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글쓰는 한량입니다.

쑥부쟁이 피어나는 시절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로맨스

종량제
작품등록일 :
2016.10.20 11:36
최근연재일 :
2018.11.16 00:55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7,047
추천수 :
37
글자수 :
158,687

작성
18.09.07 21:30
조회
325
추천
2
글자
17쪽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2)

이 창작물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배경, 사건, 단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립니다.




DUMMY

-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와 보니 후임들이 TV 바로 앞 취사병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과자를 챙겨들고 별에서 온 그대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물론 난 챙겨보지도 않는 방송이라 TV와 제일 먼 내 침상으로 돌아와 음료수를 마시고는 침낭을 펼쳐 피곤한 몸을 안에 밀어 넣었다.


“······.”


그런 생활관의 소음과는 무관하게 침낭을 뒤집어쓰자마자 지쳐 잠이 든 것 같다. 보일러 순찰은 내일 면회로 빠지는 요섭이가 돌 테니까 제설 집합만 아니면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선잠에 빠져있는 와중 예상치도 않던 방해요인이 등장하고 말았다.


[후후- 본부중대 정현식 상병님, 정현식 상병님. 행정반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컴컴한 숙면의 세계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똑똑히 들려온 방송 소리. 행정반에서 나를 부른다는 건 시설물 관리병에게 업무가 생겼다는 소리와 같다.

그럼에도 내 충직한 후임은 2명이나 더 있는 상황이기에 어차피 그들 중의 한 명이 알아서 올라갔을 테고, 난 방송을 무시하고 계속 잠을 자도 상관은 없었다.


“정현식 상병님, 호출입니다.”


하지만 요섭이는 나를 일부러 깨웠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가 확인하기 위해 난 귀찮은 티를 팍팍 내었다.


“에이씨, 시설물 부르는 거면 기웅이 보내······.”

“안 그래도 걔 올려 보냈습니다. 그럼 순찰 가겠습니다.”

“순찰? 벌써 12시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침낭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자 마침 요섭이가 정글모를 쓰고 수첩과 열쇠꾸러미를 챙기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생활관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멀찍이 보이는 창밖 세상엔 눈발이 약해져 마치 설탕가루 마냥 가루눈이 뿌려지고 있었다.

내가 멍청하게 시선을 한 곳에 두고만 있자 다른 후임병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본부는 점심 식사 직후에 제설 집합이라 합니다.”

“제설이고 나발이고 기웅이가 처리 못할 건이면 난 밥도 못 먹고 얄짤없이 보일러 고치러 가야될 걸.”


혹시 했던 것이 역시가 될 수도 있기에 목장갑과 공구꾸러미를 꺼내 침대 위에 던져두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니 내 대신 불려갔던 시설물 관리병 최후임 기웅이가 금방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덩치와는 안 어울리게 눈을 쉴 새 없이 깜빡거리고 있는 모습이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다.


“그래, A관사야? BOQ야? 둘 다 간당간당 하더만.”

“시설물 관리병 부른 거 아닙니다. 정현식 상병님 전투복 챙겨 입고 행정반 바로 올라오시랍니다.”


시설물 관리병 보직 특성상 항시 작업복 차림이 익숙한 내가 전투복을 입을 일은 영외 출타를 하거나 당직근무를 탈 때를 제외하곤 없기 때문에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


“으잉? 전투복? 왜?”

“위병소에 면회객 왔다고 합니다.”


면회객이란 소리에 난 당황하여 잠시 할 말을 잃었고, 기웅이 역시 곤란하게 눈을 굴리며 내 답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뭔 소리야? 나 면회 신청한 적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데?”

“일단 가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영문 모를 일에 의아해하며 일단 시키는 대로 복장을 챙겨 입었다. 군화끈을 바짝 조이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들어찬 의구심이 가시질 않았다.


상황 파악을 위해 행정반으로 급히 올라가보니 본부 당직병은 없고 수송대 당직병과 당직사관 수송 2소대장이 등받이 의자에 기대 앉아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팔자 좋게 TV를 보고 있었다.


“상병 정현식, 행정반 용무 있어 왔습니다.”

“야 인마! 넌 방송으로 네 이름을 불렀는데 왜 부사수를 쳐 보내고 앉아있냐?”


