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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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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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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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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듀플레인 (4)

DUMMY

“그래도 왜 그런 처신을 하는지는 알겠군. 확실히 지나친 재주는 제 주인을 갉아먹기도 하는 법이지.”


듀플레인 대공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금 깃펜을 사각거리며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있을 뿐이다.

데릭이 실력을 감추는 이유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최소 4성급 이상의 탐색계 마법이다.’


데릭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어찌됐든 듀플레인 대공에게서 이렇다 할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귀족들마다 평민을 대하는 방식은 다른 법이니, 지금 시점에서 뭔가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들 이유는 없을 듯 했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 피어나는 경계심은 어쩔 수가 없다. 데릭은 듀플레인 대공이 어떤 인물인지 아직 잘 알지 못했다.


“결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되었어. 다만, 나이로 보나 복장으로 보나 평소에 마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놈은 아닌 것 같군.”

“용병입니다.”

“그래. 이젠 하다하다 듀플레인 공작저에 주점거리의 용병까지 들이게 되는 건가.”


듀플레인 대공의 신랄한 어조에는 생각보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데릭은 대공이 자신의 그릇을 가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는 수많은 가신들을 휘하에 두고 수도 없이 부리는 위치에 있는 자다.

순식간에 그릇의 크기를 읽어내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이셀린이 골라온 인선이니 나도 따로 별 말은 하지 않겠네. 디엘라가 거주하는 저택 별채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해두지. 따로 시녀에게 안내받게.”

“감사합니다.”

“가보게.”


그렇게 데릭에게 한 번 손을 휘저은 후, 듀플레인 대공은 다시 집무용 책상 위에 가득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 거대한 공작령의 주인이었다. 생각하고 처리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데릭은 그대로 뒷짐을 진 채 집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서있었다.

듀플레인 대공은 서류를 몇 번 살피다가, 이윽고 다시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자네 뭐하나? 나가보라고 말했네.”

“대공 전하께 반드시 여쭤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뭐?”

“대공 전하. 저는 용병입니다. 용병들은 의뢰받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데릭은 시선을 내린 채, 조용한 어조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이셀린 영애께서는 제게 의뢰를 해주셨지요. 디엘라 영애가 마법을 배울 수 있게, 그리고 귀족으로서 당당히 사교계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당연한 소리를 왜 늘어놓지?”

“그렇기에, 대공 전하께 간곡히 여쭤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듀플레인 대공이 인상을 찌푸리며 데릭을 쳐다보았다.

평민 나부랭이가 일국의 대공 앞에서 이리 사견을 늘어놓는다는 것도 일반적이진 않은 일이다.

그 내용이 덧없는 것이면 그것만으로도 죄를 물을 수 있다. 신분의 차이란 그런 것이다.


허나, 데릭의 표정은 굳건했다.



*



아이셀린 영애는 공작에게 인사를 올리고 난 뒤, 개인 접견실로 들어와 제이든에게 차를 대접해주었다.

아이셀린의 전담 시녀는 정성스럽게 고급 차를 잘 우려내 제이든 앞에 내주었지만, 투박한 용병에게 그런 소녀적인 찻잔은 썩 어울리지 않았다.


제이든은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잔근육 가득한 손으로 찻잔을 들어 한 잔 머금었다.


“이번 의뢰는 딱히 제가 뭘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셀린 영애께서 저택 일정을 마치고 에벨스타인으로 돌아가실 때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실래요? 벨더른 용병단의 단장께서 직접 와주시니 많이 든든했는데요.”

“하하. 이런 영세한 용병단에 그토록 예를 취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셀린 영애께서는 참으로 마음씨가 넓으시군요.”


접견실 한 켠에 앉아 있는 아이셀린 영애는 한 송이 꽃과도 같은 모습이다.

소쇄한 기운이 흐르는 드레스 자락은 분명 평상복인데도 화려한 느낌이 들 정도로 용모가 아리땁다. 그러나 얼굴에 가득한 근심이 그 단아한 아름다움을 크게 헤치고 있었다.


“발레리안 오라버니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았지요.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니요. 이런 으리으리한 공작저에 용병을 들이는 것부터가 썩 달갑지는 않았겠지요. 다 이해합니다. 저보다는 데릭이 고생하겠지요.”

“제가 판단해서 데려왔지만, 데릭 씨가 디엘라를 감당할 수 있을지 불안해요.”

“저야 디엘라 영애께서 어떤 분인지 잘 모르니... 저도 뭐라 할 말은 없군요.”


아이셀린 영애는 막상 공작저로 돌아오고 나니 많이 불안해보였다.

