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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성 님의 서재입니다.

삼국지 - 들개의 머리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필성필성필
작품등록일 :
2020.01.29 23:32
최근연재일 :
2021.11.18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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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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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3장 39화 – 유언과 유굉, 유씨의 이들이 품은 뜻(1)

DUMMY

황충의 대우, 그 하나를 놓고 어느새 여기까지 이르렀다.


진짜 옆길로 잘 새는 것 같은데 심지어 혼자서 이리 잘 놀고 있을 줄이야.


“이거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이 환생했나?”


더는 기억하지 못할, 더는 느끼지 못할 젊은 몸뚱이가 자리하고 있으니 절로 제 뇌와 심간 또한 같이 젊어지고 어려진 느낌이다.


제가 저를 보는 것이 마치 제가 아닌 다른 객체를 관찰하는 것 같은 객관적인 느낌이 다 드니 말이다.


“거기서 뭣 하는가? 어서 올라오게. 그래도 봄이라고 꽃들이 제법 예쁘게 피었어.”


어느새 언덕 위에서 손짓과 함께 저를 부르는 유언이 제 눈에 들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연유는 제가 언덕을 올라 그와 마주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부족하나마 정갈하게 꾸며진 술자리는 주변에 자리한 풍광과 어울려 묘한 운치를 주는 듯 했다.


내리쬐는 햇살과 더불어 꽃내음이 주변에 만연했고 그와 함께 생기를 보이는 녹읍들의 향연이 절로 사람들의 눈을 호강시켜주었다.


각자의 자리에 마련된 작은 주안상과 함께 유언을 포함한 수십의 이들은 그 풍치(風致) 속에 즐거움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하게 산다는 것이 남들에 비해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 언제고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지. 이미 그 이전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긴 것들이 많아 오감이 호강한 터라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다 못해 그에 대한 반발마저 일게 되었다.”


하긴 제 전생의 부자들만 못해도 이 시대의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아왔던 그다.


그런 그에게 있어 그 어떤 도시의 향락과 사치가 도성에서 제가 즐긴 것만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


“그에 비해 이 자연은, 산천초목은, 흐드러지게 핀 꽃은 언제고 질리기는커녕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평안하면서도 경탄하게 만들지. 참으로,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아마 이곳에 자리한 이들 또한 나와 같진 않아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야. 황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참된 사인에게 있어 도가 지나친 사치와 향락 그리고 계집질과 폭음은 어울리지 않은 것이니까. 다만, 적당한 것은 또 나쁘다고만 할 수가 없지. 누군가는 욕구와 욕망은 다르니 욕망을 경계하라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지 않아.”


이는 실로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 존재에 버금가는 정당성은 간단한 의의제기마저도 그만의 색채를 드러나게 만들고 있었다.


“욕구가 본능이라면 욕망은 그 본능을 넘어선 것이지. 그리고 이는 사람들에게 저를 그려나갈 바탕이자 지표, 지향점, 목적 등이 되어주네. 권력자의 야망만이 욕망이던가? 사대부의 청욕 또한 욕망이야. 나라를 올바르게 만들려는 것, 만인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하는 것, 요순시대를 꿈꾸는 것 또한 욕망이지. 일례로, 지금 여기에 자리한 이들 또한 제각기 그 욕망의 이끌림에 의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생각하네. 뭐,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 자네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두 팔을 벌리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유언의 태도에 주변에 자리한 모든 이가 그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마치 사극 속에 그 대미를 장식할법한 권력자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명장면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사극의 조잡한 연출 따위로는 저 그림을 도저히 표현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그 정도로 지금의 제 눈에 비친 풍경에는 은은한 감동이 실려 있었고 이는 묵직한 권위가 되어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군. 허면 다들 내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겠지?”


그의 물음에 또 다시 주변에 자리한 모든 이가 그 고개를 숙이며 암묵적 동의를 표했다.


