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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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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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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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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예선(2)

DUMMY

※※※



“검성(劍星)이라고?”


올라가는 법이 드문 당소하의 음성도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막 수저를 들어올리다 굳어드는 모습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 들리겠다. 목소리 좀 낮춰.”


태연히 젓가락을 놀리던 유성이 말을 얹자 당소하가 미간을 좁혔다.


“보나마나 네놈도 놀랐을 것으로 보인다만.”

“놀랐다기보단, 되려 검을 휘두르던데.”


백연이 말하자 유성이 기침을 터트렸다. 당소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한테?”

“검성한테.”

“미쳤군. 앞으로 어디가서 나와 아는 척 하지마라.”

“......실수였다고.”

“실수로 검성한테 검을 휘두르는 후기지수라. 아주 유망해.”


나누는 목소리가 낮지 않았으나, 주변에서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드넓은 무당파의 식당 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에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문파에서 열댓명씩만 무당산에 걸음해도, 중원 전체 정파의 수를 따져보면 합해서 기백명이다.


지금 식당 안에 걸음한 사람만 백은 가뿐히 넘을 터.


그들의 말소리가 돋보일 여지가 없는 것이다. 더해 검성이라는 별호는 오랜기간 중원 무림에서 나돌지 않던 이름. 사람들의 이목이 잘 끌리지가 않았다.


“은거한지 꽤 오래 지났다. 어린 무인들은 아예 그런 검객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를 여지가 많지. 과거에 천하오대검수로 묶이기는 했다만, 이제 와서는 청성파의 청운진인(靑雲眞人)이 검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도 많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제아무리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다 해도 그 위명이 잊혀지는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풍문은 흐르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당소하가 말했다.


그는 어느새 수저를 내려놓은채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모은 모습. 그때 유성이 덧붙이듯 말했다.


“청운진인께서 천하오대검수에? 내가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른데. 제갈가주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도 많았어.”

“호사가들마다 의견이 갈리지. 제갈가주 와룡천견(臥龍千見)께선 술법무공의 대가이기도 하니. 검법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애초에 절기가 검법이 아니라는 점도 있으니.”


답한 당소하가 백연을 쳐다보았다.


“여하튼, 그런 이름이야 계속 바뀌는 것이니 큰 의미는 없지. 그렇다곤 해도 검성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다. 그의 위명. 검을 깊게 파고드는 이들은 꼭 한번씩은 마주하게 되는 이름 아닌가. 유성 네놈도 그랬지 않나?”


유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만히 그 둘의 이야기를 듣던 백연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의문인 점이 있었다. 천하오대검수에 묶이는 검성이라고는 하나, 그 힘이 다섯중에 압도적이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마주한 네 사람, 검왕, 운하검신, 검성, 그리고 선극은 제각기의 방면으로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 느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면 백연은 주저없이 선극을 고를 것이다.


허나 당소하와 유성의 이야기에서 풍기는 느낌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마치 검성에 대한 강렬한 동경과 경외심이 깃든 듯한 목소리.


“어째서야?”


백연의 물음에 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야 간단해. 그는 검 두자루에 의지해 모든것을 해결한 사람이거든.”

“요컨대 검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물론 나야 검수가 아니니 잘 모른다만.”

“당소하의 말이 맞아. 검성이라는 별호가 다른 이들을 모두 제치고 그분한테 붙은 이유가 있지. 그의 이검(二劍)이 곧......”


유성의 눈이 반짝였다. 검성을 이야기하는 눈에 선명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전장을 이끄는 별이었으니까.”


잠시 그를 쳐다본 백연이 재차 물었다.


“다른 검수들도 있지 않아? 네 스승님이라거나.”

“결이 달라. 스승님도 위대한 검수는 맞으시지만, 그분의 무위가 절대적인 것과, 검만을 이용해 지고한 경지에 이른건 다른 느낌이니까.”

“으음.”

“검성의 무공은 딱 두가지로 유명해. 다른 분들만큼 파괴적인 광역 절기나 기예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압도적으로 쾌속하고 신묘한 보신경과, 그에 뒤따르는 천하제일의 쾌검. 보이지도 않는 검법이라고 들었어. 스승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 검성의 검은 보고 피한다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검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백연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검성의 무공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다른 천하오대검수와 비교해봐도 그렇다. 하늘을 뒤덮던 검왕의 창궁무애검법이나 대지 전체를 짓누르던 제왕검형. 또 하늘을 가르고 겨울을 찢어내던 운하검신의 노을과는 전혀 다른 무공.


