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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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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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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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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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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디엘라 (1)

DUMMY

- ‘사람을 가르친다는 건 대체 뭘까요, 스승님?’


한창 마법을 배우고 있던 무렵. 데릭이 카티아에게 물었다.

변방의 마물족 퇴치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는 마차 안이었다.


데릭은 상처를 조금 입었었는데, 카티아가 적당히 그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던 참이었다.


-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니?’

- ‘...그냥요.’


어린 나이에 용병 바닥을 전전하다보니 사제지간이랍시고 스승을 섬기는 전사들을 꽤 보게 되었다.

억세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도 자기 스승에게는 깍듯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대단치 않은 호기심 하나가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 ‘아무렇지도 않게 남 뒤통수 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통 치는 놈들이 스승 앞에선 성격을 죽이는 걸 봤거든요. 흠... 사실 카티아 스승님이 좀 자비로운 거지, 다들 그런 식인 걸까요?’

- ‘억센 용병 바닥에 모든 걸 맞춰서 생각하면 곤란하단다. 사제지간이란 게 다 그런 건 아니야.’


카티아는 데릭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그리고 데릭 너는 비교적 가르치기 쉬운 편이란다. 마법 적성도 훌륭해서 금방 흡수하는데다가, 항상 협조적이잖니.’

- ‘뭘 배우려거든 당연히 협조적이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그게 정론이겠지. 하지만 세상이 항상 정론대로 돌아가지는 않잖니? 때로는 스승을 업신여기고, 이를 갈며 기 싸움을 해대려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데릭은 턱을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관절 제자라는 것이 스승을 상대로 날선 이빨을 들이댄다고 하면, 그런 걸 제자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애당초 그런 것들에게 뭘 가르쳐야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카티아의 말대로 세상이 항상 정론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 ‘만약 그렇게 억세고 은혜를 모르는 제자를 가르쳐야만 한다면, 스승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 ‘끝까지 그 아이를 이해하려하고, 보듬고 품으려고 하겠지.’

- ‘...그건 너무 이상적인 것 같은데요.’

-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도 결국 가르침의 본질은 제자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포용하며 선도하는 데에 있는 거란다.'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가 이어졌다.


- '이해와 포용으로 소통할 수 없다면 다른 시작점을 모색해야만 하겠지만, 그 본질만큼은 절대 잊으면 안 돼.’

- ‘다른 시작점이요? 그게 뭔데요?’


카티아는 조용히 붕대를 감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공포를 각인시키는 거야.’


데릭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거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때도 있어.’




*





“배려와 존중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세요.”


데릭의 싸늘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가라앉았다.

구정물로 바닥이 더럽혀진 디엘라 영애의 방, 정적 속에서도 데릭은 다시금 본인이 해야 할 말을 했다.


“기립하십시오.”


디엘라 영애는 벌벌 떨리는 눈동자로 데릭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데릭의 말대로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데릭 쪽으로 다가가서, 그대로 데릭의 따귀를 걷어 올렸다.


- 짜악!


데릭의 고개가 한 쪽으로 돌아갔다.

디엘라 영애는 숨을 몰아쉬고선 이글거리는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네가 뭔데...? 너...”


- 짜악!


디엘라 영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데릭의 손아귀가 날아들었다.

이번엔 디엘라 영애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소녀의 동공이 다시금 한계까지 커졌다.


데릭을 올려다보면 여전히 표정엔 미동조차도 없다. 그 새빨간 눈동자는 가만히 디엘라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소녀는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고, 소년은 길가의 잡초로 자랐다.

그 간극을 실감하는 순간, 처음 맞닥트리는 듯 한 감정이 엄습하고 만다.

그 감정의 골조는 공포, 미지에의 공포다.


“말씀드렸듯이 타인을 대할 때는 배려와 존중을 하셔야합니다.”

“입 다물어!”


디엘라가 조막만한 손으로 어떻게든 데릭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렇게 뭐라도 해보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그마한 소녀가 아무리 모독적인 언사를 반복해봐야 데릭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는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너희들은 안 말리고 뭘 하고 있어!”


