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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너 님의 서재입니다.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3.05.22 11:43
최근연재일 :
2023.06.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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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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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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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36화>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한 번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적인 상상과 스케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한 발명품을 아우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 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서구적인 사상과는 다르게,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택했습니다. 모진 시련을 견디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참고 헌신했지만, 권력의 암투 속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에, 어떤 비밀과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는 매우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으로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무협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판타지 소설임에도, 네덜란드의 왕자인 하멜과 조선의 미녀 여주인공이 그려가는 로맨스 또한, 소홀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DUMMY

 *            *            *


 터벅 터벅 터벅~~~

 눈길을 걷고 있는 말과 병사들은 몸이 축~ 늘어진 상태였다.

 도르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육성했던 불곰과 늑대 군단은, 이미 코르군 호랑이 군단에게 전멸을 당하였다. 이 와중에 퓨그군의 일부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패전의 쓰라림을 안고 후퇴를 하고 있는 도르반과 카오핑의 표정은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기력이 쇠진한 에보크의 눈시울은 아직도 젖어있었고 또 많이 부어있었다. 얀스는 계속해서 에보크를 달래주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가끔씩 에보크가 흐느끼는 소리는, 대장군 도르반과 그의 수하인 카오핑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얀스는 일부러 말의 속도를 좀 늦추어 그들과는 거리를 둔 채 따라갔다. 아무리 계략이나 상황판단이 뛰어난 얀스라 하더라도, 대역죄인이던 몸을 지금은 퓨그(Fuug)군에게 잠시 의탁한 상태이기 때문에, 천하의 얀스라도 일단은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라 그랬다.


 

 그동안의 소식을 황제가 들으면 즉시 노발대발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지하 기지를 총괄했던 대장군 도르반과 대령 카오핑에게 질책과 처벌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본격적인 전면전을 앞둔 상황에서, 호크런이 그들의 목숨까지 거두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도르반과 카오핑은 잘 알고 있었다.

 남풍 마프(Marp)의 기세가 아직도 강한 상황에서, 냉혈족만으로는 절대 코르의 본토를 유린할 수가 없다는 현실을, 황제가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동안 거꾸로 이용해왔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심한 꾸지람을 들을 것은 뻔했다.

 그런 건 당연히 각오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사그라진 친자식같은 군사들의 넋을 위로라도 하려면, 자신들이 황제에게 열 번 백 번 혼이 나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계곡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는, 도르반이나 카오핑이나 이런 생각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맨츠 벌판으로 들어서 황제와 퓨그군의 주력을 만나기 위해, 계속 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음, 안타까워... 우리 병사들, 불곰과 늑대들...” 도르반이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도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대장군?” 카오핑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 바보 같은 에반(Evan)! 으, 내가 그놈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도르반이 이를 부드득 갈며 뇌까렸다.

 “그러게요. 그들은 그저 지하 기지에 머물도록 놔두고, 우리의 계획대로 그냥 추진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카오핑이 말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아냐, 죽였어야 해.” 도르반이 차갑게 말했다.

 “죽여요? 그들을? 언제 말씀이신지...” 카오핑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애당초 도와달라고 에반이 송골매를 보냈을 때, 일단은 우리에게 오라고 한 것까지는 맞아.”

 “네, 저도 그때는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을 우리의 지하 기지로 데려온 것도 맞아.”

 “네, 맞습니다, 대장군.”

 ........

 “그리고, 그들에게서 코르의 상황이나 병력에 대해 자세히 얘기를 들은 후에 말이야...”

 “얘, 그 후에는요...?”

 “그때 그냥 그들을 죽였어야 해.” 도르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요?” 카오핑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그래. 더 이상 우리에겐 필요가 없었으니까... 괜히 저 멍청한 에반 놈의 얘기만 믿고 일을 한 번 맡겼다 이렇게 된 것 아니야...” 도르반이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

 “그럼, 대장군... 그럼... 저 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카오핑은 이미 도르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읽고 있었다. 얀스와 에보크도 적당히 떨어져서 오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 들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자네는 우리가 저들을 어찌하면 좋을 것 같나?” 도르반이 거꾸로 물었다.

