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믿을 수 있는 사람
“ ..춘향.. 이라고 했나? 길드는? 설마 없는 건가? “
“ 맞아! 내가 사는 행성의 아주 오래된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야! 길드는 아직 없어! 그러는 너희는? 그 유명한 레베른 두 분께서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는지? “
솔직히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바보처럼 보였다가는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다프트 또한 춘향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한번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은 고의가 아니고서야 거의 없다.
한번 잠깐 보고 말 사이인데 솔직하게 말할 리가 없었다.
분명 길드를 밝히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 흥.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캘리 가자. “
“ 어.. 어? 버.. 버.. 벌써...? “
캘리가 춘향을 바라본다.
똑같은 검은 마나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 있던 일이라 가능하다면 최대한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나 보다.
춘향은 이 틈에 끼어들어 정보를 얻어내 보기로 한다.
“ 아니? 상관있는 일이 됐는데? 캘리를 만나버렸으니까 말이지? “
동시에 춘향은 자신의 가장 친숙한 한 손 낫을 만들어내 다프트의 목을 노려 휘둘렀다.
물론 그 공격에 살기는 담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강한 적이면 당연히 막아낼 테니까.
“ .. 검은 마나.. 이래서 캘리가 함께 있었군. “
춘향의 예상과는 다르게 휘둘러진 낫은 다프트의 목을 정확하게 베어내고 지나쳤다.
손에서 목을 베어버리는 감촉도 정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프트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 오... 뭐야? 분명 감촉은 있었는데 말야? “
어차피 2대1의 싸움이다. 거기다 매우 강한 두 명이기 때문에 장난이었다는 느낌으로 춘향은 다시 낫을 집어넣었다.
“ 놀랐어. 어딘가에는 있을 줄 알았지만 캘리같은 인간이 실제로 또 있을 줄이야.. 하지만 난 너희 둘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
“ 당연하지. 우리의 감동적인 만남을 방해하는 이물질 같은 녀석이란 걸 말야. “
춘향과 다프트는 서로를 째려본다.
그런 둘을 캘리가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그 순간
춘향의 낫과 다프트의 주먹이 동시에 움직이다 멈춘다.
“ 그... 그만... 그만해 둘 다..! 더.. 더 싸우면.. 나도 싸울 거야...!! “
“ 캘리. 괜찮아. 싸울 생각은 없는걸? 그렇지 않나? “
‘ 이 녀석 뭔가 마음에 안 드는군. ‘
“ 그럼 그럼~ 죽일 생각은 있었어도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호호호 “
‘ 이 변태 뭔가 맘에 안 들어. ‘
서로 마주 보고 입만 웃고 있다.
“ 어.. 그.. 그럼.. 다행... 에..? 죽일 생각..? 응..? “
그나저나.. 이 캘리의 속박.. 엄청나다.
온 힘을 다해도 풀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강력한 속박이었다.
“ 하아.. 일단 이거 좀 풀어줄래? 너가 묶어서 오히려 더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
“ 그래 캘리! 얼른 풀어줘. 이런 옷이라는 것도 모르는 변태랑 마주보기 싫거든! “
캘리는 겉으로만 봐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 그... 그.. 지.. 진짜.. 아.. 안 싸울.. 거지...?! 그... 그렇지...?! “
“ 그럼 그럼 친구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어? 더군다나 이렇게 붙잡아두면 빨리 이곳을 떠나라던 친구의 부탁도 들어줄 수 없는걸? “
그 순간 다프트가 캘리를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린다.
...이 속박 속에서도 머리를 돌릴 힘이 있다니.. 다프트에게는 조금 약하게 속박한 걸까?
“ 너. 어디까지 말한 거야? “
살짝 당황하는 캘리가 말하기 전에 춘향이 선수 친다.
“ 딱히? 딱 그 정도까지만 말했어! 절친이 위험한데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넌 친구도 없니? 하긴! 그러고 다니는데 친구가 있을 리가 있나! “
-까득
“ 다... 다프트...! 내.. 내 친구만큼은... 죽이면.. 안돼..! “
춘향의 계산대로 캘리는 춘향을 감싸주고 있다.
어느새 우연히 만난 사이였지만 절친이라고 말한 덕분인지 이제는 아예 춘향을 지키는 듯이 서 있었다.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용감하게 다프트에게 맞서고 있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다.
