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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용사는 핵무기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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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유진숙
작품등록일 :
2023.09.03 11:30
최근연재일 :
2023.10.06 13:05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980
추천수 :
8
글자수 :
118,856

작성
23.10.0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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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0화 출범식

DUMMY

친절한 웃음으로 완전 무장한 접수원 아가씨를 보며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이 사람들이 확실한 거지?”

“예, 그럼요!”

“하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내게, 성녀가 술 냄새가 진하게 묻은 말투로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쪽이이···. 우리랑 같이 모험할 사람이야요?”

“어휴, 술 냄새. 백주부터 혀가 꼬인 성녀···. 이거 맞아?”

“쉬는 날인데 뭐 어때애? 자, 너도 한 잔 하자요오.”


팔을 붙잡고 자꾸 치근덕대는 성녀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추태를 보다 못한 마법사가 카드 뭉치를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를 잡아끌었다.


“이거 참,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평소엔 안 이러는데 술만 들어갔다 하면···.”

“정상인이 하나 있긴 했구나?”

“하하, 정상인이라니. 재밌는 단어를 쓰시는군요? 누가 보면 저희가 비정상인 줄 알겠습니다.”

“쓰읍···.”

“그런데 저희같이 중개료가 비싼 파티를 찾으시다니. 돈이 많으신가 보군요?”

“뭐, 남들 부럽지 않을 만큼은 있어.”

“그러십니까? 그러면 저랑 한 게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싫어.”


정말 이 파티에 한여름을 맡겨도 좋을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첫인상이 나쁜 모험가들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찾아볼까 고민하는데, 아까 봤던 대검을 맨 기사가 파티원들을 따끔하게 다그쳤다.


“새로 온 신입한테 무슨 짓들이야? 적당히 좀 해.”

“···그쪽이 리더인가?”

“맞아. 만나서 반가워. 난 더스틴이라고 해.”

“나도 반가워, 더스틴. 하지만, 이 파티에 들어갈 사람은 내가 아니고 여기 있는 이 엘프야.”

“네 옆에 있는 그 엘프?”

“그래. 내가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생겨서, 잠시 너희들에게 맡기려고 하거든.”

“우리 같은 A등급 모험가 파티에 넣으려고 하는 걸 보니, 엄청 중요한 사람인가 봐?”


A등급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없던 신뢰까지 샘솟는 기분이다.

덧붙여, 계약을 취소하려는 마음조차 쏙 들어갔다.


“내 제자라고 할까? 하여튼 계약 기간은 일주일 정도면 될 것 같아.”

“일주일? 좀 짧네. 우리야 상관없지만···. 한데 저 엘프는 주특기가 뭐야?”

“궁술. 레벨은 좀 낮지만, 활을 아주 잘 쏴.”

“궁수라고? 마침 우리가 찾던 사람이네. 아주 잘 됐어.”


나의 설명을 들은 기사는 한여름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은 더스틴.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지?”

“한여름. 여름이라고 불러줘.”

“한여름···. 독특한 이름이네. 앞으로 일주일간 잘 부탁해.”


진짜 정상인이 하나는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거기다 딴 건 몰라도 실력만큼은, 한여름을 성장시킨다는 목적에 딱 부합하는 인원들인 것 같다.

다른 파티원들의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지만, 일단 더스틴을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뭐, 평생 같이 다닐 것도 아니고 길어야 일주일일 텐데 아무 일 없겠지.


한여름이 파티원들과 가벼운 통성명을 하는 동안, 접수원 아가씨가 도장 찍힌 서류와 깃털 펜을 불쑥 내밀며 싱겁게 웃었다.


“아하하···.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뭐지?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제가 깜빡해버려서···. 여기 밑에 서명 좀 해주시겠어요?”

“이리 줘.”


[서명: 라피엘]


이 게임에 속한 어느 NPC가 그렇듯, 내 이름을 알게 된 접수원 아가씨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서명을 바라본다.

‘아니! 당신이 그 전설의 용사, 라피엘?’ 따위의 대사를 내뱉겠지.

이쯤 되니까 내가 무슨, 그들의 진짜 이름을 부르면 현세에 강림한다는 ‘위대한 옛 존재’가 된 기분이다.

아니지. 내가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이들에겐 내가 그런 존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설마 위대한 용사 라피엘 님?”

