현충원의 현충탑 앞에는 위와 같은 헌시(獻詩)가 씌여져 있음.



 잠시 후 그가 앞으로 살짝 나서더니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폐하, 그 헌시는... 브리젠 세자 저하께서 친히 쓰신 것이옵니다. 세자께서는 전몰장병의 묘역을 완공하시면서 동시에 이곳 충혼묘역도 조성하셨고, 그때 이 탑도 함께 세우셨사옵니다. 저 투명하고도 영롱한 수정을 탑에 박는 공사까지 모두 마치고 나자, 그 다음으로 이 헌시를 직접 지으시고는 친필로 돌에 쓰신 것을, 석공들이 정성스럽게 글을 파내어 검게 색을 입힌 것이옵니다.” 로야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옵서 친히 이 헌시를?" 하이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근처에 있던 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브리젠 세자이시다!’라고 인정을 하며 감탄하는 것이었다.

 

 ‘퓨그(Fuug)라는 제국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먼 미래를 준비하는 혜안을 가졌으면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은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부모님이, 소녀는 한없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사옵니다...’ 하이란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하이란이 여기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감상에만 계속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전면적인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시간이 아주 촉박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사라진 별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옵니까? 또한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에 더 그려 넣으신 붉은 소나무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옵니까? 제발 가르쳐주세요. 두 분의 진심을 소녀가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어서 도와주세요...' 하이란은 계속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고 또 말했다. 

 귀에 직접 들리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그런 애절한 마음을 대신들은 모두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멜조차 여기서 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다.

 병풍의 비밀은 아직 풀지 못한 채, 이처럼 커다랗게 우뚝 솟은 충혼탑 앞에 서있으니, 하이란과 하멜은 자신들이 그토록 초라한 존재밖에는 되지 않을까?라는 자괴감이 앞섰다.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이들은 그저 답답함만을 토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맑은 하이란의 얼굴에서 은은히 눈물꽃이 피어올랐다. 감동의 시간을 넘어서 안타까움과 초조함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눈물은 그렇게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            *            *

​​

 두크린(Duckreen)강 하구의 국경 수비대를 출발한 에반(Evan)과 대역죄인들은, 이들을 감시하고 안내하는 부대원들과 함께 북동쪽으로 걸어서 코르의 지붕이자 조상의 발원지인 화노블(Farnoble)산으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국경을 지키는 부대들을 계속 지나가며 강의 중류 쪽으로 들어서자, 지형은 갑자기 험준하게 바뀌어갔다.

 절벽은 갈수록 높아졌고, 계곡은 갈수록 깊어졌다. 맑고 푸른 강물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화살받이를 위해 가장 최전방으로 향하는 죄인들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일 수밖에 없었다.


 사흘을 걸어 강의 상류에 도착하니 사방이 눈 세상이고 저 멀리 화노블산을 위시한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죄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아주 청명한 가을이었지만, 땅에서의 기온은 이미 찬 겨울이었다.


 지친 죄인들과 부대원은 자리를 잡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오는 길에도 얀스(Jans)는 늘 주위의 지형을 자세히 살피며 군인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었다. 비록 양 손목은 오라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지만, 그의 예리한 눈매마저 부대원들에게 구속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에보크(Evoke)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유스토(Usto)항 기지에 잠시 머물면서 다시 팔팔한 혈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죽을 수는 없다는 발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심장에 깊이 박혀버렸다. 그래서 에보크도 늘 탈출의 기회만을 찾고 있었다.


 한편 죄인들의 수장인 에반은 끝까지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세상에서의 삶을 이미 초연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충복인 나리프(Nariff)나 토리크(Torik)조차 가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에반에게서는 어떤 표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매 빌로(Veelo)가,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추락한 주인을 버리고 멀리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에 분하고 괴로워할 만도 한데, 에반에게서는 그런 것에 대한 단 한 줌의 회한도 없는 모양이었다.


 *            *            *


 “오빠, 저기를 좀 봐봐!” 보라(Bora)호의 뒷자리에 앉아 사방을 내려다보며 정찰에 집중하던 샤니가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말했다.

 “어? 뭐를 보라는 거야?” 샤키는 고개를 잠시 돌리며 말했다.

 “저기 가장 높은 봉우리 말이야. 저기가 크란(Krann)산 정상이 맞겠지?”

 “어, 그래. 그렇겠지? 다른 봉우리들을 거느리며 가장 높게 솟았으니까. 크란산 깊은 곳에는 워낙 호랑이들이 많이 살고 민가에도 가끔씩 출몰하여, 아직 크란산 정상을 끝까지 올라갔다 살아서 내려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들었어. 다만 *아래에서 산을 올려다볼 때, 그 정상의 모습이 마치 왕관이나 갓처럼 생겼다고 하여 산의 이름이 크란(Krann)이 되었다고 해.“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왕관처럼 생겼네? 그런데 좀 이상하잖아?” 샤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뭐가 이상해?” 샤키가 대뜸 물었다.

 “크란산의 정상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어. 다른 봉우리들은 벌써 눈에 다 덮여있는데 말이야. 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 왜 저런 현상이 벌어진 거지?” 샤니가 예리하게 말했다.

 “어? 정말 그러네? 진짜 이상하다. 샤니야, 우리 고도를 좀 더 낮춰서 내려가볼까?” 샤키는 말을 마치며 보라호를 급격하게 하강시켰다. 그리고는 크란산의 정상 바로 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정상에는 눈이 없었다.

 누가 일부러 눈을 모두 치운 것처럼 울뚝불뚝 솟은 바위들은 아주 매끈했고, 왕관 모양을 하며 그저 따가운 햇빛에 강렬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크란 산맥에 눈이 내린 이후로 이 정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샤키와 샤니가 처음이었기에, 그동안 어느 누구도 크란산의 정상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 수가 없었을 터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직접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샤니야, 네가 이리 와서 조종간을 좀 잡아야겠다. 난 정상에 한 번 내려가볼게.” 샤키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 저 밑에를 직접 내려가겠다고? 뭐로? 낙하산으로? 그럼 다시 이 보라호로는 어떻게 오겠다는 얘기야?” 샤니는 오빠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만 절레 흔들었다.

 “너야 유격훈련 이후로 밧줄이 가장 무섭겠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거든?” 샤키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실제로 관악산(冠岳山)은 이런 이유로 이름이 그렇게 붙었음. 다만 본 소설에서는, 크란산을 단 하나의 산으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주위에 여러 산봉우리를 거느리는 거대하고 매우 높은 크란산맥의 우두머리 산으로 설정하였음.

