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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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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최근연재일 :
2024.05.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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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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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사제 (5)

DUMMY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오가고 있었다.

디엘라가 부서진 연단 아래로 파고 들고, 레이그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1성급 마법을 발현하는 모습.

격식과 예절을 갖추고 서로의 마법실력을 가늠하며 교류하는 마법 대련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전 박투로 상황이 넘어가고 있었다.


집사장 델론은 그 광경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마법 대련의 규칙상 대련 종료 요건은 충족되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넘어간 자도 없고, 보호 법진이 발동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걸 더 이상 마법대련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그냥 서로 감정적으로 전투를 해댈 뿐인 이런 상황을 말리지 않아도 정말 괜찮을까.


일단 난간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듀플레인 대공으로부터 뭔가 지시가 떨어지진 않았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그저 대련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집사장 델론이 자신의 고유 권한으로 말릴까 싶다가도, 진심으로 이를 악물고 결투에 임하는 두 사람의 진지함이 이를 말린다.


- 콰가각! 콰득!


레이그는 얼음 기둥 사이로 뛰어나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디엘라를 쫓기 위해서 연단 바닥을 부수려고 하면, 그 때 마력을 감지한 디엘라가 공격을 퍼붓는다.

그렇다면 레이그는 그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영창을 중단하거나, 마법을 방어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 대치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신경전을 이어가는 와중에 레이그는 깨달았다.

디엘라는 이런 식으로 대치상태를 이어지게 만들어, 레이그의 마력을 낭비시키려는 것이다.


1성급 마법을 난사하는 레이그와, 기초적인 마력 활용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디엘라.

설령 마법의 숙련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누가 먼저 지치게 될지는 불 보듯 뻔 한 것이다.


- 타다닥!


레이그는 연단 위쪽을 뛰어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연단 아래로 퍼져나갔을텐데도 디엘라의 마법이 발현되는 일은 없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디엘라는 레이그가 마법을 발현하는 때에만 골라서 방해공작을 걸어온다. 억지로 소모전을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머리 좀 썼구만! 하지만... 그래봐야 잡기술일 뿐이다...!’


마법 대련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마법실력을 겨루는 것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면 더 이상 예법을 갖추며 마법만 써줄 필요는 없다.

레이그는 그대로 연단의 담장을 박차고 뛰어오르더니, 연단 외곽에 있는 깃대를 잡았다.


듀플레인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레이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깃대 위쪽까지 박차고 올랐다. 그의 우락부락한 팔에 실핏줄이 올라왔다.


디엘라의 공격이 닿는 곳은 연단 위쪽일 뿐이다. 좀 더 고지대로 올라온다면 디엘라의 수준으로는 연단을 뚫고 보이지도 않는 적을 맞출 수는 없다. 이곳에서라면 마법을 난사하더라도 디엘라가 대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그 입장에서도 불리한 부분이 있다. 깃대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상황에선 제대로 영창하기 힘들기 때문에 마법의 위력도 줄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어서 기동력도 줄어든다.

이대로 마법을 날려서 연단 바닥을 부숴봤자, 자신은 디엘라의 마법에 당하기 좋은 표적이 될 뿐이다.


아마도 디엘라는 여기까지도 의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이그는 그런 디엘라의 의도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간다.



- 촤악!


레이그는 두르고 있던 망토의 고정 쇠를 풀어버리고, 그 망토의 천으로 깃대를 휘어 감았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모아 깃대 아래쪽에 1성급 마법 ‘마력 화살’을 박아 넣었다.


- 콰앙!


- 끼기긱, 끼익.


아래쪽 지지부분에 큰 충격을 받은 깃대가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놀라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레이그는 그대로 깃대를 휘어감은 망토 깃을 잡은 채 연단쪽으로 무게 중심을 확 끌어당겼다. 깃대가 무너지는 방향을 연단 쪽으로 조절하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무너지는 깃대를 이용해 연단을 박살내버린다.