백연 그 자신이 신강에서 경험해본 풍백의 검은 그랬다. 극한으로 갈고 닦은 검법. 하나에 지독하게 매진해 갈아낸 검은 무엇보다 날카롭다 느껴졌다.


“낭인 검객에다, 제자를 하나도 두지 않았다는 사실도 검성을 더더욱 선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점이라고 하더군.”


가볍게 덧붙이는 당소하. 그러나 이윽고 유성과 백연을 슬쩍 쳐다본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들 그러지?”

“음, 그게.”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공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셔서.”

“......농담인가?”

“그리고 이 녀석은 그걸 거절했지.”


유성이 한숨을 푹 내쉬자 당소하의 표정이 더욱 묘하게 변했다.


백연은 미간을 좁혔다.


“거절한 적 없어. 시간이 날때 배운다 한거지.”


당장은 무공을 배우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제아무리 풍백의 무공이라 해도 그렇다. 오히려 그런 사람의 무공이기에 더 시간 여유를 만들고 배우는게 낫다. 무공을 익히고 그것에 손을 대는 행위는 가볍지 않다. 어설프게 배우느니 안 배우느니만 못하니.


다급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무공을 배우는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새로운 뼈대를 엮어내야 하는 처지이니까.


그의 말을 이해한 풍백도 흔쾌히 동의한 것이다.


“보통은 그런 기연은 거절하면 다시 안 찾아오는게 정상인데.”


가볍게 불평하는 유성. 뒤이어 황당한 듯 웃는 당소하까지.


“매번 느끼지만 제대로 미친놈이군.”

“동의해.”


그를 빤히 쳐다보는 유성과 당소하 두 사람의 시선에 백연이 볼을 부풀렸다.


“조용히들 하고 식사나 하지?”

“여하간 기회가 왔으면 배워놔. 아무래도 네 검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는 않으니까. 지독할 정도의 살검(殺劍)......우리 화산의 암향표는 전후좌우 간합을 가져가는 보법이지만 검성의 무공은 말 그대로 움직임에 자유를 부여하는 보신경이니까.”


유성의 말에 백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풍백의 보신경은 한번쯤 다시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 또한 이번 일은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선 기간동안 익힐 생각이야.”

“흐음. 그래, 그러고보니 예선도 바로 내일부터 시작이군.”


당소하가 말했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식당 안을 훑었다.


“며칠 전까지 없던 사람들도 급격히 늘어났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전 무림의 정파에서 최소 한둘씩은 모였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만.”


그가 백연을 가볍게 쳐다보았다.


“일주일 뒤에 전부 남아있을 자신은 있나?”

“당연히.”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형들을 어설프게 굴리지 않았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비무제전 예선.


이미 그 방식에 대해 갖가지 설명을 들은 참이었다. 길고 복잡한 내용들이 있었으나 예선의 규칙을 크게 요약하면 세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첫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예선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선으로 직행해 만나게 될 터. 예선을 치루는 것은 오롯이 나머지 모든 정파의 무인들이었다.


둘째. 한번 진다고 바로 탈락이 아니었다. 그말인즉슨 예측하지 못한 강적을 만나도 한번쯤은 기회가 있다는 것. 사형들에게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번째. 어떻게든 일대일 경기에서 두 번만 이기면 본선에 올라간다.


자잘하고 복잡한 내용을 빼면 이것이 전부였다. 간단하고 명확한 방식.


그렇게 모여든 전 중원의 정파 무림인들 사이에서 일백 스물 여덟의 무인을 선발하는 일주일간의 과정이 비무제전 예선이었다.


“쉽지만은 않을거야. 구파와 오대세가가 아니라고 해도 상당히 강력한 사람이 많으니까. 일례로 저번 비무제전에서 이름을 떨쳤던 인물중에 하나는 안휘성 단리세가의 사람이었거든.”

“그놈을 무시하던 인간들이 박살나는 모습이 나름의 재미였다. 하나씩 깨부수는 과정에서 그 냉막하게 생긴 눈썹 한번 까딱하지 않던게 인상적이었는지 무정검귀(無情劍鬼)라는 별호까지 붙더군. 이번에는 나이가 넘어서 나오지 않겠지만.”


생소한 중소 세가의 이름이 두 소년의 입에서 언급된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무인이라는 소리. 그들의 말에 백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원하는 바였다. 그들의 말인즉슨, 제아무리 중소 세가나 문파의 무인들이라 해도 이곳에서 선전하면 이름을 만방에 알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더해 예선을 모두가 통과한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곤륜파라는 이름은 몇단계 위로 올라갈 것이다. 암화라는 이름의 뒤에 딸려오는 것이 아닌, 비무제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문파로.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군.”