​​


 샤키는 보라호의 밑으로 천천히 밧줄을 늘어뜨렸다. 그 길이가 샤키의 키보다 열 배쯤은 더 되어 보였다. 샤니는 오빠의 지시에 따라 보라호의 고도를 더욱 낮추고 속도를 줄여 크란산 정상을 중심으로 보다 작은 원을 그리며 선회를 하기 시작했다.

 샤키는 보라호가 계속 안정적으로 동일한 비행궤도를 유지하자, 드디어 밧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렇게 추락하고도 이게 겁나지도 않아, 오빠는? 하여간 저놈의 정의감은 누구도 못 말린다니까?' 샤니는 오빠가 다치거나 잘못해서 바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조종간을 그대로 꼭 잡고 있었다. 

 반면에 샤키는 세찬 바람을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내려진, 그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매달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샤키는 계속 내려가서 밧줄의 끝부분에 다다랐고, 여러 번 아래의 지형을 살피더니 드디어는 눈이 가장 수북이 쌓인 안전한 착지점을 마음에 정한 듯했다. 그러자 샤키는 팔과 손을 흔들어 샤니에게 보라호를 그리로 조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샤니는 그대로 따라했고, 그렇게 크란산 정상을 몇 번 더 선회하면서 고도를 더욱 낮추었다.


 이제는 결심의 순간만 남았다. 속으로 시간과 박자를 계속 계산하던 샤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드디어 밧줄에서 손을 놓았다. 보라호는 계속 창공으로 날았지만, 샤키는 휭~하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퍽! 퍼벅~ 퍽!

 몇 바퀴 굴러 눈 속으로 내팽개쳐진 샤키가 다시 눈을 떴다. 과연 샤키의 판단은 완벽하리만치 정확했다. 아주 푹신한 이불에 몸을 던진 것처럼 샤키는 어디 한 군데 다치지도 않고 안전하게 크란산의 정상 부근에 떨어졌다. 이제 몸을 잘 추슬러 눈이 하나도 없는 저 왕관 모양의 바위로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크란산의 최정상이었다.

 “오빠! 괜찮아?!” 저 높은 곳에서부터 샤니가 소리쳤다.

 “그래! 난 멀쩡해!” 그러자 샤키도 팔을 흔들며 신나게 외쳤다.


 샤키는 조금 더 걸어올라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말로 눈이 모두 녹아버려 바위들은 그 자체가 햇빛에 바싹 말라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바로 저 아래는 저토록 하얀 눈으로 덮힌 다른 세상이건만, 왜 이 꼭대기 부근에만 눈이 쌓이지 않은 것일까? 아니 눈이 왜 쌓이지 못한 것일까?

 샤키는 일단 바위들의 상태를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바위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샤키는 뜨거운 열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땅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이 정상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어 바위들을 만져보니 정말로 불에 달군 맥반석처럼 뜨끈뜨끈하였다.

 ‘혹시 크란산이 코지(Cozee)섬의 갤라(Gaela)산처럼 화산지대였나?’

 샤키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디서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샤키는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동안 혼란스러웠다.

 

 ‘아, 도저히 원인을 모르겠다. **이 열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기서 바위가 조금만 더 달아오른다면 산 정상이 다 타겠는 걸? 그렇다면 이 산 밑에는 엄청나게 큰 불기운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럼 나중에 그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면, 온 산이 다 시뻘겋게 탈 수도 있겠네?’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등성이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또 갈라지고 하는 게 정말 멋있다. 꼭 눈 내린 무슨 큰 나무에서 나뭇가지가 계속 뻗어나가는 것처럼 생겼어. 이렇게 쫙쫙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샤키는 열기에 대한 정답은 찾지 못한 채, 계속 사방을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앗? 그런데 이 지형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어디서였지? 저기서 저렇게 갈라지고, 또 저렇게 갈라지고, 또 그렇게... 저 지형... 내가 어디서 봤더라? 나뭇가지처럼... 저렇게... 맞아, 그래, 그거야! 바로 그거였어!! 잠깐 내가 그걸 어디다 두었지?’



 ** 예로부터 관악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강한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음. 그래서 정도전이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한양을 정하고 경복궁을 만들 때, 관악산의 불의 기운 때문에 궁궐에 화가 미치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 옆에 수성이 강한 물짐승인 '해태상'을 세웠고, 관악산의 화기를 화기로 제압한다는 뜻을 담아 한양 도성의 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였음. 즉, 숭례문(崇禮門)에서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냄. 결국 숭례(崇禮)는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가 되며,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써, 불은 불로 막는다는 의미를 가지게 하였음. 또한 숭례문 옆에는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만들어-지금은 사라졌지만-물로써 불기운을 방어하였음.

 한편, 2008년 2월 방화로 인해 숭례문이 전소되었을 때, 당시에는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 사업을 벌이던 중이었고, 이 때문에 광화문을 공사하며 옆에 있는 해태상을 잠시 치운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관악산의 불의 기운을 막지 못해 화재가 난 것이라는, 풍수지리 학자들의 주장도 제기된 적이 있었음.



 *            *            *


 하이란이 아무리 눈물로써 애원을 해보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충혼탑에 와서 부모님에게 참배를 드린 것 말고는 어떤 해답도 찾질 못했다. 이제는 서산에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그대로 비통한 표정만을 지으며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온몸의 힘이 다 빠진 하이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돌리고야 말았다.

 황제가 한즈(Hanz)로 다시 환궁을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대신들은 서둘러 그녀를 보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오늘 밤은 돌아가는 길에 천막을 치고 잠을 청해야 하겠지만, 그런 당연한 일도 근위대와 내관들에게는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되는 임무였다. 황제를 경호하고 보필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대역죄인이 된 에반과 그의 심복들을 황제가 최전방으로 쓸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육군의 곳곳에는 에반을 추종했던 세력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오른 하이란에게 적극적으로 동조를 하거나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는 것을, 하멜이나 파르코나 어쨌든 하이란을 황제로 옹립한 신하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모를 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은, 에반을 따랐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어떤 벌을 내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황제의 안녕에 더욱더 완벽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부산스러운 근위대 병사나 내관들과는 달리, 정작 근위대장인 하멜은 끝까지 담담한 표정만을 지었다. 황제이자 자신의 연인인 하이란을 위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초라해진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것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            *

​​

 “샤니야~~~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어~~~!”

 감격에 찬 샤키의 외침이 크란산 정상에서 길게 뿜어져나갔다. 환호하며 팔을 휘두르는 샤키의 움직임은 샤니의 눈에도 그대로 들어왔다. 이젠 다시 오빠를 불러들일 시간이었다.


