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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너 님의 서재입니다.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3.05.22 11:43
최근연재일 :
2023.06.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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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250

작성
23.06.0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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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쪽

<34화>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한 번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적인 상상과 스케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한 발명품을 아우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 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서구적인 사상과는 다르게,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택했습니다. 모진 시련을 견디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참고 헌신했지만, 권력의 암투 속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에, 어떤 비밀과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는 매우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으로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무협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판타지 소설임에도, 네덜란드의 왕자인 하멜과 조선의 미녀 여주인공이 그려가는 로맨스 또한, 소홀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DUMMY

 *            *            *


 헉헉헉~~

 숨이 찼다. 몹시도 추웠다. 다리는 눈 속에 퍽퍽 빠졌다. 눈보라는 또 그렇게 세찰 수가 없었다.

 거대한 자연은 미약한 인간을 조롱하듯, 감히 내게 다가올 생각을 하는 것이냐며, 매서운 회초리를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푹~ 푹~ 풀썩~~ 풀썩~~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을 부축하고 있는 다른 병사도 추위와 강풍에 지치고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도 춥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멜도 물론 그랬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완저는 이들보다 좀 더 힘들어했다.

 그래도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늘 안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하여야만, 그곳에 야영을 할 공간이라도 있기 때문이었다. 전 부대원이 추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꼭 필요하고도 꽤 커다란 동굴은, 거기에만 있다는 것이 참모들의 한결같은 보고였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산속에서, 이미 알고 있는 몇 군데의 숙영지 말고, 무작정 다른 장소를 새로 찾는 것이 이런 날씨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했다.

 내일이 되면, 또 내일 가야 할 길이 남아있었다. 끝도 없이 솟은 산을 오르고 계속 올라야만, 비로소 거기에 잠을 청할 동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어두워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얼어 죽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이란은 코르의 주력군을 두크린강 하구인 유스토로 보냈다.

 파르코가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여 그리로 갔다. 코지에서 올라온 사슴 떼는 해군과 함께 배로 올라와 몸을 만들고 있었다.

 샤키와 샤니는 전투기들을 이끌고 미리 유스토에 와서 대기를 하며, 엔진의 성능을 점검하고 또 했고, 공중전에 대한 훈련도 쉼 없이 계속하였다.

 반면에 황제는 소수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화노블산을 오르고 있었다. 대신 이들에게는 호랑이 군단이 있었다.

크란(Krann)산맥 전체를 지배하던 호랑이 떼, 충혼탑에 숨겨져있다 깨어난 페리도트의 초록빛 광채, ‘황제의 별’인 페리도트(Peridot)의 주문을 풀어 그 기운을 크란산에 뻗어나가게 하자, 이에 본능적으로 몸과 마음이 이끌려 스스로 황제에게 다가와 예를 취하며 충성을 맹세한 호랑이들이었다.

 짐승의 제왕인 용맹한 호랑이도, 코르의 황제인 하이란을 알아본 뒤로는 그녀의 앞에만 다가가면 그토록 온순해질 수가 없었다. 다른 병사들을 해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코르군 소속인 말과 사슴들과 마주쳐도 입맛을 다시지 않았다.

 호랑이들은 모두 하이란의 명령으로만 세뇌되어 있었다.

 퓨그의 주력군인 불곰과 늑대 군단을 잡는 단 하나의 임무에만 충실하도록,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미 그런 호랑이 군단이었기에, 이들은 지쳐 쓰러진 병사들을 등에 태우고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호랑이도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그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가올 먹음직스런 불곰과 늑대의 고기만을 생각하면서, 이 힘든 여정을 함께 참고 견디자며 황제가 설득한 결과였다.


 부상자가 속출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낙오자는 단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았다. 호랑이도 마찬가지였다. 코르의 독립을 위한 그들의 열정은 황제든 병사든 호랑이든, 전혀 다르지가 않았다.

 어디에 숨겨놓았을지 모르는 퓨그의 비밀 기지와 그 병력을 제압하지 않고, 그냥 맨츠로만 진격했다가는 저번처럼 또 뒤통수를 맞을 수가 있다는 판단 때문에, 황제와 소수 정예병력은 이런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적이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는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야, 그 목표를 이룰 것만 같았다. 그러려면 그 목표를 이루려면, 병력의 이동을 적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좀 더 높게 좀 더 높게 올라가야 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물론 그럴 예정이었다.

 

* * *


 헉헉헉~~~ 헉헉헉~~~

 오늘도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몸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바닥이 까지고 부르트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나다 얼어붙었고, 다리의 근육은 경련을 일으켜 눈 속에 풀썩 쓰러지기를 반복하였다. 손가락은 이미 동상에 걸려 감각을 잃은지 오래였다.

 그래도 계속 산을 올랐다. 오르고 또 올랐다. 여기서 멈춘다면 돌아갈 길도 없었다. 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곧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과도 같은 것이었다.

 

 병사들의 고통을 모를 리 없는 황제는 계속해서 눈시울을 적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눈시울의 눈물은 이미 얼어있었다. 병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중이었다.

 자신의 조국이 아닌데도 이토록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하멜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 뿐이었다.

 가장 연장자인 몸으로 이 힘든 여정을 견디려 애쓰며,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고통을 숨기며 행군에 동참하고 있는 완저 총독을 보니, 마음이 안쓰럽고 쓰라렸다. 한때는 자신을 엄하게 키우던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자신 앞에서 한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는 총독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쨌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적을 이겨야만, 이보다 더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독립을 해야만,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이란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갑자기 날이 개었다. 그토록 심하던 눈보라도 사라졌다.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어 그저 내 앞의 사람만 따라가며 산을 올랐었는데, 어느새 파아란 하늘이 이들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이제는 눈앞의 구름도 한순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에는 다들 잠시 눈을 감고야 말았다.


 이런!

 더는 오를 곳이 없었다.

 황제와 정예군은 지금 화노블산의 정상을 밟고 서있었다!

 고개를 들면 창공이 눈에 들어왔고, 고개를 살짝 낮추면 발아래에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 산의 줄기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질렀고, 호랑이들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포효를 했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의 발호였다.


 “오! 이것은~~!!” 몸을 돌려 사방을 확인하던 하이란이, 문득 탄성을 질렀다.

 “이런! 여기는 그때 거기가? 그때 산정에 있던 그 호수??” 하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단으로 맨츠에 잠입을 했다가 퓨그의 지하 기지가 무너질 때 샤키를 잃어버린 뒤, 어쩔 수 없이 적기를 몰고 그냥 코르로 돌아오다, 보름달에 비친 거대한 호수를 보았던 생각이 난 것이었다.

 “*라코븐(Lakoven)입니다! 저것은 이 화노블산의 정상에 있는 라코븐입니다, 폐하. 우리 코르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자,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곳입니다!” 완저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말했다. 그러자 병사와 호랑이들도 환희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로를 껴안으며 기쁨을 나누었다. 호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함께 와준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산 정상의 기온은 한겨울이지만, 라코븐은 이상하게도 얼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물안개가 끊임없이 수면 위로 황홀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타는 햇빛 덕분에 추위도 조금은 누그러졌기에, 혹시 그것 때문에 그럴까?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코르 영토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자, 계절도 지금은 겨울이었다. 그런데도 호수가 얼지 않았다니, 정말로 신기한 일이 분명했다.


