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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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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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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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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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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벨미어드 (1)

DUMMY

고풍스러운 예술품이 가득 도열해있는 귀족가의 정원과는 달리, 평민들의 거리는 퀘퀘한 냄새가 풍기고 습기가 가득했다. 이 간극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삶의 환경이란 마치 몸에 딱 맞는 의복의 치수 같은 것이라, 위로 올라가기는 쉬워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릭은 오랜 친구와 함께 주점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이 썩 기분 좋았다.


“귀족들 똥물이나 받아먹다가는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가 되어버리고 말 걸. 데릭 네가 몇 달 씩이나 그 공작가에 처박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얼마나 한숨이 푹푹 나오던지.”

“펠린느. 너는 쓸 데 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그리고 귀족가 사람들이라고 해서 꼭 다들 성격이 파탄난 건 아니더라고.”

“어머. 얘 좀 봐. 몇 달 호화롭게 먹고 자고 했더니 벌써 그 집 가신이 다 됐네, 다 됐어. 이러다가 기사 서약까지 올리겠어.”

“너무 호들갑이 심한 거 아니냐.”


데릭이 헛웃음을 짓고선 곁눈질로 주점 거리를 보았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용병들이 오가는 이곳은 에벨스타인에서도 가장 험악한 곳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은화 몇 푼에 사람도 죽여준다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이곳에서 생존해나간다는 것은 폭력과 가까이 지내야만 함을 의미 했다.


그리고 펠린느는 데릭과 마찬가지로 이런 주점거리에서 용병 노릇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는 소녀였다.

가냘픈 외관만 보고 그 바위처럼 다부진 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아인족 수십 마리를 토막쳐 죽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데릭과 펠린느는 서로 과거사에 대해서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래도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귀족에 대한 혐오를 생각해보면... 그녀의 가족들도 귀족들에 의해 별로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 듯 했다.


시대가 시대였다.

비일비재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데릭은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비극의 주인공 앞에서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시선을 내미는 것만큼 몰상식한 행위는 없다.


어찌됐든 펠린느는 귀족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진 인물로 자라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꽉 막히진 않았다.


뒤로는 귀족들을 씹더라도 면전에서 막나가는 짓을 할 정도로 앞뒤 없는 인간은 아니었고, 이따금씩 귀족이 관계된 의뢰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돈 앞에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야 이런 용병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제 와서 그 모습을 보고 잣대가 너무 이중적이라느니 하는 것은 촌스러운 행위였다.


살아남은 놈이 곧 정의인 곳이다.

비겁하다느니 졸렬하다느니 하는 말들은 대부분 도태된 자들의 푸념에 지나지 않았다.


- 끼익


주점 거리에서도 꽤나 구석에 위치한 술집 ‘벨더른의 눈물’의 허름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 테이블 건너편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주인장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단장 아저씨. 누가 왔는지 좀 보세요.”

“오, 펠린느. 그리고... 데릭 아니냐? 이야, 곧 에벨스타인에 이름을 날릴 마법 교사 양반을 보니 내가 다 영광이구만.”

“어휴, 호들갑은 여전하시네요, 단장 아저씨.”


제이든이 푸석거리는 수염을 쓸며 인사를 하자, 데릭은 가감 없이 반가움을 표하며 테이블에 가 앉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주점 구석구석에는 손님이 꽤 있었다. 대부분 번쩍거리는 장비를 갖추고 있는 용병들이었는데, 이런 구석 주점까지 들어온 것을 보면 시끄러운 환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데릭은 제이든의 장사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생각보다 좀 오래 걸렸어요. 아이델 금화 열 다섯 닢 짜리 의뢰란 게 그리 만만하지도 않더라고요.”

“그래. 어디 돈 벌기가 쉽나. 이 정도면 충분히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지. 아니, 오히려 이 쪽에서 절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제이든은 너털웃음을 짓고서는 큼지막한 머그잔에 과실주를 따라서 올려놓았다.

펠린느는 품위라고는 없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캬하악 하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데릭은 한동안 귀족가 영애들이 고풍스럽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들만 보다가, 저렇게 호쾌하게 벌컥이는 모습을 보니 괜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펠린느는 그런 데릭의 시선을 느꼈는지, 뭘 보냐는 듯 데릭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왜 이렇게 사람을 신기하게 봐?”

