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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네크로맨서와 최후의 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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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작품등록일 :
2021.12.31 12:03
최근연재일 :
2022.01.15 18:00
연재수 :
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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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추천수 :
0
글자수 :
39,064

작성
22.01.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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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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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4화. 막무가내 네크로맨서와 슬픈에 잠긴 구울.

DUMMY

온통 핑크색 타일로 가득한 욕실에 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그렇게 수증기가 닿은 천장에는 이따금씩 맺힌 물방울이 목욕물 위로 자유 낙하했다.

물의 표면과 방울이 만나 일으키는 청명한 공명. 나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달싹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작은 소음에 요란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간단한다.

그건 바로 이곳이 그 누구도 아닌. 엣다 베릴다가 사용하는 욕실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다말고 죽어버린 내게 이 공간은 말 그대로 지뢰를 밟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나는 여기서 몸을 담그고 있는 거지···?”


마음을 진정시켜보고자 이곳까지 오게 된 일련의 과정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우선, 말동무라도 하라는 식으로 얘기가 끝난 직후.

그녀는 나를 데리고 이곳, <연옥>이라는 곳으로 들어왔다.


<연옥>은 그녀가 다스리고 있는 마을로, 모든 구성원들이 구울로만 이뤄진 공간이었다.

온전한 몸을 가진 녀석들도 있었지만, 다리가 하나 없다거나 내장이 쏟아지고 있다거나 하는. 기괴한 녀석들도 가득한 마을이었다.


내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도 나를 끔찍한 얼굴로 바라봤으니, 이 <연옥>이라는 마을에 관한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근데 왜 거기서부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


분명 서로 끔찍하다는 얼굴로 바라본 것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연옥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술을 잔뜩 퍼마시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말이다.


“물론 술 같은 건 먹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조금은 이 지뢰 같은 곳에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보랏빛이 감도는 욕조 물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도 뭔가 마음이 안정되고 말이다.


“설마 이러고 있는데 대뜸 들어오거나 하진 않겠지?”


나를 구울로 부활시킨 네크로맨서, 엣다 베릴다의 성격이 어딘가가 단단히 삐뚤어진 것은 확실하나. 그래도 예의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게 상식이니까.”


그러나 내가 믿고 있던 상식은 아무래도 이쪽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촤륵!


“언제까지 씻을 거야!”


커튼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도는 눈을 매섭게 치켜 뜬, 엣다 베릴다가 대뜸 고함을 내질렀다.


“우아악!”

“우아악―이 아니라고, 우아악이!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오래 기다려줄 시간 없으니까 빨리 끝내고 나오란 말이야! 내가 말했지? 3초 만에 나오라고!”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애초에 3초 만에 사람이 몸을 씻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3초는 좀 너무하지 않아요?”

“그래서 3분을 기다려줬잖아. 그럼 이제 다 씻었어야지. 그리고 애초에 너 쉬라고 내 욕조를 빌려준 게 아니거든? 오늘 할 일이 많으니까 빨리 하고 나와.”


나의 전라의 몸이 그녀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마치 그딴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냉정히 돌아선다.


“대답!”

“예! 넷!”


그제야 그녀는 만족한 듯 “다시 3분 준다!”라고 말하며 다시 커튼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린다.


체리 색 롱 헤어와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

새하얀 피부에 봉숭아물이 들 듯 불그스름한 볼.

고풍스러운 검은 드레스.

나는 바로 그녀의 999,999,999번째 구울이다.


왜 나를 구울로 부활시켰는가.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런 내 의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의 내 죽음은 온전히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 그녀가 나를 되살린 것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다시 인생을 살게 해줬으니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 덕분에 다시 얻은 이 목숨을 이번엔 헛되이 쓰고 싶진 않다.

그러니 그녀가 목적이 있어 나를 부활시킨 거라면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다.


물론, 잡몹 1 정도의 활약도 기대하기 어려운 허울 좋은 최후의 구울이지만 말이다.


“호오, 이게 바로 시체 냄새가 없어진다는 특제 비누라는 거지?”


나는 난잡하게 널브러진 궁금증들을 일단 한쪽에 치워두고 그녀의 명령에 따라 몸을 씻기로 했다.


오리 모양의 비누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거품을 내고 몸을 씻는다.