 하멜은 대머리처럼 정상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다는 크란산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마도 저 물 속에서는 크란산처럼 어떤 불의 기운이 숨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궁금하기는 하이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황제는 완저에게 이유를 물었다.

 민족의 혼이 담긴 곳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그녀의 대답만이 나왔다. 솔직히 완저도 화노블산의 정상에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그 이상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유야 어떻든 정상에 선 모두에게는, 지금이 꿈과 같은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라코븐(Lakoven)=Lake of Heaven=백두산 천지(天池)를 모델로 함.



 “민족의 영산인 화노블산의 정상에서 천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실로 통쾌하고 아름답군요. 여기는 정말로 정말로, 어떻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하이란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라코븐을 건너 저 북쪽은 광대한 맨츠 벌판이고, 남쪽은 코르의 최북단 산악지방이군요, 폐하. 좌우를 살피면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는 큰 강이 보이는데, 저기 서쪽에 보이는 것은 두크린강이고 말입니다.” 하멜이 탁 트인 지형을 살피며 말했다. 황제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북쪽을 주시하던 총독 완저가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를 그대로 발산하며 울먹였다. 황제 앞에서 젖은 얼굴을 보이는 게 민망했는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계속 흐느끼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비통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총독?” 영문을 모르는 하이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게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거라도...” 하멜도 황제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완저는 당장 대답을 하지는 못한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가 안스러웠는지 하이란은 황제의 신분도 잊은 채, 친히 예전 어머니의 몸을 감싸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라고 걱정이 약간 섞인 다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완저는 어떤 기억이라도 한꺼번에 밀려왔는지, 더욱 크게 울고야 말았다.

 하이란은 양 팔로 완저를 안으면서도 눈은 하멜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생겼나?’

 말하지 않아도 하이란과 하멜은 눈빛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잠시 그런 분위기와 함께, 완저의 눈물이 잦아들 시간이 이들에겐 더 필요했다.



 “폐하.” 드디어 감정을 좀 추스린 완저가 말을 꺼냈다.

 “네, 총독. 어서 말씀을 하세요.” 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총독님?” 하멜도 이에 거들었다.

 “폐하... 저기 저 북쪽에 있는 넓은 벌판을 좀 보시옵소서.” 완저가 이제는 차분하게 말했다.

 “네, 보고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고, 똑같은 말을 하멜은 속으로 했다.

 “저 벌판을 보시면... 그 중간에 흐르는 큰 강이 하나 있사옵니다. 보이시옵니까?” 완저는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하이란과 하멜도 팔을 들어 위치를 짐작했다.


 “네, 저도 잘 보입니다. 그런데 저 강이 어쨌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멜이 중간에 나서서 말했다.

 “짐도 보고 있습니다. 꽤 큰 강이군요.” 하이란도 말했다.

 “저 강이 어떤 강인지 아시옵니까?” 완저는 이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다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 강이오? 글쎄요... 저 강은... 음... 저번에 몰래 맨츠를 비행하면서 잠시 본 것 같기는 하지만... 글쎄요...” 하멜이 망설였다.

 “짐도 전에 정찰을 할 때 본 기억이 날 듯 말 듯은 합니다... 어쨌든 저 강이 흘러가는 형세를 보아하니... 저 강의 발원지는 여기 화노블산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런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씀입니까?” 하이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폐하, 저 강의 이름이 바로... **하이란강(=해란강, 海蘭江)이옵니다.” 완저는 말을 마치면서 더욱 크게 흐느꼈다.

 “하이란강이오?” 하멜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하이란강??” 황제도 눈을 번쩍 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폐하의 존함과 꼭 같은 하이란강이옵니다. 이곳 라코븐에서 발원한 물이 맨츠 벌판의 젖줄이 되어 흘러가고 있는 것이옵니다.” 완저는 계속해서 울먹였다.

 “아니 왜 하필 강의 이름이 하이란인 것입니까, 총독님?”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멜이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강은 이미 천 년 만 년 전부터 저기에 있었을 테고... 사람들은 또 오래도록 그렇게 불렀을 테고... 하긴 짐도 전에 퓨그의 지형에 대해 공부를 할 때 잠깐은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우연히 발음만 비슷하겠거니...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런데... 짐의 이름이 저 강과 같은 것에 무슨 이유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하이란이 핵심을 짚으며 물었다. 그러자 완저는 잠시 또 눈물을 흘린 뒤, 황제에게 고개를 한 번 깊게 숙이고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야 소신이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사옵니다, 폐하. 후~~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여름, 그러니까 폐하께서 태어나시던 바로 그날 밤, 폐하의 친어머니이신 진주(Jinju) 세자빈의 친정인 드루파(Droopa) 마을 근처에 큰 유성이 떨어졌사옵니다. 전설에 나오는 '황제의 별' 말이옵니다. 출산을 위해 친정에 오셨던 세자빈께서는 이미 그 별의 진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별의 소재를 모두에게 비밀로 한 다음, 프로스궁에 계시던 브리젠 세자께 이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그때 진주 세자빈께서는 황송하옵게도 소신을 가장 신뢰하시었기에, 소신은 이 모든 과정을 다 알 수가 있었습니다. 딸의 출산 소식을 접한 세자 저하께서는, 유성이 떨어진 날 태어난 이 아이는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확신을 하시고, 그 옛날 우리의 조상이 호령하던 땅 맨츠의 기상을 가지라며, 또 언젠가는 저 맨츠 벌판을 되찾는 큰일을 할 것이라며, 맨츠를 적시는 젖줄인 하이란강(=해란강, 海蘭江)에서 이름을 따서 딸에게 지어주셨습니다. 바다처럼 큰 포부와 기상을 가지고, 맨츠의 척박한 모래땅에도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굳은 난초처럼,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봄을 먼저 알리는 목련처럼, 그런 큰 인물이 되라는 뜻이었기에, 그래서 지금 폐하의 존함이 그렇게 된 것이옵니다.” 완저는 이 이야기를 겨우 다 하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는데, 오히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완저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하이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지금까지 완저가 흘린 눈물보다도 더 많은 그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이란이라는 이름에 그런... 그런 뜻이... 그런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까? 부모님께서는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하시며 이런 이름을... 이런 이름을 지어 주신 것입니까? 어마마마, 아바마마... 흑흑흑...” 하이란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으며,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눈물과 함께 마구 쏟아내었다.

 바라보던 병사들과 호랑이와 참모들에게도, 그런 황제의 순수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은 실로 감격에 겨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이란강 :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변(延邊)의 조선족 자치구 용정(龍井) 부근을 흐르는 강으로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두만강의 지류이자 만주 벌판을 적시는 젖줄 중의 하나임.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에도 나오는 지명인 해란강(海蘭江)의 ‘해란’이라는 단어의 현지 발음이 ‘하이란’으로, 이 지역은 과거 우리 조상님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곳이었음.