마른 체형만큼이나 눈코입이 위로 비죽 솟아 한 마리의 사마귀를 연상시키는 당직사관은 내 관등성명을 듣고서 고개를 돌리고 카랑카랑한 소리로 틱틱거렸다.


“죄송합니다. 시설물 부른 줄 알았습니다.”

“내려가. 면회 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키폰 좀 해보겠습니다.”


난 본부 당직병이 자리를 비운 테이블서 키폰을 들고 위병소에 연락을 걸었다. 애초에 면회 신청도 하지 않았으니, 밑에서 타 중대 인원과 착오가 생겼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헛걸음 삼아 나가보기엔 밖은 너무 춥고, 위병소를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거리 또한 만만히 볼 수 없는 정도이니까 전화로 확실히 할 필요는 있었다.


‘통신-보안. 위병조장 상병 허윤규입니다.’


항상 자신이 상태가 매우 피곤하고 무료하다 알리는 길게 늘어진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경비소대 소속 1달 맞선임이며 나와 동기 광혁이와도 곧잘 어울리는 양반이다.


“전진, 상병 정현식입니다.”

‘왜애? 얼른 내려와.’

“허윤규 상병님. 확실히 저 찾는 사람 맞습니까?”


여전히 의문부호가 붙어있는 내가 우스운지 그는 기운 빠진 킬킬거림 끝에 입을 다시 떼었다.


‘본부중대에 정현식을 찾는데,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확실히 연대 직할중대 소속 내에서 나와 동명이인은 전무하다. 면회객이 이름을 헷갈리게 언급했을 수도 있지만 내 이름과 헷갈릴 만한 사람 이름 역시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암튼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응응. 아! 오면서 박카스 하나 뽑아다주라. 졸려 죽겠어.’


이때다 싶어서 부려먹으려는 심산이 보이지만 그만큼 막역한 관계다. 쌍방이 웃는 얼굴로 해줄 수 있다.


“야간도 아니고 주간 타시는 분이······ 저번 것까지 해서 담배로 사주십쇼.”

‘땡큐.’


만사가 기운 빠져 흐느적거리는 양반과의 통화를 마치고 행정반을 빠져나온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막사 1층 PX 옆 자판기에서 부탁받은 박카스를 먼저 챙겼다.

썰렁한 바깥바람과 차갑게 얼어붙은 캔의 냉기에 다시금 정신을 차린 뒤, 군화 굽만큼 새롭게 쌓인 눈을 뽀드득 밟아가며 위병소까지의 먼 길을 나서게 되었다.


눈길에 미끄러질라 막사 내리막을 잰걸음으로 빌빌거리며 걷다보니 간신히 도착한 위병소. 차도를 대빗자루로 쓸어내고 있는 위병 근무자 후임들을 뒤로하고 곧바로 조장실로 향한다.


“크으······.”

“······.”


난방 빵빵한 실내에 앉아 누가 온지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허 상병을 깨우고자 난 테이블 위에 박카스를 일부러 요란하게 올려놓는다. 쨍하고 철제 테이블이 요란하게 울리자 심히 놀란 듯 발작을 하며 일어난 그는 얼떨떨 맹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우······ 왔어? 박카스 완전 고마워.”

“뭐 벌써부터 졸고 계십니까. 주간이라 별 일도 없으시구만.”

“몰라, 그냥 가서 자고 싶어······.”


쌍꺼풀 짙은 눈두덩이를 애기 인형처럼 깜박거리는 게 늘 똑같은 이 양반 모습 그대로였다. 뭐, 차가운 박카스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근무 철수까지는 어영부영 버틸 수야 있겠지.


“면회객 어디 있습니까?”

“면회장에 있을 걸? 들어가 봐.”


간단히 인사를 하고 위병조장실과 유리문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면회장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제각각의 병사들과 일행들이 싸제 음식을 가운데 두고 재잘대고 있었다.


이 중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은 대체 어디 있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제일 구석자리에서 TV를 보고 있던 불한당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는 고른 이를 드러내며 교활하게 웃었다.


“어이고, 꼴이 뭐 그 따구냐? 뺀질이 맞냐?”

“미친놈······ 찐일, 수원서 여기까지 온 겨?”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경기도 양주시의 한 청소년 수련원에서 맺어진 양주결의(楊州結義) 4인방의 한 사람이 예고도 없이 파주 부대로 방문하고 말았다.