이런 저런 용병단에 의뢰를 넣으며 쓸 만한 마법사를 찾아내던 시간도 꽤 되었을 것이다. 시간도 돈도 꽤 썼을 테고, 그러면서도 본인의 사교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이든은 그런 아이셀린을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측은한 미소를 흘렸다.


“왜 데릭을 데려오셨습니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그 녀석과 오래 일해봤습니다만, 확실히 나이에 안 맞게 침착하고 일처리도 잘하는 놈입니다.”


제이든은 한결 편해진 듯 웃음을 흘리고는 아이셀린 영애의 근심도 덜어줄 겸 말을 이어갔다.


“다만, 아이셀린 영애께서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좀 궁금했을 뿐입니다.”

“글쎄요... 데릭 씨는 용병 출신이지만, 묘하게 귀족들 언행이나 문화를 좀 알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거야 뭐, 스승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 녀석 스승은 예전에 좀 잘나가던 몰락귀족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어쨌든 용병들 치고는 그런 투박함이나 악착같은 느낌도 잘 없고... 또 선량한 인상이기도 하고... 그래서 디엘라를 잘 타일러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확실히 데릭은 악착같은 용병바닥을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꽤나 상식 있고 선량한 인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마법 성취도 빠르다. 비록 그 성급은 아직 미약하긴 하나, 디엘라와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 중요했다.

1, 2성급 마법을 익힌 지 수십년도 더 지난 4성급 이상의 마법사들은 이제 막 마법을 배워나가는 자들의 입장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데릭 같은 자들이 이런 방면에서는 더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이든은 그런 아이셀린 영애의 설명을 듣고서는, 웃음을 흘렸다.


“허허. 아이셀린 영애께서는 역시 진솔하고도 강직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누가 되었든 올곧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야말로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인품을 이끌어내는 것이겠지요.”

“그렇게까지 과찬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아닙니다. 다만... 여기저기 전장을 좀 쏘다녀본 평민 나부랭이에 불과한 제가, 좀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아도 되겠습니까?”


마음 편하게 너털웃음을 지어대던 제이든의 표정이 한 결 무거워졌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이셀린 영애는 제이든이 산전수전 다 겪어본 백전노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경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깊은 속내를 노련하게 감추기 위함이다.


“항상 위험천만한 전장을 넘나드는 용병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결단력... 혹은 담력입니다. 다른 건 다 가르칠 수 있어도 그건 못 가르칩니다.”


제이든은 어울리지도 않는 꽃무늬 찻잔을 한 번 스윽 쓸어보더니, 이윽고 다시 접견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데릭 그 놈은 길바닥 위에서 자란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철들기도 전부터 용병 일을 했습니다. 그런 길바닥 출신 용병이 그저 기품과 선량함만으로 살아남았겠습니까?”

“예?”

“아이셀린 영애께서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법을 좀 더 익히셔야겠습니다.”



*




-끼익


대공의 접견실 문을 닫고 나오자 복도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가 있었다.

시녀는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한 목소리로 데릭에게 말을 건넸다.


“시녀장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디엘라 아가씨께서 지내시는 별채 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디엘라 영애께선 별채에 따로 거주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저택 본채 쪽에 방을 사용하셨는데,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란 것도 알만했다. 자기 기분따라 닥치는 대로 깨부수는 망나니를 본채에 놔두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데릭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걷는 시녀를 따라 공작저 복도를 걸어 나갔다.


화려한 장식이 잔뜩 들어차있는 공작저 복도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눈이 부실 지경이고, 벽을 보면 척봐도 비싸 보이는 그림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카펫 하나, 커튼 하나까지 전부 최고급품이 모여 있는 진짜배기 귀족가였다.


별채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붉은 장미 덩굴이 아치형 울타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참 예쁜 길이지만, 본채와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설계에 묻어나고 있었다.


“...”


그렇게 데릭은 시녀를 따라 디엘라의 방이 있을 별채로 들어갔다.

커다란 정문을 지나자 비로소 디엘라 영애를 보조하며 지내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얼굴에 벌써부터 노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데릭이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데릭이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하자, 별채를 관리하는 집사는 홀을 따라 나있는 계단 쪽으로 데릭을 안내했다.

활기가 가득한 본채와 달리 별채 내부는 묘하게 잿빛이 감도는 느낌이었다. 볕도 잘 들지 않았고, 눅진한 공기 같은 것이 흐르는 느낌도 들었다.


데릭은 한 차례 숨을 훅 들이쉬고,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갔다.

이윽고 디엘라 영애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목제 문 앞에는 시녀들이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하나같이 표정이 피폐해져 있는 사용인들을 지나쳐서 겨우 문 앞까지 도달했다.


데릭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아직 디엘라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데 더 고민해봤자 의미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노크를 했다.


- 똑, 똑.


“실례하겠습니다.”


