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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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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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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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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DUMMY

※※※



반시진이 흐른 뒤였다. 하령의 집무실에서 깨어난 백연이 핏물을 왈칵 토해냈다.


“하아, 하......”


백연에겐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이었다. 뒤이어 눈을 뜬 하령이 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어디선가 따스한 물로 적신 천이 날아와 백연의 손에 떨어졌다. 피를 닦아낸 백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그래서 경고한건데. 술법무공은 제약이 없으면 터무니없이 강력해지거든. 무공과는 다르지. 기이한 술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전투에 있어서 크나큰 이점이고.”

“그렇다 해도.”


백연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뜨자 초점이 돌아왔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졌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뭐 그럼 이길줄 알았어?”

“......”


백연이 볼을 긁적였다.


하령을 이긴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애시당초 질것을 상정하지 않고 모든 싸움에 임하는 그다.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금원방주와의 일전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당시 태청신공 없이도 금원방주를 어느 정도 상대했던 백연이다. 비록 악예린과 팽악의 조력이 있었다곤 하나, 이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상대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허나.


“네 성장 속도가 고금에 남을 기재인 것은 맞지만, 내가 지내온 세월은 그보다 훨씬 기니까. 벌써 따라잡히면 체면이 안 서지.”


하령은 금원방주가 아니었다.


그 무위, 내공의 힘, 자유자재로 술법무공을 다루는 기예와 전투에 임하는 본능적인 움직임까지.


“괴물이네요, 하령은.”


수천가지의 술법을 수족처럼 부리는 술법무공의 대가. 그 이름이 지닌 의미를 지금까지 백연은 잘 모르고 있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여의금고봉을 연상케 하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백금빛 광채를 투창이라도 된 양 자유롭게 던져대고, 벼락을 부리며 사방에 거대한 빛의 결계를 떨구던.


‘숫제 제천대성(齊天大聖)이 따로 없어.’


심상속에서 마주한 하령의 전력은, 그야말로 설화에 나오는 선인을 떠올리게 하는 무위였다. 지상에 인간의 형상을 한 괴이가 현현했다 느낄 정도로.


“걱정마. 심상이니까 그 정도 무위를 부릴 수 있는거고. 현실에서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아서 말이야. 그리고 그보다는 네 무공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하고 싶은데.”


그의 검법에 대해 말을 꺼낸다.


심상에서 하령을 상대하며 극한까지 몰아붙여진 백연이었다. 자연스레 검법의 감각을 다시 한번 자세히 깨워낼 수 있었는데, 천독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검법을 내치는 것이 자유로워졌다.


틀이 잡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내공심법. 벼락을 손에 쥐었지. 천하에 가장 다루기 어려운 기운을 품은것부터 대단해.”


후한 칭찬이 이어졌다.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그의 무공을 살피는 기색을 보여준 하령이었다.


“근원 심상이 여러군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언뜻 내 술법무공의 향기도 나고.”

“맞습니다. 도움을 좀 얻었지요.”

“그때 술법을 알려달라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잘 엮어냈어. 터무니 없는 신공이야. 심법은 더 이상 손댈것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네가 나에게 묻고, 다듬고 싶은 것은 역시 심법이 아니겠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번에 엮어내고자 한 것은 검법의 기틀. 적화검류와 창명류수검을 넘어, 강대한 적들에게 통할 검법이 필요했다. 절대자, 초월자들. 만일 그런 자들을 만나도 무기력하게 패하지 않을 수 있는 검법.


모든것을 풀어헤치는 기파. 그리고 그 기파를 두른 검법.


“보법 기세......권역을 풀어헤치고 간격을 가져오는 것에 특화되어 있어. 전장을 장악하는 보법. 이름이 용형보라고 했지?”

“네.”

“그와 비슷한 감각을 검법에 더하려 한 흔적이 보였어.”


핵심을 정확히 짚어낸다. 백연의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랬다.


그와 심상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며 하나 하나 살피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무공을 구현하려 하는지, 어떤 감각을 엮어내고 있는지.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무공을 그리 시전하며 자유자재로 다루는 와중에 상대방의 무공을 일일이 분석해 짚어준다니. 백연 자신이 자주 해대는 짓거리이지만 남한테 받는 것은 또 색다른 기분이었다.