 카오핑은 잠시 망설였다.

 

 지하 기지에 있는 동안, 또 기지를 나와 코르군을 치기 위해 이동을 할 때 며칠을 함께 같은 천막에서 잠을 청하면서, 그들과는 좀 가까워진 사이였다.

 먼 다른 세상에게 귀화한 얀스라는 인물은, 카오핑도 놀랄 만큼의 비상한 지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가 발명한 여러 가지의 군사무기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은 후였다. 

 이제 겨우 19살의 신출내기 청년인 에보크는, 매사에 덤벙거리고 진득한 면이 없긴 하지만, 그의 무술솜씨 하나는 정말로 빼어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대대로 무사의 집안이었던 대장군 에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오핑은 얀스와 에보크 이 둘에 대해서, 언젠가는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모시는 상관인 대장군 도르반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카오핑은 당장 어떤 의견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도르반이 얀스와 에보크의 처리 문제를 두고 어느 정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먼저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기에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글쎄요, 대장군. 제 생각으로는... 폐하를 만나러 가는 동안 일단 좀 지켜보시는 것이...” 카오핑은 머뭇거렸다.

 “아냐, 폐하를 만나기 전에 무슨 결정이라도 내려야 해. 저들의 존재를 폐하가 알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도르반은 아주 차갑게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류 통신을 폐하께 보내 에반과 그 일파의 존재와 향후 처리방법에 대해 긍정적인 승락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카오핑은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르게 도르반이 말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뜸 물었다.  

 "그건 그냥 한 소리지. 내가 에반의 일에 대해 진짜로 폐하께 알렸을 것 같나? 그냥 그렇게 말을 해줘야 에반이라는 놈이 흥분해서 뭐라도 할려고 들 것이니, 그걸 한 번 보려고 그렇게 말한 거지 뭐." 도르반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태연하게 이유를 둘러댔다. 


 카오핑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카오핑의 생각은 늘 도르반과 같았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도르반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만큼, 카오핑은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또 맨츠에서 살던 부족의 고향 선배로서, 도르반에게 의지했고 또 그를 지지했다.

 단 한 번도 그의 의견에 토를 단 적도 없었고, 그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이 안개에 가린 것처럼 뿌옇게 느껴졌다.  

 카오핑은 대장군 도르반의 진짜 본심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풀고 나갈지에 대한 그의 심중에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또 그래야만 했다. 며칠 후면 황제를 만날 것이기에...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대장군?” 카오핑이 슬쩍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아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 도르반은 약간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카오핑은 섬찟했다.

한 번도 도르반이 자신에게 이런 투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등에 땀이 철퍽 묻어버렸다. 생소했다. 도르반과 자신 사이에 이런 냉기가 흐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저야, 그저... 대장군께서 하자고 하시면 그대로...” 카오핑은 말을 흐리며 겨우 마쳤다.

 그러자 도르반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카오핑에게 풀어놓았다. 카오핑은 그저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였다.


 도르반의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에반과 측근들이 지하 기지로 몸을 의탁해왔던 사실을 황제에게 말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과 함께 코르의 기지를 치기 위해 화노블(Farnoble)산을 내려갔다가, 적의 호랑이 군단에게 기습을 당해 불곰과 늑대 군단이 전멸했다는 말도 꺼낼 필요가 없었다. 병력의 손실이 좀 있기는 했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지하 기지의 위치가 적에게 탄로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을 해서, 역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잠시 기지를 은폐하고 그곳에 머물던 병사들을 빼내어 황제의 주력군과 합류하기 위해 올라왔다고만 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황제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고하고 질책을 받을 것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도르반은 계속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에반과 측근들의 존재 자체를 숨길려고 하니,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서는 적과 교전했다 패한 사실 또한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야만 했다.

 이게 도르반의 계획이었다.

