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을 찾아서 (8)
밝은 방.
놀족과 뭔가를 의논하던 탐험가는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앗. 웬 놈이냐!"
"꿈꾸는 성인 길드 소속인가?"
"으음, 그렇소만. 그쪽은 웬 놈이요?"
경계심이 서린 표정. 호리호리한 체형의 탐험가였다.
존댓말인지 반말인지 모를 대답을 흘려들으며 라파엘은 놈을 살폈다.
호리호리한 놈의 로브는 두꺼웠는데, 방어력에 중점을 둔 로브 같았다. 이놈, 분명 마법사군!
"나는 마법사 라파엘이다. 놀족 퀘스트 맡은 자가 있다기에 구하러 왔지. 다행히 무사하군."
그 말에 호리호리한 마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길드 신입이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어디 한 군데에만 소속된 자가 아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주는 해결사라고 생각해라."
"해결사라··· 고맙지만 이미 이곳 일은 우리 선에서 해결되었소."
호리호리한 마법사 옆의 금발 남자도 동조했다. "퀘스트는 다 끝났다." 금발 남자는 사각진 턱을 가진 자였다.
라파엘은 둘의 모습을 힐끗 봤다.
둘 다 마법사군.
두 놈 모두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가 볼테니 하던 일 마저 해라."
생각보다 금방 끝난 대화에 둘은 어리둥절하다가 곧 본론을 계속했다.
물론 라파엘은 당당히 그 자리를 지켰다. 뭔가를 꾸미는 것 같은 현장을 떠날 수 없는 건 사람의 본능이리라.
"아무래도 이 스킬은···" 말하던 뾰족한 마법사는 뭔가 불편한 느낌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다던 해결사가 멀뚱히 서 있다. "···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럼 이만."
라파엘은 가는 척하면서 주변에 숨었다. 안내해 주던 놀족도 엉겁결에 함께 숨었다.
"코잇?"
"쉿, 조용!"
놈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라파엘은 알 수 있었다.
'마법사 놈들. 놀족에게 스킬을 전수받으려는 거였군!'
학문적 호기심이 넘치는 마법사였기에 시도하는 행위다.
하지만 직업을 초월한 스킬 전수라니, 이게 가능할 리가 없다.
'후훗.'
남의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건 오직 라파엘뿐이니까.
방 안에서 두 마법사의 고뇌가 전해졌다.
"원리만 깨우치면 익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무모한 시도였던가?"
시간이 더 흐르자 마법사 놈들은 방에서 나왔다. 축 처진 어깨는 놈들의 좌절을 보여 주었다.
*
놈들이 벽돌집에서 나온 직후, 라파엘도 천천히 나왔다.
이곳은 던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던전은 어두컴컴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평범한 마을을 누가 던전이라고 여기겠는가.
두 마법사 놈은 로브를 고쳐 입고는 놀족과 대화를 나눴다.
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홀쭉한 마법사였다.
"이틀간 신세를 많이 졌소."
"쿄이! 쿄이!"
띠링-!
익숙한 알림음 직후, 푸르른 메시지가 떴다.
[탐험가의 스킬, '통역관'을 습득했습니다.]
'통역관? 이거 혹시···'
[호기심 넘치는 탐험가는 독특한 스킬을 개발했습니다. 서로 대화 나눌 용의가 있다면, 이종족과도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홀쭉한 마법사의 비밀스러운 스킬, 통역관.
놈은 이 스킬로 몬스터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설마 저놈이 만든 스킬인가?'
만약 가정이 맞다면, 홀쭉이 놈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마법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놈이 오랜 시간 연구해서 만들어 냈을 법한 스킬은 순식간에 라파엘의 스킬 목록에 들어왔다.
라파엘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홀쭉한 마법사는 몬스터와 마저 인사를 나눈다.
"약속대로 1주 후에 또 들르겠소."
놀족은 새롭게 만든 동맹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코롯! 코롯!"
"정보는 그때 또 들고 오겠소."
"쿄이, 코주히!"
놀족의 축복을 받으며 두 마법사는 터벅- 터벅- 길을 나섰다.
라파엘은 멀찍이서 이종족 간의 대화를 엿들을 뿐이었다.
'통역관!'
놀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라파엘은 해석이 안 됐다.
[통역관] 스킬의 한계 때문이었다. 시전자와 이종족 간 대화가 가능할 뿐, 옆에서 해석할 수는 없기에.
라파엘도 [통역관] 스킬을 시험해 볼 겸 안내원 놀족과 대화했다.
'통역관!'
띠링-!
[상대방이 동의하면 통역관 (Lv. 0) 스킬이 발동됩니다.]
