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7.06 18:10
연재수 :
305 회
조회수 :
1,572,015
추천수 :
31,556
글자수 :
2,315,055

작성
23.12.06 18:10
조회
3,466
추천
90
글자
19쪽

사천(4)

DUMMY

※※※



천독의 비도가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짓쳐오는 묵빛 비도 앞에서 백연은 등골이 섬짓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못 막는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 비도에 담긴 공력, 단순히 비도를 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금안나찰의 권격을 상대할때 보았던 나선 경파. 가속과 파괴력을 더하는 수법인데 그것이 절대자인 천독의 손에서 비도술로 바뀌어 펼쳐지고 있었다.


‘세배? 네배?’


몇배로 중첩된 힘이 실렸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아내지 않을수가 없었다.


‘막아내지 못하면 죽어.’


보는 순간 알았다. 천독은 여기서 그가 죽건 말건 크게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의 자질을 시험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자질이 부족하다면 죽어도 상관 없다는 의미였다.


뒷일을 신경쓰지 않는다. 숫제 광인의 행태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파장을 모를 사람도 아닐텐데.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런것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피하는 것도 불가.’


그가 피하는 순간 이 비도는 궤적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구중각을 관통할 것이다. 그 경로에 무엇이, 누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더해 당장 그의 바로 뒤편에 쓰러져 있는 것은 유성이었다.


반드시 막아내야만 했다.


‘망할, 당소하.’


소년이 입매를 비틀었다. 나중에 이 빚을 받아내고 말 생각이었다. 적어도 당가주가 이 정도로 미친 사람인지는 알려줬어야지.


-내가 안 말해줬던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당소하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백연이 검파를 단단히 쥐었다. 눈에 진기를 집중하면서였다.


안법 자령안. 세상을 읽는 절세 안법에 모든 궤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뭉개진 면선과 기파가 음률로 화해 감각적으로 인지된다. 비도를 따라 빛살처럼 휘몰아치는 나선 경파. 허공을 짓이기며 전진하는 압도적인 파괴의 궤적.


그것마저 가늠해 예지에 가까운 예측을 엮어낸다.


‘일 검.’


백연의 검격이 허공을 가른다. 한번 휘두른 검이 비도와 맞닿는 순간, 여휘검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간다. 자신의 손아귀가 찢어지고 손뼈가 박살난다. 직후 비도가 몸을 꿰뚫고 모든것을 짓이길 것이다.


백연은, 앞서 보았다.


‘이 검.’


두번 휘둘러 검격을 중첩시킨다. 마찬가지다.


‘삼 검.’


여전히 결과는 변함이 없다. 계속해서 검격 중첩이 늘어난다. 스무번의 검격을 중첩시키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안된다.’


단순히 수십, 수백의 검격을 중첩시키는 것으로는 천독과 자신의 힘의 격차를 메울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백연은 검격을 연달아 내치는 방향을 버렸다.


동시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묵직한 고요 속에서 백연은 기파를 읽었다. 쪼개진 찰나. 허공을 따라 회전하는 비도의 형세가 마치 빛살을 휘감고 떨어지는 혜성과도 같아 보였다.


‘빛살?’


문득.


소년의 머릿속에 한 풍경이 떠올랐다. 처음 신강에 도달했을때, 무덤 앞에서 그를 가로막았던 풍백. 그를 지나치기 위해 처음 태청신공의 기초가 되는 수법을 사용했다. 그때 내쳤던 검격. 뇌성을 두른 검격이 잘라냈던 새벽 빛살의 환영이 눈앞에 선명히 스쳤다. 풍백마저도 한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던 벼락같은 일격은 분명 빛살을 가르고 풀어헤쳤다.


실제로 빛을 잘라낼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허나 신공(神功)은 섭리를 뒤틀고 이치를 무용케 하니. 벼락을 담은 검이 그의 인지조차 뛰어넘어 공간을 비틀어 낸다면.