 

 불곰과 늑대 군단은 순전히 자신만의 의지와 추진력으로 만든 것이었다. 황제에겐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매머드 군단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지금 그 매머드를 친히 대동하고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불곰과 늑대 그리고 병사들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대결전을 앞둔 상황에서 퓨그군의 전체적인 사기를 생각할 때, 굳이 소소한 패배에 대한 소식을 꺼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황제의 측근들, 그중에서도 황제와 고향이 같은 냉혈족 출신의 측근들에게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도르반은 그동안의 경과를 철저히 숨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르반의 계획이 아무 잡음 없이 깨끗하게 성공하려면, 단 한 가지의 위험요소는 미리 차단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 요소는 바로... 얀스와 에보크였다.

 

 에보크와 얀스는 퓨그의 말도 서툴렀고, 또 얀스는 다리까지 절뚝거렸다. 지난 인덤스(Indumps) 해전에서 공습을 당해 다친 결과였다.

 그래서 도르반은 이 둘을 없애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런 모든 계획을 지금 카오핑에게만 늘어놓았다.

 

 하지만 카오핑은 갈등에 빠져들었다. 분명 에보크와 얀스는 자신들이 유리하게 이용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조금 친해진 그런 인정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은 지하 기지에 몸을 의탁하면서도 미래를 위해 치밀하게 인맥을 쌓아온 얀스의 계략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뜻일 것이었다.

 얀스는 그동안, 도르반의 심복이자 직급으로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지의 제2인자였던 카오핑과 의도적으로 친분을 맺고 있었다. 이런 날을 대비한 그의 묻지마 투자였다. 그리고 그런 얀스의 예측은 정확히 적중하고 있었다.

 

 “대장군.” 카오핑이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말하게.” 도르반이 대답했다.

 ........

 “대장군의 계획을 저도 다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네, 폐하께서 굳이 아시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우리가 먼저 보고할 필요는 없다는 것에도 동감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장군. 음, 저 둘은... 그동안 제가 지하 기지에서부터 쭈욱~ 보아왔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말입니다. 일단 저 둘은, 대장군께서도 나중에 꼭 유익하게 쓸 데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을 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유익하게? 어떻게?” 도르반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도르반이 이런 말투로 카오핑에게 묻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말투를 도르반에게서 듣는 것도 카오핑은 처음이었다. 누구보다도 끈끈했던 상하관계가 하마터면 어긋나지는 않을까 하여 카오핑은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어쩐지 도르반은 그런 카오핑의 태도에 크게 실망을 하거나 아니면 짜증이 잔뜩 난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은 뭐라고 말씀드리기 애매하긴 합니다만... 분명 저는 그럴 때가 올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도르반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

 “그래서... 저 둘의 처리문제는 저에게 맡겨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대장군? 제가 확실히 책임을 지고 저 둘을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일반 병사의 옷을 입혀 부대의 무리 중에만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로 말이 나가지 않게 철저히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그러니 대장군, 나중에 꼭 필요한 곳에 저들을 쓰겠다고 생각하시고, 저들의 문제는 저에게 일임을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카오핑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차분하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끄응~~~” 도르반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싫은 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당장 어쩔 수는 없었다. 카오핑이라는 심복이 도르반에게 주는 존재감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가져 왔던 둘 사이의 관계를, 도르반도 흐트러뜨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카오핑에게 불만이 생긴 것은 생긴 것이었다. 우리 편도 아니고 원래 적이었던 하찮은 저 둘의 목숨에 연민을 가지는 카오핑이 영 못마땅스러웠다.

 더 이상 카오핑의 간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상관으로서 불쾌한 표시 정도로 내줘야, 그도 더 긴장을 하고 자신에게 더 열심히 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            *            *


 두크린(Duckreen)강을 건넌 코르군은 곧바로 적의 항구인 레도스(Redos)로 진격했다.

 지난번의 공격처럼, 처음에는 매우 수월한 싸움이었다.