 독립을 염원한 조상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지역을 흐르는 해란강.

 과거 우리의 땅이었던 광활한 만주 벌판을 되찾고도 싶어 하셨던 그분들의 높은 뜻.

 그런 숭고한 의미를 모두 간직하고 있는 ‘해란강’에서 이름을 빌려, 필자는 본 역사 판타지 소설 여주인공의 이름을 ‘하이란’으로 지었습니다.


* * *


 지난 19년 전에 일어난 ‘7일 전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보다 몇 년 전에 벌어진 일...

 갑자기 북극에서부터 내려온 호크런(Hawkrunn)이라는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호렌(Horen) 세상에 나타나면서, 역사는 순식간에 온통 다 바뀌고야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렌 세상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는 지안(Jiaan) 대륙의 주인은 바로 바르티(Bartii) 제국이었다. 그 대륙의 동북쪽에는 광활한 맨츠(Mantz) 벌판이 있었고, 벌판 안에는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아가던 여러 부족이, 자신들의 지배자인 바르티 제국에게 형식적인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각자의 영역을 적당히 유지하며 그나마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비록 국제적으로는 맨츠가 바르티의 공식적인 영토였지만...


 그런데 북극에서 발원한 엄청나게 차고 거센 바람인 보라(Bora)를 몰고 남하하는 호크런과 그의 부족인 냉혈족이 나타나자, 상황은 하루아침에 급반전이 되었다.

 냉혈족이 아니고서는 그런 추위와 강풍을 견딜 부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크런과 냉혈족에게 저항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활과 창을 들 힘도 쓰지 못하였다.

 그러니 지안 대륙을 호령하던 바르티 제국의 정예군대도, 냉혈족에게 참패를 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호렌의 여러 왕국은 그렇게 그렇게 하나하나씩 호크런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그러자 호크런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며 스스로 황제를 자처했다. 제국의 이름은 퓨그(Fuug)라고 지었다.

 퓨그의 영향력은 호렌 세상의 모든 곳에 다 뻗쳤다.

 저 아래 적도 부근에 있던 왕국도 북풍 보라의 영향을 받자 그냥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어디든 다 그랬다. 물론 이때는 슈젠타(Pseuzenta)왕이 다스리던 코르(Corr)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두크린강을 넘어온 보라는 코르의 본토 전부를 꽁꽁 얼려버렸고, 과거에 모두 멸종한 줄만 알았던 거대한 매머드의 괴성이 들리고 그 실체가 눈앞에 나타나자, 그나마 있던 코르군의 사기는 여지없이 무너지고야 말았다. 병사들은 제대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냥 퓨그군에게 사정없이 당했다.


 이때는 이미 맨츠에 살던 부족들마저 호크런의 부하가 된 뒤였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중과부적, 코르는 도무지 퓨그 제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년이 지난 지금...

 역시 호크런은 아직도 호렌을 호령하는 가장 강력한 황제였다. 아무도 그의 힘을 시험하려고 대들 수가 없었다. 그에게 맞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주동자의 삼족은 물론, 조금이라도 동조한 이들에게는 그저 처절한 복수와 응징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면서, 그렇게 세월은 19년이 흘렀다.

 그런데... 오직 한 나라... 아주 작은 왕국...

 코르(Corr)라는... 호렌 세상에서도 가장 동쪽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나라인 코르에는... 요즘 갑자기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 역시 퓨그의 호크런처럼... 스스로 황제를 자처해버렸다. 현재 모든 패권을 쥐고 있는 호크런을 물리치고, 새로운 호렌의 황제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다른 나라 사람이 들으면 경천동지할 일이 분명했다.

 지금 제정신이냐고 반문할 것도 자명했다.

 하물며 그가 누구냐 하면... 그 인물은 바로, 이제 겨우 나이 19살의, 어찌 보면 가녀린 소녀라고도 할 수 있을... 하이란이었다.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고, 모든 왕족이 다 죽어 700여 년 역사를 가진 코르의 대가 끊겼을 당시에, 우연히 유일하게 남은 왕족임이 밝혀져, 대신들로부터 나라의 주인으로 추대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그녀는...

 모진 고난을 다 이겨내고 코르 왕국의 역사가 처음 시작되었던 곳에 서있었다.

 바로 코르 민족의 혼이 담겨있는... ‘화노블산’ 정상의 ‘라코븐 호수’ 앞이었다.


 반면에...

 호렌의 현재 주인인 호크런은 이미 황금마차에 몸을 실은 상태였다. 그와 함께 디퍼슨을 떠나 맨츠 벌판을 남쪽으로 질주하는 것이 퓨그의 기마대와 보병만은 아니었다.

 굉음을 내며 비행하는 전투기들도 하늘에서 황제를 보위했다.

 그리고 코르가 코토록 무서워하는 단 하나의 실체...

 거대한 매머드 군단이 드디어 여기에 함께 있었다.

 지난 19년 전에는 겨우 몇 마리만 가지고도 코르군의 사기를 얼려버렸지만, 지금은 십여 마리의 더 커진 매머드가 움직였다. 감히 쳐다보기도 겁나는 무시무시한 덩치와, 소름이 돋는 붉은빛의 눈을 가진... 최강의 무기였고 최고의 전사였다.


 크어어어어~~~!!!!!!

 사방에 백 리는 뻗어 나갈 만큼, 엄청난 크기의 매머드가 뿜어내는 거창한 포효였다.

 이런 괴물을 앞에 두고 누가 감히 대적을 할 수 있을까? 같은 아군인 퓨그의 병사들이 옆에 있어도 매머드의 행동을 보면 모든 게 공포 그 자체인데...

 그러니 퓨그군의 사기는 하늘을 백 번 천 번 찌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            *           *


 거대한 지하의 공간에는 수천의 병사가 도열하고 있었다. 근처의 우리 안에는 불곰 수십과 늑대 수백 마리도 배가 좀 고픈 듯한 표정으로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감싼 코르군의 군복을 보여주자, 그 냄새를 맡았는지 침을 질질 흘리며 이내 흥분하기 시작했다.

 에반(Evan)이 탄 말이 부대의 가장 앞에 섰다. 대장군 도르반(Dorban)도 옆에 있었다.

 그 바로 뒤에는 장군 나리프(Nariff)와 토리크(Torik)가 그동안 전쟁을 안 해 엄청 몸이 근질거렸다는 듯,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출정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도르반의 심복 장군들과 카오핑(Kaoping) 대령이 함께 했다.

 그 다음 줄엔 도르반의 참모 장교들이 있었다. 그리고, 에반의 아들 에보크(Evoke)와 얀스(jans)도 그 근처에서 역시 말에 올라 있었다.


