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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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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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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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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11.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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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영물(5)

DUMMY

기연(奇緣). 그리 표현해야 옳았다.


눈앞의 동산에 자라고 있는 선란의 자태가 고왔다. 비스듬히 뻗은 풀잎이 한두장이 아니었다. 수십이 넘는 영약이 한곳에 모여 지기를 빨아들인다.


본래라면 불가할 일이다. 영초는 본디 지기(地氣)를 어마어마하게 빨아먹는다. 기운을 가득 머금은 삼 한뿌리가 자라면 그 주변으로는 풀이 시드는 이유다. 이리 많이 모여 있다면 사방의 지기를 다 빨아먹고도 부족할 것이었다.


허나, 이곳은 곤륜산의 기운이 모여드는 장소.


턱없이 강한 자연지기가 사방을 채우고 있다. 천혜의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세상에, 이게 대체 몇포기나 되는거냐?”

“꽃이 핀 것만 따져도 열손가락은 나옵니다.”


무진과 단휘가 감탄을 뱉었다. 그들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눈앞의 선란이 뿜어내고 있는 영기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코끝을 감도는 향취. 꽃향에 봄을 엮어 넣은 듯 했다. 불어온 바람에 살풋 흔들리는 선란의 모습이 백연의 눈에는 금덩이처럼 보였다.


아니, 금덩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곁의 뱀에게서 꺼내려던 내단 정도나 되어야 비교할 수 있을까.


‘내단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은데?’


스윽.


백연의 시선을 마주한 뱀이 머리를 낮췄다. 잠시동안 물끄러미 뱀을 응시하던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단은 한번이고 풀은 계속 자라니까.”

[......]


백사가 몸을 바르르 떤 것 같은 느낌을 무시하며 백연이 군락지를 살폈다. 시야에 들어오는 선란들. 전부 하나같이 최상품(最上品)이라 할만 했다. 영초의 기운이 바람에 실려 산지사방으로 흐른다. 저런 영초라면 캐내도 몇달은 너끈히 살아있을 법도 하다.


“이거 캐가도 되는거냐?”


무진의 물음에 백연이 끄덕였다.


“꽃이 핀것만 캐면 될거야. 가장 기운을 많이 머금은 상태일거니까. 어차피 전부 캐간다고 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풀을 캐내어 영단으로 가공하는 것도 일이다. 하오문에서도 실력있는 약사를 찾아야 할 것인데, 빠르게 될 일은 아니었다. 두고두고 필요할때마다 와서 캐는 것이 낫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주변의 땅을 도려낸다는 느낌으로 하면 돼. 꽃이 떨어지면 안되고. 알지?”

“걱정마라. 옛날에 풀뿌리 많이 캐먹어봤다.”

“......아하?”


백연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무진과 단휘가 재빠르게 동산으로 달려갔다. 혹여나 선란을 밟을새라 보법까지 일으켜 조심히 발을 디디는 모습이 재밌었다.


“나도.”


백연을 스윽 쳐다본 소홍도 재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흙바닥에 꿇어앉아 조심스레 선란을 어루만지는 사형들의 모습을 보며 백연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전부 가져가도 상관 없겠어?”


뱀의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를 보며 백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유를 모르겠네.”


백연이 중얼거렸다.


이상했다. 이 뱀이 아무리 영물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갑자기 친절해진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 그랬다고? 그럴리가 없다. 영물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한 부류들. 적의 강함에 관계없이 날뛰는 짐승들이다.


그의 검이 두려워서 이럴리가 없다는 말이다. 차라리 끝까지 날뛰다가 목이 베여서 죽었으면 죽었지.


다른 이유가 있다 봐야 했다.


‘내 기파에서 뭔가를 느꼈나.’


태청신공을 끌어올리며 일격을 준비하던 그때. 상단전이 활성화되며 이상한 감각이 들었었다. 눈앞의 백사가 급격히 태도를 바꾼 것도 그 시점이었다.


‘어째서인지.’


문득 느껴졌던 감정의 파편들. 혼란과 의문의 감정들이 그의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였다.


츠츳.


뱀의 거대한 머리가 백연의 옆으로 내려왔다. 두겹의 눈꺼풀이 열리며 세로로 갈라진 붉은 동공이 백연을 향해 깜빡였다. 콧등으로 그의 어깨를 툭 미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백연도 순간 대처하지 못할 만큼.


“으앗?”


집채만한 바위가 몸을 떠민 것 같은 무게. 백연의 몸이 잠깐 크게 휘청였다. 이윽고 균형을 잡은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왜?”


백사의 고개가 움직였다. 동굴 한편을 가리키는 머릿짓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따라오라고?”


짧은 끄덕임. 그와 함께 백사가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레 선란 군락지를 벗어나 동굴의 다른편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뱀의 거체가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움직이는 것을 보며 백연이 사형들을 불렀다.