마법을 활용하지 않고 연단을 부숴버리면 디엘라가 대처할 틈도 없을뿐더러, 자신 또한 디엘라가 있는 연단 아래쪽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다.


동등한 전장에서는 레이그가 반드시 이긴다.

그 전제 조건이 무너지는 일은 하늘이 두쪽 나도 없다.


- 끼기기기긱!


- 콰앙!


그렇게 깃대가 연단에 쑤셔 박히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레이그는 추락 직전에 옆으로 뛰어내려서 연단 위를 굴렀다. 몸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깃대가 쑤셔 박힌 쪽을 보았다.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연단 한 쪽이 무너져내려있었다. 디엘라를 지켜주고 있었던 지리적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레이그는 망설임 없이 무너진 틈새 안으로 몸을 던졌다.


- 카앙!


착지하는 순간을 노릴 것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디엘라가 발현한 얼음기둥이 자신을 덮쳤지만, 레이그는 재빨리 마력을 이끌어내서 기둥들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손을 털면서 디엘라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무너진 연단의 아래쪽.

부서진 나무판자 틈으로 이따금씩 햇빛이 들어오지만, 대부분의 공간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꽤 어둡다. 디엘라의 위치를 찾아보았지만 연단 아래쪽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연단 밖으로 나갔나?’


레이그가 연단 아래쪽을 살펴보니, 처음 디엘라가 얼음으로 막아놓았던 구멍이 다시 뚫려 있는 게 보였다.

구멍 아래는 디엘라가 밟고 올라간 듯한 얼음기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디엘라는 레이그가 연단을 부수고 내려올 듯 한 움직임을 보이자, 이번에는 자신이 연단 위로 올라갈 준비를 끝마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쥐새끼 같은...!’


절대로 동등한 조건에서 싸워줄 마음이 없다. 실력 차이가 난다면 전장의 이점과 전술로서 상대의 혼란을 유도한다.

언제 어디서 강자들과의 싸움이 강요될지 알 수 없는 삶을 사는, 용병들의 전투방식이었다.


연단 위와 아래. 입장이 뒤바뀐 상황.

이번에는 디엘라가 연단 위를 점하고 있고 레이그가 연단 아래로 내려와 있다. 방금까지와 반대된 상황이라는 것은, 모든 조건이 반대로 뒤집어졌다는 이야기다.


레이그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방금도 경험해 보았지만, 자기 위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야만 하는 연단 위가 훨씬 더 불리하다.

이번엔 자신이 연단 아래를 점했으니 유리해졌으면 유리해졌지 더 불리해지지는 않았다.


다시금 연단 위로 올라가든가, 아니면 아예 여기서 디엘라의 위치를 파악해서 일격을 꽂아넣어버리면 된다.

그렇게 레이그가 디엘라의 발걸음 소리를 파악해내자 마자, 그대로 마력화살이 그 방향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 콰가각! 콰광!


디엘라의 발밑을 정확히 직격한 마력화살이 연단을 부숴버린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를 노닐고 있던 디엘라가 강제로 지상으로 끌어내려진다.


- 파사삭! 파악!


디엘라가 연단 아래로 추락하며 다시금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자욱한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디엘라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레이그는 마력화살 세발을 더 끌어내어 디엘라가 있을만한 곳에 전부 박아넣어버렸다.


- 콰광! 쾅! 쾅!


그 충격의 여파로 흙먼지가 걷어지지만, 보호법진이 발동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중하지 않은 것이다.


레이그가 얼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며 혀를 찼다. 그리고 디엘라가 다시금 위치를 바꾸며 잡기술을 써대기 전에, 얼른 마무리 지어버릴 요량으로 마력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흙먼지 속에서 디엘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레이그의 동공이 움찔 떨리고 말았다.


소녀의 한 쪽 이마를 타고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추락하면서 생긴 상처인 듯 했다.