생김새, 말투, 행동 3박자가 오롯이 저 불한당의 본질이 양아치라고 세상에 외치고 있다. 적당한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을 시원하게 넘기던 성진일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한없이 가볍게 웃어댔다.


“한 번 와봤다.”


-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뻗은 치킨은 자연사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조류 뼈 화석의 몰골이 되어 상자 안에 내팽개쳐졌다.

짬밥에 나오는 비루한 것이 아닌 간만에 제대로 된 닭튀김을 먹는 통에 이성을 잃었던 나는 앞에 놓인 음식을 먹어치울 때까지 제대로 된 말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걸신이 들린 몰골을 경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양아치 청년은 다리에 붙은 마지막 오돌뼈까지 으적으적 씹어대는 나를 보며 목이 탄 듯 콜라만 연신 마셨다.


“보는 내가 다 토 나온다. 군바리들은 다 이래?”

“원래 밖에서 먹고 사는 공익 찌끄레기는 모르는 세계다.”


딱 잘라 비하발언을 던졌음에도 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 요란한 문양이 박힌 긴팔 티셔츠를 손으로 털었다.


따져보자면 양주결의 4인방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우애를 다지기로 했던 당초의 의지와는 다르게 현역, 공익, 면제, 징병 대상 제외 4종으로 찢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일단 성진일 이 녀석은 공익근무요원이고 수원 소재 어느 중학교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난 파주의 최전방 부대로 끌려왔지만 운 좋게 본부에 남아 다른 현역 장병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한 군 생활을 보내고 있는 편이다.


“하긴 너 수도병원서 있을 때도 지금이랑 처먹는 건 비슷했지.”

“됐고, 와줘서 고맙긴 한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


기름 묻은 손가락을 물티슈로 세심하게 닦고 있던 녀석은 코웃음을 치며 별 대수롭지 않은 양 너스레를 떨어댔다.


“전부터 위치는 봐뒀다. 너 병원에서 명찰 달고 있었잖아? 거기에 어디 부대 소속인지 다 나와 있었는데 한 번 궁금해서 찾아볼 만 하지, 안 그래?”

“무서운 새끼······.”


신상정보의 노출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 인간을 통해서 똑똑히 깨달게 된다. 일단 부대의 위치 같은 건 원래 대외비로써 취급받지 않는가?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단박에 상세 주소가 뜨는 판국인데, 그런 정보 통제 하나 제대로 안 되는 걸보면 국방부 이 양반들은 직무유기에 참으로 능한 모양이다.


“야, 현역으로 오면 아이돌 같은 거 막 좋아지고 그러지? 뺀질이 상병 짬도 오래 먹었으니까 이젠 다를 거 아녀.”


언젠가 성진일의 입에서 들어봤던 것 같은 질문이 들려왔다. 일전 녀석이 수도병원으로 병문안을 와주었을 땐 나의 계급이 갓 일병으로 올라갔을 시기였기에 해당 질문에는 부정적인 답을 돌려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진 이후다.


“걸스데이 신곡 들어봤냐? something 끝내준다.”

“어억, 미친 새끼 아냐? 예전엔 소녀시대 멤버도 잘 모르던 놈이 이젠 신곡까지 챙겨듣고 산다고?”


녀석이 기겁을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점호에 나가기 전부터 아이돌 걸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연속재생 되다보니 몸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할 수 있다.

간당간당한 옷차림을 한 예쁜 아가씨들이 뇌쇄적인 포즈를 자랑하며 춤을 추는데 남자들과 부대끼는 군대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시선이 안 돌아가는 게 되레 비정상이란 말이지.


“유라가 예뻐요. 폰 내놔봐. 뮤비 틀어 줄 테니깐.”

“저리 꺼져, 더러운 새끼야. 군대가 사람 새끼 하나 다 버려놨네.”

“그럼 나라도 혼자 볼 거니까 일단 폰부터 좀 내놔봐.”


아직 스마트폰을 사용해본 적이 없어 꽤나 버벅이긴 했지만 원하는 영상은 제대로 트는데 성공했다.

도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도입부 간주만 들어도 너무나 익숙해서 절로 몸을 씰룩거리며 안무를 따라할 뻔 했지만, 멀리서 와준 친구는 또 먼 길을 돌아서 집으로 가야하기에 그의 시력보호를 위해서라도 자중하기로 했다.


