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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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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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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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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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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사천(3)

DUMMY

※※※



“이곳일세.”


임지승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그야말로 거대한 객잔이었다. 사천 성도의 중심 거리에 자리잡은 웅장한 건물.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장원을 이루듯이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공간 내에 여러 전각들이 궁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보아도 고급지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붕을 받치고 선 기둥부터 그랬다. 일반 전각들과는 전혀 다른 비싼 자재를 쓴 것이 바로 보였는데, 그것이 건물마다 다른 종류였다.


“구중각(九重閣)이라 하지.”


광오한 이름이었다. 객잔의 소유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증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풀렸다.


“당가 소유의 객잔이란 말입니까?”

“그렇네. 대외적으로는 아니지만.”


의문이 해결되었다. 이만한 금력과 힘을 지닌 가문이 달리 있기 어려웠다. 더해 객잔의 독특한 운영 방식도 한번에 이해가 되었다.


구중각은 무림인들을 위한 객잔이라 했다. 무공을 익히고 활보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객잔이라고. 상행이나 평범한 민초들이 아예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공간이 무림인들에게 할애되어 있다고 했다.


때문에 사천 곳곳을 돌아도 보이지 않던 빈 방이 이곳에는 한가득이었다. 항시 머무는 몇몇 무인들을 제외하면 숙박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고.


“너무 비효율적인 것 아니냐? 이만한 객잔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산더미일텐데.”


무진의 물음에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름의 이득이 있기 때문에 이리 하는거야.”


계산적이었다. 이곳 구중각에서 떠나지 않고 숙식하는 유명한 낭인들이 꽤 있다 했다. 가끔씩 당가의 일에 손을 거들어 준다고.


“오대세가는 보통 빈객(賓客)을 받지 않지. 가문 자체의 위세와 이름이 너무 드높기 때문이야. 그래서 명성이 자자한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빈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없는데.”


구중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중원 무림을 떠도는 무인들을 구중각의 손님으로 받는다 해서 다른 말이 나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그저 객잔에 장기간 머무는 손님일 뿐이니까.


‘사실상 빈객을 유치하기 위한 장소.’


주 목적이 그렇다고 봐야 했다. 당가의 금력이면 이 객잔을 운영하는 비용조차 크다고 볼 수 없다. 반면 돌아오는 것은 컸다. 이름께나 날리는 빈객들의 힘. 무위가 그리 높지 않다 해도 숫자는 많을수록 좋다. 이곳에 머무는 무인들은 전부 유사시에 당가의 힘이 되어줄 이들인 것이다.


“그대의 식견이 탁월하군. 맞네. 그리고 구중각이 유명해질수록 이곳에 걸음하는 무인의 명성도 높아지지.”

“그들 입장에서도 사실상 당가의 빈객이라는 지위가 나쁠 것 없을테니까요.”


현 당가주가 처음 가주 자리에 오른 직후 만든 객잔이라고 했다. 들을수록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상승했다. 대체 뭐하는 인물인지.


일행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만한 시설과 크기의 객잔. 심지어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당가의 자존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임지승이 직접 신분을 공표하니 더욱 그러했다. 청성파의 도인들은 당가의 입장에서도 귀히 모실 손님들인 것이다. 그들과 같이 동행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낼 곳을 쉬이 얻었다. 용봉지회의 일이 뜻밖의 행운으로 돌아왔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청성파의 임지승이라 합니다.”

“곤륜파의 장문을 맡고 있는 운결이라 하오.”


객잔에 자리를 잡고 난 이후였다. 양 문파가 다시금 통성명을 나누었다. 허허로이 웃는 운결을 향해 임지승이 극진한 예를 차렸다.


“청해는 사마외도의 땅 아닙니까. 그곳에서 문파를 꾸려나가기가 힘드실 것인데.”

“제자들이 훌륭하니 걱정이 없소이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암화의 반만 닮으면 어찌나 좋을련지. 장문인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허허.”

“청성파의 장문인이면......청운진인(靑雲眞人)이시겠구려. 그 고명(高名)은 익히 들었소.”


이어지는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운결의 앞에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임지승의 태도가 공손했다. 다른 구파의 장문인을 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마음에 드는데.’


백연이 생각했다.


누구랑 다른 모습이 빠르게 호감을 샀다. 지저분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칼이 구파의 도인보단 저잣거리에 술 취해 돌아다닐 법한 중년 검객의 모습이었지만, 행동거지는 그와 전혀 반대였다.


‘부월검이라고 했나.’