 에반은 지금 한즈(Hanz)의 프로스(Pross)궁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반역과 불법의 무리라고 규정하고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결국 적국인 퓨그의 병사들과 함께 조국인 코르를 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황제를 자처한 하이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자리에서 숨을 거둔 브리젠(Brizenn)의 딸이기에, 그녀가 코르의 주인이 되는 것은 정통성이 결여되었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었다.

 코르에는 왕에 오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모두 사라진 것이고, 그런 이유로 어린 계집아이가 황제를 운운하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기에,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한 자신이 스스로 나서 이를 바로잡겠다는 한 편의 으름장이었다.



 도르반이 팔을 들어 출발하라는 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커다랗고 둥근 돌문이 서서히 구르며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 이 동굴을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면 바깥 세상이 나오는 것이었다.

 에반의 말은 도르반의 그것과 보조를 맞추었다.

 에반의 표정도 도르반과 흡사했다.

 곧 승리의 쾌감을 느낄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다.

 이는 뒤에 따라오는 장군 나리프와 토리크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표정은 오히려 더 밝았다. 살육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 피 냄새를 맡아야 속이 뻥 뚫리는 듯, 그들은 큰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가며 계속해서 실실거렸다.


 아무리 황제를 인정하기 싫어도, 아무리 하이란이 미워도, 그녀를 따르는 군대의 병사들은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이 통솔하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조국에 칼을 들이대자는 에반의 뜻에, 어떤 반론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전진만을 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것도 같은 동포를 죽이는 것이, 무슨 꿩 사냥이나 하는 것처럼 대단치 않은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오직 에반을 다시 국왕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마르고 닳도록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에보크와 얀스의 표정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우선 에보크는 귀찮다는 낯빛이 역력했다. 뭐 하러 선봉에 서서 불필요한 전쟁에 나서냐는 뜻이었다.

적의 지하 기지에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면서, 에보크는 퓨그의 국력과 군사력에 새삼스레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크란산에서 열렸던 사냥 대회에서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자신의 무술도, 이처럼 엄청난 힘을 보유한 퓨그 제국의 위용 앞에서는, 그저 한낱 어린애의 재롱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하고도 남았다.

 그러자 에보크의 눈에는, 하이란과 새로운 세력을 꺾겠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별로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문제로 생각되었다. 어차피 가만히 놔두어도 황제 호크런이 알아서 다 처리해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기에, 디퍼슨에서 출발했다는 황제와 퓨그의 주력군과 매머드 군단이 내려오기만 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이란과 그녀의 측근들이 황제의 군대에게 도륙을 당한 뒤, 그때 가서 아버지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하면, 코르의 국왕 자리는 당연히 아버지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럼 자신도 자연스럽게 왕세자가 되는 것이고, 또 세월이 흐르면 자동적으로 왕이 되는 것이었다. 백성을 쥐어짜서 공물을 더 걷어 황제에게 바치기만 하며, 안정된 자리에서 영원히 부와 쾌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었다.

 퓨그 제국의 황제 호크런은 천하무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이상, 더 이상의 쓸데없는 시도나 상상은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에보크의 머리와 가슴은 온통 그런 결론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니 편안한 지하 세계의 생활을 마다하고, 엄동설한이 몰아칠 밖으로 나아가서 하이란과 싸우겠다는 아버지를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억지로 동행하고는 있지만, 에보크의 표정과 몸은 강제로 끌려가는 게 싫어서 발버둥치는 강아지의 그것과도 흡사하게 보였다.

 

 이런 것을 눈치채지 못할 얀스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얀스는 이 출정에 함께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직 목표는 빨리 호크런을 만나는 일인데, 황제의 군대는 지금 다른 길로 내려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19년 전에는 퓨그에게 지하 기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굳이 이쪽에서 코르를 기습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 기습은 도르반의 군대와 불곰 군단, 늑대 군단이 해줄 게 뻔했고, 황제는 막강한 육군과 공군을 거느리고 두크린강 하구 쪽으로 방향을 잡아 코르와 전면전일 벌일 것이라는 첩보를 이미 엿듣고 있었다.

 출정에 나서지 못할 핑계거리를 만드는데 실패한 얀스는, 말 위에 있으면서도 옆에서 함께 움직이는 에보크에게 자주 말을 걸었다. 에보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자기 쪽으로 끌어내려고 애를 썼다.

 나리프와 토리크와는 말을 해봐야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궁지에서 헤쳐나갈 방법이 무엇일지는 얀스도 정확히 간파하기 힘들었다. 다만 에보크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막연한 느낌은 들었다.

 얀스는 계속해서 에보크에게 무슨 패를 던지고 있었다. 나중에 뒤집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지는 잘 모르겠지만...


 *            *            *


 얼마간 돌을 주어다가 자그마한 제단을 쌓았다.

 향도 피웠다.

 날씨가 맑고 바람도 잔잔하니, 모인 병사들 모두는 그 은은한 향내를 맡으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하이란이 먼저 제단에 예를 올렸다.

 이곳 화노블산 정상인 라코븐 호수에 처음 발을 딛고 그 정기를 받아 코르를 건설한, 왕국의 시조인 콘스트라(Constra) 태조와 그 이후의 제왕들, 그리고 700여 년간 나라를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조상님들, 자신의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전몰장병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고 존경의 마음을 바치는, 엄숙한 추모의 시간이었다.

 곧 다가올 적과의 전쟁을 앞두고, 황제와 병사들에게 용기와 행운을 불어넣어달라는, 간곡한 애원의 순간이었다.


 황제가 예를 다 하자, 그 다음은 근위대장인 하멜이 무릎을 꿇었다. 물론 애원을 하는 대상은 조금 달랐다.

 하멜의 마음은 지금 이역만리 저 먼 곳에 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고향인 네론(Nehron) 왕국으로 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인 마크(Mark) 1세가 떠올랐다. 한없이 죄송스러웠다.

 동방 원정에 나섰던 외아들 요한슨을 잃고 큰 충격을 받으셨지만, 그래도 왕국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 손자 하멜이 남아있었기에, 할아버지는 그 힘든 시간을 견디실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오직 하멜 하나만을 바라보며 세상을 사신 분이었다.

 왕위를 물려주려 어린 하멜을 강하게 단련시키고 또 단련시킨 분이었다. 그래서 하멜은 이처럼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래도 네론 왕국의 다음 왕위를 이을 당당한 황태자로 자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유일한 손자인 하멜을 아끼고 사랑해주었건만, 하멜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 홀연히 네론을 떠나 동방으로 온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못 본 지가 벌써 1년 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났다. 그 사이에 네론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경쟁국인 앵글(Angle) 왕국의 크롬(Kromm) 1세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지, 자꾸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시던 할아버지의 건강은 또 어떻게 되었을지, 하멜은 그저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 혼란스럽던 하멜에게, 다시 정신을 환기시키는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아버지 사슴이었다.

 코지의 여전사들이 신의 영역에 있는 사슴 떼를 많이 데리고 한즈로 올라왔었다. 자신이 모든 배를 다 뒤지며 아버지 사슴을 찾아보았지만, 당시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좌절하고 울부짖고 그랬었다.

 그런데... 그래도...