잘 움직이는 걸 보니 큰 상처는 아닌 듯 하지만, 귀족 영애의 몸에 생긴 생채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레이그는 잘 알고 있었다.


소녀는 흙먼지가 가득 묻은 로브를 흩날리며, 다시금 마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 눈에 서린 것은 독기다.


그렇다. 독기다.

유년시절부터 레이그가 디엘라의 눈에서 보았던 것은, 그 무엇이든 간에 목표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도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독기였다.

때로는 그림이었고, 때로는 마법이었다. 소녀는 뭘 하든 죽을 때까지 노력했고, 그리고 그 무엇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진심을 다해 들이박았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면, 그 반대급부로 몰려오는 것은 끝없는 허망함이다.


갈 곳 없어진 그 독기는 어디로 향했는가. 자신의 귀족적 권위의식을 지켜내고, 마지막 남은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집착적으로 사용인들을 해코지 했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 공허한 눈으로 별채에 앉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레이그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디엘라는 겨우 그 정도인 인간이다.


그러나 독기라는 것은 어떤 방향성이 부여되었는가가 중한 법이다.

그 방향성을 이끌어줄 이를 잘 만나면, 때로는 등에 돋은 날개로 화하는 법이었다.


- 쩌저적


솟아오른 얼음기둥으로 자신의 몸을 지켜내는 디엘라는 척 봐도 지쳐있었다.

레이그와는 다르게 마법을 몇 번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체력이 빠지는 소녀다. 이제 와서는 정말 한계인 듯 했다.


안타깝지만, 피 좀 흘리고 있다고 해서 봐줄 레이그는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마지막 마무리가 될 마력 화살을 끌어내는 순간이었다.


- 촤악!


“크아악!”


디엘라는 바닥에 있던 흙을 움켜쥐고선 그대로 레이그의 눈에 흩뿌려버렸다. 귀족의 행동이라곤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치졸함이었다.

레이그가 눈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치자, 그대로 망토를 휘날리며 그의 하복부를 밀어차버렸다.


- 콰자작!


그렇게 얼음기둥을 끌어내어 레이그를 공격해보지만, 레이그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면서 이를 악물고 공격을 막아내었다.


- 파바박!


레이그의 마력에 의해 박살나버린 얼음기둥 사이로 이를 악문 디엘라의 표정이 보인다.


레이그는 그런 디엘라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그녀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기고 싶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기고 싶다. 이겨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


자기 스승을 지켜내느니 어쩌니 하는 것도 그 다음의 문제다.

지금 디엘라는 그저 어떻게든 이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 눈에 어린 승부욕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정말로 저 소녀가 차갑고 공허하게 식은 눈으로 별채에 박혀 있던 그녀와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레이그가 마른 침을 삼키고선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져줄 수는 없다.


디엘라는 레이그가 망설이는 틈을 타서 무너진 깃대를 박차고 올라갔다. 어렸을 때부터 숲을 노닐며 풍경화를 그려온 그녀답게 몸놀림은 날렵했지만, 그래봐야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다.


그녀가 준비해둔 모든 변수는 완전히 파훼 당했다. 레이그는 덩달아 깃대를 박차고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으고 있는 디엘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 ‘붓칠을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밤하늘 아래에서 새하얀 머리칼을 늘어뜨린 용병 출신 소년이 말했다.


소금처럼 가득히 박힌 별들을 올려다보며, 널찍이 펼쳐진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손가락으로 한 획을 휙 긋는다.

별들 사이를 그어가며 별자리를 만들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미 그 손끝엔 마력이 서려있었다.


소녀는 별하늘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세상을 보고선, 그것을 그려보고자 했다.

저 야밤의 숲을 보며 캔버스 앞에서 붓을 잡는다. 그렇게 하늘에 덩그러니 놓인 달을 캔버스 위로 옮기고 있노라면, 만물에 서린 마력의 기운이 눈에 잡히는 듯 했다.