반면 별호는 독특했다. 어렴풋이 싸움 방식이 짐작이 될법도 했다. 도끼라는 뜻을 지녔는데, 검객이 가지기에는 상당히 이질적인 별호였다. 어쩌면 겉보기와는 다르게 패도적인 검격을 구사할련지.


“여기는 단향목과 단미랑입니다. 저희 문파의 이대 제자지요.”

“곤륜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손을 모아 포권하는 한쌍의 남녀. 청년 단향목은 어느새 쾌활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고, 옆의 단미랑이라는 여인은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운검(赤雲劍)과 청하검(靑霞劍)이군. 소문은 익히 들었네. 청성파의 미래라고.”

“과찬이십니다.”

“세간의 평을 그대로 말한 것 뿐일세. 내 눈에도 그리 보이는군.”


운결이 수염을 쓸며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야. 장문인께선 저런걸 다 어떻게 알고 계시냐?”


약간 뒤편에 앉은 백연의 옆구리를 푹 찌른 것은 무진이었다. 백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모르지.”


운결은 중원 정세에 밝았다.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조차도 다방면으로 꿰고 있는 모습이다. 무력이라면 몰라도 이런 일에 있어서 운결은 박식했다. 평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항상 파악하고 있는지.


“여기는 선관천, 선소백, 선소경이라 합니다. 삼대 제자들인데, 검을 받고 이리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지요. 어쩌면 곤륜의 아이들과 교분을 나누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맞소. 너희들도 와서 인사하거라.”

“청성파의 도인께 인사 올립니다! 곤륜파의 연비라고 해요.”

“연청입니다.”


연비, 연청 남매를 비롯한 사형들이 몰려들어 제각기 인사를 나눈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점차 가볍게 바뀌었다. 소란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백연은 몸을 일으켰다.


“나가려고?”


소홍의 물음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굳어서.”

“식사 시간, 곧.”

“그 전엔 올거야. 이 객잔의 안쪽에는 연무장도 있다고 들었거든.”

“......나도 따라가도 될까?”


백연이 고개를 돌렸다.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조용한 사저. 설향이었다. 그녀가 허리춤의 검파를 툭 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좀 있어서.”

“상관없지.”


전각을 벗어났다. 안쪽을 따라 조금 걷자 자그마한 연못과 풀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는 큼직하게 지어진 연무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연무장 주변을 따라 둥글게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큼직한 왕성의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불이 밝혀진 연무장 위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무인이 몇 보였다. 큼직한 도를 나뭇가지 마냥 휘두르는 이부터, 가벼이 검을 들어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는 이, 무언가 내가기공을 연마하는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은 사람까지.


그들을 가벼이 지나쳤다. 아무도 백연과 설향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감각으로 느끼고 있겠지.’


거미줄처럼 펼쳐진 감각도. 상대방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싫어할 이들이다. 남의 수련을 엿보는 것은 무림인의 자존심을 깎아먹는 행위였으니.


백연은 그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자신과 관계없는 이들이다. 연무장 끄트머리,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백연이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게 뭐야?”


눈앞에 선 여검객. 설향 사저. 그가 처음 곤륜파에 들어왔을 적부터 있던 사람이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수가 없어 존재감이 적었다. 그럼에도 길게 늘어뜨린 흑발과 차분한 외양이 인상적이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사저였다. 무공 실력이 매우 빠르게 늘기도 했고.


‘소홍 사형이 여자였다면 저럴려나.’


아니, 설향 사저는 그보다는 활기찼다. 소홍 사형은 정도가 심했다.


“뇌룡.”


그때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설향이 입을 열었다.


“응?”

“네가 천주산에 갔을때, 뇌룡을 만났다고 들었어.”

“그랬지.”

“예전부터 동경의 대상이었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백연은 잠자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이윽고 설향이 곧은 시선으로 검파를 쥐었다.


스릉.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나왔다. 검을 뽑아든 설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그녀와 검을 맞대면, 몇합이나 버틸까?”

“일초지적(一招之敵).”


망설임 없이 답변이 튀어나왔다. 당연한 이치였다. 뇌룡 악예린은 산동악가의 천재. 그녀의 창술은 백연 자신도 놀랄만큼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어느 면에서는 검룡보다도 위인 부분이 존재한다. 심지어 용봉지회 이후 따로 수련에 들어가겠다고 까지 한 상태인데.


그간 아무리 설향의 실력이 늘었어도 불가능은 불가능. 일합만에 박살날게 자명했다.


그 말에 설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번 비무제전에서 그녀와 맞붙고 싶어.”