“저놈이 뭔가 보여줄게 있나본데 좀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려.”

“그래라. 지금 바쁘니까......”

“무진. 조심해.”

“거 뿌리 끊어집니다!”


영초를 채취하고 있는 사형들을 둔 채로 백연이 등을 돌렸다. 가벼운 보법을 일으켜 재빨리 백사의 걸음에 따라붙었다. 그들이 지나쳐 온 길과 조금 다른 방향.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뭐지?”


산뜻하게 주변을 채우던 선란의 기운이 멀어지고, 서서히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동굴 벽을 따라 자라난 빛나는 풀들도 점차 줄어든다. 빛이 없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백사의 새빨간 눈동자 밖에 없었다.


백연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자령안.’


안법을 한층 돋구었다. 눈을 따라 흐르는 기파가 더욱 진해졌다. 어둠 속에서도 사방이 다채로운 음률로 가득 차며 감각적으로 인지된다. 어느 순간 소년의 눈도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뚝뚝 흐르는 자색 안광이 밤에 뜬 별빛 같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문득 백연은 자신이 또다른 공동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곳은 여태까지의 공동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바닥이 달라.’


가죽신 너머로 느껴지는 매끈한 돌바닥. 누군가 인위적으로 갈아낸 것 마냥 깔끔한 형태가 자연적이지 않았다.


동시에 백연의 감각에 느껴졌다. 바닥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공기가 달랐다. 상시로 기파를 뻗어내 주변을 확인하는 백연이었다. 자령안을 쓰고 있는 상태인지라 감각이 조금 흐려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원형으로 뻗은 공동. 천장의 형태가 반구(半球)형이었다. 밤하늘의 천구를 본따온 마냥.


츠츠츳.


옆에서 백사의 소리가 스치듯 들렸다. 앞으로 나아가던 뱀의 거체가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은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잘게 펼쳐진 감각. 자령안 안법으로도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빛 한점 없는 칠흑같은 어둠이 사방을 짓누르고 있었다. 반구형의 공동 벽을 따라 무언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까진 알아챘으나, 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후.”


백연이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일렁이던 안법의 기파가 약해졌다.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여휘검의 흐린 빛이 일었다. 어둠 속에서 요요하게 빛나는 검신. 백철로 만들어진 검은 어느새 광채가 깃들어 있었다.


“적화검류(赤花劍流).”


화르르륵!


백연의 중얼거림과 동시였다. 흐린 백광을 흘리던 여휘검의 손잡이부터 검신까지. 찰나에 짙은 화염이 솟구쳤다. 거칠게 쏟아지는 불꽃이 검신 전체를 감싸고 휘돈다. 귓가를 따라 타오르는 불길의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백연의 걸음이 바닥을 스쳤다. 부드러이 내뻗는 보법과 동시에 검신이 허공을 갈랐다. 화염을 꼬리처럼 매단채였다.


언뜻 춤추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일보와 함께 몸이 회전하는데, 그 형태가 아슬한 균형을 유지한다.


찰나, 세번의 춤추는 듯한 회전이 일었다. 전부 순간이었다. 그 사이 작열하는 화염으로 뒤덮인 여휘검이 허공을 수십차례 갈랐다. 지독할 정도의 쾌검식이 대기중에 검로를 새겨 고정시켰다.


“화간접무(火間蝶舞).”


파아앗-!


백연이 검을 털어내듯 우하단으로 내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직후 대기중을 따라 새겨진 수십에 달하는 불꽃의 검로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화염으로 그어낸 검로가 제각기 꽃잎처럼 흩날리며 비상했다. 삽시간에 어두웠던 공동이 화려한 빛으로 물들었다.


대낮처럼 밝아진 공동. 반구형의 천장이 위압적으로 사방을 내리누른다. 그 속에서 백연의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화악 달아오른 대기중에서 불꽃의 검로가 하늘하늘 낙하한다. 허공을 수놓은 불빛 사이로 백연은 반구형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닥과 마찬가지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천장. 그곳에는 특별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무언가의 잔흔(殘痕)을 제외하면.


“......!”


백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공동의 반구형 천장을 따라 새겨진 잔흔. 제멋대로 뻗어나간 그것이 어떤 무공의 흔적임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였다.


“어?”


투둑.


백연의 발치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입가와 코를 타고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속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는 비릿한 감각이 울컥 솟아올랐다.


“무슨......”


멍한 감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무공의 잔흔을 보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천장을 따라 새겨진 흔적. 손 가는대로 펼쳐낸 것이 분명했다. 일정한 초식이나 형태를 갖추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일수(一手)에 담긴 묘리가 얼마인지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우욱!”