 샤니는 기체의 속도와 고도를 낮추어 샤키 쪽으로 보라(Bora)호를 몰았다. 바람에 휘둘리는 밧줄은 여러 번의 시도를 해서야 샤키의 손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찬 탓인지 샤키는 근처로 다가온 밧줄을 단번에 움켜잡고는, 순식간에 보라호로 올라와버렸다.


 "오빠, 뭘 알아냈어?“ 샤키가 안전하게 자리잡은 걸 확인한 샤니는 조급하게 물었다.

 “어, 내가 드디어 탁본의 비밀을 풀었어, 하하하!” 샤키는 신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 붉은 소나무의 정체가 뭔지를 알아냈다는 말이야? 내가 아무리 위에서 정찰을 해봐도 여긴 전부 하얀 눈 세상이라, 붉은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도대체 그 비밀이 무엇이야? 빨리 말을 해봐~” 샤니도 웃으면서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하하하, 일단 '전몰장병의 묘지'로 빨리 내려가자. 지금 당장 폐하를 만나야겠어!”

 모든 비밀을 이제 다 풀었다는 통쾌한 웃음을 동생에게 발산하느라, 샤키에겐 어떤 피곤함도 드러나지 않았다.


 *            *            *


 휘이이이잉~~~~ 쌔앵~~ 쌩~~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어느새 뿌연 눈구름이 다가와버렸다. 이내 바람도 거칠어졌고 세찬 눈보라까지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죄인들이 더욱더 고지대로 올라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 드디어 화노블(Farnoble)산의 매서운 날씨를 본격적으로 체험하게 되는구먼... 결국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는가 봅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얀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막다른 골목이라... 여기서부터는 아마도 그런 듯하오...” 지금까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에반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이젠 정말... 이승에서의 인연도 이것으로 마지막이 되겠지요...”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얀스의 말이었다. 그동안 계속 예리하게 부대원들의 동향을 파악하며 탈출의 기회를 속으로 계산하던 그였지만, 더는 그런 순간이 다가오지 않자 이젠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이라... 뭐, 그런 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냥 그걸 편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게 아니겠소...” 끝까지 에반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흑흑흑~~~” 그런 아버지의 말에 설움이 북받쳤는지, 옆에서 걷고 있던 에보크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요 며칠 간은 절대로 생명을 쉽게 포기하거나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쌩쌩하던 젊은 혈기였는데, 갈수록 뭇 인간의 세상과는 멀어지며 최종 목적지인 화노블산에 가까워지자, 그도 역시 인내와 결심에 한계를 느낀 듯했다.

 아들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이런 처절한 울부짖음을 에반도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아무런 내색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피를 보며 자랐고, 지난 ‘7일 전쟁’에서 가장 많은 적군의 피를 손에 묻힌 그였다. 그 때문에 제일 빨리 장군과 대장군에 오르는 동안에도 에반은, 자신을 반대하거나 자신과 경쟁을 하려는 상대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그들의 피도 보고야 말았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제1순위의 왕위 계승자인 브리젠(Brizenn) 왕세자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에반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역시 그의 본능은 남의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들의 피눈물을 보는 동안에도 에반의 감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얀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감시하는 부대원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차피 목숨을 내놓은 대역죄인의 신분이니, 더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게 어떠하겠냐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했다.

 이런 날씨와 지형을 뚫고 화노블산의 최전방 부대로 죄인을 압송하는 부대원들도 몸과 마음이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동안 어떤 탈출의 시도도 하지 않았고, 아니 따지고 보면 부대원의 경계가 워낙 철통같았으니 그런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동하는 것에 그저 협조를 잘 해준 죄인들이었기에, 스푸든 대장의 명령을 받아 출발했던 부대원이 이 죄인들에게 어떤 특별한 악한 심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아니었다.

 에반의 음모로 국경 수비대 대원들이 몰살을 당한 이후 새로 구성된 수비대였으므로, 지금의 부대원은 이미 죽은 이전의 그들과 어떤 가족이나 친척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에반에게만 영원히 충성을 바칠 것 같던 그 당찬 모습은 다 어디로 흩어져버렸는지, 장군 나리프와 토리크는 이미 모든 생을 단념하고는 폐인에 가까운 몰골과 행동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저런 인간들이 스스로 최고의 사관학교라고 자부하는 이스트 포인트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추접함은 도를 넘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지, 무슨 수치를 뒤집어쓴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목숨만은 부지하고 싶다는 말을 군인들에게 하며, 계속 그들에게 애걸복걸 사정을 하고 또 하였다. 

 가진 금은보화는 다 줄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애원이 끊이지 않았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역겨운 흥정이었지만, 부대원들의 감시와 경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휘이이이이이이잉~~~~~ 쉬이이이이이~~~~~ 쌔애애애애애애~~~~~~

 그 사이에 눈보라는 더욱더 심해져만 갔다. 이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세상이 온통 하얗게 꽁꽁 얼어가기 시작했다. 더는 앞으로 전진하기가 힘든 시간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모두 중지!”

 부대원 중 가장 선임인 군인이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더는 움직일 수 없다. 죄인들은 지금 당장 행군을 중지하고 저쪽 바위 밑으로 몸을 피하라! 일단은 이곳에서 눈과 추위를 피해 야영지를 구축하고 휴식에 들어간다!” 선임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른 부대원은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능선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큰 바위들이 절벽 쪽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폭설을 피할 공간이 조금씩 남아있었다. 대원들은 죄인들을 나누어 그 공간에 머물도록 지시를 내렸다.

 죄인들은 그저 웅크리며 추위에 떨고 있었고, 대원들은 작은 천막을 여러 개 펼쳐 일단 이곳에서 며칠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            *            *


 쓔우우우우~~~ 고오오오오~~~~ 툴툴툴~~~

 갑자기 급강하를 한 보라호는 번듯한 활주로가 아닌 파란 잔디밭에 냉큼 착륙을 해버렸다. 평범하게 보기에는 그냥 넓은 잔디광장이겠지만 하늘을 쌩쌩 날아다니는 보라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샤키의 뛰어난 조종술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런 극적인 시도였고, 역시 샤키는 이스트 포인트 최고의 생도였기에 이런 어려운 착륙도 가능한 것이었다.


 “폐하~ 폐하~”

 샤키는 보라호 엔진의 회전날개가 정지하기도 전에 조종석에서 펄떡 튕겨져 나와, 충혼묘역을 향해 달려오며 이렇게 소리쳤다.