“ 근데 캘리~ 나 지금 당장에는 못 가는데... 내가 꼬~옥 갖고 싶은 유리 세공품을 제작 중이거든~ 쪼끔 있다가 떠나도 괜찮을까? 아니 애초에 언제 올 건지 알려주면 안 돼? 그 전에 완성해서 떠나게! “
“ 아.. 그..! “
“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캘리. 레베른을 배신할 생각이냐? 더 이상 우리의 계획을 함부로 떠들지 마. “
너무 깊게 파고들었나 보다.
자신들의 길드인 레베른까지 나온다면 아무리 춘향이 꼬드겨도 캘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여기서는 더 압박하는 것보다 친분을 더 다져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장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춘향의 입장에서는..
운이 나쁘다면 다시 만나서 싸울지도 모르니까...
“ 하암... 캘리 그렇다면 괜찮아! 나 때문에 캘리 너가 난감해지는 건 난 더 싫거든! 길드도 소중하니까 말야? “
오늘 처음 만났지만 자신을 친한 친구라고 불러주며, 같은 마나를 가진 춘향 역시 소중하다.
하지만 길드 역시 가족이다. 캘리에게는 정말로 소중하다.
그 사이에서 망설이던 사이에 춘향이 괜찮다고 배려해주자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그.. 그래도... 이대로면.. 죽.. “
캘리의 말을 끊고 춘향이 캘리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다프트가 다 들리도록 일부러 크게 귓속말을 한다.
“ 괜찮아~ 빠르게 여길 떠날게~! 대신.. 저 변태 자식 얼굴에 주먹 한 대만 부탁할게? 여자애 앞에서 저렇게 벗고 다니는 걸 마주치니까 너무 성적 수치심이 들어서 말야.. 부탁할게? “
-까득
다시 한번 다프트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려온다.
“ 만나서 반가웠어 친구야! 주위에 위험한 변태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몸조심해야 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 같은 친구들이 죽는 건 너무나도 싫거든! “
“ 아.. 으응..! 추.. 춘향 너.. 너도...!! 조.. 조심해...!! “
떠나가는 춘향에게 캘리는 손을 뻗어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지 못했다.
춘향이 떠나가고도 캘리는 한참동안이나 춘향이 떠나간 빈자리를 지켜본다.
“ ...그렇게도 반갑더냐? “
캘리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인다.
“ ..지금까지.. 사.. 살면서.. 처음 봤어... 춘향이도.. 나처럼.. 힘들었겠지..... “
“ ... “
캘리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다프트는 캘리가 레베른에 오기 전 과거가 떠오른다.
그때의 캘리는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지..
“ ...별자리가 한번 바뀔 때까지만이야. 그 이후에는 바로 보고하러 떠나겠어. “
캘리가 다프트의 배려에 떨림이 멈추고 환하게 웃는다.
“ 고... 고.. 고마워 다프트...!!! “
“ 가족끼리 고맙긴 뭘 고마워. 당연한 거지. “
순식간에 달려나간 춘향은 급하게 공방으로 돌아왔다.
“ 비상! 비상! 삐뽀삐뽀 큰일 났어! “
“ 시끄러! 집중 중이잖아! “
날이 갈수록 자신의 마나처럼 날카로워지는 아리나가 버럭 화를 낸다.
그런 아리나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번개를 춘향이 가볍게 흐트러뜨린다.
“ 에잇!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다들 안으로 들어와! 영감! 당신도! “
춘향은 메르티를 가리키며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방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 ....응? “
“ 쟤 평소에도 이상한데 오늘은 더 이상하네.. “
“ 괜히 할 거 없어서 투정 부리는 거 아냐? 굳이 가 줄 필요 있어? “
무슨 일이 있긴 해 보였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싶은 마음과 괜히 춘향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 반으로 가득 찬 라티안과 피렌, 아리나는 제자리에 있으려 했다.
그때 앨리스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 가자. 춘향의 마나가 불안해 보였어. “
“ ...앨리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 “
“ ...가자. “
공방의 안쪽 깊숙이 들어간 춘향은 자신의 그림자에 손을 넣고 이리저리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 분명.. 넣어뒀을 텐데...! “
“ ..뭐하냐? “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이리저리 손을 휘젓고 있는 춘향을 보고 라티안이 물어보았다.
“ 잠깐 기다려봐...! 여기 어딘가에.. 찾았다! “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일인지, 혹시라도 크릭이 와버린 것인지 슬슬 불안한 감정이 마음속에 스며들 때 춘향이 그림자 속에서 앨리스가 만들어 준 네엘을 꺼내 들었다.