심상이 스쳤다. 풍경을 뇌리에 담는 것과 동시에 소년의 눈에서 자색 안광이 번뜩였다.


마음에 닿은 막연한 심상이 시야에 뚜렷한 궤적으로 화했다. 검이 나아가야 할 길. 검로(劍路)였다.


소년은 자연스레 검파를 비틀어 쥐었다. 태청신공의 진기는 이미 주인의 의지에 감응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여휘검이 허공을 타고 이지러지듯 흔들렸다. 검끝에 시린 백광을 매단채였다.


찰나지간 일보를 내딛는 것과 동시였다. 소년의 검이 분열하듯 허공에 새겨졌다. 백색 뇌광이 폭풍처럼 회전했다. 시린 벼락 줄기가 비도의 나선 경파와 정확히 역(逆)방향으로 휘몰아쳤다.


쩌저저정-!


소리가 들렸으나 들리지 않았다. 이미 간극에 진입한 뒤인지라 그랬다. 뇌풍(雷風)이 빛살같은 경파를 낱낱이 쪼개며 해체했다. 순백으로 물든 여휘검이 휘몰아치는 나선 경파를 뛰어넘어 그 중심을 파고든 것이다. 마치 공간을 잘라내어 건너뛴 듯이. 한순간 허공에서 짓쳐오던 묵빛 선율이 그 힘을 잃고 느려졌다.


직후 환상처럼 흩어진 여휘검이 다시금 소년의 앞에 내려앉았다. 아직 비도의 전진은 끝나지 않았으나 그 추진을 지탱하던 나선 경파는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파훼되었다. 낭창하게 휘어진 백연의 검격이 그대로 비도와 맞닿았다. 후려치듯 내친 사선 검격이 비도의 궤적을 비틀어 바닥에 처박았다.


콰아아앙!


폭음이 파문을 그리듯 퍼져나갔다. 한순간 시야가 흔들리며 사방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뒤늦게 찾아온 여파가 전각 안을 휩쓸고도 남아 곳곳에서 유리와 도자기 파편이 박살나 흩어졌다.


“하아, 하아.”


백연이 숨을 내뱉었다. 막 간극에서 돌아왔다. 웅웅 울리는 이명을 잠재우려 애쓰며 백연이 재차 검을 치켜들었다. 입안에 울컥 올라오는 혈향이 느껴졌지만 애써 눌러 삼켰다.


‘무리했어.’


비도를 막아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간극을 끝없이 늘려버렸다. 자령안으로 가능성 높은 전투의 방향을 예측함과 동시에 찰나를 수백을 넘어 수천에 가깝게 쪼개어 사고한 것이다. 지나치게 가속했던 사고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때였다.


화아악-!


가벼운 미풍이 주변을 스쳤다. 객잔 내에 자욱하게 일어난 분진 너머, 어느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인영이 소매를 한번 휘젓자 묵직한 기파가 사방을 쓸었다. 천독의 기운이 한차례 객잔을 가득 채우고 흩어지자 그 사이 충돌의 여파는 가라앉아 있었다.


“잘 보았다.”


직후, 다시금 내려앉은 적막을 께고 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저벅.


암녹빛 장포가 펄럭였다. 당가주, 천독의 한걸음이 더없이 가벼웠으나, 그 발걸음에 이끌리는 기파는 그렇지 못했다.


‘초월자야. 검왕과 비슷하다 상정을 해야......’


백연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천독은 무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 뿐이었다.


“남궁산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군.”


중얼거린 그가 여상히 손을 뻗는 순간, 바닥에 처박혀 있던 비도가 허공을 날았다. 빨려들듯 천독의 손으로 되돌아간 비도가 순식간에 그의 소매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비도를 회수한 천독이 백연을 슬쩍 내려다보곤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후욱.