대답이 없기에 천천히 문을 열고 내부를 살폈다.


“...”


방 안의 공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채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녀 하나가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방이었다. 어찌나 으리으리한지, 가구가 차지하는 공간을 다 합쳐도 방의 2할이 채 되지 않을 듯 했다.


아기자기한 레이스로 장식된 침대나, 척 봐도 고급품으로 보이는 다기 보관장.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화장대나 옷장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방 중앙부에는 새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티 테이블이 있었는데, 한 소녀가 그곳에 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왜소한 체구를 날개처럼 감싸 안은 풍성한 금발 머리칼이 인상적이다. 편해 보이는 레이스 드레스를 평상복삼아 입고 있는 소녀는 티 테이블에 앉아 차를 한 잔 하고 있는 듯 했다.


“데릭이라고 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가까이오렴.”


어조는 단아하지만 그 목소리에 앳된 기운이 남아있다.

그녀는 이 듀플레인 가문의 막내였다. 아이셀린 영애보다도 더 연하라는 이야기니, 그 목소리를 이상하게 여길만한 건 아니었다.


가만히 주변 사용인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데릭은 시선을 한 번 굴린 뒤, 이윽고 방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찌됐든 디엘라 영애와는 대화를 나누어 봐야했다.


그렇게 디엘라 영애 쪽으로 차분히 다가간 순간이었다.


- 촤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데릭의 온 몸이 축축해져 있었다.


재빨리 몸을 돌린 디엘라 영애는 테이블 보 아래에 숨겨두었던 걸레 빤 물을 그대로 데릭에게 흩뿌려버린 것이다.

데릭의 몸을 타고 비린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접견실에서 흐느끼던 그 메이드와 같은 꼴이었다.


“어머.”


고양이처럼 늘어난 소녀의 눈이 흡족한 분위기를 풍긴다.

가냘픈 손가락으로 자기 입가를 훑더니, 이윽고 풍성한 금발 머리끝을 베베 꼬면서 천진하게 웃었다.


“어머, 어머, 어머.”



- 뚝, 뚝. 뚝.


데릭의 새하얀 앞머리를 타고 검붉은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그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디엘라 영애는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웬 시궁쥐가 기어들어왔나 했더니, 집사장이 말했던 용병이었잖아?”

“....”

“아닌가? 이제 다시 보니 시궁쥐가 맞는 것 같기도 하네. 빈민가에서 굴러먹던 거지라며? 호강하네. 이런 호화로운 저택에도 다 와보고.”


디엘라 영애는 테이블 보 아래에서 무언가를 하나 더 잡아 꺼내더니, 그대로 의자에 올라서서 데릭의 머리 위에 부어버렸다.


- 쏴아아


이번에는 음식물 따위가 섞여있는 구정물이였다. 주방의 메이드들이 치우려던 것을 굳이 가져와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릭은 이제야 사용인들의 표정이 불안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디엘라 영애가 이런 짓을 벌일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건, 미리 데릭에게 일러주어서 대처를 했다간 디엘라의 분노가 그들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중간관리직들은 언제나 고생하는 법이다. 이 별채에서 일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데릭은 그들의 불안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기에, 조용히 그 더러운 구정물을 맞아주었다.


- 뚝, 뚝, 뚝.

- 타앙!


이윽고 완전히 내용물을 비워내고, 디엘라 영애는 빈 통을 바닥에 대충 내팽개쳤다.


“이런 호화찬란한 곳은 익숙지 않을까봐 고향 생각이 나는 물건으로 준비해뒀어. 이제 좀 시궁창 빈민가 출신다워졌네. 어때, 내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드니?”

“...”

“건방지게 쳐다보지 마.”


디엘라 영애는 의자에 올라선 그대로 데릭의 명치를 발로 밀어서 넘어뜨렸다.


- 쿵!


이미 더럽혀진 바닥이 미끄러워서, 데릭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우... 지린내.”


그대로 데릭의 몸에 닿았던 슬리퍼를 벗어서, 대충 그에게 집어던졌다.

데릭의 어깨를 때린 디엘라의 슬리퍼가 바닥을 굴렀다.


한쪽만 맨발이 된 디엘라가 그대로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앉았다. 의자는 발받이 대용으로 쓰면서, 턱을 괸 채 교만한 웃음을 흘렸다.


“이젠 하다 하다 빈민가 출신 시궁쥐까지 내 별채에 드는구나. 자기 신분이 얼마나 미천한 건지 자각조차도 못하고서는... 험한 꼴 보기 전에 적당히 자기 주제 깨닫고 돌아갔어야지. 이게 다 무슨 꼴이니.”


