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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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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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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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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용봉지회(9)

DUMMY

※※※



“아직 아파 보이던데, 대회 나가도 되는 거에요?”


대회장 한 가운데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 연이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곁에 앉은 악예린은 창을 비스듬히 기대어 잡은 채로 대회장을 응시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하얀 무복을 걸친 소년이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떨어질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대회장을 향해 목을 쭉 빼고 쳐다보는 연이의 모습에 악예린이 한숨을 쉬었다.


“목 빠지겠다.”


그러자 연이가 헤, 웃으며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대회장 위에서 움직이는 무인들의 신형이 날렵했다. 그럼에도 아직 본격적으로 맞붙지는 않았다.


드넓은 대회장이다. 초장부터 사람들과 맞붙으면 불리해지는 싸움이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것이 아닌 이상 누구나 쉬이 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회장 위에서 그만큼 강하다 할 사람은 몇명 없었다.


신묘한 움직임으로 여유로이 보법을 밟는 당소하를 보며 감탄을 터트리던 연이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공녀님은, 저 사람의 말을 믿어요?”


잠시 멈칫한 악예린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비해서 나쁠건 없다 생각해.”


용봉지회가 함정이다.


위험한 발언이다. 그만한 수위의 발언이 일으킬 파장을 모를 사람도 아닐 것이다. 정말로 무지해 아무 말이나 하는 이라면, 저 당소하가 함께 어울려 다니지도 않았겠지.


심지어 몸에 저만한 부상을 입고 와서 깨어나자마자 내뱉은 말이다. 정말 백연이 그녀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고, 정파를 분열시키기 위해 거짓을 뱉은 것이라 하면 그 실력이 대단하다 해야 할 것이다.


-믿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이유를 물었기에 답했다 했을 뿐. 새벽에 그가 다친 몸을 끌고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가면서 한 말이었다.


악예린은 대회장을 내려다보며 창대를 매만졌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옅은 내공 기파가 일렁였다.


“연이야, 오라버니들은 돌아갔니?”

“네. 예성 공자께선 아직 회녕에 머물고 계시는데, 소가주께선 돌아가셨어요.”

“......예성 오라버니한테 몇가지만 좀 물어봐줘.”


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문에서 남궁과 교류하던 것. 언제부터 검왕이 아니라 소가주가 대신 나왔는지.”

“알겠습니다. 또 시키실 건......”

“다른건 됐고, 오라버니한테 여분의 창이 있을거야. 그것 좀 가져다 줘. 말하면 뭔지 바로 알아들을거니까.”

“지금 바로 갈까요?”


악예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악예린은 시선을 들어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늘어선 상석중 가장 높은 자리. 본디 남궁세가의 가주가 나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남궁혁이 대신 앉아 있었다. 처음 그것을 봤을 적에는 남궁혁의 소가주 자리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남궁산의 정치적 움직임이라 생각했건만.


-소가주 남궁혁은 어떤 사람입니까?


새벽에 백연이 했던 또다른 말이었다. 그 물음에 악예린은 이렇게 답했었다. 소가주가 될거라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라고.


검왕의 위명에 걸맞지 않은 자식이다.


사람 사이를 오가며 관계를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면으로 감각이 있다 해야할지. 하지만 자신의 오라버니는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판을 짜는 책사로써의 자질은 있을지 몰라도, 가문을 이끄는 가주의 자리에는 알맞지 않다고.


무릇 위엄과 힘이 필요한 자리인 것이다. 가주란 이끄는 사람이기에. 남궁혁은 그런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욕심이 있고, 기회를 노리는 사람.


배신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현 무림의 정세가 더없이 어지러운 이때다. 사파의 세력이 사방에 날뛰고, 매일 죽어나가는 구파 무인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평화로 가장하고 있으나, 한꺼풀 벗겨보면 난세인 것이다.