이제 고작 연주 근방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뭣하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양반은 진정, 그림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자,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동의를 하였으니 이는, 나라고 다를 바가 없다. 그 욕망에 이끌려 이 자리까지 왔고, 그로인해 내 욕망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했지. 하여 이리 훌륭한 장소를 잡은 자네에게, 그간에 이곳 양읍에서 벌어진 일을 수습한 자네에게, 하늘을 대신하여 그 하늘을 욕보이고 이용하려했던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죄인들을 척결하고 그 위엄을 바로 세운 자네에게 그 공훈을 치하한다는 의미로 술 한 잔을 내리도록 하겠네. 지금의 내 욕망은 나라를 걱정하는 여기 사대부들과 자네와도 같은 이 나라의 동량들이자 기재들을 치하하여 나라가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것. 허니 그대는 지금의 내 욕망을 위해서라도 내가 내리는 술을 받게나.”


수십 쌍에 달하는 시선들이 일거에 제게 쏟아져 내렸다.


유언의 손짓에 그를 호종하는 이들 중 하나가 한눈에 보아도 매우 귀해 보이는 술 한 병을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는 또 다시 손짓으로 제게 건넬 잔을 가져오라 시켰고 이에 그 귀한 술병에 비견 될 고급스러운 잔 하나가 제 앞에 놓이게 되었다.


“주병(酒甁)과 주잔(酒盞)은 본디 한 몸이지. 그 격이 맞지 않으면 맛이 나질 않아.”


그와 동시에 그는 그 귀한 술병을 들고 제 앞으로 다가와 제 빈 잔에 그득 술을 따라주었다.


언뜻 보아도 그 빛깔이 영롱한 것이 제대로 빚어낸 명주인 듯 했는데, 그 주향 또한 어찌나 기가 막힌 지, 제 주변에 자리한 이들이 주체를 못할 정도로 그윽한 향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진짜 명주 중의 명주인 모양이었다.


“내 처음에는 주변에 자리한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자네에게 공을 들이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얼추 알 것도 같네. 뭣 하는가? 어서 쭉 들이키게. 귀한 술이니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그 술 한 잔 제대로 받아보라는 것이었을까?


황실의 어른이 내리는 명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이름난 이들이 모인 술자리는 가히 그 술맛을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만드는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는 그만큼 제가 성장했다는 것이며, 그로인해 쟁쟁한 이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져도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금껏 제가 해왔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객관적 척도이기도 했다. 과거에 저에 비해 지금의 제가 어디까지 올라와 있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청량한 향이 코를 찌름과 동시에 순식간에 목구멍을 적시며 내려가는 명주의 물줄기는 가히 제 존재를 진득하게 일깨우는 듯 했다.


술이 독하다 아니다 하는 수준이 아니라 보다 깊고 깨끗하였으며 맑았다.


살면서 제법 괜찮다하는 술을 여럿 접했는데 이건 진짜 그 궤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후우-.”


“어떤가? 맛이 좋은가?”


유언의 물음에 저는 저도 모르게 그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술맛이 좋았다.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어주(御酒)인데.”


- 푸후우읍!


정작 놀라야 하는 것은 저인데 다른 곳에서 그 반응이 터졌다.


제가 오기 전까지 자유롭게 술을 즐기던 자리였으니, 제가 유언이 내려 준 술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이제 다시 자신들 또한 편히 마시면 되겠다 생각했던 이들이 몇 있었던 모양이다.


헌데 뜬금없이 어주가 튀어나오니 이는 가히 부정하지 못할 드높은 황은을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는 곧, 그 주변에 자리한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선사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거 그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의 감정을 대신할 이들이 나왔구만. 내 불을 뿜는 기예를 위해 술을 뿜어대는 이들은 봤어도 아무렇지 않게 그 술을 뿜어대는 이는 또 처음이로고.”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유언과는 달리 정갈한 술자리에 술을 뿜어댄 몇몇 이들은 급히 제 입과 그 주변을 닦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체통이 무너지고, 남들 앞에 민폐라 할 수 있는 못날 꼴을 보였으니 이는 어쩌면 사대부로써 당연히 부끄러워할 일이랄까?