 충혼탑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황제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보라호와 샤키에게 적잖이 놀랐다. 근위대 병사들은 무슨 역모가 벌어진 건 아닌지 혼비백산하며 활시위부터 겨누고 칼과 창을 들어 달려오는 샤키를 조준했다.

 “멈추어라!”

 하멜이 짧게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근위대원들은 대장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공격의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가까인 다가온 샤키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잠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저만치에서는 뒤늦게 출발한 샤니도 서둘러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선배?” 하멜은 샤키에게로 몇 걸음 다가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게 있잖아... 아 참, 근위대장님, 그게 있잖아요, 제가 드디어 비밀을 풀었습니다, 헉헉헉~” 샤키는 힘겹게 말을 꺼냈지만, 이미 그 표정은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밀이요? 무슨 비밀 말이에요, 선배? 설마...” 하멜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 탁본의 비밀이오. 솔루노픽스 병풍의 비밀 말입니다, 근위대장님!”

 “네? 그게 정말이에요? 선배가 드디어 탁본의 비밀을 풀었다고요?” 하멜은 놀라서 샤키의 양 팔을 움켜쥐며 물었다. 이 소리는 황제와 대신들에게도 그대로 다 전해졌다.

 “그래요, 근위대장님. 제가 방금 진주(Jinju) 세자빈께서 병풍에 추가로 새기신 그 붉은 소나무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습니다, 후후~” 샤키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이 얘기를 들은 황제도 한걸음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 이때 샤니도 거친 숨을 추스르며 뒤늦게 달려왔다.


 “그게 사실입니까, 샤키 생도? 그럼 어마마마께서 남기신 그 붉은 소나무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있었습니까?” 전혀 황제답지 않게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하이란이 재촉하듯 물었다.

 “네, 폐하. 붕어하신 휘레스 폐하께서 전에 저희에게 말씀하셨듯이, 아마도 진주 세자빈께서 병풍의 붉은 소나무에 어떤 비밀을 남겨놓으셨을 것이라던 그 추측은...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샤니가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오, 이런 세상에나! 샤키 생도와 샤니 생도가 실로 대단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자리에서 말하기가 곤란하면 짐이 대신들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흥분하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여기 계신 분들은 오직 폐하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폐하만을 보필하는 훌륭한 분이 아니옵니까? 저 간악한 에반의 무리는 이미 다 사라졌으니, 소인이 여기서 병풍의 비밀을 그대로 말씀드리온들, 그게 폐하께 무슨 걱정이 되겠사옵니까?” 샤키가 논리정연하게 말을 했다.

 “좋습니다. 여러 대신도 모두 가까이 와서 샤키 생도의 얘기를 들으시지요. 그래 도대체 붉은 소나무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있었다는 말입니까?” 황제가 재차 말했다.


 “네, 폐하, 솔루노픽스 병풍에 추가로 그려진 붉은 소나무는 바로...”

 “바로...?”

 “바로... 여기 폐하와 저희가 서 있는 크란(Krann)산의 지형이었습니다, 폐하. 그러니까... 병풍에 새긴 그 붉은 소나무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양상은, 크란산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아 이 산과 저 산들이 연결된 그 능선과 계곡의 지형과 완벽하게 일치했사옵니다!” 샤키는 이제 좀 진정이 된 숨결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정말이에요, 선배?” 하멜이 대뜸 말을 꺼내며 샤키가 내민 탁본을 쫘악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붉은 소나무의 꼭대기부터 아래의 나무기둥에 다다르는 그 모든 가지의 생김새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황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함께 보았다.

 “누가 지금 혹시 크란산의 지형을 그린 지도를 갖고 있나? 있으면 빨리 가져와보게.” 장군 파르코가 좀 서두르며 말했다. 그러자 근위대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황급하게 뒤지기 시작했다.

“있으면 좋겠는데. 잘 좀 찾아보도록.” 하멜도 초조함을 비치며 거들었다.


 “대장. 제가 여기 크란산의 지도를 찾았습니다.” 한 참모가 손을 번쩍 들어 종이 뭉치를 보이더니 냉큼 달려왔다.

 황제와 대신들은 지도와 탁본을 모두 펼쳐서 둘을 자세하게 비교하기 시작했다.


 “폐하, 샤키 생도의 주장은 과연 사실인 것 같사옵니다. 세자빈께서 추가로 그리신 탁본의 소나무 줄기는 크란산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것이 맞사옵니다.” 파르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장군님?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지요?” 샤키가 잔뜩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샤키 생도와 저는 보라호로 크란산의 정상을 여러 번 선회하며 그 지형과 소나무 그림을 꼼꼼하게 비교해봤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틀린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샤니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대단합니다, 샤니 생도. 생도와 샤키 선배는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해주었습니다, 하하하.” 하멜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황제는 방금 전까지 보이던 그 흥분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다시금 미간을 찌그러뜨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들 영문은 모른 채, 황제의 눈치만을 살피며 은근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나무 그림이 크란산을 나타낸다는 것에는 짐도 완전하게 동의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게 다입니까?” 하이란은 사뭇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네, 폐하? 그게 다냐고 물으시면...” 샤키 또한 황제의 낯빛을 눈치채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껏 휘레스 폐하께서 언급하셨던 사라진 유성을 찾아 헤맸습니다. 분명 그 유성을 찾으면 퓨그 제국과 호크런을 이길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태껏 붉은 소나무에는 그 유성에 관한 어떤 비밀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전에 샤니 생도가 에보크에게 바람을 집어넣어 이미 알아낸 비밀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하이란이 냉정하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소인이 그놈을 잔뜩 꼬드겨 얻어낸 사실이 있긴 하였습니다만...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시온지요?” 샤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크란 산맥 어딘가에 유성이 떨어진 것은 이미 반딧불이의 영상을 보고 샤니 생도가 직접 확인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황제의 말은 꽤나 차가웠다.

 “아, 네 폐하. 그건 그렇사옵니다...” 놀란 샤키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럼 결국 더 밝혀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유성이 대충 어딘가에 떨어진 것도 이미 알고 있고, 그 어딘가를 나타낸 것이 붉은 소나무 그림이었다는 것은 지금 알아냈고...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 정보는 전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황제는 조금도 칭찬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비밀은 하나도 풀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그만큼 하이란의 말은 초초함을 그대로 방출하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폐하의 판단이 맞사옵니다. 소나무의 그림이 크란산의 지형을 나타낸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그 이상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사옵니다.” 하멜도 진지하게 말했다.

 “아, 네, 폐하... 그렇게 생각하니 폐하의 말씀이...” 샤키와 샤니는 갑자기 죄인처럼 고개만을 떨구었다.