“ ..네엘? 그건 왜? “
아무런 기능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몰래 무언가를 한 걸까?
“ 일단 이건 머리에 쓰고..! “
춘향은 네엘을 자신의 머리 위에 쓰더니 다시 그림자에 손을 넣어 찾기 시작한다.
“ ... “
“ 역시 저 자식.. 죽여버리든 무시하든 해야 해. “
아리나가 손에서 번개를 만들기 시작하자 다시 한번 춘향이 벌떡 일어났다.
“ 찾았다! 진짜 찾았어! 이거야! 이거! 우리 모두 봐야 해! “
춘향의 손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 ...지금 놀리는 거지? 저 자식 그런 거지? “
“ 아이참...! 잘 들어봐! 난 오늘도 별자리가 심상치 않아서 항상 별 보는 곳에서 놀고 있었는데! 우연히 캘리 레베른이랑 다프트 레베른을 만났지뭐야?!! “
그 순간 메르티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 ....때가 왔다는 건가...? “
춘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비슷하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신기한 거는 캘리 레베른이라는 남자애는 나랑 똑같이 ‘ 검은 마나 ‘ 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
이 순간은 모두가 놀랐다.
춘향과 같은 존재가 또 있다니..
“ 망령이 아니라.. 남자애..? “
춘향이 앨리스를 향해 캘리가 그랬던 것처럼 과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 응응!! 그 녀석은 그림자로 속박하는 마법을 쓰는데 나조차도 온 힘을 다했을 때 벗어날 수 있을지 미지수였어..! 그리고 다른 한 녀석은 변태자식인데..! .... “
일단..
정말 당황하고 급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았다.
춘향의 말이 평소보다 세배는 빠른 느낌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설명해 주고 있다.
“ 잠깐.. 잠깐만.. 야 멈춰봐.. 니가 과거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못 알아듣겠으니까..! 차근차근 말해!! “
“ 아이 거 참 멍청이들아! 딱 딱 알아들어야지!! “
“ 게다가 그 이야기만 하면 됐지 왜 갑자기 네엘을 뒤집어쓰고 토끼를 꺼내서 보라고 하는 거야?! “
아리나와 춘향이 점점 가까워지며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한두 마디만 더 하게 된다면 서로의 머리채를 잡아 뜯을만한 상황까지 도달했을 때 앨리스가 생각의 끝에 도달했다.
“ 그 마나.. 너가 만든 게 아니구나..? “
그러자 춘향은 활짝 웃었다.
“ 맞아!! 맞아 맞아! 역시 미개한 짐덩이들보다 훨씬 똑똑하네! 겉보기에도, 구조도 전부 내 마나랑 똑같지만 지금, 이 토끼는 내가 만든 토끼가 아니야! 캘리라는 녀석의 마나가 나한테 섞여들어 오면서 토끼 모양으로 변했을 뿐이야! “
모든 것이 춘향의 계획대로였다.
춘향은 확신했었다.
오랫동안 검은 마나를 지니고 살아갈 정도라면 마나에 대해서 춘향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렇게 그림자를 뻗어내 상대방을 강하게 속박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마나를 잘 다룬다면, 그만큼 똑똑하다면 틈이 있을 때 마나를 보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그것도 같은 ‘ 검은 마나 ’ 를 지니고 있다면..
캘리는 반드시 수를 쓸 것이다.
캘리의 호감을 사고, 다프트의 개입에도 태연하게 반응하며 캘리에게 계속해서 길을 열어준다.
그러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척을 하고,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인 것처럼 연출한다.
덕분에 캘리는 초조해했으며, 이렇게 귓속말을 하는 순간을 틈을 타 캘리는 마나를, 정보를 건네주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앨리스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춘향의 이런 사정 역시 잘 알고 있으며, 마나에 관해서는 춘향급으로 잘 알고 있는 앨리스가 같은 검은 마나를 지니고 있는 캘리의 정보를 이용하는 것이 걱정되어 물어본다.
“ ...이런걸.. 이용해도.. 넌 괜찮아..? “
“ 나? “
춘향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 이 우주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같은 마나를 가진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인인 우리뿐이야. “
- 작가의말
손이 빠른 친구들은 싫단말이죠...
저런짓을 해도 제 눈이 따라주지 않아서 체크를 할 수가 없어요.
뭐..
제가 원하던대로 흘러가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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