“펠린느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어.”

“듣기만 하면 굉장히 기분 좋은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네가 귀족가에 다녀왔다는 걸 생각해보니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네. 내가 품위 없다는 거야?”

“그렇긴 한데, 어차피 너 귀족들처럼 품위 챙기는 거 싫어하잖아.”

“흠... 반박할 말이 없네.”


펠린느는 뒤로 올려 묶은 백금발 머리칼을 다시 매만졌다. 군데군데 삐져나온 머리들을 정리하며 다시금 머리끈을 조이는 동안, 제이든이 데릭 쪽에도 머그잔을 들이밀었다.


“축하주 한 잔 해라. 우리 벨더른 용병단의 유일한 마법사가 드디어 귀환했는데,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어.”

“고맙습니다. 근데 이러면서 다 장부에 달아놓을 거죠?”

“쓸 데 없이 예리한 게 네 가장 큰 단점이야, 데릭.”


이윽고 제이든과 데릭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데릭은 머그잔을 들어 올리고서 몇 모금을 머금었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니 제이든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래서, 돈은 다 받아왔냐?”

“그야 그렇죠. 근데 사실 그게 중요하진 않아요.”

“돈 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

“더 큰 돈이겠죠.”


데릭이 한 쪽 팔을 들어서 허리춤에 매어둔 낡은 책을 보였다.

처음에는 제이든과 펠린느 모두 저 책이 뭔가 하는 듯 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이윽고 그게 마법서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뭐, 뭐야 그게. 데릭. 설마... 2성급 마법서야?”

“아니, 3성급 마법서야. 공작저의 지하 서고에 있던 걸 받아왔어.”

“...3성급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펠린느는 그 말을 듣고 다시금 고개를 쑥 내밀어서 데릭의 허리춤을 확인했다.

마법적 지식이 일천한 펠린느는 외관만 보고 마법서의 성급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허나, 데릭이 이런 것으로 허풍을 떨지는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2성급 마법서만 해도 평민들은 거의 살 수가 없는 물건이다. 3성급에 이르러서는 귀족 구획의 고급품 경매장에나 가끔 경쟁 물품으로 올라오는 그런 물건이었다.

제이든 또한 데릭의 허리춤에 묶인 게 3성급 마법서란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봐야만 했다.


“평민한테 이런 물건을 줬다고? 데릭, 귀족 물을 좀 먹었더니 이런 허풍까지 배워온 거야?”

“나는 그냥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

“믿을 수가 없네.”


펠린느는 머그잔을 다시 홀짝이면서 진정을 기했다. 일확천금이란 단어가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저 마법서를 제 값주고 팔수만 있다면 훨씬 더 나은 거처에서 훨씬 더 나은 장비를 가지고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하층민 생활을 끝낼 수도 있을 액수였지만, 데릭은 지금 당장 이 마법서를 팔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중에 현금화 하는 날이 오면 제가 크게 한 턱 쏠게요.”

“암, 그래야지. 우리 벨더른 용병단에도 크게 한 번 기부해라.”


제이든은 다시금 호탕하게 웃음 지었다. 어쨌든 그는 데릭의 성취에 대해 솔직하게 기뻐해주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요즘 의뢰 좀 들어온 건 있어요? 내일부터 뛸 수 있을만한 일들은 좀 뛰려고요.”

“부지런도 하구만.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너도 알다시피 이 바닥에서 마법사는 부족했으면 부족했지 남아도는 일은 절대로 없거든.”

“그런데, 데릭. 너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벌써부터 일 뛰러 다니게?”


펠린느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야기 했지만, 데릭은 딱히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받아쳤다.


“가벼운 토벌 일 정도는 빨리 시작해야지. 편안한 귀족 저택에서 좀 오래 쉬다 보니 감이 좀 죽었어.”


데릭의 한탄에 제이든은 헛웃음을 픽 흘렸다.




*




이튿날부터 데릭은 벨더른 용병단을 통해서 들어오는 여러 마물족 토벌 의뢰 따위를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평화롭게 보냈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에벨스타인 외곽지대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마물들을 잡아 죽였다.

때로는 홀로 움직이는 때도 있었고, 때로는 펠린느와 둘이서 같이 쏘다니기도 했다.


일거리 자체는 늘 그랬듯 넘쳐났다.