그렇게 순식간에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지켜보던 유언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록 무례한 질문이긴 했다만, 그대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두고 나는 의문이 많았다. 물론, 황실을 능멸한 이를 척결하고 그 죗값을 치르게 한 것과 더불어 양읍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한 것까지. 대단하다고 하면 대단하다 할 수 있지만 어쩌면 반대로 관료로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지. 하여 폐하께선 면전에서 내게 그 의문을 허락하셨지. 해서 폐하께 물었다, 황실의 일은 그렇다 치더라고. 고작 이 정도 일을 했다는 것이 정녕 어주를 내릴 정도입니까? 하고 말이야.”


황족들이나 가능할 황제와의 대화라는 귀한 키워드가 나오니 그 어수선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이쪽을 향해 쏠린 것이다.


하지만 저는 유언이 이러한 이야기를 왜 지금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노리기에 제 어깨에 손을 올려가며 저들의 시선 안에 저와 자신을 집어넣은 것일까?


“허니 폐하께서 그러시더군. 잔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들이 잔속에 자리한 것들을 바꾸기 마련이다. 차도, 술도 그 병목을 따라 떨어져 내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영향을 달리 받게 된다. 하여 내가 받은 것은 충정(忠情)이다. 기존에 부정하고 음험한 이들에 대한 보고만을 받던 내게도 그간 잊고 지내야 했던 깨끗함이 찾아온 것이지. 하여 나는 떠오르는 의문을 품고 이를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유언의 이야기에 절로 주변에 자리한 이들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충정이라는 화두는 가히 신료들, 또 저와 같은 사대부들 그리고 나라를 위한 바름을 이야기하는 청류의 이들에게 있어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논쟁거리와도 같은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천하에 부정한 이들이 많다지만 그와 반대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간 기울인 노력은, 수습한 사태는 저 양읍에서 보고를 올린 신임어사의 것보다 크고 많을진대 그런 그들의 노고는 어찌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폐하께선 내게 또 이리 말씀하셨다.”


어쩌면 저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유언의 태도에 저들은 찰나의 호감을 보냈다.


허나 그 찰나의 호감도 뒤이어진 유언의 이야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의 규모가, 실적의 횟수가 중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중한 것이다. 제 아무리 이름난 충신이며 나라를 위해 성정을 펼친다하더라도 하늘에 대한 충정은, 신하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본분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들이 선정을 펼치는 것은 저와 제 학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일이며 그로 말미암아 백성의 추앙이 하늘이 아닌 제게 닿도록 하는 것에 있다. 악정을 펼치는 자들도 모자라 선정을 펼치는 자들까지 그 하늘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니 나 또한 이를 잊고 살았다. 하여, 더는 그 하늘을 위해 충정을 바칠 이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러한 본분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다들, 뜨끔할 것이다.


언중유골이라고, 유언의 입을 통해 전해진 영제의 언사는 작금의 사대부들에 대한 이유 있는 비판이자 힐난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저리 다들 그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지.


아까는 유언이 왜 제 어깨를 잡았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는 얼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유언이 택한 저는 영제의 선전물인 셈이다.


헌데, 이게 대체 노림수가 몇이야?


지금의 제 머릿속에 돌아가는 것만 따져도 얼추 네, 다섯은 된다.


청류든 탁류든 하늘에 대한 충정을 일깨우며 기존의 구도와는 다른 판을 짜려는 것이 하나.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저만의 지지기반을 만드는 것이 둘.


그간 퇴색 된 하늘의 위엄과 위계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 셋.


기존의 다툼을 벌이는 청류와 탁류의 기조 사이에 하늘에 대한 충정으로 언제든 그 저울추를 뒤바꿔줄 수 있음을 암시한 천권의 어필이 넷.


그리고 뭐 여러 부수적인 부분까지 따지면 그보다 더 나아가 더 많은 노림수가 있을 것 같은데, 진짜 영제가 난 놈은 난 놈인 모양이었다.


헌데 그러한 영제의 영민함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그보다 더 못나 보이는 헌제는 뭐지?


