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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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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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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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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약선객(5)

DUMMY

※※※



길다란 절벽을 올라오는 것에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목숨을 걸고 벽면을 기어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잔도 끝자락에 난 구멍은 길다란 동혈(洞穴)이었고, 뒤편의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금령수의 향을 쫒다가 찾았습니다. 길이 있더군요. 본래 과거에는 사람들이 오가던 곳인 모양인데.”


제갈명의 말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숨이 차면 멈춰서서 헥헥거리는 그는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아도 체력이 약한 사람이었다. 제 딴에는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서 그렇다 말했지만.


“그래도 어릴적에 무공을 배우긴 했습니다. 체력에는 아무 문제도......”

“몇살까지 말입니까?”

“나이가 두자리가 되기 전까지지요.”

“......”


웃는 모습에 백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등을 내어주었다. 그보다 키가 큰 제갈명이었으나 워낙에 가벼웠던지라 업고 올라가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올랐다. 그때까지도 제갈명은 백연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다. 구음절맥을 치료해 줄 수 있냐는 물음에 그는 고민하듯 웃다가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백연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동혈을 벗어나고, 숲길에 발을 디디게 되었을때, 백연의 등에서 내려온 제갈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숲길에 우뚝 멈춰선 제갈명이 백연을 돌아보았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빛이 그의 눈썹에 별가루마냥 내려앉았다. 묘하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제갈명은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몇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본디 사람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기 보단, 특히 무림인들이 그렇지요.”


그가 스스로의 코를 가리켰다.


“향에 예민하다 했지요? 저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몸에서 피냄새가 납니다. 생명의 냄새이자 죽음의 향이지요. 전장 속에서 살아온 이들. 검끝에 몇명의 목숨을 담아냈을지 알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사람이 선하건, 악하건 간에요.”


백연이 무의식적으로 코를 찡그렸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백연 자신의 몸에서도 혈향을 맡고 있는것인가. 이 사람은.


상당한 고통일 것이다. 피냄새 뿐만이 아니다. 모든것의 향을 잘 느낄 정도로 극도로 예민한 사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백연 또한 스스로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릴때의 기분을 잘 알기에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과도한 정보가 스스로가 원하지 않아도 쏟아진다.


“해서 저는 주로 혼자 시간 보내기를 좋아합니다. 의원이라는 자가 모순적이지요. 제게 치료해달라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림인들이고, 그렇기에 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지쳐 방안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 세간에서 약선객이라는 별호가 제게 따라붙은 것도 그 이유가 없지 않을겁니다.”


말끝에 덧붙인다. 약으로만 치료하면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되기에-라며.


가볍게 말했지만 가볍지 않은 내용이 뒤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백연은 그 뒷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가 관심가질 내용이 아니다.


“허면 하오문은-.”

“하오문은 알고 계시겠지만 구성원의 대부분이 무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그들조차도 자주 얼굴을 보는 것은 아니고요. 또 제가 하오문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살풋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두드리더니 미소지었다.


“비밀입니다. 가문에서 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로만 알려드리지요.”

“그렇다고 하기엔 소가주는 당신을 꽤나 아끼는 듯 보였는데 말입니다.”

“아, 천 형님이야 그러시겠죠.”


미미한 웃음을 짓는 끝자락에 씁쓸한 어조가 깃들어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백연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 물었다.


“피냄새가 난다 했지요. 그렇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음.”


제갈명이 그를 응시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가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분 나쁠 이유는 없지요. 제가 사람을 많이 죽인것은 사실인데.”

“그러니까, 당신은 바다입니다.”


알 수 없는 말. 그에 백연이 되물으려던 그때 제갈명의 말이 이어졌다.


“피로 이루어진 바다(血海).”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에게선 전장의 군신(軍神)에게서나 날법한 피냄새가 납니다. 여러 무인을 만나보아 피냄새에 익숙해졌다 생각한 제가 어지러울 정도로.”

“그 정도로 죽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상한 일이었다. 전생의 검귀라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백연은 그렇게까지 많은 피를 묻히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여놓고 그 양이 많냐 적냐를 논하는 것 부터가 우스운 일이지만.