고블린, 트롤, 그렘린 따위의 마물족들이 변방 지대를 배회하고 다니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근처의 미궁에서 빠져나온 마물족들인 경우가 허다했는데, 행상인들이나 여행객들을 습격하는 통에 주기적으로 토벌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주로 이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용병들의 밥줄인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자잘한 업무들... 영지 근처에 기어들어온 걸인들을 쫓아내거나 깡패들을 두들겨 패주는 일, 장사꾼들을 괴롭히는 불한당을 쫓아내주는 일, 간단한 호위 임무에 이르기까지 데릭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정말 많았다.


데릭은 굳이 일을 가려 받지 않고 자신이 감당 가능한 것은 다 처리했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그래왔듯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했다. 해가 떠있을 땐 주점 거리를 거닐며 온갖 의뢰주들의 신임을 샀고, 달이 뜨면 시장 구획 한 켠에 있는 거처에 틀어박혀서 마법서를 읽었다.


실전에 나서는 날에는 최대한 사용해보지 않았던 마법들을 위주로 사용해서 마법 숙달을 높이려 했고, 휴일에는 에벨스타인 변방의 초원지대에서 홀로 앉아 마력 활용을 연습했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다보니 시간이 쏜 살처럼 흘러갔다.


데릭이 주점 거리로 돌아온 것은 늦은 봄이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뜨거운 여름을 지나서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순간도 나태해 지지 않고 꾸준하게 마법을 숙달해 나갔다. 데릭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바로 그 한결 같음이었다.


“...흐음. 감이 올 것 같긴 한데, 애매하네.”


시간이 날 때마다 에벨스타인 외곽의 초원지대에서 마력을 휘두르던 데릭은, 하늘을 향해 휙 손을 뻗어보았다.


소년은 3성급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이런 어린 나이에 품기에는 지나치게 큰 꿈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마법 단련을 하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았다.


귀족들 중에서도 영재 중의 영재는 성인식을 치를 때 즈음에 3성급에 입문하는 자들도 있다고 하지 않나.

평민들한테는 구름 위의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어렸을 적부터 귀족들보다 빠르게 마법을 숙달하기 시작한 데릭한테는 그리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품고서 데릭은 매일 같이 3성급 마법서를 탐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3성급의 벽이라는 것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어떤 계기라고 할 것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데릭이 할 수 있는 일은 꾸준히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성과는 따라오지 않는 법이다.

하루 중 네 시간 이상 잠드는 날이 거의 없었고, 밤마다 마법서를 탐독해댔기 때문에 양초 값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또한 투자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데릭의 마법 실력이 2성급 마법마저도 원숙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낙엽도 다 지고 첫눈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




- 콰앙!


주점 ‘벨더른의 눈물’.

그 삐걱거리는 나무문이 기운차게 열리자, 피로 범벅이 된 데릭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타닥거리는 모닥불의 열기가 가득히 차오르던 주점 안으로 외부의 한기가 스며들어왔다.

눈송이 몇 개인가가 주점 안으로 들어와 나무 바닥을 툭툭 때리더니, 이윽고 금세 물방울이 되어 바닥을 적셨다.


겨울 밤 주점의 아늑한 열기에 빠져 맥주를 들이키고 있던 취객들은 입구의 소년을 보고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 눈송이만큼이나 새하얀 백발을 늘어뜨린 소년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다. 피로 범벅이 된 꼴이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느낌이다.

멀쩡하게 서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피가 소년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소년은 굳은 눈이 수북하게 붙어있는 부츠 발로 주점 안을 걸어 들어왔다. 그는 어깨 뒤쪽으로 큼지막한 마물족의 목을 걸쳐들고 있었다,

그 뒤로 펠린느도 얼른 따라 들어오더니 모닥불 쪽으로 달려가 손을 녹였다.


“으아아. 춥다, 추워! 단장 아저씨! 뜨거운 차 한 잔만 주세요! 이러다 손가락이 잘리겠어!”


호들갑을 떠는 펠린느를 지나쳐서 안쪽까지 걸어 들어간 데릭이 바 테이블 위에 큼지막한 하피의 목을 쿵 하고 올려놓았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물씬 올라왔다.


“좀 오래 걸렸어요.”

“이야, 이 날씨에 진짜로 켄트 산맥 중턱까지 갔다 왔어? 젊다 젊어.”