소식을 들은 집사장 델론이 재빠르게 사용인들 사이를 헤치고 뛰어나왔다.

그 늙은 집사장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진 사용인들에게 호통을 치고선, 재빨리 데릭과 디엘라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데릭과 구면이었다. 아이셀린 영애와 함께 용병단을 노닐며 스승을 물색하던 사람이다.


“여기까지 하게. 이 이상은 정말로 위험해.”


위험하다.

그 표현은 디엘라보다는 데릭에게 보내는 말에 가까웠다.


한낱 평민이 공작 영애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당장에 팔 다리가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다.

여기서 끝내면 평생을 불구로 사는 한은 있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집사장 델론이 하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데릭은 품에서 공작의 인장이 찍힌 증서 하나를 꺼내서 티 테이블에 툭 던져놓았다.


그 내용은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듀플레인 대공 전하께서 디엘라 아가씨에 대한 모든 교육 권한을 제게 전권 위임해주셨습니다. 제가 무슨 방식을 취하든, 대공께서 허락한 일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주십시오.”

“뭐...라고?”


집사장조차 몰랐던 문서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사장을 통해 정식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대공이 즉석에서 써준 문서란 뜻이다.


집사장 데론은 그 문서의 진위여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이 귀족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폭력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귀족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이런 짓을 허가해줬다는 사실이 어딘가에 발설이라도 된다면 공작가 전체의 큰 치욕이 될 것이다. 귀족이란 언제나 고고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 권위의 꼭대기에 존재하는 듀플레인 대공이 어찌 이런 일을 허가해준단 말인가.

집사장 델론이 그런 의문을 가지고 데릭을 쳐다보자, 데릭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대답해주었다.


“레이그 공자께서 집사장님께 뭔가를 알아보라고 했다던데요.”

“...!”


공작가 차남 레이그는 이미 디엘라를 갱생시키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다.

그는 방향성을 바꿔서 아예 변방의 수도원에 그녀를 유폐시켜버릴 생각이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집사장을 통해 수도원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던 것이다.


듀플레인 대공은 그 제안을 일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런 방안이 대공 앞에 당당히 대두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황이 갈 때까지 갔다는 뜻이다.


이미 별채의 사용인들은 물론이오 본채의 가신들까지 그녀의 행패에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로서는 언제까지고 고개를 돌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이번 결정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마음을 굳게 먹고 내리는 마지막 극약처방이다.

극약조차 듣지 않는다면, 불치병이라 판정하는 수밖에 없다.


“디엘라 영애께는 이제 기회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축적으로 이야기하자 델론의 표정이 굳었다.

무엇보다 데릭의 행보 자체가 믿기가 힘들다.


용병출신 마법사라는 소년. 야생과도 같은 환경에서 날 것처럼 자랐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반적인 인간이 품을만한 담력이 아니다.

제 아무리 대공의 증서를 등에 업고 있다 하더라도, 귀족가 영애에게 따귀를 걷어 올릴 수 있는 인간은 결코 흔치 않다.


듀플레인 대공은 사람의 그릇을 가늠하는 능력이 날카롭다.

그가 여기까지 예상하고 있을지 어떨지는, 지금 델론의 시점에선 알 수 없었다.




*




“형님! 형님! 일단 좀 진정해보십시오, 형님!”


- 콰앙!


그날 밤,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집사가 안내해준 손님방에서 데릭이 장비를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분노에 찬 한 사내가 그대로 데릭이 머물고 있는 방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네가 아이셀린이 데려왔다는 그 용병이냐? 그래, 낮에 접견실 앞에서 봤던 그 놈이 맞군.”

“형님! 아니, 일단 진정부터 하고 가자고요! 형님!”


듀플레인 가문의 제 1공자, 발레리안 레너드 듀플레인.

긴 금발을 늘어뜨린 훤칠한 체격의 미남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데릭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는 듀플레인 가문의 차기 가주로 내정된 인물이었으며, 부드럽고 자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로 알려져 있었다.