"마법사가 무사한 것을 관찰했으니, 나도 원래 마을로 돌아가 봐야겠다."
"쿄우자 시쿄지롯? (같은 마을에 사는 거롯?)"
'미친!'
하지만 짐짓 태연한 척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와 저자들은 같은 길을 걷는 동문이다."
그 말에 안내원 놀족은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문이라고 하지만, 저놈들은 내 부하에 가깝다. 내 명령에 따를 뿐이지."
"호이푸히? (부하라고히?)"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일이 많아서 가 봐야겠다며, 놀족 전원과 작별을 고했다.
어느덧 혈맹이 된 놀족은 언제든 들르라며 라파엘을 축복해 줬다.
"쿄이, 코주히! (어디서든 잘 먹고 잘살길!)"
마법사 놈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라파엘은 마음이 급했다.
'스킬 주머니가 사라진다!'
한창 수면에 빠진 바바리안을 깨우고 서둘러 놈들을 쫓아갔다.
놀족은 떠나는 혈맹을 배웅했다.
"쿄이잇!"
"후키키!"
*
풀숲 안.
여전히 <평온한 은신처> 던전 내부다.
잠이 덜 깬 바바리안은 다시 부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조금 더 쉬고 가는 것도···!"
"바르크, 그럴 시간이 없다. 조금 더 늦으면 꿈꾸는 성인 길드원을 놓치게 될 거다!"
"으하핫!" 바바리안의 얼굴에서 열의가 엿보였다. "퀘스트 보상 비용 논의가 필요하다, 이거구만!"
"그렇다."
아니다. 퀘스트 보상은 오로지 마법사 두 놈이 가져갈 것이다. 저들 알아서 해결한 퀘스트니까.
놀족 퇴치 퀘스트에서 사실상 라파엘과 바르크가 한 일이라고는 없는 셈.
친선 경기 3회로 얻은 것은 놀족과의 혈맹이다.
그럼에도 긍정의 대답을 한 것은, 지친 바바리안에게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바르크는 없는 힘까지 쥐어짜서 달리고 있지 않은가.
다다다다닥-!
꼭 원시 부족이 입을 법한 가죽 갑옷은 휘잉- 휘잉- 위태롭게 날리었다.
라파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후훗."
바바리안은 [맹렬한 돌격]까지 써 가며 달리는 것 같다.
점점 둘의 격차는 벌어졌다.
"바르크. 천천히 가라!"
잠시의 시간 후.
둘은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바르크는 극심한 체력 소모 때문에 벌러덩- 쓰러졌다. [맹렬한 돌격]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라파엘은 동료에게 포션을 한 방울 주고는 주변을 살폈다.
어디 간 거지?
[전장 정찰 스킬을 사용합니다. 초당 마력 소모량 : 전체 마력의 20%]
탐험가 흔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초목 공장. 방금 지나간 탐험가 위치를 가르쳐 다오!'
슈슈슈-!
식물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무질서한 움직임!
심지어 몇 식물은 라파엘을 가리켰고, 어떤 식물은 놀족 부락 방향으로 몸을 뻗기도 했다.
라파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식물이 다른 얘기를 하다니?
'정확하게 아는 녀석들만 나서도록.'
슈슈슈-!
여전히 식물은 아우성쳤다. 모두는 자신이 확실하다며 그 뜻을 굽히지 않는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라파엘은 바바리안의 능력에 기대기로 한다.
"바르크, 이상하게 내 탐지 마법이 안 듣는다. 마법사를 방해하는 결계가 쳐져 있는 것 같다. 네가 대신 탐험가 흔적을 찾아봐라."
바바리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응? 나도 모르겠는데?"
"난감하군! 방금까지 있던 흔적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바바리안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이럴 때는 스킬에 의존할 게 아니라 감각을 발휘해야 하는 법! 흔적은 어디까지 있었는가?"
바바리안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돈은 이 바바리안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니까. 두 탐험가를 족쳐서라도 제 몫을 받겠다는 탐욕이 느껴진다.
라파엘은 그런 바바리안을 멀뚱히 쳐다봤다.
"네가 앞서 나가지 않았나?"
돌격 스킬까지 써 가며 신나게 달려나간 것은 분명 바바리안이다.
"응?! 내가?"
바르크는 단지 신나서 달린 것뿐이었다.
"아니, 됐다. 그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법이다."
누군가를 탓하는 건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늘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
순간, 라파엘의 머리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식물이 얼마나 오래 살지?"
"으응?! 너무 어려운 질문이구만!"
눈을 끔뻑끔뻑하는 바바리안.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청년이 겹쳐 보였다.
그를 보자 라파엘은 분노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올랐다.
'길도 모르면서 왜 먼저 달려나간 거냐?'