한순간 기파가 빨려들듯 움직였다.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천독을 향해서였다. 단순히 생각을 입밖으로 내뱉은 것 만으로도 주변 기파가 그에 동조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암녹빛 장포를 펄럭이며 바깥으로 걸음하는 천독의 뒷모습을 본 백연이 입술을 씹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년은 초월자의 등을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천독은 망설임 없이 걸었다. 무슨 목적이 있는 듯이. 백연은 가만히 입을 다문채로 그를 따라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가다듬으면서였다.


‘당가주가 왜 여길?’


이곳에 천독이 찾아온 목적을 알기 어려웠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러한건지. 처음 그를 보자마자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미 천독은 백연의 행보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다 봐야했다.


적어도 천주산까지의 일은 전부.


당소하와 교분을 맺었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인가. 허나 당소하의 말에 따르면 천독은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애초에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위인이라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런 이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당소하와 백연의 친분을 언급하고, 그를 시험하겠다 했다.


‘암살 시도가 아니라면 말이지.’


자질 운운하며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 못 막았으면 죽었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백연은 천독의 일수를 막는 것에 성공했고, 그 결과 그의 시험을 어떻게든 통과했다 봐야겠지.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군.’


끼이익.


나무 바닥이 옅은 소리를 내었다. 드넓은 객잔은 일전의 폭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묘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곳곳을 지나칠때마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의 신형이 간간히 보였다.


그 소란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깨어나지 않는 모습.


명백히 부자연스러웠다. 백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천독을 향했다.


‘무공을 썼다.’


허나 대체 어떤 무공을 썼기에 이렇게 되는가. 검룡 유성을 비롯해 부월검 임지승과 청성파의 무인들. 더불어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빈객 무사들까지. 꽤나 고강하다 칭해질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리 제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히 불가해한 일.


검왕 남궁산, 풍백 이신과 다른 방향에서의 압도적인 무위였다. 그야말로 초월자의 격.


“당가의 절기는 두가지가 있다. 만독과 만천.”


그때였다. 마른 목소리가 툭 치고 들어오듯 흘러나왔다. 앞서 걸으면서도 백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중 만독은 내공을 독으로 조합해 내뿜는, 독공의 정점에 이른 무공이라 일컬어지지.”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천독의 시선이 백연을 힐끗 스쳤다. 등어깨에 이르는 흑발과, 짧게 붙여 자른 수염위로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백연을 눈에 담았다. 그러나 그 눈은 처음 보았을때의 인상과 약간 달라져 있었다. 미미한 생기와 빛이 깃든 듯한 모습.


“너도 그리 생각하나?”


우뚝.


천독의 걸음이 멈춰섰다. 어느 한 전각 앞에서였다. 구중각에서도 외곽에 자리한 작은 전각이었는데, 현판마저 걸려있지 않아 버려진 듯 보이는 곳이었다.


그 앞에서, 천독이 백연을 돌아보았다.


명백한 질문을 던졌다. 이윽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천독이 백연의 답을 기다리듯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무슨 의도로 던진 질문일까. 백연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시험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독은 분명 그에게서 자질을 시험하겠다 말했고, 비도술을 파훼한 것으로 백연은 그 시험의 한단계를 통과했다. 그리고 이곳에 왔다.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과연 그게 무엇일지 알기 어려웠다.


‘만독. 내공을 독으로 조합해 내뿜는다고.’


당소하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천하 모든 독을 조합하고도 남는다 했다. 그 한계가 오로지 자신의 오성뿐이라고. 허나 그 무공이 과연 정점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가.


“......만독의 공능이 제가 들은대로라 하면, 독공의 정점에 이른 무공이 맞겠지요.”


한참동안 고민을 하던 백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앞에 선 천독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소년을 눈에 담았다. 그 눈에 일말의 실망감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백연의 말이 재차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무공의 무결함을 방증하지는 않습니다. 독공은 본질적으로 독이라는 특정한 매개체를 이용하는 무공.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니 독공이라는 범주 내에서는 정점에 이르렀다 할 수도 있겠지만, 무공으로써 정점에 다다랐냐 하면.”