“나만 몰랐었던 썸띵- 분명히 느껴져 must be 썸띵-”


음악에 맞춰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가벼운 분위기. 난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쌜쭉 입술을 움찔거리고, 녀석은 못 따라가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어댔다.


“꼬라지 걱정돼서 와봤는데 그래도 뺀질이는 여전하네. 그럭저럭 버틸 만 한가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성진일이 던진 멀쩡히 지내 보인다는 물음. 그 말 하나가 그동안 묘하게 둥둥 떠 있던 둘 사이의 긴장감을 바짝 잡아당겼다. 표정 변화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제스처는 그대로일지 몰라도, 음울하게 가라앉은 나의 톤은 마주 앉아있는 상대를 훌쩍 경직시키게 만들었다.


“뭔 개소리여? 답답해 죽을 맛이구만.”

“······.”


부대 내에서 원만한 관계를 위한 연극을 하는 것처럼 딴에는 잘 지내는 척 광대놀음을 계속해주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해야 하는 때는 따로 있다.


지금의 생활은 절대로 버틸 만한 게 아니니까. 조급해지는 마음으로 속을 썩혀가며 내가 매일을 보내는 걸 성진일 이 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왜 왔어? 네가 이유도 없이 움직이는 놈은 아니잖아?”

“······.”


먼 걸음을 해준 녀석은 핸드폰을 쳐다보고만 있는 내 상태를 줄곧 주시하더니 짐짓 무게를 잡는다. 원체 행동거지가 경박하고 가벼운 게 일상인 인종이라 그리 와 닿지는 않았으나 이번 물음은 유쾌하게 농을 치듯 꺼낼 주제는 아니었으니 녀석도 태도를 달리할 필요를 느꼈나보다.


“윤지 상태. 보고 왔으면 그대로 정확히 얘기 해둬.”

“하아, 윤지가 말이다······.”


성진일 답지 않게 눈치를 살피거나 시선을 밑으로 까는 움직임이 짤막하게 포착된다. 그럼 여기서 녀석이 호전되고 있다고 말을 한다면 실상은 완벽히 반대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일까? 머리가 되도 않는 유추를 하느라 지끈거려온다.


“호전까진 아니지만, 악화되지도 않고 잘 버티고 있다.”


하지만, 녀석의 목울대가 한 번 출렁이고 나서 나온 말은 확실하지가 않고 애매했다. 별안간에 짜증이 몰려왔다.


“나보고 몇 퍼센트나 믿으란 소리냐?”

“새끼야, 사람이 말을 하면 재지 말고 그대로 알아들어.”


어차피 진실을 인마로부터 전해들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떠보기라도 하면서 그 숨겨진 조각들이나마 긁어모아보려 했지만 이렇게 강짜를 부리고 대화를 거절하면 더 방법이 없다. 게다가 수원서부터 만나겠다고 와준 사람과 으르렁거리다 헤어지는 건 모양새도 좋지가 않다.


“담배나 피우러 가자.”

“알았다.”


내가 긴장상태를 깨버리고자 면회장 문을 박차고 건물 뒤편 흡연 장소로 향하자 성진일은 똥 씹은 얼굴로 걸음을 같이해줬다.


흡연장으로 쓰이는 소나무 밑 그늘은 다시 굵어진 눈발을 피해 있기엔 꽤 쓸 만한 장소이다. 그 밑에서 달동네에 은거하는 한량 마냥 쪼그려 앉아 담배를 물고 그나마 단정한 색깔로 바뀐 녀석의 머리칼을 치켜보고 있으니 곧바로 훈계하는 톤의 비아냥이 날아왔다.


“이젠 담배까지 익숙해졌냐?”


사회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입에 무는 것을 꺼려왔던 담배마저도 기다림에 지친 나는 결국 손을 대고 말았다. 라이터로 불붙이는 것마저 어색했던 처음과는 많은 게 달라져버린 지금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그럼 여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되냐? 뾰족한 노하우 있으면 좀 알려줘 봐.”

“어어······ 사실 그거 밖에 없긴 하지.”


진일은 필터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철조망 바깥쪽을 흘기다 이내 농후한 연기를 뿜어낸다. 그의 입에서 태어난 한 마리 청룡은 공기 위에서 꿈틀거리다 철조망을 꿰뚫고 넘어가 이윽고 흩어지며 승천했다.