 그때 자기가 혹시나 놓쳤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지금은 파르코 장군과 함께 두크린강 하구의 유스토에 머물러 있을 그 많은 사슴 중에, 분명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마저 하멜이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멜은 아버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향내가 더 진동할수록 하멜의 가슴은 더 쿵쾅거렸다. 아버지가 끼던 그 반지, 지금 하멜이 끼고 있는 이 반지는 더욱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총독 완저의 차례였다.

 완저도 황제나 근위대장이 했던 것처럼 제단에 먼저 예를 올렸다. 그리고 역시 무릎을 꿇었다.

 하이란이 태조와 선왕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했을 때, 하멜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했을 때, 완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완저의 머릿속에는 다른 대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대상은... 전임 국왕 중 한 분인... *라이션(Lighcean)이었다. 자신과 함께 코지섬의 미개했던 원주민을 교화시키며, 코지를 낙원으로 만들던 바로 그분이었다.

 함께 거석상을 세우며, 함께 갤라(Gaela)산에 산다는 신선들에게 기도를 드리며, 함께 웃고 울던 바로 그 다정했던 분이었다.

 라이션께서 코지섬에서 운명을 다 하시던 날, 누구보다도 크게 슬퍼했던 사람은 바로 완저 자신이었다. 그의 시신을 수의로 감싸드리고 양지바른 좋은 곳에 묻어드렸던 사람도 바로 자신이었다.

 함께 척박한 코지섬을 개척했고, 함께 원주민을 사람하고 가르쳐서 그랬는지 몰라도, 비록 죽음이 이들의 사이를 갈라놓았을지언정, 영혼의 교감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 라이션=광해군을 모델로 하였으며, 실제로 광해군은 인조반정 이후에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나중에 제주도로 옮긴 뒤 거기서 숨을 거두었음.




 완저는 거석상 앞에서 라이션을 기리는 의식을 자주 했었다. 위기에 빠진 코르 왕국을 구하고 코르에게 힘을 보태어 달라는 소원을 그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런 세월이 쌓이고 쌓이면서, 완저는 이상하고도 신비한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거석상의 눈을 통해 라이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고, 거석상의 코를 통해서는 그분의 채취를 맡는 것만 같았다.

 완저가 기도를 드리면 드릴수록, 그런 느낌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지금 완저는 코지섬에서 천리보다도 더 떨어진 이 화노블산의 꼭대기에 올라... 제단을 앞에 두고... 라이션에게 다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코르에게 힘을 달라고... 황제에게 영광을 달라고... 간절히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           *           *


 에반(Evan)과 도르반(Dorban)을 필두로 지하 기지를 나와 코르(Corr)를 치기 위해 출정에 나선 퓨그(Fuug) 제국의 군대는, 산비탈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온통 눈과 얼음의 세상인 이곳에서, 병력의 손실 없이 코르의 본토로 진입을 하려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가는 것이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강의 최상류 지역이라, 강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곳의 물은 이미 꽁꽁 얼어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에반과 도르반은 군대의 병사들과 불곰, 늑대들의 이동을 위한 최적지를 찾아 그저 느긋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기고만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아무리 한겨울이라 하여도, 최전방에 몇 군데는 있을 법한 코르군의 정찰 기지가 지금은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말로만, 그리고 지도상으로만 양 국의 국경이 그어졌을 뿐이지, 솔직히 이 험난한 산중에 특별히 따로 담을 쌓아 올렸거나 철조망을 친 곳은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그만큼 오지 중에 오지였으며,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곳이라 더욱 그랬다.


 에반의 얼굴엔 한결같은 뿌듯함만이 남아있었다. 애송이 주제에 황제라고 칭한 어린 계집 하이란만 생각하면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장군 나리프(Nariff)와 토리크(Torik)도 실실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 번의 전쟁에서 크게 병력의 손실을 본 코르군의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더 그러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런 손실을 입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손실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에반과 두 장군에게 있을 거였지만, 이들의 기억에는 그런 과거의 악몽은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오직 눈앞에 당장 나타날 짜릿한 승리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하이란과 파르코, 또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를 도륙내야 하겠다는 그런 욕심뿐이었다.


 도르반은 이들의 이런 욕심을 보면서, 그저 흐뭇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욕심이 과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이들의 그 과한 욕심보다도 훨씬 더 과하게, 양 국의 전력에 차이가 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 정도로 차이나 나는 상태라면, 적당히 욕심을 부려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 욕심이 탐욕으로 더욱 커지는 호사를 좀 부린다고 하여도,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에 도르반의 충직한 심복인 대령 카오핑(Kaoping)은, 그래도 매사에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상관인 도르반의 호탕한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이 그의 밑에서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런 카오핑의 세심함을 또 놓치지 않고 엿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역시 얀스(Jans)였다. 지하 기지에 들어온 이후, 도르반을 알게 되었고 또 그의 수하인 여러 장군과 카오핑도 알게 되었다.

 남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칠 수 있겠지만, 얀스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람의 성격과 성향과 재능을 대번에 간파하고 기억하는 그런 천부적인 재주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재주를 넘어서, 어쩌면 먹이를 찾을 때 내뿜는 맹수의 날카로운 눈빛과도 같은 본능이었다.

 뛰어난 신체와 탁월한 무예를 갖추었지만, 매사에 늘 거만함과 경솔함만을 보이며 어디서든 덤벙거리는 에보크와는 이미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지하 기지를 떠난 이후 행군을 하면서는, 카오핑과도 대화를 나눌 기회를 일부러 계속 만들었었다.

 

얀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보크와 카오핑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이서 대화를 하고 있으면 왠지 균형이 맞는다는 야릇한 느낌이 생겨났다.

 에보크의 부족한 부분과 카오핑의 넘치는 부분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는,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을 저울추를, 둘의 존재는 완벽하게 평형으로 만들어주고 있다는, 그런 판단이 강하게 생겨났다.

 자신은 그저 지렛대의 받침점에 있다가, 어느 한 쪽이 약간 기울만 하면 바로 그쪽으로 한 발만 움직여주면, 수평은 이내 돌아올 것이라는 상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좌절할 필요는 없겠다는 희망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얀스는 늘 그랬다.

 힘들기는 해도 잠시 무너지기는 해도, 결코 지치거나 포기할 줄을 모르는... 그런 천혜의 체질과 감각을 타고난... 그런 탁월한 본능과 능력의 소유자였다.



 한나절을 이동한 군대는 계곡 안에서도 좀 너른 평지에 자리를 잡고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시간적으로는 아직 밤이 멀었지만, 계절은 이미 겨울로 들어섰고, 이곳은 첩첩산중의 골짜기 안이라 해가 무척 빨리 기울고 있었다.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해 더 이상의 행군이 무리라고 판단한 도르반은, 군사들에게 그만 저녁을 먹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불곰과 늑대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질 않았다.