백연이 말을 끊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어 천독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검도창권장(劍刀槍拳掌), 수각부봉편(手脚斧棒鞭)등. 무공의 갈래는 저 밤하늘에 새겨진 별의 숫자만큼 많고, 그 묘리도, 방향성도 제각각이지만 결국에는 모두 하나의 길로 귀결되지요. 검의 정점에 이른 무인은 손에 검을 쥐지 않아도 검객입니다. 독공도 독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야 하겠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무감한 표정으로 백연을 내려다보던 천독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천독의 눈동자에 희미한 감정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백연이 놀람을 삼켰다. 어떤 일에도 무감할 것 같았던 초월자가, 옅은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네 말이 맞다.”


메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하여 나는 만독을 넘어서기로 했지. 독공의 정점이라는 말에는 무용한 울림밖에 없으니.”

“......성공하셨습니까?”

“네가 기막을 둘러 독을 막았기에 잠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툭 내뱉은 천독이 몸을 돌려 전각의 문고리를 잡았다. 뒤에 선 백연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독공이 아니었다고?’


독공이라 생각했다. 만독으로 만든 독을 통해 구중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잠에 빠트렸다고. 그가 틀렸다 말하고 있었다. 그저 당가주 자신이 백연을 잠에 빠트리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잠에 들지 않은 것 뿐이라는 이야기다.


“아직 오만하구나. 하지만 그 자신감과 자질은 높이 사겠다.”


당황에 빠진 백연을 남겨두고 천독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나무가 끼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전각의 문이 열렸다. 어둑한 전각의 안으로 천독을 따라 들어가며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만독을 넘어섰다고? 설마 만독의 공능을 지닌 의념과 진기를 권역의 형태로 뿌릴 수 있는건가?’


백연이 생각했다.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당가주의 말은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코나 입, 피부로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독공을 넘어 그것을 기운의 형태로 강제로 상대에게 투사시킨다. 그리하면 말 그대로 독이 필요없는 독공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독공을 벗어났다 할 수 있는 것이다.


터무니 없는 무공.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가능성이 생각나질 않았다.


백연이 경악을 옅은 호흡으로 갈음하고 있을때 천독이 손을 펼쳤다. 삽시간에 주변의 등롱에 불이 붙으며 전각이 화악 밝아졌다.


아무것도 없는 전각이었다. 낡은 천장과 기둥, 그리고 바닥. 바깥에서 보았을때 느꼈던 버려진 건물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 안에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하나였다.


전각의 정중앙. 웬 다탁이 놓여 있었다. 넓지 않은 다탁 위에는 호리병 하나와 접시에 놓인 작은 단(團)이 있었는데 그 색과 향이 무색무취(無色無臭)였다. 약인지 음식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지 못할 물건이었다.


“먹어라.”


당가주가 말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소가주는 만독을 익혔다. 아직 경지에 오르지 못해 그 독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피해를 입히지. 이것이 네가 전장에서 녀석의 옆에 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독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준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어째서 이런것을.”

“아이가 교분을 쌓은 무인이, 아이의 독 때문에 그 등을 지킬 수 없어서야 안될 일이지.”


내뱉는 음성이 무감했다. 그러나 백연은 그 어조에서 당소하에 대한 어렴풋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관심이 없다더니.’


아예 그런 것은 아니었던 듯 싶었다.


동시에 이것이 가볍지 않은 선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당소하와 함께 전투를 할때마다 만독을 봉인시키고 싸울 수는 없는 일. 일전 악예린과 팽악은 해독제를 먹고 같이 싸웠다곤 들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매번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해독제로 전부 해독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천독이 직접 저리 말했다. 이것을 먹으면 만독의 영향은 사실상 거의 받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는 소리다. 아마 당가주 본인의 영성이나 힘이 담긴 물건.


백연 자신이 만에 하나 당소하의 적으로 돌변한다면 더없이 치명적이기도 할 일이다.