혈해라 일컬을 정도의 목숨을 취했는가, 그리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수 있었다.


제갈명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같은 연배에, 당신같은 신성이 그렇게 피냄새를 묻히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요. 인간백정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만큼 피를 흩뿌렸다면 풍문으로라도 알려졌을 일이겠지요.”

“음.”

“저도 당신이 그렇게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피냄새가 묻어있다, 그런 이야기지요.”


말하는 목소리가 여상했다. 제갈명의 시선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면 지금 괜찮으신겁니까? 피냄새가 그리 심하다면 맡기 좋은것은 아닐텐데요.”

“어, 음. 사실 그것이 또 이상합니다.”


제갈명이 머리를 긁적이곤 말했다.


“당신의 기도, 그러니까 향은 전체적으론 매우 투명합니다. 혈해라고 했지요? 분명히 혈해와 같은 향이 나긴 하는데, 그것이 중심이 아닙니다. 바람, 숲, 햇빛의 향과 흙더미 위의 풀냄새, 아릿한 비바람과 뇌전의 습기부터 나아가면 자소단의 꽃을 비롯한 향취까지. 뭐랄까 당신은.”


제갈명이 손을 모았다. 그제서야 표현할 말을 찾은듯이.


“자연입니다. 전쟁마저도 속에 품고 있는 거대한 자연. 마치 세상의 사랑을 받는 듯 하군요. 모순적입니다. 이리 피냄새를 묻히고 있으면서.”

“이해하기는 어렵군요.”

“그리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양한 향이 난다는 뜻이니까요.”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요. 요건은 당신의 체질이 매우, 매우 독특하다는 소리입니다. 정확한 것은 살펴보아야 알겠지만요.”


제갈명이 말을 덧붙였다.


“처음 선란을 받았을때, 거기에 언뜻 당신의 향취가 미약하게나마 묻어있었습니다. 물론 선란의 질도 굉장히 뛰어났기에 일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만. 그보다 그것을 보낸 이가 궁금해졌었습니다. 그래서 간만에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랬기에 하오문에 백연 자신에 대해 물어보고 정보를 알아냈다고.


루주가 말했던, 자신을 궁금해했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인듯 했다.


“그랬군요.”

“그래서 이번 비무제전에도 걸음했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얼굴이나 구경할까 싶어서.”


말한 제갈명이 잠시 고민하듯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사실 만나고 지금까지 약간의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악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제게 무엇을 요구하려 드는 사람도 아닌 듯 하고.”

“요구는 했지 않습니까? 치료를 부탁드렸는데.”

“제가 여기로 올라올때까지 아무런 대답도 안했는데 가만히 있었잖습니까. 하하.”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제갈명이 부연설명을 했다.


“대다수의 무림인은 그리 성정이 느긋하지 못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얻어내야 하지요. 그들은 힘이 있고, 힘이 있으면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명문세가나 지고한 구파의 일원이라 해서 그닥 다를것도 없습니다.”

“경험담인가 봅니다.”

“뼈저리게 새긴 경험이지요.”


생긋 웃는 제갈명의 모습. 눈썹을 스친 햇빛이 더 길게 기울었다. 이윽고 그가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


“가시지요. 환자를 보러.”


산뜻한 음성이었다. 백연은 눈을 깜빡였다. 흔쾌히 수락해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뭔가 필요한건 없습니까? 댓가라거나.”

“살려주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정 그렇다면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혹 다치거나 한다면, 제게 우선적으로 진료를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상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들어주지 못할것도 없는 내용.


“약선객이라 불릴 정도의 의원한테 진료받는 것은 외려 제가 이득인 것 아닙니까?”

“그리 띄워주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체질에 대한 제 개인적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함이니까요.”


미소섞인 어조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상황이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가는 길에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좀 들어보도록 하지요.”

“석려려라는 아홉살 소녀입니다. 구음절맥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는데, 제가 임시로......”


산길을 스치는 걸음이 이전보다 가벼웠다. 그제서야 한시름 내려놓은 백연이 석려려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양기를 이용해 환자의 혈맥을 녹여놨다고요?”