 그놈들은 제법 배가 고파있는 상태였지만, 그들이 맡을 수 있는 것은 땀에 젖은 그리고 피가 잔뜩 묻은 코르군 병사의 군복이 전부 다였다. 군복 안에 넣어둔 살코기에서 흐른 피는 천에 이미 흥건히 배어있었다. 그러자 불곰과 늑대들은 다시 한 번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렇게 계속 흥분을 하란 소리였다. 흥분이 지나쳐 발광을 하란 명령이었다. 내일쯤이면 두크린(Duckreen)강의 어디쯤에 포진을 하고 있을 코르군을 만날 터이니, 그때 가서 적을 사정없이 물어뜯으라는 얘기였다.

 이게 바로 도르반이 노리는 치명적인 전략이었다.


 천막을 치고 그 안에 들어간 에보크(Evoke)는 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이 추운 곳에서 지금 이게 뭐 하는 것이냐는 투덜거림이었다. 아무리 자기 아버지가 하는 행동이지만, 그냥 가만히 놔둬도 될 일을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냐는 넋두리였다.

 그러자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던 카오핑은, 그냥 가볍게 웃기만 했다.

 아무리 혈기가 왕성한 나이지만, 그래 봐야 카오핑의 눈엔 이제 겨우 19살의 어린애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전쟁에서 에보크라는 저 아이에게 뭐 특별히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전혀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대장군이라는 신분이기에, 그 연줄로 이번에 경험이나 좀 쌓으려고 쫓아온 것이려니만 생각했다. 그 이상은 카오핑의 관심 밖이었다. 얀스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에보크라는 청년은 뭐가 어떻다는 둥, 뭐가 특기라는 둥, 뭐는 좀 아쉽다는 둥, 몇 번 떠들기는 했을지언정...


 야영지를 돌면서 마지막까지 임무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한 번 더 경계병들을 다그친 카오핑은, 그제야 피곤함을 느꼈는지 곧바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곁에 자리를 마련한 얀스는 달랐다. 잠이 통 오질 않았다. 천막을 나와 밖에 남은 군사들과 잠시 손짓 발짓을 더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는 몇 발을 더 움직여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날은 계속 어두워져, 이제는 하늘에도 별이 총총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하늘이 맑았다. 바람도 거세거나 아주 차지가 않았다. 아무리 산을 내려왔다고는 하나 해발고도로 보면 그래도 아직은 꽤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왠지 바람이 포근하게 얀스에게 느껴졌다.

 문득 코지(Cozee)섬이 생각났다. 갤라(Gaela)산 생각도 났다.

 하멜 왕자를 태우고 다시 한 번 동방 원정에 나섰다 뜻하지 않게 풍랑을 만나 침몰한 스페르(Sperr)호 생각이 우선은 났다. 하멜 왕자와 자신만 남겨놓고는 안타깝게 그냥 바다의 제물이 되었던 그 많은 원정대원 생각도 났다.

 어느새 얀스의 눈은 서글프게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네론(Nehron)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 얀스는 그때 하멜 왕자를 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동시에 다른 대원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하멜 왕자의 목숨과 그들의 목숨을 맞바꿔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에 얀스는 망설임 없이 하멜을 선택했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고 늘 자위하고 살았다. 그래도 저 세상으로 먼저 간 대원들에 대한 미안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늘 가슴이 아렸고, 그들의 넋을 늘 위로했고... 또 그들과 함께 꿈꾸었던 조국의 밝은 미래를 이루어내는 길은, 결코 여기서 좌절하지 않는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하멜 왕자와 자신, 둘만 남겨진 상황에서, 낯선 곳의 지형을 일단은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거대하게 솟아오른 갤라산의 기슭을 따라 정찰을 떠났었다.

 그리고 첫날의 정찰이 거의 다 끝날 때쯤,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큰 계곡을 만나 거기서 야영을 했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낯선 곳에서 그렇게 첫째 날을 보낸 시절이... 지금으로부터 한 1년 전쯤은 되는 것 같았다. 그날 정찰을 멈추고 야영에 들어갔던 시각도 마침 지금과 비슷한 것 같았다.


 하멜 왕자가 더욱 보고파졌다.

 황제 하이란의 근위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그저 궁금하기만 했다.

 호크런(Hawkrunn)과의 일대 결전을 위해 맨츠(Mantz)로 올라올 것이라는 첩보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멜 왕자를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인지, 우선은 그게 답답했다.

도르반과 에반이 코르군을 기습해서 전과를 올리면, 이들은 코르의 본토 깊숙이 진격을 할 것이 뻔했다.

 하이란과 코르군이 호크런을 상대하려고 맨츠로 향하고 있을 때, 도르반과 에반은 그 뒤를 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고, 아니면 아예 코르의 수도인 한즈로 그냥 내려가서 무주공산을 바로 점령을 해버리겠다는 속셈도 역시 존재했다.

 하이란과 코르군의 보급 부대를 중간에 괴멸시켜버리겠다는 전략과도 일맥상통했다.

뭐가 되었든 얀스가 다시 온전히 하멜 왕자를 만나, 둘만 몰래 탈출을 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길로 빠지고 있었다.


 카오핑과 에보크와 아주 가까운 관계가 되었기에, 이 난국에서 뭔가 그들에게 도움을 받던지 아니면 도움을 주던지 한다면, 어쩌면 하멜 왕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아직 하나도 없으니, 얀스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아직 답답하기는 전과 별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별빛은 더욱더 많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코지섬에서의 첫 정찰 때... 아마도 이쯤에서 자신이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하멜 왕자를 보고 싶지만, 오늘 할 일은 더는 남아있지가 않았다. 생각을 쥐어짜면 짤수록 머리만 아플 것이 뻔했다.

 일단은 내일 뜨는 태양을 보고, 아침을 먹고, 그리고 행동에 나서면서...그 다음 생각을 해야하는 것을 얀스는 잘 알고 있었다.


 갤라산에서 잠을 잘 때, 하멜 왕자가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자신을 잠깐 흔들어 깨운 것 같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뭐였는지는 얀스도 생각이 잘 나질 않았다.

 그냥... 그때... 그런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냥 그런 적이...

 그냥 그런...

 그냥......

 눈이 저절로 감겼다.


 *            *           *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별은 하늘에서와 똑같은 크기로, 똑같은 눈부심으로 저 밑에서도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적과의 결전을 바로 앞에 두고 어둠이 엄습한다고 느꼈었다.

 왠지 소름이 돋았다. 이처럼 고요함의 극치를 보이는 것이, 길조보다는 흉조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정작 까만 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방은 온통 별빛의 향연으로 가득했다.

머리 위에서는 은하수가 폭포처럼 내리쳤다. 하이란과 코르군이 야영을 하고 있는 산정 부근이라 그 빛이 더 거세어 보였다.

