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주
회색 도포의 여인은 고개를 숙여 성진과 소화에게 인사했다.
"제가 아미 장문인 대행인데, 이 시신은 어느 분의 시신입니까?"
회색 도포의 여인이 고개를 들며 묻는 순간, 성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미 장문인 대행 정소저가 이토록 아름답고 어린 소저라니!'
아미 장문인 대행 정소저는 투박한 회색 도포를 입었음에도 천상의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초승달같은 가녀린 눈썹,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 조각한듯한 오똑한 코, 앵두같은 붉은 입술, 백옥같은 피부.
미인이 갖춰야할 모든 요소를 갖춘 정소저는 절세미녀로 소문난 소화와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성진만 놀란 것이 아니라 소화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껏 열여덟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저가 아미 장문인 대행이라니!'
소화는 아미 장문인 대행이 최소한 스물은 넘은 소저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정소저는 성진이 한동안 넋나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다시 물었다.
"이 시신은 어느 분의 시신입니까?"
이때서야 정신을 차린 성진은 이청이 일러준 대로 대답했다.
"저는 정체 불명의 복면인으로부터 이 시신을 아미의 장문인 대행께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 누구의 시신인지는 모릅니다."
정소저는 이상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통성명했다.
"저는 아미 장문인 대행 정화진이라 합니다. 시주께서도 통성명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정화진이라, 어여쁜 이름이구나.'
선녀처럼 아름다운 정화진에게 호감을 느낀 성진은 그녀의 이름마저 어여쁘게 느껴졌다.
'내 이름 석자 만큼은 사실대로 통성명하자.'
성진은 이런 생각에 포권을 취하며 통성명했다.
"저는 양씨세가의 양성진이라 합니다."
그러고는 소화를 가리켰다.
"제 누이동생 소화라 합니다."
정화진은 성진과 소화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주들이 천하제일의 선남선녀 남매라는 양씨세가의 남매시군요."
성진과 소화는 천하제일의 선남선녀 남매라는 말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성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한 한마디에 정화진이 한마디 대꾸하고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저는 장문인께서 출타하신 동안에 장문인 대행을 맡은 것 뿐이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화진은 성진이 자신을 부담스럽게 생각해 고개를 숙인 것 같아 말한 것이다.
사실, 성진은 정화진이 아미 장문인 대행이라서가 아니라 선녀처럼 아름다워 부담스러웠다.
성진은 뭐라 말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때 소화가 살며시 성진에게 눈짓했다.
빨리 떠나자는 뜻이었다.
소화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정소저가 지금은 미소 짓고 있지만, 장문인의 시신임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성진도 소화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정화진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희 남매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화진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살펴가십시오."
성진은 정화진이 시신의 복면을 벗기면 어쩔까 싶었지만, 다행히 정화진은 시신의 근처도 가지 않았다.
성진과 소화는 다행이라는 듯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서 말머리를 돌렸다.
성진과 소화가 말을 몰아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미 제자들이 귓청이 울려 귀를 막을 정도였다.
이때 정화진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외쳤다.
"기왕에 아미에 오셨거든 숨어서 웃지 마시고 모습을 드러내시오!"
정화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복면의 인영 하나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정화진 바로 앞에 착지했다.
검은 도포에 검은 복면을 쓴 자였다.
이 복면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착지하는 경공술은 정화진에 못지 않은 입신의 경지였다.
성진은 복면인의 경공술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자가 부모님을 죽인 흉수와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성진은 재빨리 소화에게 속삭였다.
"저 복면인이 흉수와 연관이 있을지 모르니 잠시 떠나는 것을 보류하자."
성진이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세우자 소화도 말을 멈춰세웠다.
이때 정화진이 복면인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통성명했다.
"저는 아미 장문인 대행 정화진이라 합니다. 선배님은 구대 문파 중 어느 문파의 선배님이신지요."
복면인의 경공술은 틀림없는 구대 문파의 경공술이었다.
정화진은 복면인의 경공술로 보아 자신의 선배뻘일 것이라 추측하고 물은 것이다.
정화진의 추측과는 달리 복면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 몸은 구대 문파 사람이 아니오."
"구대 문파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문파의 선배님이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정화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복면인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 몸은 무림맹주의 사자요."
무림맹주라는 한마디에 성진과 소화는 물론 정화진을 비롯한 모든 아미 제자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진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부모님을 죽인 흉수가 무림맹주란 말인가? 그렇다면 무림맹주는 누구란 말인가?'
성진은 부모님을 죽인 흉수가 무림맹주일 거라 추측했지만, 무림맹주가 누구인지는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정화진이 복면인에게 되물었다.
"무림맹주의 사자라니, 그럼, 무림맹주는 누구십니까?"
복면인은 대뜸 고개를 저었다.
"밝힐 수 없소."
이 말을 하고서 복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곳에 있는 모든 아미 제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허나, 그대들의 죽은 장문인은 무림맹주가 누구신지 알고 있었소."
이 말을 듣는 순간, 성진은 깨달았다.
'아무 탈없이 아미를 빠져나가기는 틀렸구나!'
정화진이 경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죽은 장문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정화진은 자신의 귀로 듣고도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복면인은 조금도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죽은 장문인이라 말했소."
정화진은 장문인이 죽었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리쳤다.
"허무맹랑한 소리하지 마시오!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을 리가 없소!"
이렇게 외친 정화진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성진과 소화가 가져온 시신 쪽으로 향했다.
'설마 저 시신이 사부님의 시신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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