“예,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요.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기공의 고수라 해도 지극히 섬세한 기감이 없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텐데. 어떻게......”


의문과 당황이 섞인 질문이 오갔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무당의 경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이른 제갈명이 몸을 돌려 백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내려가보겠습니다. 운현에서 머물고 있도록 하지요. 구음절맥의 치료를 위해서는 장기간이 걸리니 말입니다.”

“이대로 제갈세가에 알리지 않고 내려가도 되는겁니까? 비무제전도 코앞인데.”

“저는 비무제전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세가 사람들은......천 형님에게만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일은 알아서 잘 할테니 신경 끄라고요.”


그리 말하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내려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한바탕 휘몰아치고 사라지는 모습. 어조와 행동은 더없이 친절하고 유쾌한 의원의 모습이나, 그 밑바탕에는 바람같은 기질이 깔려 있었다.


분명 다르지만 비슷한 사람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언뜻 머릿속에서 제갈소백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스치는 것만 같을 정도로.


제멋대로라 하더니. 백연은 루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듯 했다.


약선객 제갈명.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



이어지는 날들이 빨랐다. 백연은 제갈명을 운현으로 보낸 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어째 무당산에 와도 달라진게 없네.’


어쩌면 곤륜파에 있을때보다 더 바쁜 것 같기도 했다. 사형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틈틈이 선아가 검을 살피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무공 구결을 다듬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귀찮게 굴어대는 이들을 상대해주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젠장, 졌다.”


쿠웅.


팽악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한숨을 뱉었다. 그토록 노래를 불러대던 백연과의 대련 직후였다.


“절초는 안쓰는 겁니까?”

“......그리되면 너무 많이간다. 내 절초를 막아내려면 너도 힘을 좀 써야 할텐데.”


팽악이 혀를 찼다.


“바로 내일부터 예선이 시작이잖나.”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날이 성큼 지나갔다. 비무제전의 시작일은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였다. 일주일간 이어질 예선, 그리고 그 후로 삼주간 이어질 본선.


장장 한달간 이어질 거대한 제전(祭典)의 시작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랑 절초랑 뭔 상관입니까?”

“......흠?”


팽악이 눈썹을 치켜올리다 헛웃음을 지었다.


“예선이라고 무시하지 마라......고 하고 싶다만. 하긴 네놈을 꺾을 사람이 안보이는군.”

“아니요. 그런 문제라기보단, 저는 만전을 그리 중시하지 않습니다. 전장에서 누가 만전을 기다려준다고.”

“그것도 그렇긴 하군. 하지만 지금은 어렵겠다.”


팽악이 한켠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연무장 저편,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인파 너머 흑색 무복의 소년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르는 바람에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이곳을 응시하는 것은 유성이었다.


“기다리는 모양인데.”

“......무슨 일로?”


중얼거린 백연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한순간에 사람의 벽을 뛰어넘은 소년이 유성의 앞에 바람결처럼 내려앉았다.


“백연.”

“무슨 일이야?”

“그냥. 잠시 놀러왔지.”


말하며 웃는 모습에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한가한가보네. 난 바쁜데.”

“들었어. 대련해달라고 줄을 서 있다며?”

“그것만이면 좋게.”


시도때도 없이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탓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깨를 매만진 백연이 유성을 보며 물었다.


“그건 됐고. 그나저나 네 기도가 살짝 바뀐것도 같은데.”

“여전한 눈썰미네. 스승님께 지도받은게 약간 있어서.”


여상한 어조로 답한 유성이 생긋 웃었다. 어느새 하늘에 해가 비스듬히 걸렸다.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다. 유성이 물었다.


“식사는 했어?”

“아니.”

“......아침도 거른건 아니지?”

“벽곡단은 완벽한 음식이야.”

“그건 언제 먹었는데?”

“어제 저녁에.”


유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에 백연이 작게 툴툴거렸다.


“바쁘다니까. 농담 아니야.”


애초에 그는 벽곡단 맛을 싫어했다. 검귀의 생에 돌아다닐때 한두번 먹었어야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곡단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만큼 바빴다.