소녀는 왜소한 체구가 무색할 정도로 눈가에 날이 바짝 서있었다. 손톱을 세운 고양잇과 생물 같은 공격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밀려 올라오는 냄새가 불쾌한 것인지, 소녀는 그대로 콧잔등을 꾹 누르며 말했다.


“미천한 비렁뱅이 주제에, 네가 뭔데 날 가르치려들겠다는 건지.”

“...”

“주제를 알아야지, 길바닥 거지새끼 주제에.”


데릭은 가만히 그런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 ‘그렇기에, 대공 전하께 간곡히 여쭤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집무실에 앉아 조용히 깃펜을 놀리던 듀플레인 대공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잠시 턱을 몇 번 훑어 내리더니, 이윽고 깃펜을 집무용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 ‘저는 일반적인 마법 교사도 아닌 길바닥 용병 출신입니다. 따라서 제 방식대로 일을 처리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 ‘허나, 디엘라 영애라는 분의 처우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을 보면 그간 해왔던 대처로 상황이 해결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극약처방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디엘라 영애를 사랑해 마지않는 대공 전하께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공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집무실 한 켠에 있는 창가로 향해 바깥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대로 뒷짐을 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평민 출신인 주제에, 최소 2성급은 되어 보이는 체내 마력 흐름.

대공을 앞에 두고도 따박따박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을 물어보는 모습. 그러면서도 최대한의 예의는 갖추는 것이 귀족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깔려있다.


그 소년은 말했다. 용병은 받은 의뢰를 반드시 해결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그 말 그대로, 소년은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판단하려고 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 묘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모습에, 듀플레인 대공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 ‘디엘라 영애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대공께서는 제게 어느 정도까지 권한을 허용하실 수 있습니까?’


극약처방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하는 데릭의 눈에 서려있는 진지함은, 지금까지 보았던 기품 어린 귀족 출신 마법사들과는 그 방향성이 확연하게 달랐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한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 뿐이다.

그리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굳건하다.


“...”


오만방자한 디엘라의 품성은 이미 상류층 사이에선 유명했다.

그 딸아이가 그렇게 된 데에, 정말로 듀플레인 대공 자신의 잘못은 아예 없었을까.

가주이자,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언제나 자신은 옳은 선택을 해왔는가.


발레리안, 레이그, 아이셀린, 디엘라.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의 산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공작령을 돌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던 자신은, 늘 자식들을 공평히 사랑해왔던가.


끝없이 이어지는 그런 자문 속에서... 듀플레인 대공은 조용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짜악!


- 콰당탕!



너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 상황이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나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광경이라 머리가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다.


문과 복도 쪽에 모여들어 있던 사용인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호흡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큰 충격에 휩싸여, 하나같이 손가락 끝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 쨍그랑!


티테이블 위에서 떨어진 찻잔이 깨지는 소리.


그 앞에는─ 데릭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그대로 의자에서 나가떨어진 디엘라 영애가 주저앉아 있었다.


“──.”


시간조차 멈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정적.

바닥에 주저앉은 디엘라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만 있어야 했다. 한계까지 늘어난 동공이 그녀의 충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유력가의 영애가 가지는 위치란 무엇인가.

홍차의 온도를 잘못 조절해서 영애의 혀라도 데였다간, 차를 끓인 사용인은 등가죽이 찢어질 때까지 채찍질을 당한다.

길을 가다가 삐끗해서 발목이라도 삐었다간, 그녀를 보좌하던 시녀는 저택에서 쫓겨나게 된다.

언제나 기품 있고 아름다워야 할 귀족가 영애의 옥체란 그런 것이다. 귀족가에 몸담은 사용인들은 질릴 때까지 교육받는 것이었다.


허나, 그런 것들이 무색하게도 디엘라의 뺨은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 탁, 탁.


데릭은 더럽혀진 튜닉 끝을 털어냈다.


디엘라 영애는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충격에 휘감긴 목청은 공허하게 의미 없는 소리만 내뱉을 뿐이다.


“...”


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디엘라 영애의 말이 맞았다. 데릭의 고향은 시궁창이다.

평생을 고귀하게 살아온 상급 마법사들에게 이런 모멸은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될 수도 있겠으나, 밑바닥 출신 시궁쥐에게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다.

이 또한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기립.”


옷을 갈무리한 데릭이 주저앉은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구정물에 눌어붙은 새하얀 머리칼.

그 사이로 드러난 냉정한 눈동자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모종의 귀기가 서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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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773 1,194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942 1,226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1,316 1,159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2,125 1,191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976 1,387 21쪽
19 여정 (3) +50 24.04.09 30,301 1,289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818 1,229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870 1,217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599 1,236 16쪽
15 사제 (5) +45 24.04.04 30,290 1,200 20쪽
14 사제 (4) +30 24.04.03 30,054 1,137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997 1,20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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