 “선배와 샤니의 잘못은 전혀 아니에요. 다만 우리에게는 아직 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있다는 사실 뿐...” 하멜은 그들을 위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의 침묵만이 흘렀다.


 여기서 아무도 어떤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고민이 깊어졌다.

 “저리로 한 번 다시 가보십시다.” 하이란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충혼탑이 있는 곳으로 냉큼 걸어갔다. 그러자 대신들과 내관들도 황급히 황제를 따라나섰다.


 충혼탑에 다다른 황제는 헌시(獻詩)가 새겨진 그 앞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돌판의 글씨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소리를 내어 헌시를 읽어내려갔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하이란이 소리를 내는 동안은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황제의 다음 말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울 따름이었다.


 “민족의 얼... 얼이 서린 곳... 해와 달...” 하이란은 계속해서 겉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이 헌시의 내용에서 뭔가 집히는 게 있으신 것이옵니까?” 한 발짝 뒤에 서있던 코지(Cozee)섬의 총독 완저(Wanzer)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민족의 얼... 얼이 서린 곳... 해와 달...” 하이란에게는 그 문구가 주는 어떤 미묘한 느낌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그저 브리젠 세자가 지은,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가장 정성스런 헌시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 헌시를 지은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척 감격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저 그 시를 되뇌고 또 되뇌며 그 안에 새겨있는 깊은 의미를 만끽하고 싶은 것만 같았다.


 “폐하, 이젠 그만...” 하멜이 민망한 표정으로 살짝 귀트임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하이란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병풍에 그린 소나무는 크란산의 지형과 꼭 들어맞는다... 그것도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바로 아래에 새긴 그 소나무가... 크란산과는 완전히 똑같다...” 황제는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이렇게도 해석해보고 저렇게도 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는 대신들도 황제처럼 수수께끼에 대한 고민을 그저 막무가내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순간에는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문제는 멀쩡한 소나무의 솔잎마저 왜 모두 붉게 표시를 했냐는 것이겠군요, 폐하. 소나무 중에서도 줄기가 붉은 **금강송(金剛松)이야 말로 그 자태나 강직함에 있어서 천하의 제일로 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궁궐을 지을 때에도 항상 금강송만을 사용하는 것이며, 사시사철 늘 푸른 솔잎의 소나무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푸르고 강인한 것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런 소나무를 무슨 이유로 모두 붉게 그렸냐를 이제부터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겠습니다.” 파르코(Parco) 장군이 천천히 말을 꺼내가며,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동참했다.

 “붉은 소나무라... 붉은 소나무...” 그러자 하멜의 입안에서도 이 단어는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소나무의 줄기나 잎이 크란산의 지형과 꼭 같지만, 크란산만을 나타내려 했으면 붉은색과 초록색을 섞어서 그렸어야 했는데, 왜 모두 붉은색만을 사용했냐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크란산은 산이 너무 높고 험해 초가을부터 늦봄까지 산의 중턱 위로는 대부분 눈에 덮혀있는데 말입니다...” 황제는 계속해서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앗? 잠시요 , 폐하!” 갑자기 샤키가 말을 끊었다.

 “어? 왜 그래요, 선배?” 하멜도 대뜸 물었다.

 “그러니까, 폐하... 저희가 늘 알고 있었듯이... 동절기에 크란산에는 늘 눈이 가득하지만,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샤키 생도?” 파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아 네, 장군님. 그러니까... 크란산의 가장 정상에는... 눈이 없었습니다."

 "눈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샤키 생도?" 파르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눈이 진짜 없었습니다, 장군님. 그러니까... 맑은 날 여기서 크란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면 눈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실제로 보라호를 타고 하늘에서 그 전경을 내려다보니 왕관처럼 바위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최정상 부근에는 모든 눈이 다 녹아서 바위가 바짝 말라있었습니다. 마치 정수리만 대머리인 백발노인의 머리를 보는 듯했다는 말씀입니다.” 샤니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최정상에만 눈이 전혀 없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그럴 수가 있나?” 완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습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총독님. 하도 이상해서 저는 직접 밧줄을 타고 내려가 크란산의 정상에 발을 디뎌봤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모두 말라있는 곳의 바위들은 마치 불에 달군 맥반석처럼 뜨끈뜨끈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눈이 쌓일 수 없었겠고요.” 샤키는 모두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손짓을 사용해, 어떻게 내려갔고 또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래? 샤키 생도가 직접 다녀왔다니 그 말이야 모두 사실일 테지만, 크란산이 화산지대도 아닌데 어떻게 지표면이 뜨거웠다는 건지... 소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사옵니다, 폐하” 파르코가 고개를 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이런 여러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하이란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깊은 생각에만 잠기어 있었다. 

 잠시 또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 실제 조선시대에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보면, 줄기는 붉고 잎은 푸른 금강송(金剛松)을 해와 달의 밑에 그려넣었지만, 필자는 이 소설에서 판타지적인 묘미를 더하기 위해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의 소나무는 전체가 다 붉은 것으로 설정을 하였음.

 금강송은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함. 그렇지만 적송은 소나무의 일본 이름이고, 한국의 옛 문헌에서 소나무를 적송이라 부른 예는 없음.

 소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벌레가 쉽게 생기거나, 휘거나 갈라지지도 않음. 그래서 궁궐이나 사찰을 만드는데 많이 쓰였음. 특히 궁궐을 짓는 목재는 소나무 외에는 쓰지를 않았음. 그중에서도 강원도와 경북 울진, 봉화에서 나는 소나무는 ‘춘양목’이라 불렀으며, 나무의 결이 균질하고 고와 최고급 목재로 이용되었음.




 “로야리(Loyari) 내관?”

 심각한 표정으로 대신들과 논의를 하던 하이란이, 갑자기 내관을 불렀다. 그러자 약간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야리는 서둘러 황제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로야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관은 이중에 가장 연장자인데, 지금까지 짐과 대신들이 고민하고 있는 이 문제에서, 혹시 추가로 더 보탤 얘기는 전혀 없는 것입니까?”

 “네, 폐하? 보태라고 하시면 무엇을 어떻게...” 로야리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한 번 슬쩍 들며 물었다.

 “크란산에 대해서 말입니다. 크란산이 화산지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정상의 바위들이 뜨끈뜨끈할 수가 있냐 이 말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짐 또한 전혀 집히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에요.” 하이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네, 크란산 말이옵니까, 폐하. 크란산이라... 크란산...” 로야리는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크란산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역사적이나 풍수지리적인 의미가 더 있습니까, 내관?” 완저도 자신보다 한참 더 늙은 로야리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비록 내관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몇 대 걸쳐 오직 국왕만을 섬기고 있는, 그야말로 진한 연륜과 올곧은 성실함을 겸비한 코르의 충직한 신하였기에, 어느 누구도 로야리에게는 함부도 대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질 못했다.