하지만 이 정도 분노는 쉽게 다스릴 수 있다.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바바리안의 머리를 쿵-! 때려 버렸다.
"으윽! 대체 왜···!"
"흡혈 벌레가 있었다."
라파엘은 식물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스킬을 시전한다.
[시전자의 의도에 따라 농업 대백과사전이 펼쳐집니다.]
[초당 마력 소모 : 전체 마력의 1%]
[이름 : 픽시 세이지]
[수명 : 70년]
[설명 : 4계절 내내 푸릇푸릇한 이 잡초는 굉장한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이름 : 강모 (綱毛)의 레드위드]
[수명 : 50년]
[설명 : 공격력을 가진 잡초로, 제 생명을 위협하는 자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이름 : 크리핑 레이스플라워]
[수명 : 1년]
[설명 : 날씨에 따라 색깔이 은은하게 바뀌는 이 꽃은, 놀족이 가장 좋아하는 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 법했다.
-방금 지나간 탐험가 위치를 가르쳐 다오!
애매한 주문이 문제였던 셈.
식물은 시간의 흐름에 무지하다. 오랜 세월을 살고, 늘 한 자리에 머무니까.
농업 대백과사전을 닫은 라파엘은 좀 더 명확한 조언을 구했다.
'초목 공장! 우리 말고 다른 탐험가가 있는 방향을 말해 다오!'
스스슥-!
촤자작-!
식물의 의견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두 방향을 가리키는 식물들!
'두 마법사 놈은 결별한 건가.'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가능성 높은 얘기다.
마법사 놈은 제각기 갈 길을 떠난 것이다.
던전 내부에서 찢어지는 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바르크. 내 탐지 마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얼른 이동하자."
쉬고 있던 바바리안을 데리고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우선 한 녀석이라도 만나야 하니까.
속도를 높이고 한참 후.
마법사 놈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놈들이다."
"제대로 찾았구만!"
한데 이상하게도 두 명이 함께 있었다.
홀쭉이 놈과 금발의 마법사 놈. 두 놈은 로브를 나풀거리며 함께 길을 걷고 있다.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라파엘 일행은 마법사 일행에 합류했다.
"여기서 다 만나는군. 우리도 마을로 가려던 참이다."
"엇? 아까 그 해결사 아니요?"
"아까 그자인가?"
"그렇다. 너희도 놀족과 혈맹을 맺은 것 같더군."
잠시 긴장했던 마법사 놈들은 한편이라는 것에 안심되었는지 경계심을 풀었다.
라파엘은 퀘스트 보상비 얘기는 당분간 하지 마라고 바바리안에게 미리 일러뒀다.
"보다시피 나와 바르크는 함께 활동하고 있다. 너희만 괜찮다면 당분간 퀘스트를 함께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나쁘지 않은 제안이기에 마법사 두 놈은 저들끼리 뭔가를 속닥였다.
어차피 마법사끼리만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는 한계가 있으리라.
빨리 스킬이나 내 놔라. 이놈들!
놈들의 대답을 재촉하기 위해 라파엘은 마저 말했다.
"싫으면 말고. 우리는 둘이서도 충분히 먹고살 만하니까."
결국 놈들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홀쭉이가 먼저 제 이름을 밝혔다. "내 이름은 사울이요.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소."
그 후에는 네모난 얼굴 사내가 이름을 밝혔다. "크리스다. 나 역시 마법사의 길을 걷는 중이다."
라파엘은 둘을 신중하게 살피고는 말했다.
"우리 실력은 정평이 나 있으니, 둘 실력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으하하! 2인의 노한 헌터 내에서도 미제 의뢰는 내가 다 해결했지!"
바바리안 놈이 그럴 능력까지는 없었지만,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 반응에 바바리안 놈은 더욱 치고 나갔다.
"내가 차기 길드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문도 있더구만!"
현재 바바리안 놈은 혼자서 C급 퀘스트도 해결하기 힘든 수준.
실력주의 길드에서 길드장 후보에조차 오를 자가 결코 아니다.
괜히 오버했다가 들통나면 동맹이 깨질 수 있어서, 바바리안 놈을 급하게 제지했다.
*
홀쭉이 사울을 중심으로 불이 둥글게 확산되었다.
화르르륵-!
그것은 주변의 식물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둥그렇게 태워진 현장은 마법의 흔적을 남기었다.
'오호!'
홀쭉이 마법사, 사울은 꽤 상당한 실력자였다.
띠링-!
[마법사의 스킬, '헬파이어 노바'를 습득했습니다.]
[주변의 적을 모조리 불태웁니다.]
라파엘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발 마법사 크리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 다음 마법사!"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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