그런 물건을 자신에게 준다.


‘대체.’


잠시 고민에 빠졌던 백연이 이윽고 다탁에 다가갔다. 호리병과 단을 집어든 그가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천독을 한번 돌아보았다.


“괜찮겠습니까?”


만독의 영향을 없애줄 물건. 당가주가 장담한 것이니 세간에서 말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은 몰라도 비슷한 것을 이루어줄 것이다. 정녕 이것을 자신에게 주어도 되는가 묻는 것이었다.


천독의 새까만 눈이 백연을 내려다보았다.


“내 아이의 자질을 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당소하의 판단을 믿는다는 이야기였다. 백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손에 공력을 담아 호리병의 머리를 날린 백연이 단을 입에 담고 그대로 액체를 들이켰다.


흐르는 듯한 감각이 목을 적셨다. 하늘의 깃털같은 구름을 모아 들이킨 듯 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에 잠시 눈을 감고 선 백연을 천독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흘렀다. 영단을 먹을 때처럼 운기조식을 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숨을 가다듬은 백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에 백연이 중얼거렸다.


직전 그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려 들었던 당가주가, 이제는 기연을 선물해주었다. 비록 그것이 백연 자신을 위한것이 아니라 해도.


그러나 당가주는 이미 그런것에서 일체 신경을 거둔 듯 했다. 새까만 눈동자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천독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만독을 넘어섰다. 허나 만천은 아직 넘지 못했지.”


신공절학 만천(滿天). 만독이 독공의 정점이라면 만천은 암기술의 정점. 비도와 암기가 하늘을 가득 채운 꽃비처럼 내린다 했다. 혹자는 만천화우(滿天花雨)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당가의 상징이자 절기.


당가주가 그것을 입에 담았다.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백연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초월자의 말은 한마디에도 수많은 것이 엮여있다.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이들이기에. 귀담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들었을 것이다. 가주의 위에 대해.”

“......”

“네 자질을 높이 사고, 또 네가 아이의 친우를 자칭했으니 말해주겠다. 아이는 가주가 되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메마른 어조에 담긴 내용이 커다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당가주의 입에서 나온 것은 또다른 일이었다.


“다른 형제들 때문입니까?”

“이유는 여러가지다.”

“......결국 소하는 가주의 자리를 쟁취해내야만 한다는 말씀이군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지난한 과정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당가주 또한 당소하가 죽음에 이른다 해도 수긍할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가문 외부의 사람인 백연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홀로 싸워나가야 할 당소하를 생각해서일까.


“그러니 한가지는 확실히 알려주도록 하지.”


당가주가 말했다.


“아이가 진정으로 가주의 위에 오르고자 한다면, 나를 넘고, 가문의 무학을 넘어서야 할 것이라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9 성화방주 +5 23.12.07 3,488 91 16쪽
» 사천(4) +9 23.12.06 3,467 90 19쪽
127 사천(3) +8 23.12.05 3,486 95 22쪽
126 사천(2) +5 23.12.04 3,556 90 17쪽
125 사천 +8 23.12.01 3,688 90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658 90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581 92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654 87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725 83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824 92 15쪽
119 영물(5) +7 23.11.17 3,899 89 19쪽
118 영물(4) +6 23.11.15 3,758 93 15쪽
117 영물(3) +7 23.11.13 3,796 90 15쪽
116 영물(2) +7 23.11.10 3,949 90 18쪽
115 영물 +7 23.11.08 4,092 88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971 92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4,103 94 19쪽
112 네가 돌아올 곳(9) +7 23.11.01 4,056 85 20쪽
111 네가 돌아올 곳(8) +6 23.10.30 4,165 85 17쪽
110 네가 돌아올 곳(7) +7 23.10.27 4,289 85 20쪽
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383 83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459 91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4,556 90 19쪽
106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522 93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8 23.10.16 4,612 95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4,766 97 16쪽
103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4,815 94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4,625 103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4,708 109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5,086 109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