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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 님의 서재입니다.

스파르타의 반역자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복복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9
최근연재일 :
2022.06.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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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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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글자수 :
218,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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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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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ε (4) - 전사로의 길

DUMMY

“그간 네게 숨긴 것이 많아 미안하구나. 불행한 가정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데마라투스가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랐으니까.”


피겔리우스는 씁쓸한 얼굴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항상 냉랭했던 아버지의 저런 표정을 소년은 처음 보았다.


“데마라투스, 그자와 아는 사이셨던 건가요.”

“아고게 동문이었지. 나름 친한 사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태도가 차가워지더구나. 내 히파그레타이 선정 때부터 훼방 놓더니 지금껏 계속해서 괴롭혀 왔단다.”

“아버지도 히파그레타이에···”


갑자기 가슴 속이 뿌듯해지는 걸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비겁자, 명예 없는 수치스런 자가 아니었다.

한때 왕의 곁에서 싸우는 최고의 전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뛰어난 전사였다. 힘 말고 다른 술책을 부리는데도 능했어. 모의전에선 상대 아겔레스(조)에 헛소문을 퍼뜨려 서로 분열시키곤 압승을 거두게 만들었지.”

“그자다운 방식이네요.”

“누군간 입으로 싸웠다 조롱했지만 난 훌륭한 전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날 미워하게 되었는진 알 길이 없구나.”

“그야 물론 질투겠지요.”


아라안이 피곤한 얼굴로 단언했지만 피겔리우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그릇이 작은 남자는 아니라 생각하네.”

“과거의 당신이라면 이해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우린 서로의 성격에 너무 영향 받은 것 같군요. 당신은 너무 유해지고 난 강해져 버렸으니.”


노예인 아라안이 아버지에게 ‘당신’이라 부르는 걸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을 때 둔탁한 발소리가 감옥 안으로 들려왔다.


“얘기할 것이 있으니 잠시 나가주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에포로이.”


냉기를 뿜으며 등장한 데마라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감옥을 지키던 군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뱀 같이 차가운 얼굴을 소년의 아버지는 정면으로 마주했다.


“오랜만이네, 데마라투스. 대체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가 뭔가.”

“괴롭히다니 오해요. 난 당신의 반역 행위를 우연치 않게 찾아냈을 뿐.”

“그게 우연이 아니란 건 자네도 나도 아네. 아마 이전부터 꼬리를 잡았겠지. 터트릴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었나? 그 옛날에도 히파그레타이에 뽑힐 수 있었지만 자네가 퍼뜨린 음험한 소문 덕에 탈락하고 말았지.”


쓰라린 과거를 얘기하고 있었지만 피겔리우스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 후로 상심한 나머지 가장 멀고 위험한 전장만 골라 미친 듯 싸움에 몸을 내맡겼어. 동료들은 전부 날 피했고 전장에서 공을 세워봐야 보답 받는 일도 없었지.”

“모두 당신 탓이오.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피를 나눈 형제나 마찬가지인데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않으니 인정받지 못할 수밖에.”

“우리 솔직해지세. 매번 자네가 뒤에서 손을 썼다는 걸 알아. 그때부터 내내 자넨 내 인생을 망가뜨릴 것처럼 음해와 감시를 멈추지 않았지. 군에서 떨어져나간 뒤에도 말이야.”

“······”

“그리고 결국 이 자리까지 왔군. 왜 그랬나. 대체 내가 무슨 원한을 그리 샀기에 이렇게까지 날 몰아붙이는 건가.”


한참의 침묵 뒤에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날 절망하게 만들었어.”

“그게 무슨 소린가.”

“난 뛰어난 인간이야. 누구에게도 뒤쳐진 적이 없지. 내가 스파르타 최강의 전사라 말하진 않겠어. 하지만 그 누구든 맞서 싸울 자신이 있고 힘으로 안 된다면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지.”


그의 독기 어린 눈은 데미트리우스를 연상케 했다.

서늘함 무게감이 느껴지던 평소와 달리 오늘 이 에포로이의 표정은 망할 금발 녀석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 당신만은··· 빌어먹을! 18살에 사자 머리를 들고 돌아오는 놈을 대체 무슨 수로 당해내란 말인가.”

“······”

“알겠나? 당신 같이 규격을 벗어난 인간이, 신들의 축복을 독차지한 괴물이 최고의 자리를 움켜쥐고 모두를 절망에 빠뜨린다고. 이건 절대 불공평해!”

“보십시오, 피겔리우스. 결국 질투입니다. 이럴 줄 알았죠.”

“닥쳐라, 노예!”


아라안이 측은한 얼굴로 마주보았지만 데마라투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질투 따위 가벼운 감정이 아니다. 이건 균형의 문제야! 올림푸스의 신들이 가끔 이런 장난을 칠 때 미리 막아야 해. 저런 놈이 활개치면 그 빛에 눌려 나 같이 불행한 자들만 늘어날 뿐이야.”

“그 사자는 늙고 병들어 있었네. 난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해.”

“사람 잡아먹는 식인 사자가 말인가? 헛소리 좀 작작하시오.”