때문에 악예린은 백연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대비, 대비. 전장에서의 모든 것은 사소한 것에 대한 대비로 이루어진다. 경고를 새겨놓고 있어 나쁠 것이 없었다. 강호 무림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렇게 잠시간 남궁혁을 응시한 악예린은 이윽고 대회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시야 한켠에 무인들 사이를 헤치고 움직이는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팽가의 대공자. 팽악. 어째서인지 한곳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목표가 있는 듯 했다.


잠시 뒤, 발길을 멈춘 팽악을 본 악예린이 미간을 좁혔다.


“왜......?”


팽악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백연이었다. 본디 저 정도 되는 무인들끼리는 이 단계에서 서로 싸움이 붙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전제일텐데. 팽악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백연의 앞에 서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욱!


삽시간에 거칠게 뻗어나간 신형이 백연을 향해 쏟아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일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악예린은 가만히 그 광경을 응시했다.


암화 백연. 대련에서 그녀를 간단히 제압한 재능이다. 부상이 심하다고는 하나 저 덩치만 크고 무식한 힘을 뽐내는 팽악에게 당하기 어려웠다.


과연 예상대로 팽악의 첫 권격을 가뿐히 흘려내는 백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틀려 들어오는 주먹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손이 손목을 가뿐히 눌러 비껴 쳐낸 것이다. 찰나에 이루어지는 출수가 지극히 효율적이다. 후속으로 따라 들어오는 경력 여파도 손을 저어 해소하는 모습이 능숙하다.


악예린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근접 박투에서 저런 식으로도 운용이 가능한가. 기감이 더없이 섬세해야 할 터다. 상대의 공격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비틀어 내는 것은 어지간한 감각으로는 어려울 일이다.


“제대로 가지!”


갑작스레 커진 팽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본격적으로 기파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등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목도(木刀)를 꺼내든 팽악이 거칠게 진각을 밟았다.


“무슨.”


악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 팽악의 기세가 거세기 그지 없었다. 진심으로 내치는 공격이 강맹했다. 손에 철로 된 도만 안들었다 뿐이지 지금 저 기세는 마치 생사결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뿜어낼 무공이 아니었다.


콰앙!


내딛는 진각 한번에 대회장의 바닥에 진동이 일었다. 팽가의 보법에 이어 뻗어나가는 도법 줄기가 쾌속했다. 목도를 타고 일렁이는 기파가 유형화된 일그러짐을 보여냈다.


오호단문도. 팽가의 도법이 대기를 짓이기며 기침을 흘리고 있는 백연에게 쇄도했다. 부상당한 몸으로는 받아내기 버거운 절초.


악예린은 창대를 움켜쥐었다. 이런 것까지 상정하지는 않았다. 팽악이 다짜고짜 진심으로 백연에게 덤벼들다니. 대체 무슨 일인 것이지.


그때였다.


“......하아.”


안법을 끌어올린 악예린의 눈에, 백연이 입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한숨을 뱉는 모습이었다. 다섯 줄기의 도법 기파가 짓쳐오고 있음에도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다.


‘이건.’


차갑고 묵직한 기운이 대기를 천천히 끌어내렸다. 한순간에 발출시킨 기파가 대회장 사방을 뒤덮었다. 그녀와 대련할때 꺼내었던 무공. 현음공이라 했던가.


‘저런 몸으로?’


성치 않은 몸일 터인데. 발출하는 기운이 강렬했다.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만전이라 착각할 수준이었다.


삽시간에 짓쳐드는 도법 기파를 보며 백연이 천천히 목검 검파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


악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안법 시야에 백연이 발검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보지는 못했다. 다만 이미 인지했을때 허리춤에서 뽑혀나온 검이 그 자리에 자리했을 뿐.


빛살같은 발검식이었다. 하지만 악예린이 놀란 것은 그런 지점이 아니었다.


상하좌우와 중심으로 나뉘어 짓쳐오는 도법. 다섯 방향의 도법 줄기는 맹호(猛虎)가 그어낸 발톱 자락마냥 날카롭고 강맹했다. 정면으로 받아내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파괴력. 때문에 그냥 보법을 밟아 피할 것이라 예상했건만.