호부견자라더니, 어째 견부보다 못한 호부보다 멀쩡한 외관을 지녔어도 그 속은 더한 견자였던 것인가?


하긴 본래 역사상의 헌제는 뭐, 동탁 앞에 위엄을 보여 동탁이 황제다움을 느꼈다고 해했지만, 실제로는 유변보다도 더 허접했다는 주장도 많다.


그래야, 제 꼭두각시가 되기 좋을 것이며 제 말을 가장 잘 들어먹을 것이 아닌가?


다만 그러한 하늘을 강탈한 권력자가 저 스스로를 돋보이기 위해, 헌제를 조금 추켜 세워준 것이라면, 이 또한 얼추 이해가 간다.


특히나 동탁을 비롯해 그 그림자라 할 수 있는 이각과 곽사라는 마수로부터 도망쳐 나온 헌제는 하늘로 승천했던 용이 추락하며 떨어트린 여의주나 다름이 없었고, 이미 한 번 다른 용에 입에 물려있어 그 침이 범벅이 된 여의주를 또 다시 제 입에 물고 승천을 꿈꾸던 조조는, 당연 저를 위해서라도 제가 문 여의주가 중고품이 아닌 새것마냥 반짝이며 깨끗하고 빛깔이 더욱 영롱해야만 했기에 그 여의주의 광택을 내는데 갖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인 조비 또한 제가 황위를 선양받아야 했기에 헌제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는 빛이 나야, 자연스레 이를 선양받은 저는 그보다 더 빛날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상대적 스포트라이트를 그에게 준 셈이랄까?


헌제는 억지로 빛날 수밖에 없었던 호적수이자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하여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그 충정의 맛과 향은 그 어떤 어주로 쓰일 명주와도 비교할 수 없으니 부족하나마 그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 대가라고 하시며, 자네에게 어주를 하사할 것을 명하셨네. 헌데, 어째 그리 분위기가 좋은 것이 아니군.”


여하튼, 그리 생각을 멈추지 않는 와중에 제 입으로 폭탄을 터트려놓고 넉살 좋게 그 분위가 별로라 하니 저 유언 또한 대단하다면 참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저도 한 뻔뻔은 한다 싶었는데, 저렇게까지 양심의 가책이 없을 정도로 상대를 후벼놓고 모른 체를 하는 유언을 보며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는 것을 알았다.


“허면 이리 음울해진 분위기를 뒤바꾸기 위해서 이 사람은 잠시 빠져주겠네. 대신 자네들끼리 편히 마시고 편히 즐겨봐. 여기, 동부를 비롯해 저기 상경의 길에 그 이름을 날린 무장도 있으니 그 무용담이나 예언 등을 논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좋겠지.”


유언은 눈짓으로 제 휘하의 황충과 함께한 동부를 가리켰는데 저는 저도 모르게 유언을 향해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 사람을 아끼는 것도 좋은 일이야. 허나 대붕(大鵬)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범인(凡人)들은 미리 떨어트려 놓는 것이 상책이지. 자네는 어떠한 선택을 내리겠나? 대붕인가 그도 아님 범인인가?”


여전히 제 어깨에서 손을 내리지 않았던 그는 저들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제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까?


저들이 분명 다른 군웅들에 비해 일찍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들이긴 할지라도 범인이라 매도할 정도로 무능력한 이들은 아니다.


용이나 호랑은 못 되어도 청성하고 고아한 백로나 두루미 정도는 되는 이들이었고 그 나름이나마 역사에 스스로의 족적을 남겼다.


물론, 그래봤자 하루에 구만리를 나는 대붕만 못하겠지만.


“분명 재미를 위해서라면 대붕보단 범인을 택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만, 저 또한 욕망을 지닌 사람이니 대붕을 택해야겠습니다.”