“늙고 약해졌기에 사람을 잡아먹는 것일세. 강인하다면 평범히 사냥을 하겠지.”

“흥!”


그는 전혀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피겔리우스는 감옥 창살에 다가가 간곡히 말했다.


“자네가 뭐라 하든 난 이제 전사의 길에서 벗어났네. 이긴 것은 자네야. 그러니 내 말은 꼭 들어주게. 나는 반역을 한 것이 아니야.”

“헬로트들을 국외로 탈출시킨 것이 반역이 아니라고? 저 정체 모를 노예와 몇 년이나 그런 개수작을 벌인 걸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자네와 나, 우리 모두 알지. 에포로이가 선출되면 스파르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기억하나?”


그 말을 하는 피겔리우스의 눈이 활활 타올랐으나 침묵을 지키던 데마라투스의 얼굴엔 경멸의 빛만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을 너무 높게 평가한 모양이군.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아무리 헬로트라도 그런 짓을 당할 이유는 없네. 이 추악한 짓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우린 점점 더 괴물이 되고 말 거야. 심지어 그 손을 더럽히는 건 바로 우리 아이들일세!”

“닥치시오! 오래 전부터 내려온 신성한 전통을 모독하는 거요.”

“이유는 그뿐이 아니야. 스파르타··· 아니, 헬라스 전체에 위협이 다가오고 있네. 헬라스 너머 바깥 세상에서 죽음을 초월한 군단이 오고 있어. 그때를 위해 종족과 계급을 넘어 헬라스의 모든 이들이 하나로 뭉쳐야 해.”

“헛소리 좀 그만하시지!”


침이 날아와 피겔리우스의 얼굴에 뱉어졌다.

소년이 주먹을 움찔했으나 아라안이 곁에서 조용히 붙잡았다.


“이 세계는 서, 남쪽은 망망대해. 북으론 거대 산맥이 가로지르고 동쪽엔 저주받은 안개가 들어간 자 모두를 삼켜버리는데 무슨 바깥 타령인가! 오직 헬라스만이 세상의 전부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시야를 넓혀보게. 우린 위기에 직면해 있고 거기 맞서려면 힘을 합쳐야 해. 드레켄 그리고 엘바들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일세. 난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이 정신 나간 미치광이 같으니! 더는 듣지 않겠소.”


에포로이가 꽥 고함을 질렀을 때 아라안이 보기 드물게 서늘한 표정으로 냉소했다.


“봤죠? 소용없습니다, 피겔리우스. 저렇게 자기 속에 파묻힌 자들은 수없이 봤습니다. 얘기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고 더러운 노예가 어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네놈은 대체 뭐냐?”

“내가 바로 헬라스 바깥에서 온 사람입니다. 전장에서 만난 피겔리우스에게 이곳의 위기를 알린 것도 나죠. 불멸의 군단과 ‘검은 지배자’들에 대해 들어보겠습니까, 에포로이 나리?”

“그 입 닥쳐라!”


그가 으르렁대며 고함쳤지만 아라안은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가 얼굴을 마주했다.


“놈들의 군세는 막강합니다. 헬라스에서 그들과 맞설만한 곳은 스파르타뿐이지만 당신들은 무너지고 있죠. 경직되고 잔혹한 사상이 스스로를 망쳐놓고 있습니다.”

“닥치지 못하겠나 이 더러운 바르바로이(이방인)! 감히 우리의 전통을 모독하느냐!”

“설사 스파르타가 건재했어도 놈들을 막기엔 힘이 모자랍니다. 그러니 드레켄, 엘바와 연합해 온 헬라스가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당신들에겐 멸망뿐입니다.”

“주둥아릴 찢어놓기 전에 닥쳐!”


창살 안으로 손을 던진 데마라투스가 멱살을 움켜잡았으나 돌연 아라안의 몸에서 시커먼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길한 빛은 허공으로 퍼져 거대한 해골 형상을 그렸고 에포로이는 기겁을 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안색이 창백해진 아라안은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아라안! 정신차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의 시간은 끝나가고 저주받은 마술이 붙들어놓았던 거짓생명도 바닥을 보이는군요.”

“무슨 소리야 그게 대체···”

“불멸의 군단이 헬라스로 돌아올 때, 날 되살리려 들겠지만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나의 자유는 곧 나의 죽음일지니···”


기력이 빠지는지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데마라투스는 눈앞에서 벌어졌던 광경에 입만 벌리고 있다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제 보니 당신, 음험한 마술와 주술에 손을 댔군! 그 또한 스파르타에서 금지하는 것을 모르는가? 오직 전사의 강인한 팔만이 진정한 힘의 근원이야.”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겠단 건가. 아라안은 분명 헬라스 바깥의 인간일세. 그곳엔 세상의 섭리를 어그러뜨리는 기괴한 비술이 존재해.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야. 왜 내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제 알겠나.”

“이··· 이런 사기 같은 짓으로 날 현혹하려 해봤자 소용없어! 당신들 모두 사형이야. 반역자들! 전부 사형이야!”