 그리고 땅에 부딪힌 별빛은 그냥 그대로 흩어졌을지언정, 라코븐(Lakoven) 호수에 부딪힌 별빛은, 온전히 반사되어 다시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황제와 코르군 병사들, 그리고 호랑이 군단은 지금 떨어지는 은하수 폭포에 몸을 씻고 있었고, 또 호수에부터 용솟음치는 은하수 온천물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하이란과 병사들은 처음 보는 이런 장관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멀리 들릴까 봐 보안상 포효를 하지는 못했지만, 호랑이들의 아가리도 이처럼 크게 벌어진 적이 전에는 결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내일은 분명 적과 조우할 상황이 생길 터였다. 그래서 더욱 긴장이 되고 살이 더 떨렸었다. 그런데 그런 초조함과 불안감을 녹여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은하수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화노블(Farnoble)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오로지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코르 왕국의 혼이자, 코르 민족의 기상이었다.

 지금은 그런 기운이 가득한 밤이었다.


 하멜은 갤라산 생각이 났다. 정찰을 시작한 첫날밤에 보았던 그 은하수가 생각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그리고 어디선지 날아와 하늘을 수놓았던 반딧불이 생각도 났다.

 그때처럼 지금 여기도 은하수의 천국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한겨울이라, 반딧불이가 있을 턱은 없었다.

하여간 그날 갤라산에서 반딧불이가 한데 모여 보여준 영상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첫날밤,

 동방 원정에 나섰던 대원들이 모두 수장되는 것을 지켜보며 울고불고 경악하고 좌절했던 바로 그 순간.

 그리고 다시 기운을 내서 정찰에 나섰다가 본 그때의 기억... 그런 생각이 지금 솔솔 피어올랐다.


 하멜 스스로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코를 신나게 골며 잠만 잘 자던 얀스를 흔들어 깨웠던 생각도 문득 났다. 얀스는 물론 잠에 취해 그저 잠꼬대만을 뇌까렸었다. 그런 얀스를 보면서 하멜은 참으로 감사의 마음을 다시 가졌었다.

 때론 아버지처럼, 때론 스승님처럼, 늘 하멜을 챙겨주고 하멜만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는 그에게 정말로 고맙다는 진심을 보냈었다.

 얼굴의 반은 지난 동방 원정 때, 아버지의 동방 원정 때 입은 화상의 흉터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는 늘 변함없이 아버지와 자신, 그러니까 네론 왕국의 왕실을 위해 모든 열정을 다 바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하멜은 늘 얀스를 믿었었고, 얀스에게 의지했고, 그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다 주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그때 그날, 프로스(Pross)궁 대전에서... 그 단 한 번의 판단 착오로 얀스가 역적의 무리에 포함이 되어버린 사건이 떠올랐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에반의 간악한 음모에 얀스가 잠시 눈이 멀었던 그 사건이, 하멜의 가슴을 더 쓸어내렸다.

 얀스는 너무도 하멜 왕자를 생각했기에, 코르 왕국 안에서의 인지상정보다는 오직 네론 왕국의 밝은 미래만을 갈망했기에... 그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때보다 더 이전에... 휘레스(Phoiress) 왕이 근신 중인 파르코(Parco)와 무기정학을 받은 생도들을 불렀을 때의 생각도 났다.

 그날 왕은, 그동안 에반은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아니 하지 않았던 지난 이야기들을, 그 자리에서 풀어놓았었다.

 19년 전 한즈의 하늘을 낮게 스치고 지나간 사라진 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별의 실체는 ‘황제의 별’이 분명할 것이라는 확신도 말했었다.

 모든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지만, 하멜의 머릿속엔 왕이 말한 그 별은, 자신과 얀스가 그토록 찾고 있던 ‘사자의 심장’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었다.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별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었다.


 그런데, 휘레스왕이 모든 걸 비밀로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바람에, 하멜은 그 당시에 그 별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얀스에게 하지 못했었다.

 그때 만약 하멜이 얀스에게 몰래 귀뜸이라도 해주었다면... 얀스는 결코 에반을 왕좌에 올려놓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 후회가 밀려왔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었어야만 했었다. 그랬어야 지금 하멜과 얀스는 한 몸이 되어 움직일 수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얀스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하멜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에반의 무리가 최전방으로 향하던 중, 국경 수비대원들을 죽이고 모두 탈출을 했다고는 하는데... 얀스가 지금 그 무리와 함께 있을지, 아니면 혹시 중간에 뭐가 잘못되었을지, 하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하멜은 그저 비통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얀스가 더 보고 싶어졌다.

 얀스의 신변에 어떤 이상이라도 생기면 안 되는데... 그는 어쩌면 자신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스승님 같은 존재인데...

 하멜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자꾸...

 자꾸 그런......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별빛은 호크런(Hawkrunn)의 눈 속으로도 쏟아지고 있었다.

 황제의 천막에서 잠시 나와, 황금마차를 세워 놓은 곳 근처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호크런의 그 무시무시한 얼굴도, 은빛 폭포수가 부딪히는 동안은 꽤 괜찮은 모습으로 보여졌다.

 대평원에 야영지를 잡은 퓨그(Fuug)군의 병사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지 오래였다. 그 평원보다 훨씬 더 넓은 대우주가 온통 은하수로 물들고 있는 것을 볼 기력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수도인 디퍼슨(Deeperson)을 떠나 며칠 동안 쉼 없이 맨츠(Mantz) 벌판을 달려 내려왔으니 그도 그럴만했다.

 함께 달려온 매머드들의 붉게 빛나던 눈동자도 지금은 모두 꺼진 상태였다. 고요만이 이 평원을 지배하고 있었다.


 호크런은 잠시 눈을 감고 팔을 들고 주문을 외웠다. 눈꺼풀 속에 숨어있어도 그의 눈알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서서히 찬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북극에서부터 발원한 ‘보라(Bora)’였다.

 냉혈족인 호크런이기에, 바람에 짙게 배인 고향의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더욱 강도가 세어졌다.

 잠을 청한 맨츠 부족 출신의 병사들은 무심코 옷과 이불을 다시 여미고 몸을 더 웅크릴 일이었지만, 태생이 북극인 냉혈족 병사들에게는 그저 다정한 바람을 느끼며 숙면을 즐기기에 딱 좋은 순간이었다.


 황제의 검은 망토가 점차 더 크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호크런의 주문에 북극에 있던 보라가 반응을 하여 이곳까지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일단 황제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황제의 몸 안에서 다시 한 번 에너지를 얻은 보라는, 이제는 황제의 망토를 통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호크런의 망토가 펄럭이면 펄럭일수록, 황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저 하늘 위로 거칠게 솟구쳤다.


 일정하게 떨어지던 은하수의 폭포도, 하늘의 중간에서 보라(Bora)와 부딪히니 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호크런은 다시 한 번 맨츠 벌판에 보라를 날리고 있었다. 남쪽으로 계속 계속 날리고 있었다. 이미 겨울에 들어서 사방이 눈으로 덮힌 맨츠 벌판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황제의 성미에 차지가 않았다.