 레도스항에 있는 퓨그의 국경 수비대 병력은 코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막상 가보니 그저 경계근무를 위한 병력과 화력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코르의 대군이 몰려오자 연신 조류 통신만 사령부로 날리며, 자기들은 항구를 포기한 채 도망치기에 바빴다.

 

 처음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눈앞의 맨츠 벌판을 두고, 그저 눈발을 날리며 말을 달리면 그만이었다. 코지(Cozee)섬에서 올라온 사슴들도 말과 함께 달렸다.

 

 그러다가 며칠 후, 황제가 이끄는 부대와 코르군의 본진은, 맨츠 벌판의 중간쯤에서 조우를 하였다. 다시 모든 명령은 황제에게서부터 나왔고, 전열을 재정비한 코르군은 퓨그의 수도인 디퍼슨(Deeperson)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벌써 디퍼슨을 떠나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던 퓨그의 황제 호크런(Hawkrunn)도, 북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서 코르군의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가 짙어지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혈투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             *            *


 도르반과 퓨그군은 드디어 황제와 주력부대를 만났다.

 도르반과 장군들, 그리고 카오핑 대령은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군사들은 매머드가 쉬고 있는 근처 진영의 한곳에서 머물며 명령을 기다렸다. 그중에는 얀스와 에보크도 있었다. 물론 퓨그군과 똑같은 군복을 입고...

 

 짜여진 각본대로 도르반은 황제에게 그동안의 과정을 보고했다. 호크런은 그저 듣고만 있었지만, 황제와 같은 냉혈족 출신의 장군들은 이런 도르반의 예상치 못한 합류에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도 도르반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태연하게 보고를 했다.

 여름에 원인 모를 대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린 지하 기지를 대신해서 다른 기지를 만든 것까지는 말을 했지만, 불곰과 늑대 군단도 다시 육성했던 사실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공사에 투입되었던 노예와 인부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지하 기지의 건설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기대했던 전력상승의 성과는 솔직히 보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호크런도 더 이상은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전면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퓨그군 수뇌부 사이에 갈등과 혼란이 발생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다 함께 남하를 하여 곧 있을 대결전에만 매진하라는 말로 모든 것을 마무리지었다.

 


 *            *            *

 


 11월 중순,

 기온은 더 떨어졌고 호크런이 몰고 오는 북풍 보라(Bora)도 더 거세어졌다. 눈보라도 차츰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넓은 평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진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양 국의 군사들은, 자세를 흐트러뜨릴 여유조차 없었다.

 만에 하나 까딱 잘못해서 경계를 느슨하게 하거나, 적의 공격에 집중을 하지 못하면, 그대로 목숨이 달아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이잉~~~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하이란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등에 두른 붉은 망토는 어느 때보다도 더 세차게 펄럭거렸다.

 추위에 살갗은 이미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래도 멀리 북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중과부적이라는 현실을 안고 싸워야만 하는 비장한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둔다면 퓨그(Fuug)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운명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그 운명이 코르의 것이든, 하이란의 것이든...

 

 쿵~ 쿵~ 쿵~

 코르군은 밟고 있는 땅에서 진동이 발생하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쌓인 눈도 차츰 슬쩍슬쩍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진에 이미 도착해서 열을 지어 빙판 위에 대기하고 있던 코르의 전투기들도, 몸통과 날개가 제법 흔들리고 있었다.

 적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눈보라가 시야를 제법 가려 저쪽에 있는 퓨그군의 동태가 정확히 보이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진동은 적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코르군도 움직여야만 했다.

 황제가 신호를 보내자 명령은 그 즉시 사방으로 하달되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시동을 걸었고, 기마 부대와 보병들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호랑이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양 국의 군대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진동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퓨그군이 집결한 곳에서 뭔가 큰 물체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뿌애애애애~~~ 뿌애애애~~~

 드디어 퓨그군의 주력인 매머드가 괴성을 지르며 제일 앞 열에 나타났다. 한마디로 거대했다.