발을 끌어낸 백연의 무게중심이 낮아진다. 동시에 뽑혀나온 검이 부드럽게 뻗어나갔다.


공격초가 아니었다. 상하좌우. 각각 네 방향을 따라 휘어진 목검이 부드럽게 도법의 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비틀었다. 차가운 수기를 휘감은 목검이 자연스레 도기의 사이에 비껴들며 그것을 흘려낸 것이다.


호흡을 쪼개었다. 현음공의 기파로 짓눌린 간합 내에서 본인의 속도는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공간을 장악하고 그 안의 흐름을 비틀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운데로 짓쳐 들어오는 도기. 좌하단의 끝에 떨어졌던 검끝이 사선으로 올라오며 도기를 부드럽게 걷어냈다. 일련의 동작에 끊김이 없었다.


그 모습 속에서 악예린은 저번 자신과 백연의 대련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는 분명 저렇지 않았다. 소년의 검법은 그 사이 변화해 있었다.


‘천고의 재능.’


그 말이 악예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짧은 질시가 마음속에서 일었지만 곧 잠재워 없앴다. 그러면서 악예린은 안법을 더욱 끌어올렸다.


질시한다 해서 그녀의 실력이 늘어나는 일은 없다. 앞서 나가는 이의 걸음. 보고 배울 점이 많은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백연에게 고정되었다.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을 생각이었다. 호흡 하나까지도.


막 진각을 밟은 팽악이 목도를 백연에게 내리치고 있는 시점이었다.



※※※



카악!


목검과 목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내리쳐 오는 목도의 무게감이 묵직했다. 잠시 팔에 힘을 주며 무게를 받아낸 백연은 이윽고 한걸음을 뒤로 당기며 검을 사선으로 흘렸다.


자연스레 뒤따라간 도가 옆으로 흐르며 그를 비껴나간다.


백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방금 일격을 받아치며 회전해 공격을 날렸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흘린다.’


방금 전 짓쳐오던 팽악의 오호단문도.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너무 힘의 소모가 심했다. 끌어올린 현음공은 적양공과는 달리 체력의 소모가 덜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잖이 소모되고 있었다.


‘혈맥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어젯밤의 폭발에 상당히 크게 부상을 입은 참이었다. 체내 기의 흐름이 그리 안정적이지 못했다. 언제나 공세에 가깝게 임하는 그의 검술을 펼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식을 택했다.


“검끝이 무뎌졌구나!”

“당신은 느려졌고.”


중얼거린 백연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횡격이 사선으로 비틀렸는데, 그 궤적에 맞물린 도격이 자연스레 함께 비틀려 옆으로 떨어졌다.


‘이런 감각.’


그동안 근접 박투를 거듭하며 느낀 감각이 있었다. 상대방의 공격 사이에 있는 기운의 빈틈. 완벽한 일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를 따라 기운을 집어넣어 비틀면 작은 힘으로 큰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그것은 검격도 마찬가지였다.


방어초를 만든다, 만든다 하고 있었는데.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그 감각을 제대로 활용할 생각이 든 것이다. 몸이 불편해지자 감각이 자연스레 그렇게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


카각. 카악!


짧게 도법을 흘려낸 백연이 주변을 가늠했다. 그의 검격에서 흩뿌려진 현음공의 기운이 어느새 사방을 덮어가고 있었다.


‘수기로 형성된 검법.’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나가는 검격이 감각적이었다. 화려한 불꽃의 연격과 정반대에 위치한 검법이었다. 아직은 미완이지만.


“집중해라!”


휘익!


고함과 함께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팽악이 오른발을 내딛으며 우상단에서부터 사선으로 목도를 그어냈다. 쾌속하게 이어지는 도격의 자락에 기파가 길쭉하게 이어졌다. 그것을 보는 순간 백연의 감각이 확장되었다.