“솔직히 좀 무모했던 거 인정할게요. 눈 속에서 야영하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네요. 그대로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뭐 어떠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그런 고생도 다 해보는 거지.”


데릭이 마물의 피가 잔뜩 묻은 가죽 장갑을 벗어서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동안, 제이든은 흉물스러운 하피의 목을 얼른 챙겨 들어서 안 쪽 작업공간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서는 의뢰비를 어떻게 정산할지 간단히 의논한 다음, 따뜻한 벌꿀주를 내다주었다.


주점의 다른 쪽에서 맥주를 들이키고 있던 손님들은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용병들이었기에, 그들은 저 피칠갑의 소년이 어떤 인물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데릭은 슬슬 에벨스타인 용병 바닥에서도 꽤 이름을 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용병이야 많지만, 맡은 일을 반드시 수행해내는 용병은 거의 없는 것이 이 바닥이다.

이미 의뢰주들 사이에서는 데릭에게 일을 맡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고, 중간에 낀 제이든은 그 중에서 무슨 일을 수주해야할지 잘 골라야만 할 지경이었다.


“...”


제이든이 따뜻한 물로 적신 천을 가져다주자, 데릭은 그것으로 얼굴 근처의 마른 피를 슥슥 닦아내었다. 소년은 주점 구석의 용병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신경 쓰는 기색조차도 없이 장비 상태부터 점검했다.


이미 데릭의 의뢰비는 어렸을 적에 비해 몇 배나 높아져 있어서, 듀플레인 공작가에서 받은 돈을 온전히 저축한 상태에서도 충분히 먹고 살만 했다. 이대로 잘 유지해나가면 그 비싸다는 개인용 완드나 스태프를 구입하는 게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고생 많았다, 데릭. 이런 눈 속을 헤치고 산맥을 타올라서 하피의 목을 따오는 놈은 너 밖에 없을 거다.”

“다른 용병단에서도 날씨 상관없이 마물 토벌 의뢰를 잔뜩 수주하던데요, 뭘.”

“그네들이야 야영 장비 잔뜩 안고 며칠씩 걸려서 대규모로 다녀 오잖냐. 너처럼 동네 뒷산 오르듯이 훌쩍 다녀오는 놈은 없을걸.”

“...동네 뒷산 오르듯 훌쩍 다녀오진 않았어요. 진짜 얼어 죽을 뻔 했어요.”

“그래, 그래. 이번 의뢰비는 좀 잘 쳐주마. 의뢰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줄 거야.”


제이든은 컵들을 정리하면서 웃음을 흘렸다.

얼른 정리해줘야 할 것들을 정리해줘야 데릭도 거처로 돌아가서 쉴 것이기에, 제이든의 움직임이 조금 분주해졌다.


“이번에 고생 좀 했으니 당분간은 좀 쉴 테냐?”

“들어와 있는 의뢰 또 있어요?”

“없기가 더 힘들지.”

“내일은 쉬어야 될 것 같고, 그 이후로 잡힌 일이면 상관없어요.”


데릭은 부츠 끈을 다시 꽉 조여 묶으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이 개고생을 하고도 또 의뢰를 수주하겠다는 데릭을 보고 있으니 제이든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용병단 안에 이리 활발하게 움직여주는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제이든은 허허 웃으며 바 테이블 아래에 정리되어있는 서류뭉치를 뒤적였다.


“그래도 설산에서 난리를 피우고 왔더니 피로가 좀 누적되긴 했어요. 너무 멀리 나갈 필요가 없는 일이면 좋겠는데요.”

“흠... 사실 간단하고 벌이도 좋은 의뢰가 하나 들어와 있긴 하지.”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물론 쉽고 벌이 좋은 일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야. 너도 수주하기 싫으면 그냥 넘겨도 상관없다.”


제이든은 의뢰지 하나를 꺼내 들어서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벨미어드 백작가 쪽에서 나온 의뢰야. 서편 거리의 로헬 용병단에서 튕겨져 나온 의뢰지. 마법을 쓸 줄 아는 인간을 찾더군.”

“...귀족가 의뢰가 튕겨져 나왔다고요? 로헬 용병단이면 꽤 큰 곳이잖아요.”

“그래, 별난 일이지?”