 눈에서는 붉은 광채가 났고, 짙은 흑갈색의 털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매머드들은 크게 휘어지고 길게 튀어나온 두꺼운 상아를 사방으로 휘저었고, 우람한 코와 입에서 하얀 김을 쭉쭉 밖으로 뿜는 모습이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장군 파르코(Parco)는 19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멜의 아버지인 요한슨(Johannson) 왕자를 따라 동방 원정에 나섰다, 풍랑에 배가 파손되고 쳐비 제도(Chubbie's islands)의 해적에게 기습공격을 당한 뒤, 겨우 빠져나왔다가 코르(Corr)라는 왕국에 표류했었다. 이후 한즈(Hanz)시로 압송되어 낯선 곳에 적응을 시작할 때쯤에 ‘7일 전쟁’이 터졌다.

 병사들이 부족해 이방인인 파르코도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했었고, 명령을 받고는 즉시 전방으로 이동했었다.

 그때 코르군은 난생 처음으로 매머드라는 동물을 보았었다. 퓨그의 황제 호크런이 친히 몰고 온 그 괴물을 대적했었다. 물론 상대가 전혀 되질 않았다.

 

 거대한 매머드의 괴성만 들어도 오금이 저렸다. 흥분한 그들의 몸부림에 팔과 다리는 그대로 얼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래서 코르군은 칼이나 활이나 창 한 번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투석기에 바위를 올려놓고 발사할 정신조차 없었다.

 밀고 내려오는 매머드 앞에서 코르군은 그냥 그대로 추풍낙엽처럼 대번에 무너지고야 말았었다.

 파르코는 그 악몽이 생각났다. 그때 보았던 매머드의 형체가 그려졌다. 그리고 지금 나타난 매머드와 비교를 했다.

 그런데 확실히 달랐다.

 

 저기 저 앞에 있는 매머드가 그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럼 19년 전의 매머드는 완전히 다 자란 놈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유야 잘 모르겠지만, 지금 보고 있는 매머드가 그때보다 분명 더 큰 것이었다.

그리고 말의 등에 안장을 올려놓듯이, 매머드의 등에도 큰 대접같이 생긴 뭔가를 설치한 상태였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대접 안에는 적군 몇 명이 올라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파르코는, 적군의 주력이 19년 전의 매머드보다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반면 완저(Wanzer)는 19년 전에는, 브리젠(Brizenn) 왕세자의 부인인 진주(Jinju) 세자빈의 시녀였기에, 매머드를 지금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처음 본다 하여도 그 위용에 기가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파르코는 황제에게 즉시 이런 상황을 보고했다. 듣고 있던 하이란의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파르코나 완저도 다르지 않았다.

 

 적의 석궁과 투석기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온 코르군은, 잠시 행진을 멈추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병사들은 창과 칼과 활과 방패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했다.

 그건 퓨그군도 마찬가지였다.

 뿌애애애애~~~ 뿌애애애~~~

대가리를 흔들며 발광하는 매머드만 제외하면, 양 쪽 모든 병사에게서는 잠시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쓔우우우우~~~ 쓔우우웅~~~

 전투의 시작은 하늘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퓨그군의 전투기들이 창공을 뒤덮었고, 코르군의 그것도 정면으로 대응했다. 수는 물론 퓨그군의 많았지만, 최신예 수정 엔진을 장착한 코르의 전투기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쓔우우우우~~~ 퓨우우우우~~~

 쑤아아아아~~~ 코오오오오~~~

 팍! 팍! 파박!!

 휙! 휙! 휙휙!!

 꽈광~!! 꽝~!! 꽝~!!

 양 국의 조종사들은 현란한 기술을 뽐냈고, 뒷자리에 앉은 사수들은 적기를 향해 쉴 새 없이 석궁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날아간 화살은 가끔씩 전투기의 몸통에 박히기도 했고, 촉에 화약을 담은 더 큰 화살은 전투기 근처에서 굉음을 내며 산탄으로 터졌다.


 “전군, 공격하라~~!!!”

 대치하고 있던 양 국의 육군에게도 드디어 진격명령이 떨어졌다.