백연이 허리를 꺾었다. 공동의 바닥에 핏물이 철퍽 떨어져 내렸다. 소년의 호흡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때 백연의 눈에 바닥에도 무슨 자국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들어왔다. 천장을 따라 다채롭게 새겨진 흔적과는 다르게, 바닥에는 몇개 되지 않는 흔적밖에 없었다. 겨우 세네걸음 내딛은 보법의 잔흔일까.


그러나 백연은 그것을 보는 순간 즉시 눈을 감아버렸다.


‘안돼.’


보면 안된다.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스치듯 보법을 인지한 것 만으로 머리가 한번 더 아파오려 했다. 이번에는 핏물을 토해내는 것이 끝이 아닐지도 몰랐다.


소년은 눈을 감은채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연스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운을 돌리면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가 펼쳐냈던 적화검류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 백연이 눈을 떴다.


다시금 공동은 칠흑같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천히 소년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로 입마(入麽)에 들뻔 했네.”


이 공동에 남겨진 무공의 흔적. 그 무공을 펼치는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언제 새겨졌을지 모를 오래된 흔적을 스치듯 인지한 것만으로 주화입마가 찾아올 뻔 했다.


‘대체 누구의 무공이지?’


알기 어려웠다.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적어도 무공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분야에 있어서 백연은 한계가 거의 없었다. 수준을 뛰어넘은 무공이라 해도 보는 것 만으로 자신의 이해를 초월해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무공을 펼치려 시도하다 주화입마가 오는 것도 아니고, 그 흔적을 본 것 만으로 목숨이 위험해지다니.


‘게다가 이런게 왜 여기에.’


하필 이곳에 저런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도 의문이었다.


이걸 기연이라 봐야 할까.


이윽고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았다는 것을 깨달은 백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본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나 죽이려고 한건 아니지?”

[......]

“하긴. 그건 아닐테고. 그럼 이 무공을 보여주려 했다는 건데......”


백연이 머리를 쓸었다.


“아직은 안되겠다.”


그의 실력이 부족했다. 이 무공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기라도 하려면 아직 한참 더 강해져야 했다. 그게 대체 언제가 될지 알기는 어려웠지만.


‘기연은 맞다.’


천하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무공이다. 이것을 사용한 이의 경지에 닿을 수 있다면. 아니, 그러지 못해도 이 무공에 담긴 의념과 힘의 편린이라도 그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천하를 질타하는 무공.’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잠시 동안 어둠에 잠긴 공동을 바라보던 백연이 몸을 돌렸다.


“나중에 다시 오자.”


훗날을 기약했다. 그리 멀지는 않은 시점에 다시 오리라는 확신도 동반해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무공의 흔적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하며 백연이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백사가 소년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나갈 시간이었다.



※※※



“......이게 다 뭐에요?”

“보면 모르십니까?”


다음날이었다.


산맥에서 발견한 동굴. 그 아래에서 영초를 가득 캐온뒤 날이 밝자마자 곧장 옥수로 향했다.


물론 백사는 그 안에 남았다. 그만한 덩치의 뱀이 산을 기어다니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날 사람이 한둘이 아닐 일이었다. 백사가 백연 자신 말고 다른 이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애시당초 그 동굴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백사의 존재 이유 같았다. 우연히 자연지기를 받아먹고 큰 뱀은 아닌 모양이었다. 백연이 나가려 하자 원래 있던 입구로 돌아와 가만히 똬리를 틀고 기운을 잠재우는 것이 그랬다.


‘누가 영약을 뺏어갈 일은 없겠네.’


피식 웃은 백연이 눈앞의 사람을 보았다.


그곳은 백야주루의 최상층이었다. 하얀 도포를 걸친 백연과 마주 앉은 사람은 당연하지만 루주 선화였다.


며칠 전 신강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짧은 시일 사이에 루주는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이거, 선란 아니에요?”


펼쳐진 보자기 위에 가지런히 놓인 풀들. 뿌리까지 다치지 않게 조심히 캐내진 선란을 보며 루주가 입을 벌렸다.


“맞습니다.”

“아니 대체 어디서 이런......이만한 상등품은 하오문에서도 쉽게 취급하지 못하는 것인데.”

“더한것도 다루지 않습니까?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라거나.”

“아주 가끔이죠. 영초는 귀한 물건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양을 한번에 보는 일은 정말 없는걸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풀잎에서 새어나오는 기운을 가늠한 루주가 백연을 쳐다보았다.


“공자.”

“예?”

“저한테만 말해봐요. 이거 어디서 구한거에요? 혹시 어디 사파 문파한테서 강탈했다거나......”

“저를 대체 뭘로 보는겁니까. 산에서 캔거에요.”

“전설의 약초꾼?”


실없는 농담을 흘리는 루주의 말을 무시한 백연이 물었다.