“하하하하!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았군. 허면 이제 어찌할까? 아무래도 따로 장소를 잡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세상에 어딜 가든 쥐와 새가 있으니,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듣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했습니다. 허니 만일 그 대붕이 품은 것이 남들 앞에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것이라면 어디에서인들, 부끄럽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부끄러운 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겠습니까? 허니 그와 반대로 당당하다면, 그 속에 품은 것이 어디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면 저를 따르십시오. 꽃구경을 하며 산책하기 좋은 날이 아닙니까?”


유언은 그런 저를 보며 멈칫했다.


허나 이내 이글거리는 눈빛과 함께 또 다시 제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가, 확실히 사람 하나는 잘 보았군.”


그렇게 술상이 차려진 장소를 벗어나 저와 유언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용역을 벌이는 이들이 공사를 벌이는 현장이 눈에 들어오는 강변 위의 또 다른 언덕에 자리를 잡았는데 역시 그 풍광이 좋은 곳이라 그런지 주변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만일, 간자가 있으면 어찌하려고?”


“간자를 논할 정도로 속에 품고 계신 것이 검습니까?”


“아니,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크네. 너무 커서, 하늘을 뒤덮을까 그것이 문제지.”


설마,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다.


이 양반이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아직 황건의 난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러한 꿈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간자에 대한 신경은 끄십시오. 초목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와 함께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있고 또 저 강변의 물줄이가 우리의 이야기를 지워낼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발견한 간세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새들이 알아서 알려줄 것입니다.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니, 제 영역에 침입한 침입자를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허어! 듣고 보니 그렇군. 진정 그러함이야. 헌데 내 왜 진즉에 이를 생각지 못했을까?”


유언은 적잖은 감탄과 함께 다시금 제 주변에 자리한 경치를 훑어보았다.


빽빽한 초목과 함께 바람이 불었고 나무 사이사이에 자리한 새들의 둥지가 보였다.


“가을이나 겨울이라면 또 모를까. 저리 수목 위로 녹읍이 자라나기 시작한 지금에선 지켜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허니 이제 더는 간세 걱정은 마시고 편히 말씀하십시오.”


“편히라, 편히. 하지만 자네는 내 사람도 아닌데 어찌 편히만 말할 수 있을까?”


“허면 알아서, 거를 것은 거르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정작, 그 시작은 유언에게서 시작되었으나 저는 끌려만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약간은 도발적 언사를 보여 그를 끌어내는데 성공했고, 지금 이리 그와의 대화에서도 적잖이 괜찮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자, 허면 이제 그 본론은 무엇이 나오려나? 사실, 알면서도 절로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그래서 유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인데 어쩌면 저는 지금 역사의 일면과 마주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네는 형주사람이지?”


“종정께서도 형주에서 태어나셨나보군요.”


“강하에서 태어났네. 산 좋고 물 맑고 뭐, 좋은 땅이지.”


“실로 그러합니다.”


“하지만 좁아.”


저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 양반 도참설에 심취한 것으로 유명하더니 이거 아주, 땅에 환장한 사람이다.


“장강이 좁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땅이 좁아, 땅이. 그 지세도 뱀 같은 것이 뭔가 느낌이 이상하고. 남들은 남양 땅의 중심에 자리한 완을 용란(龍卵)이나 봉란(鳳卵)이라 부른다지?”


“남양은 또 왜 물으십니까?”


이 부분은 저도 모르게 뜨끔하긴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그저 왜 땅 얘기만 하냐는 식의 반응을 보여야 했다.


“비록 한때지만 남양태수였으니까. 헌데 내 후임으로 들어온 놈이 중상시 곽승과 손을 잡을 줄은 몰랐어. 내 알기로 그놈이 눈치는 좋은데 딱히 배경은 없는 놈이었거든. 뭐, 이제는 또 다시 태후마마 일가의 손에 들어갔지만 뭐 어찌되었든. 내 말하고자 하는 요체는 이거지.”


후우, 곽승의 이름이 나왔을 땐 진짜 소름이 돋는 듯 했는데 금세 지나가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땅을 사랑하는 이가 아닌가?


“지세(地勢).”


“지형 말입니까?”