당소하의 어조가 가벼웠다. 믿음이 실려 있었다. 유성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백연은 가만히 웃음으로 답했다.


곤륜의 첫 걸음을 내딛을 때가 코앞이었다.



※※※



식사를 마친 뒤였다. 백연은 유성의 조언대로 남은 하루를 쉬기로 결정하고 무당파 경내를 천천히 걸음했다. 산문으로 들어오는 무인들의 수가 한가득이었는데, 개중에는 백연을 알아보는 사람도 몇 있었다.


“잠깐만......혹시 그대.”


산문으로 막 들어서던 무인이 백연을 보고 입을 연다.


“암화(暗火)가 아니시오?”


거친 황백색 장포를 걸친 중년 무인이었다.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강렬했는데, 후기지수는 아니었다. 그 무위가 상당히 높다는 것 만큼은 쉽게 알법했다.


동시에, 백연이 모르지 않는 형태의 기도였다. 일전 용봉지회에서 아주 잠깐밖에 느껴보지 못했지만 그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뒤따르는 일고여덟의 젊은 무인들조차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맞습니다.”

“본 무인은 황산파(黃山派)의 장문직을 맡고 있는 이무홍이라 하오. 이렇게 만날 줄이야. 남궁가주에게 전부 들었소. 그대가 소선이의 시신을 수습해주었다고......”


연신 감사인사를 보낸다. 뒤따르는 황산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 소저께서 제 사형을 살려주셨지요. 또 위 소저께서 제게 몸을 좀 챙기라 그리 당부하셔서, 덕분에 건강히 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가 가볍지 않아 언제고 갚고자 하고 있으니 그리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랬구려. 소도장과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싶건만. 그럴 시간이 없는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못내 아쉬운 얼굴로 들어가는 황산파의 무인들. 생각지도 못한 인연을 마주했다. 강호 무림의 은원은 알 수 없다더니.


다시금 머릿속에 위소선의 목소리가 스치는 듯 했다. 그때보다 몸이 훨씬 강건해졌는데. 다시 보면 어찌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결코 알 수는 없겠지만.


“단휘 사형에게도 알려줘야겠네.”


중얼거린 백연이 걸음을 옮겼다.


황산파가 지나간 이후에도 사방에서 속속들이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는 한 무인도 있었다.


“저, 저기!”

“쉿. 목소리가 너무 크다.”

“당가주가......”


저편 아래에서부터 홀로 거대한 기파를 끌고 올라오는 한 무인. 암녹빛 옷자락 위로 흐르는 듯 금실로 엮어진 문양이 다채롭다. 초췌한 얼굴의 무인이 스치듯 산문 앞에 내려앉았다가, 여상한 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 움직인다.


그 사이에 백연 자신에게 또렷한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간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당금 무림의 절대자들이 전부 한곳에 모이고 있었다.


뒤이은 행렬도 마찬가지였다. 단미랑과 단향목이 섞여있는 청성파의 무인들도 스치듯 지나갔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한없이 청량한 기도의 도인이었다. 아마 저 사람이 청운진인일 터.


뒤따르던 단미랑이 그를 알아보고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백연은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행렬을 눈에 담기도 한참.


천천히 무당파의 경내를 거닐던 백연의 기감에 문득 누군가의 기척이 잡혔다. 맑고 투명하며 동시에 푸른 하늘처럼 드넓은 기운.


고개를 돌리자 시선에 새하얀 백색 장포가 얽혀들어왔다.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다. 뒤따르는 무인 하나를 가볍게 따돌리고 오는 걸음에 남궁세가 천풍신법(天風身法)의 쾌청한 묘리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아챈 백연이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백색 장포를 걸친 소년이 그에게 멈출 새도 없이 와락 뛰어들고.


“백연!”


투명한 음성이 반가움을 담고 울려퍼졌다. 그의 품에 안겨드는 몸이 이전보다 성장해 있었다.


“왔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찾아오지도 않고 뭐하는거에요. 곤륜파의 장문인은 이미 뵈었는데, 백연에게 말을 전해준다고 해서. 언제오나 기다리다......”


그럼에도 다급하게 늘어놓는 목소리는 이전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에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 남궁의 가주를 뵙습니다.”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에 안겨들었던 소년이 머리를 홱 치켜들었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 황당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백연! 그게 무슨 말투에요.”