본디 이름난 귀족가에서 평민들이 득시글거리는 용병단에 의뢰를 넣는 것 자체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위세 높은 권력가일수록 인력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가 의뢰 자체도 흔한 편이 아닌데, 심지어 벌이는 꽤 좋다. 귀족들은 씀씀이가 헤픈 법이었다.

그러니 이런 대형 귀족가의 의뢰가 한 건 떨어지면 용병단은 너도나도 수주하고자 달려드는 게 당연했다.


지난 봄, 듀플레인 공작가의 의뢰를 벨더른 용병단이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아이셀린 영애가 디엘라를 가르칠 교사를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의뢰를 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이런 약소한 용병단까지 귀족가 의뢰가 내려오는 일은 없는 게 보통이다.


데릭은 눈가를 좁히고선 의뢰지를 살폈다.


“...과연,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벨미어드 백작가에서 마법 대련을 도와줄 평민을 찾고 있었다. 1성급 마법만 다룰 줄 알면 아무나 상관없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귀족가에 마법 대련을 할 상대야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굳이 평민 마법사를 찾는다는 것은 연습 삼아 마음껏 두들겨 팰 상대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민 주제에 귀족 마법사를 이겨먹으려 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애초에 그게 가능한 평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데릭은 이 의뢰를 수주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법을 쓸 줄 알면서 젊고 쌩쌩한 현역 평민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들은 항상 벌이가 더 괜찮은 일감이 넘쳐나기 때문에, 이런 자존심 내다 버리며 두들겨 맞기만 해야하는 일을 굳이 수주하려 들지 않는다.

로헬 용병단의 마법사들도 각자 계획된 마물족 토벌을 하거나 호위 임무를 하려 하지, 치기어린 귀족들의 샌드백 노릇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의뢰비가 막대하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귀족가 의뢰 치고는 그리 메리트가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귀족 구획에서 마법 대련 좀 어울려주면 되는 일이네요?”


그러나, 데릭은 오랜 하피 토벌을 다녀오느라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곧바로 멀리 나가는 일을 잡고 싶지는 않았기에, 차라리 적당히 어울려 주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일을 원했다.


“네가 하게?”

“적당히 져주면서 몇 대 맞아주면 되는 거겠죠. 제가 수주하는 걸로 처리해주세요.”

“네가 괜찮다면야, 알았다.”


데릭은 대충 그렇게 말하고, 끈이 꽉 매어진 부츠로 바닥을 몇 번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선 가죽 주머니를 들쳐 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꿀주 잘 마셨어요.”

“장부에 다 달아놨어, 임마.”

“그럴 줄 알고 한 말이에요.”


데릭은 거처로 돌아가서 몸을 씻고 마법서를 탐독할 생각이었다. 긴 여정 끝에 돌아왔음에도, 그는 마법 숙달을 게을리 할 마음이 없었다.

여전히 바쁘게 사는 데릭을 보면서 제이든은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펠린느. 거기서 졸면 화상 입는다.”

“으힉.”


침을 흘리며 불가의 온기에 몸을 맡기고 있던 펠린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데릭은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서는, 다시금 주점의 나무문을 열어젖히고 혹한 속으로 파고들어간 것이다.


조용히 맥주를 들이키던 주점의 손님들이 겨울밤의 싸리눈을 헤치고 나아가는 데릭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소년을 담금질 했다.

눈보라를 헤치며 거처로 돌아가는 그 모습은, 이미 원숙함이 쌓인 베테랑 용병이었다.


한 해가 간다.

곧 생일을 맞이하면, 17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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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엘렌테 (4) +58 24.04.29 24,081 1,151 25쪽
28 엘렌테 (3) +65 24.04.22 27,743 1,121 19쪽
27 엘렌테 (2) +45 24.04.19 28,437 1,070 23쪽
26 엘렌테 (1) +45 24.04.18 27,875 1,086 23쪽
25 벨미어드 (5) +68 24.04.17 29,072 1,151 20쪽
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542 1,185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718 1,217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1,091 1,149 17쪽
» 벨미어드 (1) +63 24.04.11 31,889 1,183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749 1,376 21쪽
19 여정 (3) +50 24.04.09 30,053 1,283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575 1,221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639 1,210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358 1,227 16쪽
15 사제 (5) +45 24.04.04 30,047 1,193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810 1,128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754 1,19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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