격분한 에포로이가 사형을 벼르며 사라졌건만 소년은 그저 스승의 몸만 끌어안고 소리를 쳤다.


“아라안, 정신차려! 아라안!”

“···도련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네 앞에 있어. 내가 안 보이는 거야?”

“제 안에 남은 힘이··· 별로 없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아직은··· 우리가 헤어질 때는 아니니까요.”


아라안은 피곤한지 눈을 감았고 피겔리우스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부터 가끔 이랬으니 너무 걱정 마라. 최근엔 빈도가 잦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아라안이 헬라스 바깥 사람이라는 게 사실인가요? 그래서 그를 홀로 뒀던 거군요.”

“그는 우리의 파멸을 경고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수년간 떠돌며 믿을만한 사람을 찾았고 내가 절망해 있던 시절, 전쟁터에서 만났지. 우연한 교감 끝에 우린 한 뜻으로 뭉치게 되었단다.”

“그럼 헬로트들을 탈출시킨 것도 아라안과 함께 한 일이겠군요. 그렇지만 어째서 그들을?”


소년의 질문에 표정이 어두워진 피겔리우스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만약 네가 그대로 아고게에 남아 있었다면 곧 알게 됐을 거다. 스파르타의 전사로서 꼭 통과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거든.”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무엇인들 못하겠어요.”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들 ‘그짓’을 하고 마는 거다. 거기까지 가서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소년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가지 사실을 조용히 말했고 그 순간 드라콘티우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 얼굴엔 경악과 함께 끔찍한 환멸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정말로··· 정말로 우리가?”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렇단다. 우리는··· 스파르타는 지금까지 그런 짓을 줄곧 자행해왔다. 진정한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마지막 통과의례라 떠들며 말이지.”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해졌다.

아버지에게 들은 것은 긍지 높은 전사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짓.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추악한 만행이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반역자로 몰려 사형당하기 직전이었다.

잔인한 무력감에 소년이 이를 갈고 있었을 때, 아라안의 감겨져 있던 눈이 가볍게 떠졌다.


“도··· 련님. 드라콘티우스 도련님···”

“아라안! 정신이 들어?”

“도련님··· 걱정 마십시오··· 이대로 끝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기회를··· 마지막 기회가 있을 터이니··· 도련님께선 부디···”


스승의 가냘픈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고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점차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옛날 어린 시절, 처음으로 자신을 둘러싼 폭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때처럼.


“물론··· 쉽진 않을 겁니다만··· 해··· 보시겠습니까, 도련···?”

“넌 내가 어렸을 때랑 똑같이 말하네. 대답이 필요해?”


드라콘티우스는 아라안의 손을 굳게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할게, 아라안. 당연히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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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반역자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간 및 컨셉 22.05.13 46 0 -
40 ι (1) - 페리클레스 22.06.16 32 2 12쪽
39 θ (5) - 아르콘의 조카 22.06.16 22 0 13쪽
38 θ (4) - 아르콘의 조카 22.06.14 19 0 13쪽
37 θ (3) - 여신의 도시, 아테네 22.06.14 16 0 12쪽
36 θ (2) - 다마스테스의 침대 22.06.13 28 1 10쪽
35 θ (1) - 다마스테스의 침대 22.06.13 18 1 12쪽
34 η (5) - 다마스테스의 침대 22.06.12 20 1 12쪽
33 η (4) - 아테네를 향하여 22.06.12 19 1 11쪽
32 η (3) - 왕자와 암살자 22.06.08 21 1 11쪽
31 η (2) - 왕자와 암살자 22.06.08 22 1 11쪽
30 η (1) - 대지를 달리는 배 22.06.07 23 0 12쪽
29 ζ (5) - 대지를 달리는 배 22.06.07 28 0 12쪽
28 ζ (4) - 도시의 이방인 22.06.06 41 1 13쪽
27 ζ (3) - 스파르타를 떠나다 22.06.06 99 1 13쪽
26 ζ (1) - 추방령 +2 22.06.03 36 1 11쪽
25 ε (5) - 추방령 +2 22.06.03 32 2 12쪽
» ε (4) - 전사로의 길 22.06.02 34 1 13쪽
23 ε (3) - 전사로의 길 22.06.01 26 0 13쪽
22 ε (2) - 전사로의 길 22.05.31 29 1 13쪽
21 ε (1) - 전사로의 길 22.05.30 29 1 12쪽
20 δ (5) - 전사로의 길 22.05.30 28 2 11쪽
19 δ (4) - 전사로의 길 22.05.27 30 1 12쪽
18 δ (3) - 전사로의 길 +2 22.05.26 36 2 11쪽
17 δ (2) - 전사로의 길 +2 22.05.25 39 2 12쪽
16 δ (1) - 잔혹한 시험 22.05.24 31 1 14쪽
15 γ (5) - 잔혹한 시험 22.05.23 33 1 12쪽
14 γ (4) - 잔혹한 시험 22.05.21 34 1 11쪽
13 γ (3) - 모의전 22.05.20 36 2 13쪽
12 γ (2) - 모의전 22.05.19 3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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