표백제 비슷한 냄새 사이에 은은한 아로마 향이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아참, 막 스물 살이 된 건장한 구울이 몸을 씻고 있다고 해서 ‘안대 끼고 백발의 멋진 다른 나라의 구울’을 상상하고 있다면 우선 사과하겠다.

나는 그 사람과 다르게 검은 머리인 데다가 안대도 쓰지 않았으며. 그저 조금 매서운 눈매와 그 아래 찍힌 미인 점만이 자랑인 푸르댕댕한 시체에 불과하니까.


“음! 역겨웠던 시체 냄새가 깨끗하게 사라졌네. 좋은 향이야.”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내게 그녀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나는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향을 느낄 수 없었다.


“후각이 예민하진 않나보네. 아무튼 옷은 이거.”


그녀가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나에게 후줄근한 트레이닝 상하의 세트를 건넨다.


“네가 입고 있던 옷을 조금 손 봐서 편할 것 같은 복장으로 새로 만들었어.”


솜씨를 발휘했다는 의기양양한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 모습에 조금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입고 있던 꽤나 비싼 옷들로 만든 트레이닝 복을 받아든다.


“응?”


잠깐만.


“마음에 들어?”

“으응? 이거 뭐, 뭐로 만들었다고요?”

“하하하, 놀랐지? 네가 입고 있던 옷으로 이렇게까지 기동성과 방어력을 갖춘 장비를 줄줄은 몰랐지?”


나는 구울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성, 엣다 벨라다는 나의 주인님이다.

보통 구울은 주인에게 대드는 법 없이 충성을 다하지만.


“이건 아니지이이이이!”


정말 이건 아니다.


“그게 얼마짜리 옷이었는지 알아요?! 거기다가 그 옷. 제가 데데, 데이트가 아니라. 고백하려고 준비한 최고의 코디였거든요?! 진심 룩이었단 말이에요!”


수능 기간 동안 공부마저 포기하고 열심히 웹서핑을 한 끝에 발견한 데님 팬츠에 하얀 폴라 티, 더블 코트라는 섬세하고 지적인―심지어 가격이 굉장히 비싼―스타일링이 어째서 집 앞 편의점 갈 때 입는 검은 삼선 트레이닝 복으로 바뀐 것인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기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왜, 왜 그래? 잘 만들어졌는데. 화를 내는 이유를 티끌만큼 모르겠는데?”


그러나 나의 주인은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재질부터가 다르잖아요, 재질부터가!”

“당연히 다르지. 내 마력을 주입해서 네가 아무리 찢어도 복구되는 옷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런 엄청난 기능이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격이 떨어지잖아요!”

“뭐? 격?! 지금 내가 만든 옷을 보고 격이 떨어진다고 한 거야?!”

“누가 봐도 삼선 트레이닝 복이니까 당연하죠!”


내 말에 그녀는 상처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구울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게 화가 난 것인지.

볼을 붉힌 채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린다.


“어차피 죽은 놈이 잘 보일 게 뭐가 있다고!”


앙칼진 외침과 함께 내 얼굴로 붉은색 목도리가 날아왔다.

어푸푸, 하고 볼라처럼 날아온 목도리를 살펴보니 고백 선물로 내가 준비했던 물건이었다.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봐? 참나! 저 목도리도 그냥 양말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애초에 구울이 패션이라니. 연옥이 발칵 뒤집히겠어!”


그녀의 말에 틀린 건 없다.

구울이 됐고 이젠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내게 비싼 옷들이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단순한 옷이 아닌 내 모든 노력과 다짐이 담겨 있던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구울이고. 그녀는 나의 주인이다.

그러니 이딴 분노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내 몸은 고개를 숙여 주인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빨리 갈아입어. 나갈 거니까.”

“아, 예.”


그리고 그녀의 명령에 따라 고분고분 옷을 입는다.

값 비싼 옷이었던 시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엄청난 편안함과 착용감에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만다.

물론 구울이라 눈물은 흐르지 않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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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심심한 네크로맨서와 심심풀이 구울 22.01.02 15 0 9쪽
» 4화. 막무가내 네크로맨서와 슬픈에 잠긴 구울. 22.01.02 20 0 9쪽
3 3화. 최강의 네크로맨서와 최악의 구울 22.01.02 21 0 10쪽
2 2화. 죽어버린 현실과 최후의 구울 22.01.02 26 0 9쪽
1 1화. 고백하려던 날에 인생이 고백(Go Back)했다. 22.01.01 41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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