 뿌애애애애~~~ 뿌애애애~~~

 어흐으으응~~~ 어흐으응~~~

 와~~!! 와~~!! 와~~!!

 둥둥~~!! 둥둥~~!! 둥둥~~!!

 쿵~ 쿵~ 쿵~ 쿵~!!

 뚜그닥 뚜그닥 뚜그닥 뚜그닥~~~~~!!

 

 매머드와 호랑이들이 포효했고,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고, 전진하라는 북소리가 세차게 퍼졌고, 모든 기병과 보병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소음으로 이 광활한 벌판은 눈발을 날리며 마구 흔들렸다.

 강 대 강의 목숨을 건 최후의 결전이 곧 터질 것이었다.

 

 슉슉슉!!! 슉슉!!!

 쾅~ 쾅~ 쾅~!!

 파바바바박!! 파바박!!

 코르군이 날린 화살 중에는 적기에게 명중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약이 폭발해 그 파편이 적기의 몸통에 박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추락하는 퓨그의 전투기가 당장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공격하는 코르군 사수의 솜씨도 뛰어났지만, 이를 피하는 적군 조종사의 민첩함도 신기에 가까웠다.

 

 공중에서 쫓고 쫓기는 싸움이 어지럽게 계속되었지만, 양 국 조종사들의 실력이 워낙 백중세여서, 전투 중에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는 경우는 있어도, 동체가 완전히 파손되어 땅에 처박히는 경우는 아직 드문 편이었다.

 그래도 역시 코르군 전투기 수정 엔진의 성능이 퓨그군의 루비 엔진보다는 약간 나은 것 같았다. 코르군은 적기의 꼬리를 먼저 잡는 횟수에서 확실히 앞섰다.

 

 코르군 전투기 중에도 탁월한 조종술과 사격술을 보유한 전투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보라(Bora)호였다. 샤키가 조종을 했고, 샤니가 사격을 했다.

 이 남매가 모는 보라호는 특히나 적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샤키는 그 누구보다도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위치를 바꾸고 적의 꽁무니를 잡았고, 샤니는 치밀하고도 완벽하게 조준을 하여 화살을 날렸다.

 

 펑~! 펑~! 퍼벙~~!!

 날개와 연료통에 정통으로 화살과 산탄을 맞은 적기는, 이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허공에서 비틀비틀거렸다. 그러다 재차 공격을 당한 뒤에는 점차 추락의 길로 들어섰다.

 작은 새를 대번에 낚아채는 송골매처럼, 확실히 보라호는 지금 하늘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보라호의 활약에 고무된 다른 코르기들도 사기가 충천하여 적기를 공격하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양 국이 보유한 전투기의 전체적인 대수였다.

 퓨그의 한 전투기가 코르기에게 당하는 양상을 보이면, 곧 다른 전투기가 이를 엄호하며 다가왔다. 그러면 코르기의 조종사도 적의 공격을 일단 피해야만 했기에, 자연히 사수의 조준점도 흔들리고야 말았다.

 그러니 아무리 일방적으로 공격을 계속하려 해도 중간에 자꾸 끊길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적기에게 치명상을 안기지는 못했고, 그저 보이는 대로 부분적으로만 공격을 하였다. 조금씩 기체에서 연기가 나는 적기들이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그러면 부상을 입은 적기는 이내 먼 허공으로 피하고 곧 다른 적기가 나타나 코르기와 대적하였다.

 

 퓨그군의 그 많은 편대를 지휘하고 있는 맨 앞의 전투기에는, 대령 카오핑(Kaoping)이 타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편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자국의 전투기보다도 성능이 뛰어난 코르군 전투기를 보자, 그도 한동안은 적잖이 당황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전투기들의 위치를 조정했고 또 움직였다.

 그러니 카오핑의 지시를 받으며 이처럼 끝도 없이 밀려드는 퓨그기의 홍수 속에서, 코르군 전투기들은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조금씩 추락은 시키고 있었지만, 까맣게 하늘을 덮은 적기를 보면서 과연 이 전투의 최종 목적지는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도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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