 가장 겸손한 그의 표정을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세상에서 제일 거만한 나부랭이라 하더라도 감히 속된 말이나 행동이 먼저 나오지는 못할 입장이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의 많은 역사를 스스로 모두 기억하고 있을 내관 로야리의 존재가, 모두에게는 매우 인상적이고 조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저 간악한 에반의 무리가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코르 안에서 권력을 독차지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때에는, 단지 내관의 신분인 로야리라는 이름은 결코 드러나지 못했었다. 에반과 측근에게 로야리는, 인간이 아닌 쓸모없는 곤충 정도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고, 또 그 세상을 다스리는 주요 인물들의 성품 또한 바르게 자리 잡았음을 많은 백성이 인정하는 중이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물음을 주시니, 소신에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긴 있사옵니다.” 로야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파르코가 점잖게 물었다. 그러자 로야리는 목젖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침으로 입술을 몇 번 바르더니, 옛날을 회상하며 말을 시작했다.


 “크란산은... 예로부터 크란산과 그 주위를 둘러싼 이 거대한 산맥은... 한즈(Hanz)시와 브로(Bro)강을 남쪽에서 지켜주는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태고로부터 우리 코르 왕국에게는 가장 신비롭고 보물과도 같은 다섯 개의 산, 그러니까 *오악(五岳) 중 하나였지요.”

 “그건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코지섬의 갤라(Gaela)산이나 북쪽의 화노블(Farnoble)산과 함께, 크란산도 매우 중요한 산인 것을요.” 파르코가 또박또박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장군.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그러니까 ‘7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 산에 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반면 로야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19년 전이오? 그리고 또 이상한 일이라뇨? 그게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놀란 하멜이 대뜸 나서며 물었다.


 19년 전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하멜이었다.

 그 해는 자신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지만, 예언에 나오는 밝은 유성이 유주의 하늘을 날아 멀리 동쪽으로 사라진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자의 심장’을 찾아 아버지인 요한슨 왕자가 네론을 출발해 동쪽으로 원정을 떠난 해이기도 했고, 하지만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나중에 이를 비관한 어머니 마리앙(Mariann)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그러니까 하멜의 가족에게는 비극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또한 그 비극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도 그 별을 찾아 이곳 호렌(Horen)까지 들어왔고, 지금은 코르(Corr)라는 나라에 갇혀 별은 찾지도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 한국의 오악은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5개의 산으로,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서울에 있는 북한산)을 말하며, 산악에 대한 신앙으로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하여 오악의 개념이 생겼음에 기인함. 한편, 송도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 그리고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은 ‘경기 5악’에 해당됨.




 “19년 전, ‘7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짐이나 여기의 근위대장 또 샤니 생도가 태어났던 해가 아닙니까?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리 코르는 매우 평화로웠다고 들었는데, 그때 크란산에 어떤 일이 생겼다는 말이오, 내관?” 황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네, 폐하. 그게 그러니까... 아마도 시기적으로는 여름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깊은 밤에 밝은 유성이 한즈의 하늘을 낮게 날아갔다는 점성술사들의 보고가 있었는데, 마침 그날따라 날이 많이 흐렸고 비도 제법 내려서 정확히 어디쯤에 그 유성이 떨어진 것이지는 확인이 되질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왕궁의 주술사들이 말하기를, 크란산의 기운이 많이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이 산이 매우 안정적인 상태로 한즈와 브로강의 남쪽을 지키는 형세였는데, 그 유성의 일이 있은 후로는 갑자기 크란산 안에서 어떤 불과 같이 뜨거운 기운이 계속 솟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야리가 차분하게 말을 했다.

 “불의 기운이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로야리 내관? 세상에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인데요? 폐하, 소장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사옵니다.” 파르코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셨겠지요, 장군. 이 일은 당시 슈젠타(Pseuzenta) 폐하께만 보고가 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외형적으로 크란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폐하께서는 주술사들의 보고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모두에게 다 잊혀진 일이 될 수밖에요. 물론 저도 그렇게 잊고 있었고요. 그런데 폐하께서 오늘 갑자기 이런 물음을 주시니, 소신도 정말 오랜만에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사옵니다.” 로야리가 공손하게 말했다.


 “불과 같이 뜨거운 기운이라... 불과 같은 기운... 불의 기운... 크란산 안에 불의 기운이 가득 찼다...” 황제는 계속해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하멜은 곁에서 이런 황제의 고민을 함께 하며, 탁본에 새겨진 소나무 그림을 여러 번 쓰다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그림 안에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다른 해답이 나올 것만도 같았지만, 여전히 그런 게 나오질 않으니 무척 답답한 모양이었다.

 황제가 슬쩍 눈치를 주자 하멜이 이번에는 그 탁본을 하이란의 앞에 펼쳐놓았다. 이제는 하이란이 그 그림을 어루만지며 수수께끼에 대한 실낱같은 단서라도 찾으려고 하였다.


 틱~

 하이란의 손끝에 아주 미세한 무엇인가가 스쳤다.

 “어?” 하이란이 고개를 숙여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하멜이 대뜸 물었다.

 “여기, 탁본에 여기가 좀 찢어졌군요.” 황제가 침착하게 말했다.

 “네? 아, 네... 그렇군요. 종이니까 뭐 이리저리 가지고 다니다보면, 찢어질 수도 있고 뭐 그런 거겠죠, 폐하.” 하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요? 뭔가 툭 튀어나온 부분에 종이가 긁혀서 살짝 찢어진 것 같은데요?” 하이란은 생각이 달랐다. 그러자 하멜도 좀 더 자세하게 종이의 면을 긁어보며 확인에 나섰다.

 “아, 네... 폐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사옵니다만... 여기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특별히 탁본의 관리를 잘못한 적은 없을 텐데 말이죠.” 하멜은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


 “아, 폐하! 혹시 그 부분이... 붉은 태양과 아주 가깝게 있는 소나무 줄기의 끝부분인가요?” 갑자기 샤니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툭 말을 던졌다.