“···응. 맞아. 그게 나야.”

“와아! 그런 엄청난 분을 코앞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이 계약서를 길드에 걸어놔도 될까요? 방문 기념으로요!”

“마음대로 해.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정말요? 감사합니다! 라피엘 님이 왔다 갔다고 소문이 나면, 얼마나 많은 모험가가 찾아올까!”


접수원 아가씨의 요란한 반응에 길드 내에 있는 모든 모험가의 이목이 쏠렸다. 용기를 낸 일부는 내게 다가와서 사인을 해달라며 아우성치었다. 이러한 번잡함이 부담스러워, 더스틴의 파티를 이끌고 길드 바깥으로 나왔다.


“이런 게 피곤해서 웬만하면 내 이름을 안 밝혔던 건데···. 뭐, 그건 됐고. 잠깐 좀 걸을까? 너희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고 하니까.”


마구간으로 걸어가는 동안, 더스틴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 업적들을 읊어나갔다.


“아발로니아 대륙에 산다는 히드라를 맨손으로 잡으셨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런 몬스터를 어떻게 맨손으로 잡겠어.”

“잡긴 잡으셨다는 거죠?”

“자꾸 머리가 자라나서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랬었지.”

“우와! 슈니스타산에 사는 레드 드래곤을 잡았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가만 보니, 넌 기사가 아니라 음유시인인가 보네. 왜? 날 주인공으로 서사시라도 쓰게?”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나중에 내가 은퇴하고 나면 찾아와. 그때가 되면 네가 질릴 때까지 이야기해주도록 하지.”


아까 모험가 길드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더스틴은 꽤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다.

그의 조잘거리는 입을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꿰맨 후, 골드가 가득 든 돈주머니를 불쑥 건넸다.


“그건 그렇고, 내가 갔다 올 동안 여름이를 잘 부탁해. 여행 경비로 30골드를 줄 테니까, 그녀가 해달라는 것 있으면 다 해주도록 하고.”

“예? 30골드요? 그, 그렇게나 많이 주셔도 괜찮습니까?”

“너희들을 고용한다는 의미에서 주는 돈이니까 받아. 대신 받은 만큼 확실히 일해줘. 너희들의 최우선 임무는 여름이의 안전 보장이야. 알겠어?”

“무, 물론입니다!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라···. 아, 거기 성녀!”


아직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지만, 찬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한 덕분인지 성녀는 술이 어느 정도 깬 모습이었다. 나의 부름에, 그녀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목을 한번 풀고 난 뒤에야 대답했다.


“예. 부르셨나요?”

“술은 좀 깼어?”

“···못 볼 꼴 보여드려 죄송해요.”

“뭐, 네가 할 일만 잘한다면야 나야 크게 상관없어. 다른 건 아니고, 너한테 부탁을 좀 하려고 하는데.”

“말씀만 해주세요. 실망하시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 냉기 저항을 올려주는 마법이나, 막아주는 마법 쓸 줄 알아?”

“부족한 실력이지만, 할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여름이에게 꾸준하게 걸어줘. 추위에 엄청나게 약한 녀석이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자, 대충 전할 말도 끝났으니 출발해볼까. 슬라베스카로 돌아오면 그때 다시 보자고.”


# # #


늦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루트리가의 대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드는 저택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엘과 똑같은 메이드 복장을 한 하녀가, 내가 입고 있는 흉갑을 벗겨주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를 따라서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있던 다른 하녀들도 일제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게 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우리엘이 고개를 숙이며, 하녀가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게 다 뭐야, 우리엘? 집이 뭐가 이렇게 휘황찬란해? 여기 있는 이 하녀들은 다 뭐냐?”

“아, 손님맞이 때문에 약간 손을 좀 봤습니다. 여기 있는 하녀들도 그것 때문에 고용한 것이죠.”

“···손님맞이라니?”

“우선, 이것부터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엘이 건넨 두루마리를 뜯으니, 온갖 잡다한 내역이 적힌 청구서가 바닥까지 주르륵 펼쳐졌다.


“저택 수리, 붉은 비단, 닭고기, 만드라고라, 최고급 식탁보, 크리스탈 샹들리에, 고급 식기 세트, 고용인 100명 임금 기타 등등···. 합해서 무려 3천 골드라고?”