오호단문도의 도법. 일격에 휩싸인 기파가 약하지 않다. 직선으로 이어지는 오호단문도는 그 궤적을 예측하긴 쉬우나, 동시에 받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직선적인 움직임에 담겨있는 파괴력이 드높았기 때문이다.


각 공격이 절세의 일초인 도법.


찰나에 백연의 머릿속으로 몇가지 선택지가 스쳤다. 개중 하나가 가장 강하게 떠올랐다.


‘후퇴 보법으로 회피.’


가장 알맞은 움직임이다. 화신풍 보법으로 피해내는 것이 맞다. 공간을 격하는 보법은 충분히 도법 회피와 반격까지의 시간을 벌어줄 터였다.


하지만.


왠지 끌리지가 않았다. 최적의 수를 계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진데.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다른쪽에 마음이 강하게 동했다.


“쯧.”


짧게 혀를 찬 백연은 그대로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순간 그의 시야와 머릿속에서 생각이 지워졌다. 감각도가 확장되며 사방의 기파를 인식했다. 동시에, 그의 손이 치켜올라갔다. 좌상단으로 뻗어나간 검끝.


몸이 최적의 투로를 찾는다. 그의 자세가 팽악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거울상을 띄며 도격에 따라붙었다. 사선으로 그어오는 목도에 백연의 목검이 달라붙는다. 같은 도법을 펼치는 양.


“!”


한순간 팽악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이거군.’


느릿하게 늘어진 시간 간극 속에서 백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목검과 목도가 허공에서 맞물렸다. 부드럽게 이어진 검과 도가 처음부터 하나였던 듯 같은 궤적을 그려내며 떨어졌다. 그 사이에서 백연은 손목을 따라 가볍게 힘을 주었다. 주변을 가득 메운 수기의 파도가 함께 밀어내는 힘을 더했다.


자연스레 사선으로 떨어진 도격은 처음 팽악이 의도했던 궤적에서 살풋 비틀려 허공을 격하고.


‘지금.’


그 순간 백연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가볍게 내딛은 진각에 실린 보법 기파가 원형으로 퍼져나간다. 사방에 뿌려놓은 검격 경파를 갑옷처럼 몸으로 끌어 모으면서였다. 묵직한 수기가 그의 몸을 뒤덮으며 뻗쳐오는 도기의 여파를 해소해주었다.


동시에 백연의 신형이 부드럽게 팽악을 스쳤다. 자연스레 뻗어나간 손이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증표를 향해 움직였다. 찰나에 팽악이 팔꿈치로 그의 손목을 내리치려 했으나, 백연의 몸을 휘감은 수기가 그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방어초로 일관하다 단 한번 내딛은 전진 보법.


그러나 백연이 그 걸음을 멈추었을때 주변은 조용했다. 저편에서 움직이며 서로의 증표를 노리던 무인들마저 한순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백연은 그와 팽악의 주변을 따라 드넓은 공간이 원형으로 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대일 싸움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저거, 지금.”

“팽가가......”


백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잡힌 글씨가 새겨진 흰 천. 팽가를 상징하는 증표였다. 뒤를 돌아보자 입매를 비튼 팽악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네놈.”


목도를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기세였다. 백연은 침착하게 팽악을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팽악이었다.


“......저번과 검이 달라졌군.”

“사정이 있는지라.”


백연은 대답하며 가만히 기파를 가다듬었다. 팽악의 성격상 어디로 튈지 몰랐다. 그렇잖아도 자존심이 드높고 성격이 급한 인물이다. 다짜고짜 덤벼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호흡을 가라앉히는 팽악이었다. 눈빛은 처음 봤을때처럼 미묘한 광기가 서려 있었는데, 그 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무제전에서 보지.”


말과 함께 홱 등을 돌린 그가 성큼성큼 대회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 팽악의 공격부터 결말까지. 다소 허무하기까지 한 감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칠룡의 일좌에 있는 팽악. 그가 대회의 본선도 아닌 예선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린 소년에게.