“남궁의 가주께 결례를 범할수는 없지요. 그리고 저리 뒤따르는 사람을 버리고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가주의 안위가......”

“......백연!”


이제는 약간의 물기까지 어린 목소리에 백연은 웃어버렸다. 남궁유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그가 고개를 숙여 소년과 눈을 맞췄다.


“잘 지냈어?”

“......장난치지 마세요. 진짜.”

“미안.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백연이 미소를 지어보이자 남궁유진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깃드는 것이 여전히 순수한 모습이었다.


“잘 지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솔직히 조금 버거워요. 아니, 많이.”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는 내용과는 다르게 단단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담담히 뱉는 음성. 잘 버텨내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린나이에 물려받은 가주직이 보통 버거울 것이 아닐텐데.


“가주님! 그리 혼자 가시면......”

“괜찮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곤륜파의 암화와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뒤따라온 무인이었다. 백연을 슬쩍 응시한 무인이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백연이 웃음을 흘렸다.


“어엿한 가주네. 사람도 잘 다루고.”

“......그런 소리 마세요. 적어도 백연은.”


무인에게 명을 내리던 침착한 표정에서 삽시간에 제 나이대의 얼굴로 뒤바뀐다.


“저를 가주 취급 안해줬으면 좋겠어요.”

“남궁세가를 이끄는 가주한테 그러면 결례인데.”

“다들 그렇게 대하니까요. 세가의 장로들도, 무인들도, 하다못해 다른 구파와 세가들의 사람들도. 한없이 딱딱하게 굴고......”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궁유진이 말하는 내용이 놀라웠다. 저 말은 두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검왕의 위세가 남궁유진에게 일부나마 확실하게 넘어갔다는 의미. 즉 남궁가주직의 계승이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모두가 그것을 인정했다는 소리다.


또 그와 더불어 남궁유진이 가주의 일을 잘 처리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검왕의 이름을 등에 업고 어린 나이지만 남궁세가를 훌륭히 이끄는 소년.


보통이라면 검왕의 위명에 짓눌려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남궁유진은 그만한 자질이 있다 봐도 좋았다.


그럼에도.


“고생했어.”


백연이 머리를 쓰다듬자 화악 펴지는 얼굴이 아직은 그 나이대의 소년임을 드러낸다. 형제도 없이 홀로 세가를 이끄는 일은 극히 어려우니. 토로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었겠지.


검왕이 그에게 부탁했던 이유가 없지 않았다. 간간히 기별을 보내어주라더니. 어쩌면 백연 자신을 이제는 없는 형제들이랑 겹쳐보고 있는 것인지.


무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하며 백연이 남궁유진을 쳐다보았다.


“가문에 별일은 없고?”

“네. 당장은 모두 괜찮아요. 안휘성에 날뛰던 사파는 용봉지회의 토벌을 기점으로 많이 잠잠해졌어요. 특히 북경 황실의 감찰사가 한차례 내려온 이후에는 근 몇년중에 가장 평화롭다 말할 수 있겠죠. 다만.”


소년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한걸음 물러나 짓는 표정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삽시간에 남궁가주의 모습이 된 남궁유진이 말을 이었다.


“검왕께서 이제 자리에 없으시니 일시적인 평화일 뿐이에요. 그렇기에 갖가지 대비를 해두고는 있지만 충분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또, 그와 별개로 한가지 이상한게 있는데.”

“이상한 것?”

“백연을 빨리 보려고 했던 이유중에 하나에요. 제가 보고 싶었던 것과는 별개로, 알려줘야 할 것이 있어서.”


소년이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본다. 동시에 살풋 발끝을 비트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와 함께 제왕검형의 권역이 미세한 기파를 일으키며 주변을 따라 막처럼 퍼져나가는 것이 백연의 기감에 느껴졌다.


그들의 말을 혹여나 누군가 엿듣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새.


이윽고 주변을 확인한 남궁유진이 백연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천주산에서 만금장이 회녕부 지부대인과 엮였던 사건. 황실의 감찰사까지 내려와서 조사했는데, 조사를 길게 이어가지 않고 일을 그냥 종결시켜버렸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하게 말해서, 황실이 나서서 묻어버린거에요. 저번 용봉지회의 자세한 내막을 파해치지 않고.”


백연의 눈이 가라앉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백연이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중에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없어요.”


소년의 대답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자리를 옮기자. 들어야 할 이야기가 좀 있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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