따사로운 바람이 부는 저녁. 초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느티나무.

봄. 밤. 그리고 별.


마법이란 것이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것이라 한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마력이 물감이오, 주문은 붓이고, 한 폭의 그림이야말로 현실로 이끌어낸 마법이다.

그렇기에, 소녀는 빳빳하게 길이 잘든 붓을 물감에 찍어 세상에 붓칠을 했다.


- 화악!


백발의 스승이 조언 해준 대로, 그저 마력을 한 획 그어낸다.

소녀는 텅 비어서 새하얀 캔버스에 첫 획을 그어내는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현된 마력이 그녀의 몸을 휘감더니, 이윽고 한 번 휘어잡은 것만으로 손끝에 모여 꽃으로 발한다.


연단 위에 올라서며 마력을 끌어올리던 레이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흙먼지로 뒤덮여서 귀족의 품위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고, 눈가에 흐르는 한 줄기 선혈이 그녀에게 비장함을 덧대어 준다.


이제는 정말 말려야 한다고 연단 쪽으로 몰려든 사용인들조차 모두 굳어버렸다.


- 화아아악!


소녀의 손끝에서 발한 것은, 1성급 마법 ‘얼음창’이었다.


얼어붙은 창이 그녀의 주위를 부유하더니, 이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레이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으로 쫓기조차도 힘든 속도로 달려든 창이 레이그의 시야를 가득 매웠다.


“크윽!”


레이그는 이를 악물며 마법을 발했다.

자신의 방어를 뚫을만한 화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디엘라에게서 갑자기 날아든 1성급 마법.

갑작스러웠지만, 막아내면서 순간적으로 반격해내기만 하면 된다. 이제 디엘라는 정말 바닥까지 마력을 긁어내서 저항할 수단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자세를 낮춘 레이그가 마력을 끌어 모았다. 얼음창을 회피하면서 디엘라에게 마력화살을 꽂아 넣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 콰앙!



다시 한 번 연단에 먼지가 피어오르고, 흙먼지 속에서 방호 마법이 발했다.


방호 마법이 발현되었다는 것은 승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피어나는 흙먼지를 가만히 보고 있던 가신들과 사용인들은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비장한 사투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두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씩 연단 위를 가득 매우고 있던 흙먼지가 걷혀져 사라졌다.




- 우웅


그리고 방호 마법이 발현된 것은... 디엘라 쪽이었다.

기운이 다해서 그대로 주저앉은 그녀는 방어마법이 펼쳐진 것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허억... 허억...”


레이그는 바닥을 굴러서 어렵사리 얼음창을 피해냈다. 그리고 어떻게든 마지막 한 발을 디엘라에게 꽂아넣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완전히 지쳐버린 레이그가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던 디엘라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디엘라의 패배였다.



“...”


이윽고, 패배했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한 디엘라가 망울진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레이그는 그런 디엘라의 모습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1성급 마법을 썼다고...?’


결투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몇 분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연단이 무너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박투가 일어났다.


워낙에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고, 듀플레인 대공은 굳이 그들을 말리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번 지켜봐야겠다는 직감이 그를 막아 세웠기 때문이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말이 되는 일이에요?! 이 무슨 경박하고 추잡스러운...!”

“...”


옆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던 미리엘라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품위도 없고, 더럽혀지기만 하고, 이런 걸 마법대련이라고...!”

“...”

“이런 건... 이런 건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요! 그 마법 스승이라는 작자. 디엘라한테 이런 걸 가르치고 있었던 거에요? 항상 기품 있고 귀족적이어야 하는 우리 듀플레인 가문의 영애한테 이딴 걸 주입시키고 있었다고요?!”


미리엘라가 씩씩 화를 내면서 테라스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얼른 따라 붙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데릭의 멱살을 잡고 따져댈 생각인 듯 했다.