이만한 실력의 무인이 그의 무공을 자세히 살피고 조언을 해주는 일이 흔하지 않은 것이다. 새겨들어야 했다.


“네 검. 아직 미완이야. 그건 너도 알지?”

“당연하죠.”

“하지만 심상에서 분명 그 방향성이 보였어. 네 기파는 뇌기야. 상대의 공간을 찢고 가르는 공능이 매우 탁월한데, 고수들간의 싸움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지. 권역과 의념.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가 매우 중대해. 기본적으로 싸움은 공간을 가져오고 장악하는 것이 기본이니까.”


간합과 무공 초식의 장악 범위. 합쳐서 공간을 다룬다고 한다. 앞뒤양옆, 위와 아래. 어디가 사각이고 어디가 사각이 아닌지를 파악하고 파훼하는 것은 무림인들의 기본.


하령이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네 검, 뇌풍(雷風)처럼 빠르고 예리하게 몰아치는 것을 기본으로 잡고 출발한 것은 알겠어. 그런데 중간마다 이상한 공능을 보았는데, 내 생각이 맞아?”


하령의 시선이 백연과 마주쳤다. 하령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검법, 빛을 잘라내던데. 다른말로 하면 공간을 분절시켰어. 착각이 아니라면.”

“착각은 아닐겁니다.”


그가 검법을 엮어내며 담은 심상이 그러했으니까. 변질되지 않았다 하면, 그의 검법이 나아갈 방향성은 그곳이다. 미래의 가능성까지 제시하는 심상에서는 그게 구체화되어 나타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령이 그것을 눈치채는 것도.


그 말에 하령이 머리를 긁적였다. 꼬마 방주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흘러나온 것은 잔뜩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야, 너. 대체 무슨 미친 검법을 만든거야?”

“아직 다 안만들었습니다만.”

“아직 안만들......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령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 검법의 심상과 방향성이 유지가 되어 완성된다면. 그리고 네가 그걸 완벽히 다뤄낼 경지에 다다른다면.”


아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맑은 시선이 백연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피하는 것 외에는 막을 수 없는, 극공(極攻)의 검법이 탄생하는거야.”



※※※



“언제든지 찾아와. 그리고 혹시 연락하고 싶을땐 이걸 사용하면 될거야.”


서안지부를 떠나는 백연에게 하령은 이것저것을 가져다 품에 안겼다. 귀한 술과 차, 그리고 술법무공에 관련된 도구 몇가지. 개중에는 일전 하령이 옥수에 있던 그에게 연락을 취할때 썼던 종이도 있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연락을 한번은 취할 수 있으니까.”

“꼭 필요할때 쓰겠습니다.”

“그래. 지나갈 일 있으면 또 오고.”


무공에 대해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하령은 진심으로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듯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진짜 스승으로 모셔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술법무공도 전부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비무제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아마 한번 더 올거에요.”

“당연히 우승하고 올거지?”


피식 웃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약조를 하듯 장담했다. 그리고 작별이었다.


“가시는군요. 암화님.”

“예.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지기에게까지 인사를 마치고 서안지부를 나서자 흐릿해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한층 가라앉았다. 햇살의 장막이 거두어진 하늘은 차가운 바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밤에는 눈이 내릴 듯 싶었다. 아직 겨울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경고하듯이.


‘눈이 많이 쌓이려나.’


그렇게 되면 여정길에 조금은 지장이 있을법도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여차하면 하룻밤 더 머물고 가도 될 일이다. 장문인, 그리고 검룡 유성과 미리 이야기 해놓은 사항 때문에 그러했다.


“장문인, 다녀왔습니다.”


객잔을 찾아 돌아가자 따스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마침 식사를 할 시간에 도착했다.


“이리 와서 앉거라.”

“예. 그나저나 이게 다 뭡니까?”

“먹거라. 밥은 든든하게 챙겨야지.”


비싼 요리가 가득했다. 사천에서 먹은것과 비슷한 수준의 진수성찬이었다. 운결은 아이들이 먹는것에는 인색하게 돈을 쓰는 일이 없었다.