“그래. 그 지세(地勢). 지세는 땅의 모양이나 형질을 말함이나 나는 이를 기운이라 해석하네. 그리고 그 땅의 기운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 하늘마저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 제 아무리 천변만화하는 하늘도 드높은 산비탈을 만나면 절로 구름이 비를 내릴 수밖에 없고, 그 지세가 하늘을 꿰뚫는다면 능히 구름마저도 호수와 바다처럼 담아낼 수 있네.”


분명 전생의 기억 속에서도 어디에선가 구름폭포와 구름바다를 볼 수 있다 들어본 것도 같다.


새벽녘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보다 낮은 곳에서 생성된 구름들이 모여들어 지세를 넘지 못하고 그 안에 고여 찰랑대는 물결마냥 움직인다고 하여 장관이라던데, 지금 유언이 말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은 바였다.


“허면 그 땅은 대체 왜 그렇게 생겼을까? 이는 분명 그 땅이 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야. 내가 아까 강하와 완의 지세를 이야기했었지?”


했던 말을 다시 확인하면서까지 강조하는 그를 보며 저는 적잖은 답답함을 느꼈지만 이것이 바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실제로 땅에 관한 이야기는 제법 신기한 것들이 많은데 마치 운명처럼 유명인이 태어날 것이라느니, 사람들이 불리는 지명으로 인해 그 땅의 운명이 변할 것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제 전생에 기억 속에서도 적잖이 많았기에 이해는 하겠다만, 그 하나만 보고 사는 것은 조금 아니지 않은가?


거 왜 사람의 운명을 살필 때에도 사주팔자와 명리, 관상, 성명 등 많은 것을 겹치고 또 겹쳐야지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고작 하나의 분류만으로 때려 맞출 수야 있겠지만 분명 그것이 정확한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익주에 황제의 기운이 있다하여 갔던 유언이지만, 정작 황제가 되었던 사람은 유비였으니 그 대상이 저나 제 아들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날아가 버린 셈이다.


“강하는 머리가 정해지지 않은 뱀일세. 동쪽이든 서쪽이든 무언가를 삼키기 위해 통과하는 통로와 같아. 해서 그런지 내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말들이 많았어. 뱀이 태어나는 땅이라느니 이무기가 태어나는 땅이라느니 하는 소리들 말이야. 그에 비해 완 또한 용알과 봉알이 자리했다 하니 말이 제법 많았지. 남양 땅을 둥지라고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용알은 알겠는데 봉알? 보......, 봉알? 크흠.


어째 그 어감이 이상한 것이 절로 불편해지고 있었다.


봉새가 알을 두 개 낳으면 싸, 쌍봉......, 아, 아니다. 제 입이 막 간지러워지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욕을 먹지 않으려면 이쯤 하고 접어 두는 것이 좋겠다.


“친한 지관(地官)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땅에 대하여 아시는 것이 많으신 듯 하니.”


그렇게 아저씨들도 웃지 않을 저열한 언어유희를 접으며 저는 화제를 돌렸다.


“풍수지리야 어릴 적에 다 떼어버렸지. 재미있는 것은 그 흥미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배워두는 것이 좋아. 언제가 써먹을 일이 있을 때, 그때 제대로 배워둘 걸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일이 될 테니까.”


이제 슬슬 그 본론이 나올 차례인데 아직도 나오지를 않으니, 생각보다 저돌적이었던 저로 인해 유언이 조금 조심하는 모양새로 나온 것은 아닐까한다.


허면 지금의 제가 어찌 해야 할까?


시간은 금인데, 지금의 자리를 마치고나서도 또 이름난 사인들을 하나씩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고작 빙빙 겉면만 도는 일로 시간을 축낼 수 없으니 억지로라도 그 본론을 끄집어내 줘야한다.


“해서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해주시는 연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빤한 말이겠지만 막상 이리 닥치고 나니, 그 빤한 말을 할 수밖에 없더군. 내 사람이 되어주게. 그래야 앞으로의 대화를 더 진행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그래도 이쯤 되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조등의 관심도 받았고, 조조와 그 형인 백덕의 호감도 받았다.