돈이라면 나도 많다. 수많은 몬스터를 해치우면서, 자연스럽게 모인 액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약속만 100만 골드를 제외하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대략 25만 골드(한화 1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불필요한 사치에, 무려 3천 골드(한화 120억)를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길게 늘어진 청구서를 다시 말고 있는 사이, 우리엘이 고급스러운 자재로 교체된 계단 난간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버려진 지 오래된 저택이라서, 수리비가 좀 많이 나가더군요. 크기도 무지막지하게 크잖아요?”

“미치겠네. 어떤 손님이 오길래 이런 거금을 함부로 막 쓴 거야? 누구 허락을 맡고···.”

“내가 허락했어.”


흑요석 동상 바로 위편의, 2층 계단 난간에 기대고 있던 마스테마가 우리엘을 대신해 답했다. 그녀는 난간을 뛰어넘어, 내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제국에서 가장 위세 넘치는 자들이 모일 자리에, 이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어?”

“···으리으리한 황궁을 놔두고, 왜 우리 집에서 하겠다는 거야, 프로젝트 출범식을?”

“난들 알겠니. 황제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나에 대한 작은 복수야 뭐야, 이거. 이 청구서 나중에 반드시 황제에게 전달해. 호구 잡힐 수야 없지.”

“그건 힘들겠는걸. 황제가 미리 ‘작은 오두막에서 출범식을 해도 상관없다.’라고 못 박았거든.”

“아니, 근데 왜!”

“너희 한국 게이머들은 이게 문제야. 돈은 쓰라고 있는 거지. 잔뜩 모아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고블린이야, 뭐야?”

“뭐? 고블린? 이게 자기 돈 아니라고 그냥···.”

“워, 워. 진정해.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할 돈 아니야? 쓸 땐 써야지. 이것 좀 봐. 집이 얼마나 근사해졌니?”

“···그냥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거네, 그럼. 아휴, 모르겠다. 잠이나 잘란다. 피곤하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성검 두 자루를 풀어, 우리엘에게 건넸다. 검을 건네받은 그녀는 방으로 향하는 나를 따라오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식사는 하셨나요? 바로 준비해드릴까요?”

“됐어. 오다가 샌드위치 하나 사 먹었어.”

“그러면 주무시기 전에 목욕하시겠어요? 뜨끈한 물을 받아놨는데.”

“흠, 그건 좋네. 눈보라를 맞았더니 좀 씻어야겠어.”

“후후, 제가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드리겠습니다.”

“···됐어. 내가 알아서 씻을게. 애도 아니고 뭔···.”


[대저택의 목욕탕]


풍덩-


기분 좋은 향기의 입욕제가 풀어져 있는, 적당히 따뜻한 물이 내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져준다.

한여름이라면, 필시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겠지.

그 녀석, 나 없이 모험은 잘하고 있으려나.


똑- 똑-


“뭐야?”

“등 밀어드릴까요?”

“고맙지만 됐어, 우리엘. 지금은 좀 조용히 쉬고 싶어.”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러시든가···.”


대리석으로 만든 독수리 조각상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고 내일 있을 출범식에 대해 떠올린다.

남들 보여주기 좋아하는 황제가 분명히 나에게 멋진 축사를 부탁하겠지.

뭐라고 하지? 오펜하이머가 인용했다는 유명한 힌두교 경전의 어구를 따라 쓸까?


이때까지만 해도 난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 있을 출범식이, 나의 정치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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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화 23.10.02 42 0 13쪽
16 16화 슬라베스카의 노예 사업 23.10.01 24 0 13쪽
15 15화 23.09.30 24 0 13쪽
14 14화 23.09.28 27 0 13쪽
13 13화 23.09.27 3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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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 피바람은 우르사 강물을 마신다 23.09.25 35 0 13쪽
10 10화 뜬금없는 변심 23.09.24 33 0 13쪽
9 9화 23.09.23 34 0 12쪽
8 8화 루트리가 대학 23.09.23 36 1 12쪽
7 7화 23.09.22 30 0 12쪽
6 6화 [팁: 알고 계셨나요?] 23.09.21 37 0 12쪽
5 5화 23.09.20 45 0 13쪽
4 4화 23.09.19 6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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