예선이 그야말로 코앞인 탓이었는데, 어제 저녁까지가 사형들을 굴릴 수 있는 한계인 까닭이었다.


오늘밤은 그래도 쉬게 해줘야 할테니.


그렇지 않으면 내일 예선의 개막때 다들 방에 쓰러져서 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그가 만전이 아닌 상태로도 싸울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백연 자신이나 해당되는 말.


아직 실력이 부족할때는 간밤에 잠을 푹 잤느냐 아니냐가 승패를 가르기도 하는 것이다.


한숨을 내쉰 유성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딜?”

“밥 먹으러.”

“진짜 바쁜데. 사형들한테 마지막으로 구결 지도도 좀 해줘야 하고, 직접 대련하는건 아니어도 이것저것 알려줄게......”


터억.


자연스레 다가온 유성이 내밀었던 손으로 백연의 머리를 꾹 눌렀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 사형들은 네 생각보다 강해. 예선은 문제없을거야.”

“......알지만.”

“어미새도 아니고, 입에다 다 넣어줄려고? 아서라. 너도 오늘은 좀 쉬어.”


어투가 가벼웠다. 그러나 동시에 두가지 생각이 섞여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겪은 곤륜파 사람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백연에 대한 걱정.


저렇게 말한 이상 거절하기도 뭐했다. 한숨을 내쉰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거 없으면......”

“무당파 숙수들이 얼마나 뛰어난데.”


백연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술은?”

“......너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하하.”

“당소하한테 물어봐 그런건.”

“그럼 너는 안마시는거지?”

“그런 말 한적은 없는데.”


두 소년이 서로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왠지 유성이라는 깨끗한 도화지에 자꾸 먹물을 들이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쪽이야. 오늘은 뭐가 준비되어 있으려나.”

“돈도 어마어마하게 들겠네. 이만한 사람들을 먹이려면.”

“아마 절반은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바치는 식재들일걸? 상호간에 이득이라. 대신 상인들도 비무제전 기간동안 문파 경내로 들어와 돌아다니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전각들 사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가끔씩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이 많았으나 두 사람 다 그런것에는 이미 익숙했다.


그렇게 걸어가다 어느 전각의 뒤편의 길로 돌아들어가는 순간.


화아아악-!


따스한 바람이 귓가를 타고 흘렀다. 한순간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기파가 꿈결처럼 투명했다. 동시에 곁에서 걷던 유성이 번개같이 검을 뽑아드는 모습이 시야 바깥으로 스쳤다.


“넌 누구냐!”


후욱.


짧게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암향표의 기파가 일고, 어느 순간 유성은 이미 백연보다 앞에 나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전각 뒤편에 선 훤칠한 인영을 향해서였다. 매화검법의 기파가 시야속에서 그림처럼 흩어졌다.


백연이 말릴 틈도 없었다.


찰나지간 뻗어나간 검격이 눈앞의 인영에 닿으려던 순간.


“화산의 기재.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 소문이 외려 축소되었다 느껴질 정도군요.”


길목에 선 검객의 손이 분절된 듯 움직였다. 마치 움직임을 잘라내 붙여넣은 듯이.


어느새 유성이 내지르는 검의 옆면에 손을 가져다댄 그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벼운 손짓으로 검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터엉!


맑은 소리가 울리고, 화려하게 피어나던 꽃잎이 삽시간에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유성의 검격은 처음부터 검객의 옆을 향했던 듯이 비껴나가 있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요. 잘 보았습니다. 눈이 즐겁군요.”

“이런......!”

“잠깐만, 유성.”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유성을 멈춰세운 것은 백연의 목소리였다.


그가 유성과 같이 검을 내지르지 않은 이유.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인영이 그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면을 쓰고, 허리에 두 자루의 검을 비스듬히 비끄러맨 이검(二劍)의 검객. 바람을 휘감은 듯한 기도가 인상적이던 사람은.


“......풍백?”


가면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 아래 비치는 연하늘색 눈동자가 반가운듯 휘어졌다.


“간만입니다. 백연. 잘 지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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