이뿐인가? 곽승은 저를 아끼고, 하운 또한 조금 그 궤가 다르긴 하다만 저를 수하로 두고 싶어 했다.


거기다 이제는 저 유언까지.


“빤한 말에는 빤한 대답이 들려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전에 앞서 저를 택한 그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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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들개의 머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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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3장 62화 – 짧은 만남 그리고 보다 긴 이별(3) 20.11.05 316 11 24쪽
252 3장 61화 – 짧은 만남 그리고 보다 긴 이별(2) +2 20.11.04 310 10 24쪽
251 3장 60화 – 짧은 만남 그리고 보다 긴 이별(1) 20.11.03 316 11 25쪽
250 3장 59화 – 들개는 이리와 연을 트고 싶다(2) 20.11.02 322 9 22쪽
249 3장 58화 – 들개는 이리와 연을 트고 싶다(1) +2 20.10.31 348 11 26쪽
248 3장 57화 – 개 같은 뱀, 뱀 같은 이리 20.10.30 321 9 23쪽
247 3장 56화 – 백정의 피가 흐르는 개가 황실의 피가 흐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우다(5) +4 20.10.29 327 13 28쪽
246 3장 55화 – 백정의 피가 흐르는 개가 황실의 피가 흐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우다(4) 20.10.29 316 9 19쪽
245 3장 54화 – 백정의 피가 흐르는 개가 황실의 피가 흐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우다(3) +2 20.10.28 294 9 22쪽
244 3장 53화 – 백정의 피가 흐르는 개가 황실의 피가 흐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우다(2) +2 20.10.27 326 11 26쪽
243 3장 52화 – 백정의 피가 흐르는 개가 황실의 피가 흐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우다(1) +1 20.10.26 337 10 23쪽
242 3장 51화 – 탁군으로 들어선 황하의 들개무리 +2 20.10.23 355 12 18쪽
241 3장 50화 – 절상(折傷) 20.10.22 311 11 27쪽
240 3장 49화 – 북(北)으로(3) 20.10.21 323 13 22쪽
239 3장 48화 – 북(北)으로(2) 20.10.20 322 13 22쪽
238 3장 47화 – 북(北)으로(1) 20.10.19 338 12 30쪽
237 3장 46화 – 도성(道成)과 현무(玄武) +2 20.10.18 353 10 28쪽
236 3장 45화 – 연화(軟化) 20.10.17 337 10 21쪽
235 3장 44화 – 장막과 왕광 그리고 포신. 18로 제후의 길(3) 20.10.16 351 10 26쪽
234 3장 43화 – 장막과 왕광 그리고 포신. 18로 제후의 길(2) 20.10.15 333 9 22쪽
233 3장 42화 – 장막과 왕광 그리고 포신. 18로 제후의 길(1) +2 20.10.14 345 12 23쪽
232 3장 41화 – 유언과 유굉, 유씨의 이들이 품은 뜻(3) 20.10.13 340 12 18쪽
231 3장 40화 – 유언과 유굉, 유씨의 이들이 품은 뜻(2) +2 20.10.12 329 12 24쪽
» 3장 39화 – 유언과 유굉, 유씨의 이들이 품은 뜻(1) 20.10.10 536 11 25쪽
229 3장 38화 – Show me the show(3) +4 20.10.09 357 11 27쪽
228 3장 37화 – Show me the show(2) +2 20.10.08 333 15 26쪽
227 3장 36화 – Show me the show(1) +3 20.10.07 333 11 19쪽
226 3장 35화 – 도성에서 내려온 네임드, 지방에서 올라온 네임드(3) +2 20.10.06 368 12 21쪽
225 3장 34화 – 도성에서 내려온 네임드, 지방에서 올라온 네임드 그리고 그 사이(2) 20.10.05 344 13 24쪽
224 3장 33화 – 도성에서 내려온 네임드, 지방에서 올라온 네임드 그리고 그 사이(1) +2 20.10.04 337 1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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