‘신웅 사숙조가 보셨으면 투덜거리셨겠네.’


이렇게 돈낭비 하지 말라며 항상 말하는 사람이다. 자금 관리는 자기가 한다고. 어찌나 불평을 하던지.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은 그리 아끼지 않아도 될 것인데, 신웅 사숙조는 결코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이놈들아, 아껴서 나쁠것 하나 없다.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아, 백연. 왔구나. 처리하러 간 일은 잘 풀렸어?”


자리에 슬며시 끼어들자 앞에 앉은 유성이 반갑게 인사했다. 음식을 한접시 집어든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된것 같아.”

“좋은 일이네.”

“그런데 밤에 눈이 많이 내릴 것 같은데. 화음에서 이곳까지 길이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백연의 말에 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마. 눈이 쌓이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올 사람들이니까. 늦어도 내일 오후면 올거야.”


섬서 화음현. 화산이 자리잡은 도시이다. 그곳에서 이곳까지의 길을 말했다. 화산파의 행적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청해에서 출발할때부터 이야기를 나눈 사항이었다. 화산파와 섬서 서안에서 합류하기로. 검룡 유성의 존재 때문이었다. 한동안 곤륜파에 와서 지낸 화산제일기재가 이제 화산파의 품으로 돌아갈때가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기분이 어때?”

“기분? 딱히 별 생각은 없어.”


유성이 흑단같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고향에 돌아가는 건 당연히 좋지만, 화산파보다 여기가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말 해도 되는거야?”

“사실을 말하는 것에 문제가 될 여지는 없지.”


살풋 미소를 지은 유성이 눈매를 매만졌다.


“이곳은 활발해서 좋아.”

“화산은 아니야?”

“구파중에서도 오래된 문파니까. 고루한 규칙도 있고, 고지식한 장로님들도 계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유성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듯 턱을 두들긴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장문인의 직전제자니까. 배분의 문제도 있고. 여러모로 겉도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


담담한 어조였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네.’


백연은 생각했다.


어디서나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이들은 겉돌기 마련이다. 압도적인 재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력을 지녔다면,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취를 보일 것이다. 눈앞의 검룡이 그런 사람이다.


같은 배분으로 들어온 동기들과 이미 하늘과 땅 차이만큼 실력이 벌어져 있겠지. 하물며 그 압도적인 재능으로 단기간에 칠룡의 머리에 오르고, 그것을 넘어 화산파 장문인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기까지 하면 어떨까.


제아무리 유성의 사형과 사제들이 그런것을 신경쓰지 않으려 한다 해도,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들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타인의 성취에 눈을 돌리는 행위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공이란 본래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는 것. 구파의 고매한 신선들이 무공을 구도(求道)의 수단으로 삼는 이유다.


누군가의 재능과 실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낼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


그걸 신경쓸 시간에 자신의 무공 한초식을 더 연습하면 될 일이다.


“그래서 곤륜의 분위기도 좋았어. 다들 너를 편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백연이는 귀엽잖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백연의 머리를 푹 내리눌렀다. 시선을 돌리자 언제 술이라도 한잔 마셨는지 약간의 홍조를 띈 연청 사형이 있었다. 특유의 유들유들한 웃음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우리 문파의 막내.”

“막내 아닌데.”

“아참, 선아가 있었구나. 해랑이도 있고.”


생글생글 웃는 연청의 옆에서 또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번에는 도현 사형이었다.


“그나저나 연청 네 말은 검룡은 화산파에서 귀여움을 못 받았다는 거지?”

“어이쿠, 이렇게 몰아간다고?”

“네 말이 그렇잖아. 안 그렇습니까, 검룡?”

“아하하.”


유성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도현이 어깨를 으쓱이곤 입을 열었다.


“화산파에서도 저한테 했던 것처럼 한대씩 두들겨 패주면 친해질겁니다. 검룡의 검에 제일 많이 두들겨 맞은게 화산파 애들이 아니라 나일 것 같은데.”

“그런가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웃으며 도현의 말을 받아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간 수련을 계속 같이 진행하며 어느새 친근해진 모습이다. 그새 술병을 들고 온 도현이 백연을 슬쩍 밀어내고 유성의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나저나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공대합니까? 연배도 비슷할텐데.”