“나 나가고 싶어 하는 거 알잖아? 괜한 소리 하지들 말아.”


말없이 담배를 피우다말고 녀석에게 투정을 하나 던져버렸다. 오늘 녀석 앞에서 속이는 것 하나 없이 처음으로 내보여진 진짜배기 감정이었다. 이제야 그럴 듯한 반응을 보여서 그런 지 성진일의 똥 씹은 표정도 슬슬 누그러졌다.


“누가 모르냐? 그래도 너무 보채지는 말라고. 전윤지가 어떤 애인데, 우리 중에 제일 성질머리 더럽고 멘탈 탄탄한 애가 이 정도 짧은 시간 하나 못 버티겠냐?”

“내가 매일 같이 얼굴 볼 수 있는 처지면 이런 앓는 소리까진 안 한다.”


최대한 곁에서 지켜주고 싶지만 나는 말뚝에 묶인 똥개 신세라 파주 땅을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꾸 겁이 나고 조급해진다. 이번마저도 내가 지각을 해버린다면 난 평생을 그 애에게 늦기만 했던 놈으로 남고 말 것이다.


“알겠으니까 목소리 좀 더 째고. 듣는 나까지 암울해진다.”

“신경 쓰였으면, 미안하고······.”


내가 원체 낮은 톤의 목소리 소유자라서 쉽진 알겠지만 듣는 사람들을 신경 쓰게 만들 정도로 음울하게 들린다면 목구멍에 힘을 불어넣을 필요 정도는 충분한 것이다.


“혼자 여기서 너무 깝깝하게 있지는 말고, 너도 기운 챙기면서 살고 있으라고.”

“해보기는 할 테니까······.”


평안한 머릿속을 만들어보려 남들의 조언을 몇 번이고 들어가며 곧이곧대로 해왔었지만 그대로 되었다면 인마가 지금처럼 목소리가 어떻고 지적하는 일은 없었겠지.


결국 노력을 해도 한계치는 정해져 있는 법이고, 나는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모두에게 신경 쓰이게 만드는 짐덩어리에서 달라진 게 없다는 소리였다.


맞는 사람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이 꿈틀거리는 먹구름은 쉴 새 없이 함박눈을 쏟아낸다. 코끝을 얼얼하게 만드는 시련의 겨울은 기다림마저 벅차게 느낄 만큼 지독히 늘어져 곁을 왱왱 맴돌고 있었다.


-




스토리 : 종량제 / 검토, 편집 : 은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쑥부쟁이 피어나는 시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공지입니다. 20.04.19 133 0 -
공지 ♭.1/ 序文 : 쑥부쟁이 피어나는 시절 오픈 예고 18.07.19 320 0 -
24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13) +1 18.11.16 184 0 16쪽
23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12) 18.11.09 136 0 14쪽
22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11) 18.11.03 156 0 16쪽
21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10) 18.11.01 167 0 13쪽
20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9) 18.10.30 180 0 12쪽
19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8) 18.10.25 204 1 13쪽
18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7) 18.10.13 220 2 15쪽
17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6) 18.10.11 234 2 12쪽
16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5) 18.10.09 266 2 13쪽
15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4) 18.10.06 231 2 16쪽
14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3) 18.10.04 240 2 15쪽
13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2) 18.10.02 260 2 15쪽
12 #.2/ 驛馬煞(역마살) : 정처 없이 가도를 떠돌다. (1) 18.09.29 257 2 14쪽
11 #.1 - Return./ 신답역에서... +1 18.09.27 297 2 20쪽
10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9) +2 18.09.25 284 1 19쪽
9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8) 18.09.22 267 2 12쪽
8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7) 18.09.19 266 1 15쪽
7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6) 18.09.18 285 2 12쪽
6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5) 18.09.15 301 3 17쪽
5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4) +2 18.09.13 326 2 13쪽
4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3) 18.09.10 327 3 14쪽
»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2) 18.09.07 326 2 17쪽
2 #.1/ 月煞(월살) : 칠흑 속에 둥근 달만 떠있다. (1) 18.09.06 422 2 12쪽
1 Prologue./ 結末의 始作. (결말의 시작) +2 18.09.04 1,081 2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