 “끝부분? 글쎄요? 그게 그러니까... 음, 맞군요. 태양과 아주 가깝게 있는 줄기의 끝부분이 맞는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샤니 생도?” 황제가 고개를 돌려 샤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저희가 프로스(Pross)궁으로 들어가 휘레스 폐하와 베니안 왕세자를 뵈오며 처음으로 그 병풍을 보았을 때 말입니다, 폐하.” 샤니가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 그때 처음으로 병풍을 보며 이 탁본을 뜨게 되었지.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샤니 생도?” 장군 파르코도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뗐다.

 “그때 병풍에서 실오라기가 뜯어진 부분이 한 군데 있었사옵니다. 모두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당시에 베니안 왕세자께서는 ‘태양과 가장 가깝게 있는 부분이라 실도 좀 타버린 건 아닌가요?’라고 지나가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씀이 떠올라서 제가 그냥 드린 얘기입니다, 폐하.” 샤니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오라기가 태양과 가장 가까워서 타버렸다... 그런 말이 있었던가요, 폐하? 하여간 샤니 생도는 어떻게 그렇게 그냥 스쳐갔던 얘기까지 다 기억을 하는 것입니까? 이제 보니 정말 생각보다 무척 예리하군요.” 하멜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네. 원래 저에 대한 생각은 그게 아니셨습니까, 근위대장님?” 하지만 샤니는 정색을 하며 따지듯 물었다.

 “네?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깜짝 놀란 하멜은 적당히 손사래를 치며 대충 얼버무렸다.


 “근위대장, 탁본에서 찢어진 부분이 크란산에서는 어디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까?” 황제는 둘의 대화를 중간에 자르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움찔한 샤니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한 발 물러섰고, 하멜은 구원군을 만난 병사처럼 반갑게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찢어진 부분은 정말 소나무의 줄기 끝으로 붉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곳인데... 크란산의 지도와 비교를 해서 그곳이 이 지점이라면... 음... 여기서 이렇게 산등성이가 연결이 되고... 여기서는 계곡이 이렇게 있으니... 그러니까 폐하... 탁본에서 실오라기가 터졌던 곳은... 음... 바로 이 묘지입니다, 폐하. '전몰장병의 묘지'가 있는 이 산기슭이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의 태양에 제일 가깝사옵니다.” 하멜이 놀라며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이란도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탁본을 확인하며 말했다.

 “네, 확실하옵니다, 폐하. 이 ‘전몰장병의 묘지’ 중에서도... 음... 바로 여기 이 충혼탑이 있는 곳이 실오라기가 탄 곳과는 정확히 일치하옵니다.” 하멜은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그러자 황제도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무엇인가 단서를 찾아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보였다.


 황제는 다시금 충혼탑 앞에 새겨진 헌시를 바라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그 시문을 읽고 또 읽으며, 눈을 감고 수만 가지의 추측을 떠올리고 있었다.

 “민족의 얼... 얼이 서린 곳... 해와 달... 민족의 얼... 얼...” 황제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되뇌었다.

 “민족의 얼...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하시는데... 무슨 깊은 의미라도 느끼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가장 가까이 옆에 있던 하멜이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황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다른 대신들도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시간만 잠시 흘리고 있었다.


 “민족의 얼... 얼... 근위대장?” 황제가 살짝 물었다.

 “네, 폐하?” 기다렸다는 듯 하멜이 즉시 대답했다.

 “대장은 전에 짐과 함께 황실의 사고(史庫)에 들어가 아바마마의 행적을 적은 **디퍼슨(Deeperson) 일기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네,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옵니까, 폐하?“

 “그때 아바마마께서... 고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시기 전에, 휘레스 숙부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기록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차분해진 황제가 천천히 물었다.



 ** 소현세자 심양일기


 *            *            *


 눈은 하염없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뿌연 눈보라 속에 갇혀버린 화노블산의 중턱에서는, 사방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최전방의 국경 수비대 기지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지만, 이런 날씨에서 더 이상 전진을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물론 이미 목숨에 대한 미련을 거의 버린 에반을 비롯한 대역죄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들을 호송하는 부대원들의 안전도 매우 중요하였기에, 선임 장교의 명령에 따라 임시로 구축한 천막과 잠자리도 이제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며칠을 더 보내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원들은, 쌓인 눈이 혹시나 눈사태가 되어 쏟아 내릴 수 있는 곳을 예측했고, 만약에 필요할 일행의 동선에서 그곳은 반드시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죄인들은 여전히 두 손목이 오라에 묶인 채, 내리는 눈을 피해 한곳에 모여 고개를 바르르 떨며 추위에 몸을 웅크렸다. 거지 중에서도 이런 상거지가 없을 만큼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부대원들 중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동정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퍼드드득~ 퍼득~ 퍼득~ 척~

 큼지막한 새 하나가 날개를 천천히 접고 근처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파묻고 있던 얀스는 가장 먼저 무슨 소리를 느끼자 머리를 휙~ 들었다. 짙은 색의 깃털을 가진 송골매 한 마리가 근처에 머물며 주위를 살피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보라에 가려 그 실체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얀스는 그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앗? 저건?” 얀스가 말을 꺼내자 바로 옆에 있던 에반이 “쉿!”하고 나지막이 소리를 내며 얀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놀란 얀스는 저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부대원들부터 바라보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녀석이 드디어 나에게로 잘 찾아왔군, 후후” 에반은 갑자기 음흉한 표정으로 얀스를 보며 슬쩍 말했다.

 “저놈은 바로 대장군이 아끼던 매 빌로(Veelo)가 아니오? 아니, 저놈은 이미 대장군의 곁을 떠났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소?” 얀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떠났다고만 했지, 돌아오지 않을 거란 말은 한 적이 없지 않소이까? 저 녀석은 절대 주인을 버리지 않을 세상에서 가장 충직한 놈이라오, 후후.” 에반은 더없이 빌로가 기특한 모양이었다.

 "앗? 아버지!“ 에보크도 깜짝 놀랐고, 이는 나리프와 토리크도 마찬가지였다.

 “어허~ 다들 조용!” 에반은 그들에게 입단속부터 시켰다.

 빌로는 다른 부대원들에게 들키지 않게 신속한 걸음짓으로 에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에반은 두 손목을 묶은 오라를 앞으로 내밀었고, 빌로는 대가리를 낮추어 부리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그놈의 다리에는 뭔가 딱딱하고 길쭉한 것이 담겨있는 주머니가 묶여있었다. 에반이 줄을 풀어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조그만 크기로 접은 서찰 한 장과, 작은 칼이 하나 담겨있었다.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은장도였다. 칼집에서 나온 칼날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역시 빌로,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에반은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 대장군. 빌로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 큰 일을 해주는구려.” 얀스가 감탄을 자아내며 기쁘게 말했다. 에반은 그저 자랑스럽다는 웃음만을 지었다.