허나, 데릭의 멱살을 잡은 채 그를 노려보는 얼굴에 그런 자애로운 모습은 없다.

소중한 막내 동생을 두들겨 팬 건방진 평민 앞에서 그는 이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떨었다.


“네가 감히... 감히...”

“형님!”


옆에서 그를 뜯어 말리는 레이그가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데릭은 그대로 멱살을 잡힌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담백한 사실을, 최대한 예를 갖추어서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발레리안은 잠시 숨을 머금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멱살을 놓았다.


“...후우.”


이윽고 발레리안은 한숨을 푹 흘리고서, 한 번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올리고 말했다.


“날 따라와라. 레이그 넌 단련이나 하러 가고.”

“아니, 제가 또 안 따라왔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데...”

“긴 말 안한다.”


발레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데릭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눈길을 보내고선 다시금 열린 문 쪽으로 나갔다.

레이그는 그런 발레리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푹 쉬고서는 데릭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래. 낮에 있었던 얘기 들었다. 난 네 편이다. 디엘라 걔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애야. 귀족이면 뭐 주먹이 다 피해갈 줄 아나.”

“...아닙니다.”

“하여튼 갱생도 안 될 애를 붙잡고 있느라 너도 고생이 많다. 뭐, 곧 있으면 수도원으로 보낼 테니 좀만 더 참아라. 발레리안 형님도 뭐... 정이 많아서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좋은 분이야. 별 해코지를 하진 않을 테니 긴장하진 말고...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난 가봐야겠다.”


건장한 체격에 사각턱. 다부진 근육까지 온 몸이 든든해 보이는 레이그는 한숨을 푹 흘리고서는 열린 문으로 따라 나갔다.


“하이고... 희망도 없는 걸 더 붙들고 있어봐야 뭐한다고... 형님도 참.”


그렇게 한탄하며 나가는 레이그의 표정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이미 그는 디엘라에 대한 모든 희망을 놓은 듯 했다.




*




발레리안이 데릭을 데리고 간 곳은 저택 본채의 1층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었다.

척 봐도 사람들의 왕래가 오랜 시간 없었던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깔끔하게 청소 하는 것인지, 먼지 한 톨 찾아볼 수가 없었다.


- 화악


발레리안이 마력을 일으키자, 방 곳곳에 있는 촛대가 밝혀지면서 내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방이다.

한 쪽엔 귀여운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침대가 있었고, 다른 한 쪽엔 예쁘고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잘 진열되어 있는 책장이 있었다.

귀여운 프릴드레스가 가득 걸려 있는 옷장과, 여러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책장 등, 고풍스러우면서도 소녀적인 방이었다. 소녀 혼자 쓰기엔 지나치게 넓은 방이긴 하지만, 신분을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디엘라가 본채에 있었을 무렵에 쓰던 방이다.”


발레리안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별채라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반쯤 유폐되어 지내고 있지만, 이곳에서 지내던 무렵의 디엘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여러 캔버스와 화구들이 놓여있었다. 데릭이 그 쪽을 쳐다보자, 발레리안이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디엘라는 그림을 즐겨 그렸었어. 주로 풍경화를 그렸었지. 사교계 교육의 일환으로 시작했었지만, 본인이 큰 흥미를 느껴서 매번 즐겁게 그리고 내게 보여주러 왔었어.”

“...”

“그림을 봐달라며 매번 방방 뛰던 모습이 아직도 아른 거릴 때가 많아.”


캔버스 사이를 노닐다보니 새하얀 덮개로 가려져 있는 한 캔버스가 데릭의 눈에 들어왔다.

발레리안의 눈치를 보니 그가 덮개를 걷어주었다. 나름 깔끔하게 그려져 있는 노을 그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 소녀가 시녀의 등에 업혀 웅장한 노을을 보고 있는 그림.

다만, 그림의 외곽은 여백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그리던 그림이야. 보다시피 미완성이지.”

“미완성이요?”

“디엘라는 항상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완성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대부분 여백을 남겨놓고 좋아하는 부분까지만 그리곤 했지.”


다시 보니 확실히 여기저기 여백이 남아있는 풍경화들뿐이었다.