“......힘들텐데? 대진운이 좋으면 몰라도.”


뇌룡과 맞붙기 위해 올라가는 과정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대진을 봐야 알겠지만, 예선을 뚫고 본선 중반에는 가야 뇌룡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네게 부탁하는거야.”


설향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떨어지더라도 뇌룡의 손에 떨어지고 싶어. 적어도 한번만이라도 그녀와 같은 자리에 서볼수만 있다면.”

“......”

“역시 너무 무리한 부탁일까......”


침묵이 흘렀다.


뇌룡의 손에 떨어지고 싶다는 것은 그녀에 이르기까지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과 모두 싸워 이겨야 한다는 소리. 지금 설향의 실력으로는 명백히 무리였다. 천운이 따라 뇌룡을 빠르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지만.


“안되는 거면 어쩔 수 없......”

“열합.”


사저의 부탁이었다. 그녀가 품은 동경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평시 항상 조용하던 사람이 이리 따로 그를 찾아와 부탁할 정도라면 설향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겠지.


이루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과정이 아무리 지난하고 뼈를 깎는 것이라 해도.


“뭐......?”

“열합을 겨룰 수 있게 만들어줄게. 뇌룡 악예린과.”


스르릉.


백연의 검이 뽑혀나왔다. 여휘검이 흐린 빛을 내며 설향의 얼굴을 비춰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사저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긴 말 안할게. 검 들어.”

“......고마워.”


설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가다듬은 그녀가 검을 치켜들었다. 기꺼운 태도였다. 설향이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백연이 기파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가 중얼거렸다.


“막아. 아니면 죽는다.”


찰나 섬짓한 기파가 연무장을 휘돌았다. 한순간 제각기 무공을 수련하던 무인들의 시선이 연무장 끄트머리로 약속이나 한 듯이 확 쏠릴 정도로.


직후 새하얀 백광이 어둠을 갈랐고.


쩌어어엉!


구중각의 연무장에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



“백연, 무슨 짓을 한거야?”


식사가 끝난 뒤였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각자의 일을 하러 흩어졌다. 백연은 전각의 한 구석에 기대어 앉은채로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아까 사온 당과 주머니를 옆에 놓은 채였다.


“무슨 짓이라니?”

“아까 설향이 아주 만신창이가 되서 왔던데.”


단휘였다. 그의 물음에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익숙하잖아, 사형들은.”

“수련이야? 그런데 설향은 아직 그런 수준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백연이 서책을 덮었다. 청율이 필사해준 비급의 복사본이었다. 일하곤륜 태청. 청휘가 남긴 비급 속에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결이 많았다. 태청신공 이외에도 뽑아낼 것이 한참 남았다는 소리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살살해.”

“시간이 없어서.”

“고집은.”


백연이 픽 웃었다. 한숨을 내쉰 단휘가 검을 어깨에 걸쳤다.


“난 수련하러 간다.”

“열심히 해.”

“부월검께서 검을 좀 봐주신다 하던데. 너는 관심 없지?”

“음.”


흥미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이곳에서 전력을 내보일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그의 절기는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은 상황. 적당히 적화검류를 펼쳐주며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반대로 임지승의 검초를 보는 것은 조금 더 마음이 동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백연에게는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비급을 살피고 검법과 호신강기의 단초를 정리하는 것. 구결을 짜낼 심득은 이곳저곳에서 얻을 수 있을테지만, 그게 청성파의 검초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진 사형이랑 소홍 사형은?”

“이미 연무장에 갔다. 유성은 저기 있고.”

“그래. 다른 사형들도 같이 다녀오는 것도 좋겠네.”

“네가 말하기 전에 다 갔다. 청성파 일대 제자의 검초를 보는 것은 흔한 기회는 아니니까.”


곤륜파에서 운결과 백연, 청율, 그리고 설향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연무장으로 향했다고 했다. 좋은 일이었다. 강호 견문을 넓히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단휘마저 연무장으로 나가자 전각은 한층 고요함이 감돌았다. 구석에서 가벼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백연은 그 소리를 지우며 다시 비급을 펼쳤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암화. 실례지만 혹 이야기를 좀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단향목이었다. 그의 곁으로 유성과 단미랑이 서 있었다. 백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유성에게 넘어갔다.


“단향 선배가 너한테 궁금한 것이 있다 해서.”


유성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유성에게 부탁해 그와 말을 트려고 한 모양이었다. 양쪽과 본래부터 교분이 있는 사람은 유성 뿐이었으니. 조용히 있으려던 백연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는 탁월했다.