얀스가 먼저 은장도를 잡아 에반의 손목을 감은 오라를 세게 긁어댔다. 추위에 이미 밧줄이 딱딱해져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얀스는 격렬한 손놀림으로 조금씩 계속 끊어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에반의 표정은 더욱더 밝아졌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다.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국경 수비대의 부대원들이 아닌... 오직 대역죄인들뿐이었다. 아, 물론 행복하게 이를 지켜보고 있는 빌로를 포함해서...


*            *            *


 “네, 폐하. 소신이 희미하게 기억하건대, 퓨그로부터 독립을 하는 길만이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지금은 억울하더라도 참고 퓨그의 앞선 문물을 배워야할 시기라고... 뭐 그런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멜이 옛 순간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맞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구절이 없습니까, 근위대장?” 하이란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브리젠 세자께서 동생이셨던 휘레스 왕자와 함께 계셨을 때 했던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만약 자신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다 하여도... 사사롭게 생각하지 말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말고 자신을 밟고 가야한다고... 자신이 먼저 부서져야만 하신다고... 아마 그런 말씀도 하셨던 걸로 기억이 나긴 합니다만... 소신도 그 이상은 정확하게...” 하멜은 확실하지가 않았는지, 아니면 대답해야 하는 단어가 황제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저 적당히 말을 둘러댔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는, 잠시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로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눈알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니 어떤 기억을 억지로 꺼내보려는 듯했다. 대신들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황제의 다음 행동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황제가, 드디어 눈을 번쩍 뜨며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짐은 아바마마의 모든 것을 기록한 ‘디퍼슨 일기’를 보고 나서, 거기에 적혔던 내용을 되뇌기를 수십 번도 더 하였습니다. 일기에서 아바마마는 당신의 아우이신 휘레스 왕자나 당신을 따르던 신하와 백성에게 한결같이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국방력으로 퓨그와 맞선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훨씬 더 강화해 궁극적으로는 퓨그로부터 독립을 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상하더라도 지금은 퓨그의 앞선 문물을 배워야 할 시기다. 나는 민족이 부활할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 할 것이며, 결국에는 민족의 혼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 아바마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 부분을 짐은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또렷이 기억을 할 수가 있습니다.” 황제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소신도 제대로 기억이 나옵니다, 폐하. 분명 브리젠 세자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디퍼슨 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이옵니까, 폐하? 브리젠 세자께서 누구보다도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셨던지라, 당연히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것 아니옵니까?” 하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말에 동조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음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아바마마는 분명 그렇게 민족의 혼, 민족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셨고, 또 그런 말씀은 일기의 여러 군데에서도 자주 나타나 있었습니다.”

 “맞사옵니다. 민족의 혼에 대한 강조를 아주 여러 번 하신 것이 분명하였사옵니다, 폐하.” 하멜도 일단은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단 한 번도 ‘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디퍼슨 일기 어디에도 ‘얼’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짐은 분명 똑똑하게 기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근위대장도 얼이라는 단어를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까?”

 “네? 아... 음... 아니옵니다, 폐하. 소신도 얼이라는 단어는 오늘 여기서 처음 듣사옵니다.” 하멜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 직접 지으셨다는 이 헌시에는, 그토록 평소에 자주 사용하시던 ‘민족의 혼’이라는 문구는 전혀 들어있지가 않고 오히려 ‘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이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당장은 아무런 대답도 나오질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황제가 궁금해하는 부분이 아직은 가슴에 크게 와닿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민족의 혼... 민족의 얼... 혼... 얼... 혼과 얼... 무슨 차이가 있사옵니까, 폐하? 아무래도 소신은 코르(Corr)의 언어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관계로,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사옵니다.” 하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혼과 얼이라... 혼과 얼... 브리젠 세자 저하께서 늘 ‘혼’이라고 말씀을 하시다가, 막상 이 헌시에서는 ‘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음...” 완저(Wanzer) 총독도 뭔가 가물가물한 단서라도 찾아내려는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장군 파르코(Parco)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샤키(Sharky)와 샤니(Shanny)도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혼과 얼은 같은 뜻이 아니옵니까, 폐하? 혼을 쓰든 얼을 쓰든 그 차이에서 그다지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별다른 해답이 나오질 않자, 파르코는 별로 큰 문제는 아닐 거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하지만 황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네. 소신의 생각으로는 단어의 차이에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만..." 파르코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요... 이 구역은 충혼묘역이고 이 탑은 충혼탑입니다. 우리는 이 묘역의 입구인 저기의 충혼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왔고요. 이처럼 이곳 전체에는 모두 '충혼', 그러니까 아바마마께서 디퍼슨에서도 계속 강조하시던 바로 그 '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묘지 전체는 물론 이 구역 또한 아바마마께서 친히 만드시고, 모든 것의 이름도 직접 지으셨다고 하였죠? 그런데 왜 이 헌시에서만은 그토록 계속 말씀하시던 '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얼'이라는 말을 처음 쓰셨냐 이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래도 짐의 의구심이 너무 앞서나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이란은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설명을 했다.

그러자 모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을 떨구었다.


 "저기요... ‘혼’이 어떤 단어인지는 알겠는데요... 혹시... ‘얼’의 어원은 어떻게 되는 거죠?” 갑자기 샤니가 모두를 바라보며 말을 툭 내던졌다.

 “어원? 어원은 무슨 어원? 그냥 한 음절의 말이니 얼은 그냥 얼인 거지.” 샤키는 단순하게 말했다. 대신들도 얼의 어원이 무엇이냐는 샤니의 질문에는 이해를 잘 못하고 있었다. 그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음... 얼의 어원이라...” 하지만 황제는 뭔가 단서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얼의 어원이 어떤 것인지... 혹시 아시옵니까, 폐하?” 완저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오, 짐도 그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일단 얼의 어원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 총독께서는 얼의 어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하이란이 간곡하게 물었다.


 지금은 총독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는 자신을 낳고 19년 간 키워온 친어머니로 알았고 또 그렇게 지내던 사이였다. 비록 이제 황제와 신하의 관계라고는 하지만, 하이란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있어서도 늘 완저에게는 친어머니와 같은 자세로 대했다. 그만큼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코지섬에서 원주민을 교화시키고 가르치느라 늘 책을 놓지 않았던 소신으로서도, 그 단어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사옵니다.” 완저는 허탈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중에서 그래도 가장 연륜이 있고 학식이 풍부하고 똑똑한 완저 총독이 모르겠다는 말을 하자, 대신 모두는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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