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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이옥봉의 사랑

몽혼(夢魂) : 꿈 속의 넋 

 

이옥봉(李玉峰), 본명 :  이숙원

 

생애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조 명종 갑자년(1564년)에 남편 조원(趙瑗)과 만났고 조원이 임진왜란 때 죽었다 하므로 1550~160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억측할 수 있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던 것이었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명나라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 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라는 젊은 선비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옥봉의 사랑을 알아차린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찾아가 딸을 첩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지만, 조원은 거절하였다. 이미 결혼하여 정실부인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조원의 첩이 되겠다고 자청한 딸.

옥봉의 아버지는 급기야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결국 이준민의 주선으로 옥봉은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것은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이후 옥봉은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조원을 따라 함께 지내며 몇 년 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낸 듯하다. 삼척으로 가는 길에 영월에서 노산군 단종을 생각하며 지은 ‘영월도중(寧越道中)’이라는 시가 있다.


          성문 밖 닷새길을 사흘에 넘으니                       五日長干三日越

슬픈 노래 부르다 끊긴 노릉엔 구름만 둥실           哀詞吟斷魯陵雲

이 몸 역시 왕손의 딸                                       妾身亦是王孫女

이곳의 두견새 소린 차마 듣지 못 하겠네             此地鵑聲不忍聞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爲人訟寃)>  

   

세숫대야를 거울삼고                          洗面盆爲鏡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으니              梳頭水作油  

첩의 몸 직녀가 아닐 지온데,                妾身非織女  

님인들 어찌 견우이리오.                     郞豈是牽牛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 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읊었다. 더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平生離恨成身病)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酒不能療藥不治)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길게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日夜長流人不知)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보려 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나 보다.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거나 사회적 보호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  (매화꽃 피면) 돌아오신다더니 어이 이리 늦으시나요
庭梅慾謝時(정매욕사시)  정원의 매화는 벌써 이우려 하는데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문득 가지 위의 까치소리 듣고서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열없이 거울을 보며 눈썹이나 그려요

 

 


댓글 6

  • 001. Lv.16 오화라

    16.06.06 16:46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었군요. 온몸을 시로 친친 감고 ...아아, 그 시혼...세세연년 빛나리...

  • 002. Lv.49 난정(蘭亭)

    16.06.08 13:58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아요^&^*

  • 003. Personacon 二月

    16.06.07 22:20

    옥봉님의 시가 정말 아름답네요. 사연은 더욱 기구하고 아름답네요.
    사랑하는 자의 아들이 명 사신으로 갈 때 시로 인연을 맺어주니 그 사랑과 정성이 하늘에 닿았네요.

  • 004. Lv.49 난정(蘭亭)

    16.06.08 13:58

    아, 이월님 너무 감사합니다. 저 아름다운 여인을 조명해볼까 해요^&^*

  • 005. Lv.49 스톰브링어

    16.06.20 20:14

    억지로 참고 있었던 시 창작욕망을 주검을 통하여 시 자체로 승화시킨 이옥봉은 조선의 가장 위대한 시인일 겁니다. 어떻게 이런 시인이 있을 까요? 사랑도 죽음도 막지 못한 시를 향한 옥봉누님의 열렬한 갈망! 멋진 소설은 진심 기대하고 고대하옵니다. 아! 기다리 고기다리 고 또 기다리고.....

  • 006. Lv.49 난정(蘭亭)

    16.06.20 20:38

    예에, 스톰님.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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