 온 세상을 꽁꽁 얼려버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더군다나 유독 코르(Corr)에만 내려가면 힘이 약해지는 보라이기에 더욱 그랬다. 아직도 어떤 이유로 따뜻한 남풍 마프(Marp)가 그토록 코르 안에서는 위력을 발휘하는지, 황제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퓨그와 코르의 국경인 두크린강을 경계로, 계속해서 보라와 마프가 일진일퇴 힘을 겨루고만 있으니, 호크런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19년 만에 다시 황제인 자신이 친히 매머드 군단을 데리고 남정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코르의 모든 것을 도륙내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19년 전에는 코르의 왕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그의 아들들과 백성을 볼모로 잡아 디퍼슨으로 끌고온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지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코르라는 지역은 은근히 근심거리로 작용을 했다. 다른 식민지처럼 완전히 굴복을 하지가 않았다. 자신과 퓨그에게는 숨기면서 뭔가 계속 힘을 기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1년에 한 번 군사고문단을 보내 그 영토에 대한 모든 검열을 다 했고, 코르의 왕으로 하여금 백성을 쥐어짜내 조공을 계속 바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도 그동안 그대로 다 시행이 되었지만, 그래도 코르라는 이름만 들으면 뭔가 찜찜한 것이 계속 남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조공국으로만 두기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자신에게 반항을 할 역량을 몰래 비축하고 있음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호크런의 근심은, 저번에 맨츠에서 한 번 크게 충돌을 한 것으로 여실히 그 실체가 드러났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공군.

 자신만이 발명에 성공해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전투기들...

 또한 그런 전투기가 망망대해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퓨그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개발한 항공모함과 또 최신예 무기를 장착한 퓨그의 전함들...

 그런데 저번에 밝혀진 진실은 실로 황제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인덤스(Indumps) 해역까지 전진한 자신의 해군이 그곳에서 그만 전멸을 한 것이었다. 그 큰 항공모함에서 그 많은 전투기가 출격을 했는데도, 살아서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맨츠에서는 또 어땠는가?

 자신뿐만 아니라 코르도 공군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기도 있었다. 자신의 군사들보다 더 뛰어난 조종사들이 코르에도 있었다.

 그래서 적의 전투기 단 두 대로 인해 자신의 전투기들이 맥도 못 추고 공중전에서 그냥 당하기만 했다고 보고를 받았었다.

 그날 그 소식을 접한 순간의 소름을 호크런은 잊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르라는 이름과 지역은 그냥 호렌(Horen)의 역사와 지도에서 다 지워버려야만 했다.

 평범한 코르의 백성이라 해도 살려두면 안될 것 같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살려두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게 분명했다.

 가축은 물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코르에 있는 것이라면 그냥 모두 불태워 없애버려야만 한다는 확신이 이미 들어섰다.

 이 강력한 보라(Bora)를 몰고, 이 육중한 매머드를 앞세우고, 이 최첨단의 전투기들을 날리며 코르의 본토로 쳐들어가,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계획.

 그런 전략.

 지금 호크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            *           *


 두크린(Duckreen)강을 건너 적의 레도스(Redos)항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즉시 점령하고, 맨츠 벌판으로 계속 진격하라는 황제의 조류 통신은 아직 오질 않고 있었다.

 그래서 유스토(Usto)항에 집결한 코르군의 본진은, 결전의 시간만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샤키(Sharky)와 샤니(Shanny)는 보라호를 타고 편대의 가장 앞에서 날며, 다른 전투기들과 이번 공중전에서 새롭게 선보일 전술을 익히는데 집중했다.

 스푸든 대령은 해상으로 나를 보급품을 점검하며, 해군의 훈련과 전함의 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장군 파르코(Parco)는 육군의 일까지 전부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동안 육군을 좌지우지하던 에반(Evan)과 그 일파가 모두 역적의 무리에 포함이 되어 최전방으로 끌려갔기에, 지금 육군을 지휘할 경험이 있고 전술에 통달한 제대로 된 지휘관은 거의 없었다.

 황제와 근위대장, 그리고 완저 총독이 호랑이 군단을 이끌고 몰래 화노블산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유스토에 모인 전군을 통솔할 총사령관은 사실상 파르코가 유일했다.

 병사들도 그런 사정을 다 알기에, 파르코 장군의 명령에 잘 따르고 있었다.


 파르코는 부족한 말을 대신해서 맨츠 벌판을 달려줄, 코지섬에서 올라온 사슴들의 전력을 점검하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모든 사슴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며, 말과 사슴의 등에 올라 기마전에 대비한 훈련에 매진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챙기는 데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사슴들과 만나고 또 훈련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떤 사슴 한 마리의 행동은 파르코의 눈에도 더 유심히 들어왔다.

 뭔가 저 사슴은 다른 사슴과 움직이는 게 남달랐다. 특별했다.

 달리는 모습이나 속도도 더 우월했고, 방향을 틀고 또 돌아서고 위로 뛰어오르는 정도도 더 탁월했다. 그 사슴이 움직이면 다른 사슴도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근위대장인 하멜이 저번에 한 얘기가 문득 파르코에게 떠올랐다.

 처음 브로(Bro)강에서 사슴들을 보았을 때, 혹시 대장 사슴은 어디에 있냐고 하멜이 완저에게 대뜸 물었었다.

 황제도 완저도 또 자신도, 그저 코지섬의 신의 영역에서 함께 뛰어놀던 사슴을 보고, 이 중에 대장 사슴이 있니 없니 하며 물었던 당시 하멜의 행동은 좀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뭔가 하멜은 남들이 모르는 사슴에 대한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황제에게 잠시의 시간을 달라고 떼를 쓰고 나서는, 미친 듯이 사슴이 실린 배를 모두 다 뒤지고 다녔다는 얘기도 듣고는 있었다.

 그런데, 유스토에 와서 사슴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저 사슴 하나는 뭔가 행동이 남달랐고, 다른 사슴을 이끄는 것이 확연히 파르코에게 보였다.


 파르코는 그 사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사슴의 눈도 쳐다보았다. 시선을 한 번 맞추어도 보았다.

 어쩐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사슴의 눈이라고 치기에는... 저 눈... 저 눈... 저 눈동자... 내가 어디서 보았던 적이 있었나? 왠지 낯설지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목덜미에 난 털은... 일정한 방향으로 결이 났다가 중간에 살짝 들어가있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계속 묶여있던 흔적같았다.

 야생에서만 뛰어놀던 사슴이고 다른 사슴에게는 전혀 없는 것인데, 누가 이 사슴의 목에만 무슨 줄을 매어놓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혹시 하멜 왕자님이 말하던 대장 사슴은, 바로 이놈을 보고 한 소리일까? 배가 난파되어 얀스와 함께 섬의 정찰에 나섰다가 코지의 전사들에게 잡혔다고 들었는데 대장 사슴은 또 무슨 말이라는 것인가? 사슴의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혹여 있다고 해도 또 그게 이놈이라고 한다 해도, 하멜 왕자님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 이 사슴이 하멜 왕자랑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냐... 무슨 관계가 있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나 뭐 그럴 사건이 있던 적도 완저 총독은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사슴의 눈을 보고 있으면 뭔가 보통 사슴과는 좀 다른 게 분명하다... 나도 이제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겠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뭔가 모두에게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파르코의 뇌리에 맴돌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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