“네가 괜찮다면 언제든지.”

“시원하군. 한잔 할까?”

“좋은걸.”


술잔을 나누는 것도 빠르다. 연청은 또 그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즐거워 보이는 사형들을 바라보던 백연이 운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래도 됩니까?”

“허허, 하루 정도는 그냥 두거라.”

“도문에서 술을......”

“백연이 네가 그런것도 따졌느냐?”

“억울해서 그럽니다. 저는 안마셨는데.”


백연이 입술을 비죽거리자 운결이 웃었다.


“그리 억울하면 언제 나와 한잔 하자꾸나. 내가 이래봬도 천관을 상대로도 술을 진적이 없다.”

“......예?”


백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야장 천관. 백연이 기억하는 그라면 어마어마한 주량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아니, 애초에 그만큼 외공의 성취가 높은 인물이 주량이 적기도 어려웠다. 타고난 용력부터가 장사이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술을 진적이 없다니.


‘우리 장문인, 위험한 분이셨네.’


운결과의 술자리는 피해야겠다고 머릿속에 새겨둔 백연이 잔을 손에 쥐었다. 이제 장문인의 허락도 받았겠다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레 유성의 곁에 붙은 백연이 생긋 웃었다.


“나도.”

“막내, 넌 아직......”

“연청 사형은 오늘 저녁에 나랑 일대일로 수련하고 싶어?”

“한창 마실 나이지. 밤을 새도 멀쩡하겠구나.”


또다시 유들유들 흘려넘기는 연청이었다. 백연에게 자연스레 술병을 건네주는 동작까지 물 흐르는듯 했다. 바깥에서 눈발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음에도 객잔 안은 따스했다. 그렇게 밤은 일렁이는 등불과 함께 은은하게 저물어갔다.



※※※



이튿날이었다. 아침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정오가 되기에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잔은 어둑어둑했다.


“눈이 그치질 않는구나.”


운결이 중얼거렸다.


“어찌 될련지.”


그만큼 심했다. 객잔의 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내다본 백연조차 고개를 절래절래 저을 정도로. 하늘을 가득 채운 눈바람이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든다. 그야말로 대설(大雪)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 못했는데.”


사형들은 아예 깨우지도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난 백연은 객잔 밖의 날씨를 확인하고 아침 수련을 그 즉시 포기했다. 설향 사저만이 조용히 일어나 지금 객잔의 일층에서 심법 수련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올 수 있는거 맞아?”


백연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근처에 걸터앉아 차를 홀짝이던 유성이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이 정도는 모르겠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답하는 음성이 담담했다. 절대적인 믿음이 서려 있었다. 그에 백연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화산파의 무공이 뛰어나다지만 이런 눈발을 뚫고 서안에 입성할 수 있다고? 무공은 만능이 아니다. 지고한 무인도 자연의 앞에 휩쓸려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뭐, 어차피 나갈 수 있는것도 아니니 기다려 봐야지.”


어깨를 으쓱인 백연이 마찬가지로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백연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켠에서 눈을 감고 앉아있는 운결, 그리고 가만히 엎드려 일정한 숨소리를 내며 잠든 설향 사저. 두 사람의 규칙적인 호흡 너머, 옅은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눈바람의 소리가.’


벌떡 일어난 백연이 객잔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했다.


여태껏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어느새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적이지 않았다. 천지사방 전체를 감싸고 휘도는 바람이, 어느 한 공간에서만 가로막힌듯 지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왔다.”


그때 백연의 뒤를 쫓아 뛰쳐나온 유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연은 시선을 집중했다.


희게 흩어지는 입김 너머, 저편.


어느 순간, 하늘이 다채로운 색으로 덧칠되고 있었다. 오색창연(五色蒼然)한 색채가 하늘을 뒤덮은 구름마저 갈라내고 그 위를 색칠한다. 한호흡에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거인 반고(盤古)가 하늘을 백지 삼아 붓질을 한 듯이.


그리고 그 아래 선 투명한 인영이 있었다. 유성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스승님.”


구름 위의 노을.


운하검신(雲霞劍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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