하는 수 없이 비급을 덮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운검, 청하검이라 하셨죠.”

“맞아요.”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의 이름을 나누어 받으셨군요. 두분이 청성파의 미래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가 봅니다.”


청성파를 대표하는 절세 검법의 언급에 단향목이 쾌활하게 웃었다. 단미랑 또한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과분한 별호라고 생각해요. 아직 실력도 미진한데.”

“사매는 너무 겸손한게 흠이야. 아무튼 그리 말해주는 것은 고맙군요. 암화.”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궁금한 것인지.”

“다름이 아니라.”


단향목이 웃음을 걸며 물었다.


“독룡 당소하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뜬금없는 물음에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맞긴 합니다만.”


단향목이 당소하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백연 자신의 무공이나 하다못해 행적에 대해 물을 줄 알았건만. 그것이 아니라 해도 청성파의 무인이 곤륜파의 무인에게 묻기에는 심히 동떨어진 질문이었다.


유성과 단미랑도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는 모습.


그러나 단향목은 그런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와 손을 나눠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천하 독룡의 무위......그런데 그의 진짜 전력은 독공인 것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지요.”

“독공의 위험성 때문에 본래 대련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당가의 두 절기, 만천(滿天)과 만독(萬毒)중 독룡은 만독을 익혔다고. 만천은 못 익힌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단향 사형.”


단미랑이 입을 열려 했으나 단향목은 그녀에게 웃어보이고는 다시 백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만독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단향목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었다.


“독공을 사용한 그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들 잘 모릅니다. 혹 알고 계신다 하면 제 무위와 비교해 누가 위인지 묻고 싶었습니다만.”


쾌활한 어투였다. 실제로도 별 생각 없이 물은듯 보였다. 동시에 칠룡과 자신을 비교하는 말에서 오만함과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백연의 시선은 가라앉아 있었다.


“예의가 아니군요.”

“예?”

“소하는 제 친우이며, 동시에 당가의 사람입니다. 타 사문의 무공을 함부로 가늠하고 입에 담는 행위......궁금하다면 차라리 독룡에게 직접 물어보시지요. 설령 제가 만독을 직접 본적이 있다 하더라도 자세한 내용을 입에 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년의 어투가 차갑게 떨어졌다. 잠시나마 쾌활하던 단향목의 표정이 굳어들 정도였다. 반면 눈치를 보는 것은 단미랑과 유성이었다.


백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소하의 무공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보려던 것부터, 그 무위를 은근히 깔아보는 어조까지 전부 불편했다. 문득 소년의 눈을 따라 옅은 자색 기파가 스쳤다. 감정에 동했는지.


“단향 사형! 그만하고 가요. 어차피 만독은 평생 상대할 일도 없는데.”

“하하. 미안하군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저 만독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 궁금했던 것이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네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단미랑이 단향목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를 저편으로 밀어낸 그녀가 이윽고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살풋 숙였다.


“미안해요. 단향 사형이 독룡한테 진 적이 있어서. 만독은 커녕 비도 몇자루에 처참히 깨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나봐요.”

“그랬습니까.”

“원체 호승심이 강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암화의 검식 한자락이라도 견식해보고 싶었는데......이렇게 되었으니 사형을 끌고 연무장에 수련이라도 하러 가야겠네요.”


단미랑이 고개를 재차 숙였다. 그에 백연이 입을 열었다.


“비무제전에 참가하시는것 아닙니까? 그때 보여드리면 되지요. 대련할 시간이야 가서도 충분할테니.”

“정말인가요? 고마워요.”


표정이 확 밝아진 단미랑이 돌아가고, 곁에 서 있던 유성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네가 왜?”

“본래 칠룡에게 자격지심이 좀 있는 선배인 것은 알았다만, 이런 무례를 저지를 줄이야. 내 잘못이다.”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유성의 잘못은 없었다. 저런 말을 꺼낸 단향목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가벼이 머리를 쓸어넘긴 백연이 입을 열었다.


“둘이서 술이나 한잔 마실까.”

“지금 여기에 네 장문인도 계신거 알지? 뭐를 마시고 싶으면 차나 마시자.”

“이런 객잔에서 차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앓는 소리를 내는 백연의 모습에 유성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제서야 딱딱해졌던 유성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확인한 백연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아, 술이든 차든 가서 주문하면 되겠지.”

“차로 해.”

“아하핫.”