백연은 그런 목소리에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방금 팽악과의 싸움에서 얻어낸 감각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확실한 수확이었다. 저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검격으로도 팽악을 제압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 검격.’


면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방어초로 이루어진 검법이었다. 초식과 구결의 형태는 실전에서 다듬어야 하겠지만 감각은 확실히 기억했다.


검끝을 내린 백연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까처럼 그에게 다가오는 무인들의 무리는 없었다. 방금 전 일전의 영향인지, 아무도 그의 증표를 노리지 않는 것이다.


‘다행인가.’


천천히 현음공을 거둔 백연이 머리를 짚었다. 짧은 격전에서 얻은 피로가 뒤늦게 몰려왔다.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매만지며 검을 짚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조의 예선이 마무리 되고, 살아남은 열 여섯이 정해졌을 때.


백연이 빼앗은 타인의 증표는 팽악의 것, 단 한개 뿐이었다.



※※※



“후우.”


운공을 마친 백연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집중해 운연동공을 펼친 것이다. 연무장을 따라 그가 움직인 흔적이 선연했다. 운연동공의 동작까지 직접 움직이며 완벽하게 구결을 펼쳐냈다.


예선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새벽까지도 욱신거리던 가슴께가 거의 나아 있었다. 이제 불편함을 느끼기가 어려웠는데, 그래도 아직 혈맥이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히 경이롭다 할 수 있었다.


회복력 하나 만큼은 그가 검귀이던 시절, 고수의 경지에 달했을 적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높았다. 벌써부터 이런 공능이라 하면, 나중에는 대체 어찌 될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땀방울을 가벼이 닦아낸 백연이 연무장 밖으로 걸음하려던 때였다.


“암화!”


여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달려오는 남궁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앞에 멈춰선 소년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나랑 대놓고 만나도 되는거야?”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지금 화제의 인물이니까요. 저 같은 나이에 동경하는 인물 하나쯤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재미있네.”


어깨를 으쓱인 남궁유진이 품을 뒤졌다. 이윽고 그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는데, 그것을 받아든 백연도 굳이 열어보지 않고 집어넣었다.


“고마워.”


사내에게서 뺏었던 풀은 잃어버렸다. 그 폭발 속에서 살려낼 수가 없었던 탓이다. 증거 확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궁유진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듯 했다.


“그리고 또 할말이 있어요.”

“응?”


주변을 잠시 살핀 남궁유진이 입을 열었다.


“확인해본 바, 금원전장이에요. 공식으로는.”

“......아. 그렇겠군.”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대외적으로 장부에 만금장이라 적을리가 없었다. 사파 상회의 명칭을 장부에 적었다가 걸리면 큰일이다. 금원전장은 적어도 가면을 쓰고 있기는 하니까.


더해 하오문은 그저 사파 문파로 취급되는 집단이 아니었다. 개방과 비슷한 중립 세력으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 하오문이다. 금원방이 만금장과 손 잡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 장부도 그쪽에 기입되어 있겠네.”


백연이 중얼거렸다.


남궁혁과의 거래. 그것을 기입한 장부가 아예 금원방쪽에 빠져있을 확률도 높다. 거래의 교두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남궁세가 측 장부에 금원방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으면, 금원방의 장부에도 그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단 말은, 확실한 증거인 거래 장부 확보를 위해서는 금원방을 방문해야 한다는 소리.


“이번에는 내려가야겠군.”


하오문 회녕 지부. 금원전장의 탈을 쓴 금원방에 방문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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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야장(2) +5 23.06.28 9,841 172 17쪽
42 야장 +6 23.06.26 10,026 169 16쪽
41 적화(赤花) (3) +9 23.06.25 9,977 171 16쪽
40 적화(赤花) (2) +8 23.06.24 10,144 168 16쪽
39 적화(赤花) +6 23.06.23 10,652 172 16쪽
38 수라궁(3) +6 23.06.22 10,645 183 17쪽
37 수라궁(2) +6 23.06.21 10,682 181 18쪽
36 수라궁 +6 23.06.20 10,842 18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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