“그래서 가능합니까?”


영단을 제조할 수 있냐는 물음. 하오문 천라방을 찾아온 이유였다. 그의 말에 루주가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고운 미간이 옅은 주름을 새기며 좁혀졌다.


“아마도요?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거에요.”

“최대한 빨리 하면 어느 정도 걸리죠?”

“일단 이 정도 상등품의 영초를 가공해 영단을 만들어줄 약사를 찾아야 해요. 저희 하오문에 직접적으로 속한 몇명은 이걸 다루라 하기엔 아깝네요. 실력이 부족해서.”


단호하게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는 모습. 냉정하다 말할법도 했다. 그러나 저런 사람이니 이곳의 루주를 맡고 있는 것이겠지.


고민하듯 턱을 톡톡 매만진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에 연락을 넣어볼게요.”

“그들이 영단을 만들어 주겠습니까?”

“대가만 충분하면요. 제갈에 뛰어난 약사가 하나 있거든요. 무공은 등한시하고 약학만 익혀서 가문 내에서도 겉도는 인간인데.”


생긋 웃은 루주가 보자기를 조심스레 그러모아 선란을 덮었다.


“저희 하오문한테 신세를 좀 지고 있어서. 거절은 하지 않을거에요.”


금덩이라도 들어있는 양 보자기를 다루는 모습. 실제로 금덩이보다 귀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백연이 물었다.


“예상 시일은 얼마나 걸립니까?”

“길게 잡으면 삼 주. 그 이하로 해볼게요.”

“감사하군요. 대금은......”

“이만한 양을 전부 영단으로 가공하면 꽤 많이 나올텐데, 그중 한 알만 주세요.”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오히려 헐값에 해준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흑랑이 공자에게 말을 남겼는데. 아무래도 한동안은 못 볼것 같다고 하더군요.”

“바빠질 것 같다고는 들었는데, 많이 바쁜 모양이군요.”


신강에서 돌아오자마자 바삐 어딘가로 향하던 흑랑이었다. 방주 대리라는 직책. 쌓여있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터였다.


“맞아요. 우선은 회담부터 시작해서 할일이 많죠. 뭔가 알아본다는 것도 같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만 더. 하령님께서 섬서를 지나칠 일이 있으면 한번 찾아와달라고 했어요.”

“하오문 서안지부에 말입니까?”

“네. 말할게 있다고요.”

“새겨두지요. 조만간 갈 것 같으니.”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루주에게 인사를 하고 건물을 벗어나자 찬 겨울의 공기가 뺨을 두들겼다.


소복히 쌓인 눈더미가 하얗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 곤륜산맥을 옆에 둔 옥수의 겨울은 혹한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눈앞에는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한켠에 짐을 가득 싣고 지나가는 상행. 손을 호호 불어대며 무언가를 먹고 있는 이들까지.


번창하고 있었다. 생동감으로 가득 찬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곤륜의 위세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오문을 등에 업긴 했으나, 그럼에도 이제 단단한 문파로써의 입지가 선 것이다.


‘기세가 끊이지 않게 해야겠지.’


이 또한 물결과 같았다. 하나의 흐름에 올라탄 이상 기세를 몰아 나가야 했다. 지금은 백연에 집중된 곤륜의 위명을 모두에게 퍼뜨려야 했다. 그 기회는 아마 비무제전이 될 터.


단순히 암화라는 무인을 보유한 문파로 알려지는 것을 넘어, 곤륜파의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줄 기회.


그리하려면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도 올라가는 대로 사형들을 수련시킬 계획이었다.


다시 한번 옥수를 슬쩍 바라본 백연이 기파를 일으켰다. 소년이 가벼이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일었다. 한순간 흐릿해진 신형이 그대로 도시를 벗어나 곤륜산을 향해 질주했다.


그렇게 소년이 떠난 옥수에 아침 햇살이 천천히 깃들고.


“여기인가.”


턱.


누군가의 걸음이 언덕 위 눈밭을 밟았다. 하늘 높이 솟은 칼날 같은 산맥. 그 아래 펼쳐진 성도를 응시하는 무인의 뒤로 티없이 새하얀 장포가 흩날렸다. 특이하게도 안감에 검은 무복을 덧대어 입은 형상이 눈에 띄었다.


“곤륜이라......”


나직이 뇌까리는 무인의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인 낡은 검이 보였다. 솔잎이 새겨진 송문고검(松紋古劍)이 옅은 찬바람에 흔들렸다.


“궁금하구나. 어떤 문파인지.”


중얼거린 무인이 가벼이 걸음을 내딛었다. 한순간 그의 신형이 부드러이 흔들리더니, 구름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이윽고 언덕 위로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햇살 아래 펼쳐진 순백의 눈밭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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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4,729 106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4,832 9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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