따스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비급을 다시 살필 생각이었다. 아니면 유성과 무공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이고. 쉼없이 달려온 백연에게는 간만의 휴식 시간이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호북을 향해 달려야 할테니까. 오늘은 여유로이 있고자 했다.


그렇게 백연이 막 한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쿵.


문득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백연의 시야 앞을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 난데없이 고꾸라지는 소리였다. 그런데 자세가 이상했다. 누군가 실을 뚝 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엎어지는 모습.


“괜찮......?”


그때였다. 섬짓한 감각이 온몸을 저몄다. 찰나 무겁게 짓눌러오는 공기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도 잠깐.


벽면의 등롱이 크게 일렁였다. 백연이 진기를 끌어올리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화아아아악!


귀가 탁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스쳤다. 일순 시야가 아찔하게 일렁였다. 백연은 본능적으로 기파를 전신에 둘렀다. 태청신공의 진기가 한순간에 몸을 따라 흐르며 얇은 기막을 형성했다.


“유성!”

“백연, 이런......”


쿨럭. 얇게 기침한 유성이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윽고 그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일정한 숨소리만이 허공을 타고 맴돌았다.


적막.


기이한 고요가 감돌았다. 주변에 감돌던 모든 소리가 일거에 사라졌다. 백연을 제외한 모든 것이 동시에 잠들기라도 한 듯이.


그러나 백연의 감각도에는 달리 느껴졌다. 어느새 자색으로 물든 소년의 눈이 사방을 가늠하고 있었다.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막대한 크기의 기파가 구중각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권역. 그 넓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몸에 두른 진기를 짓눌러 찢어버릴 듯이 무겁다. 무공을 펼친 이가 어마무시한 축기량을 지녔다는 뜻이다.


‘아니, 애초에 무공도 아닌......?’


백연이 눈을 부릅떴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건 무공이 아니었다. 그저 의념을 권역처럼 펼쳐놓은 것일 뿐. 달리 표현하자면 유형화된 살기(殺氣)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네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백연은 여태껏 자신이 앉아 비급을 읽던 자리에 한 그림자가 들어찼다는 것을 깨달았다. 깡마른 신형. 암녹빛 옷자락이 흐르듯 의자를 타 넘어 바닥에 떨어진다. 그 위를 따라 금실로 엮어진 문양이 다채로웠으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남자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었기에 그랬다.


“내 핏줄과 교분을 쌓았다지.”


무심히 중얼거리는 어투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메마른 목소리는 세상 어떤것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을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동시에 초췌한 얼굴은 백연이 익히 아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새까만 눈동자. 굵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소가주 당소하의 외관이 그의 부친과 똑 빼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잠시.


“그 자질이 충분한지 시험하겠다.”


백연의 시야에 남자의 소매가 언뜻 스쳤다. 그 안에서 은은히 빛나는 검은 비도를 인식하는 찰나였다.


“막아보거라.”


키이잉-!


막대한 공력이 휘몰아치며 허공에 나선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동시에 소년의 인지가 즉각 수십, 수백으로 쪼개지며 길쭉하게 늘어난다. 여휘검의 흐린 빛살이 소년의 앞을 가로막는 것과 함께였다.


직후.


당가주 천독(千毒)의 손에서 뻗어나온 비도가 한줄기 묵빛 궤적을 그리며 백연을 향해 짓쳐왔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구중각에 거대한 폭음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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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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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성화방주 +5 23.12.07 3,488 91 16쪽
128 사천(4) +9 23.12.06 3,466 90 19쪽
» 사천(3) +8 23.12.05 3,486 95 22쪽
126 사천(2) +5 23.12.04 3,556 90 17쪽
125 사천 +8 23.12.01 3,688 90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658 90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581 92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654 87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725 83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824 92 15쪽
119 영물(5) +7 23.11.17 3,899 89 19쪽
118 영물(4) +6 23.11.15 3,757 93 15쪽
117 영물(3) +7 23.11.13 3,795 90 15쪽
116 영물(2) +7 23.11.10 3,948 90 18쪽
115 영물 +7 23.11.08 4,092 88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971 92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4,103 94 19쪽
112 네가 돌아올 곳(9) +7 23.11.01 4,056 85 20쪽
111 네가 돌아올 곳(8) +6 23.10.30 4,165 85 17쪽
110 네가 돌아올 곳(7) +7 23.10.27 4,289 85 20쪽
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383 83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459 91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4,556 90 19쪽
106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522 93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8 23.10.16 4,612 95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4,766 97 16쪽
103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4,815 94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4,625 103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4,708 109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5,086 109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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