그렇게 그림들을 살피고 있자니, 발레리안이 방 한 켠에 있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자기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흘리고선 말했다.


“...아까 감정적으로 멱살을 잡은 건 미안하게 됐다. 내 사과하마.”


그 표정에 무거운 마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귀공자가 한낱 평민에게 사과를 건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번 이성적인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지만, 중요할 때에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만다. 가족이 엮인 일이라면 더더욱. 그런 방면에서 보자면 난 아직 군주로서는 한참 부족해.”

“...이 방을 보여주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널 납득시키고 싶었다. 걔는 그렇게 천대받고 손찌검이나 당해야만 하는 애는 아니었어.”


발레리안은 무거운 목소리로 차분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걔는 자기 혈통에만 과하게 집착하면서 아랫사람들을 깔보기 시작했어. 대체 왜 그렇게 된 건지... 뭐가 계기였던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더니, 근래는 네가 알고 있는 그 상태야.”

“...”

“그냥... 그냥 나는 잘 모르겠다. 대체 왜 자기 혈통에 그렇게까지 광적으로 집착하는지, 대체 뭐가 디엘라를 그토록 독하게 만드는지. 마법 습득도 더뎠고 모든 분야가 완벽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상 밝게 지냈었어. 좋아하던 그림도 잔뜩 그렸었고, 가족들과도 늘 즐겁게 환담을 나누는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발레리안은 걸터앉아 있던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귀공자들이 입는 각 잡힌 예복을 정리하고선 고개를 숙였다. 데릭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대공이 정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잡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 듀플레인 공작가의 차기 가주다.

그는 함부로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신분이다.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그 자체가 귀족 규율상 허용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한테 이야기 들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디엘라는 수도원행이야.”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1성급 마법을 하나 정도만 어떻게든 익히면 내가 아버지를 설득해볼 수 있을 거다. 최소한 사교계 데뷔를 위한 준비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부디... 디엘라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만들어 줘.”


고개를 든 발레리안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절실함은 알겠으나, 데릭 입장에서는 당장 머리가 아프긴 했다.


사용인들 이야기를 듣자하니 수틀리면 사람을 패고, 짜증난다는 이유로 물건을 부수고, 가신들을 모독하고 신분을 들먹이며 찍어 누른다고 한다.

발레리안의 이야기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망나니에, 폐급에, 인격파탄자다.


그런 애를 갱생 시켜서 요조숙녀로 만들어놓고 마법까지 가르쳐 놓으라니. 말 그대로 마법을 부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8개월 만에 20명의 교사를 갈아치웠다는 대기록이 납득이 가고 만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릭은 일단 디엘라의 방을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저런 풍경화가 가득한 캔버스. 예쁘게 정리된 이불보. 아기자기한 레이스와 리본들.

그 사이에서 가만히 책장을 올려다 보니, 가정교육을 받을 때 사용했던 책들도 가득했다.


자수, 꽃꽂이, 승마 같은 것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들.

심지어 그 비싸다던 마법서들도 몇 권이 꽂혀있었다. 공작가 자제쯤 되면 교육용 마법서까지 따로 구비해놓는 모양이었다.


“...흐음.”


데릭은 턱을 짚고서 천천히 책장을 살폈다.


전부 귀족계 규율학파 마법서였다. 그야 당연하다. 여기는 듀플레인 가문이다.

한 권 꺼내서 이리저리 돌려보니 열심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 여기저기 메모의 흔적이나 실습 소감 따위도 적혀있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디엘라는 처음부터 모든 걸 내려놓은 게 아니다. 피를 깎는 노력을 했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이다.


노력의 양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방향이다.

데릭은 서가 가득히 쌓여있는 규율학파 이론서를 보며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한 번 해봅시다.”


데릭은 꺼내들었던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아놓고, 발레리안에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금 로브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방을 나간 것이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침실이 아닌, 수많은 장미덩굴로 둘러싸인 저택의 별채다.

조용히 정원 사이를 가로질러 가는 그를 심야의 어둠이 반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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