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암호 (1)
태우의 집 서재.
태우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20년전 반 회지를 준식에게 건넨다.
[네가 한번 다시 풀어봐라. 난 도저히 모르겠더라.]
[보자.. 보자..]
태우에게서 받은 회지를 유심히 살펴보던 준식은 한참을 쳐다보다 살짝 웃는다.
[강태우......거울 좀 가져와봐..]
[거울?]
[거울 말이야. 걸려있는 거울 아무거나 좀 가져와봐.]
[아······자식. 귀찮게 하네······]
태우가 투덜대며 일어나서 방안에 걸려있는 거울을 떼서 준식에게 건네준다.
준식은 그 거울을 직각으로 세운 다음.
[잘 봐......]
거울에 노민우의 암호 같은 문장을 비추자 암호문이 한글로 변한다.
[이게 거울 암호라는 건데......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개발한 암호지. 글자를 뒤집어서 흘겨 쓰면 쉽게 알아내기가 힘들어.]
[크크......이걸 수수께끼라고 낸 새끼나......그걸 또 진지하게 푼 새끼나......아무튼 뭐라고 쓰여있는 거냐?]
[거울 들고 있어봐. 내가 한번 읽어 볼게......]
준식은 천천히 소리 내어 암호문을 읽는다.
[은빛의 강을 따라......여섯 물결......]
분주한 도봉경찰서 강력계.
이진호 형사는 자리에 앉아 노트에 `토막 난 시체’, `김준식’, `성형외과 전문의’ 라는 단어를 의미 없이 적고 있다.
`뭔가 김준식과 연결된 점이 있을 텐데, 시체의 신원 확인이 안되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잖아······’
진호는 답답한 듯 노트에 적은 `김준식’ 이라는 단어에 여러 번 동그라미를 친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의 후배 형사 `최진철’이 진호를 부른다.
[선배님.. 어제 말씀하신 최근 실종 사건이요. 강남 쪽에 하나 올라와 있습니다.]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철에게 다가가 모니터를 같이 응시한다.
[30대 중 후반 남자 실종인가?]
[예.. 35세 백상진.. 미혼에 임대업..]
[좋아. 당장 해당 경찰서 담당자에게 전화 넣어.]
[예. 알겠습니다.]
진철은 폰을 꺼내어 강남경찰서로 연락을 취한다.
다시 태우의 집 서재.
[이게 뭔 말이야?]
[준식아. 다시 한번 읽어봐.]
[은빛의 강을 따라 여섯 물결. 좌편 흙빛 호수를 지나 다섯 발자국. 거대한 돌산 뒤 편에 새겨진 사라질 이름들...... ]
[······]
[이 문장도 무슨 암호 같은데······]
[······.]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한 태우.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연다.
[아......나 이거 생각나는 것 같아. 거울 암호는 니가 풀었고......이 암호문은 내가 풀었던 것 같은데......학교 운동장에 노민우가 뭘 새겨놨었어.]
[학교? 우리 중학교?]
[그래. 광남 중학교. 거기에 노민우가 뭘 감춰놨었다고.]
[뭘?]
[나야 모르지 새꺄······20년전인데······그게 기억이 나겠어?]
준식은 가만히 앉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보자. 학교.]
[뭐? 아 귀찮은데......무슨 학교까지 가.]
[가면 뭔가 생각날지도 모르잖아..빨리 가보자.. 너네 집 앞이잖아......]
준식의 제안에 태우는 적잖은 피곤함을 느끼지만, 오래된 친구의 부탁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가면 뭐가 있을까? 20년이 지났는데?]
[뭐 오랜만에 학교도 가보고 겸사 겸사해서 가보자는 거지. 어차피 주말이라 할 것도 없잖아..]
[좋아.. 노민우 수수께끼 받아주지. 콜!]
준식과 태우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현관으로 향한다.
한편 도봉경찰서 강력계에서는
최진철 형사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다.
[.........39세......예......강남에......예...... ]
최진철 경사는 전화를 끊고 진호에게 빠르게 다가간다.
[그래 뭐래?]
[백상진씨 실종신고가 어제 들어왔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본 게 8월24일 지금으로부터 23일 전 이네요..]
[23일전? 사체 사망시점하고 얼추 맞아떨어지는군......그나저나 실종신고는 왜이리 늦게 한 거야?]
[그게 실종된 백상진씨가 워낙 바쁜 사람이라 원래 집을 잘 비운다고 하네요. 강남에 빌딩 5개를 갖고 있는데......뭐 여하튼......중요한 것은 출신학교가 광남 중학교......]
[뭐? 광남 중학교? 거기는 김준식과 노민우가 나온 학교잖아......]
진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번진다.
[선배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반장님한테 보고하고 정식으로 강남서에 수사공문 날려서······시작해야지. 진철아. 뭔가 냄새가 솔솔 나는 것 같지 않아?]
[뭐.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에서 나온 연락처가 하필 의사이고, 그 의사의 출신학교 사람이 최근에 실종 되고······]
[만약에 그 시신이 실종된 백상진씨 라면?]
[아······그러면 일이 복잡해지겠네요······]
[아니. 오히려 더 단순해질지도 몰라.]
[어렵네요. 선배님······]
[일단은 우선 반장님한테 보고부터 하자.]
[네.]
진호는 바쁜 걸음으로 반장의 자리로 향한다.
한편,
태우와 준식은 한 여름에 편한 복장으로 그들의 모교 `광남 중학교’ 교문 앞에 서있다.
주말이라 그런지 몇 몇 아이들만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을 뿐 대체로 한산하다.
[이게 얼마만이야······대 사립 명문 광남중.]
[그러게.. 나도 집 앞이면서 그 동안 한번도 안 와봤네······]
준식은 운동장으로 들어서며 태우에게 소리친다
[태우! 빨리 와.. 니가 풀었잖아 그 암호······]
[아무리 내가 천재라지만, 낸들 그게 기억이 금방 나겠냐······]
[아이고, 얼마나 대단한 천재길래.. 사법고시를 3번이나 떨어지셨을까······크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건 이 몸 컨디션이······]
[됐고. 이제 한번 풀어보자. 노민우 수수께끼······]
.
.
.
20년 전 어느 때.
같은 운동장의 중학생인 준식과 태우가 서있다.
어린 준식은 손에 든 쪽지를 천천히 읽는다.
[은빛의 강을 따라 여섯 물결. 좌편 흙빛 호수를 지나 다섯 발자국. 거대한 돌산 뒤 편에 새겨진 사라질 이름들이라······태우야 감 좀 잡혀?]
태우는 마치 자신이 유명한 탐정이라도 된 듯, 손을 턱에 괴고 운동장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글쎄······어딘가에 뭘 새겨놨다는 거 같은데..]
두 사람은 각자 운동장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준식은 암호문을 계속 소리 내어 되뇐다.
[은빛의 강을 따라 여섯 물결······은빛의 강을 따라 여섯 물결······]
[잠깐!]
눈이 커진 태우가 준식을 막아서며,
[잠깐······잠깐······은빛의 강? 물결?]
.
.
.
다시 현재로 돌아온 광남 중학교.
태우와 준식은 서로를 마주보며 동시에 소리친다.
[그래! 가스배관!]
[맞아.. 운동장 담벼락 밑에 은색 가스배관.. 그게 마치 파도같이 구불구불 생겼었잖아..]
[나도 기억나.. 그 가스배관 아직도 있을까? 빨리 가보자······]
준식은 태우의 뒤를 다급히 쫓아간다.
마치 어린 시절 그 때로 돌아간 듯 발걸음이 들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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