듀플레인 대공은 그런 미리엘라의 분노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서 그녀가 뭐라고 하든 간에, 그는 그저 가만히 연단 위에서 울고 있는 디엘라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듀플레인 가문의 가주인 레이몬드 오스왈드 듀플레인은 어렸을 적부터 전장을 노닐던 자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전장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이 듀플레인 가문의 주인이 되기까지 숱한 사람들을 봐왔다.


귀족의 피를 타고 나서 많은 것을 성취해온 자들은 보통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법이다. 허나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누군가는 꿈을 이루고 성공하여 웃고, 누군가는 꿈을 잃고 좌절하여 운다. 세상의 이치란 그런 법이다.


“...”


이를 악물고 온갖 편법을 써가며 레이그를 어떻게든 이기고자 하는 디엘라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고 만 것은, 그가 보았던 막내딸의 모습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숱한 좌절 끝에 별채에 틀어박혀 공허한 눈으로 벽이나 쳐다보고 있던 그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좌절을 경험하면 으레 그렇게 되곤 한다. 대개는 시간이 약인 법이므로, 듀플레인 대공은 소녀를 어떻게든 품고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가슴 한 편이 시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공허한 눈에 언젠가 빛이 돌 것이라고 기대하며 어떻게든 공작저 안에 디엘라를 품고 있었다.

이제 정말 한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가 될 때까지, 그녀의 방황을 어떻게든 지켜보고 있었다.


반드시 제 길을 찾아 돌아오리라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방황하는 자식을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대개 그런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작금의 소녀에게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세상 모두가 패배를 점치는 대련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기고자 했다.

패배가 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모습엔 승부욕과 인정 욕구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가시덤불로 뒤덮인 별채 속, 방 안에 틀어박혀서 공허한 눈으로 벽이나 쳐다보고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마력을 좀 다루고, 예식용 마법을 몇 개 익히는 것쯤은 시간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듀플레인 가문의 혈통을 타고난 이상 얼마나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뿐이지 어느 정도 경지까지는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니, 데릭이 마법을 좀 일찍 발현시켰다고 해서 장기적인 관점으로는 엄청나게 대단한 기여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디엘라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고, 모두가 패배를 점치는 결투에서조차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손을 뻗어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끊임없이 주지시켜주었다.


그제서야 듀플레인 대공은 깨닫는다.

데릭이란 소년이 저 디엘라에게 가르친 것은 한낱 마법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데릭이 가르친 것은 ‘야망’이다. 그는 저 조막만한 소녀의 가슴속에 불꽃을 심었다.


어두운 빈민가의 시궁창 속에서도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던 그 소년의 야망을, 저 자그마한 소녀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대로 흡수했던 것이다.


전쟁 속에서도 비범하게 눈을 빛내던 이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어떤 이들은 숱한 좌절 속에 빠져 평생토록 손에 쥐지 못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법 몇 개 쓸 줄 아는 것과는 그 가치부터가 다르다. 대공은 그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야망이야말로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씩씩대며 연단 쪽으로 내려가는 미리엘라를 가만히 보고 있던 대공의 눈매가 한층 가늘어지고,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로 듀플레인 대공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눈을 뜨고선 메이드장의 이름을 불렀다.


“카타리나.”

“예, 대공 전하.”

“나도 연단 쪽으로 내려가야겠군.”

“알겠습니다.”


그는 그대로 사용인들과 함께 메인 홀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묵직함이 서려있는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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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엘렌테 (2) +44 24.04.19 28,252 1,066 23쪽
26 엘렌테 (1) +45 24.04.18 27,692 1,083 23쪽
25 벨미어드 (5) +68 24.04.17 28,900 1,148 20쪽
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377 1,183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560 1,214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0,932 1,146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1,732 1,181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602 1,372 21쪽
19 여정 (3) +50 24.04.09 29,902 1,276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420 1,215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468 1,205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194 1,221 16쪽
» 사제 (5) +45 24.04.04 29,880 1,189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650 1,123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580 1,19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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